150. 복마전에 들어서다(5)2020.06.06.
“꺅!!”
소령의 몸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그물의 굵기가 거의 손가락 정도로 굵었다. 거기에 구멍의 틈이 커서 소령의 다리가 그물 사이로 빠진 것이다.
‘이걸 자르고 나가면!’
하지만 그 상황에서도 소령은 두 눈을 빛냈다. 강호에서의 경험이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정도로 허둥거릴 정도로 나약하게 훈련을 받은 적은 없었다. 무공교두인 검인이 늘 강조했던 것이 바로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는 것이다. 촤악!!
“윽!!!”
하지만 소령의 눈이 커졌다. 소령의 머리 위로 새하얀 가루가 눈처럼 쏟아졌기 때문이다. 그것에서 미약한 분냄새가 나는 것을 맡은 소령의 눈이 커졌다.
‘독? 약?’
독이나 약이었다. 소령은 다급하게 숨을 참았지만 상황은 좋지 않았다. 아까 나간 줄 알았던 마흔 명의 미혼방도들이 어느새 창고 문으로 들어와 그물에 갇힌 소령을 향해 검을 들어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야들야들한 계집일 줄이야!!!! 크하핫! 이거 운수가 좋구만!!!”
그물에 갇힌 채, 소령이 움직이기만 해도 베어버릴 준비를 하고 있는 미혼방도가 한둘도 아니고 오십이었다. 그리고 소령은 숨이 가빠오는 것을 느꼈다. 이 상태에서 숨을 쉬면 독인지 약인지 모를 이 하얀 가루를 들이마실 수밖에 없었다.
“푸핫!!!!”
그 안에서 옴짝달싹 할 수 없게 된 소령은 숨이 턱 끝까지 차도록 안간힘을 쓰면서 버텼지만, 도저히 빠져나갈 방도가 없었다. 결국 소령은 숨을 들이마셨고, 하얀 가루가 몸 속으로 들어오자 곧바로 머리가 띵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범도 잠재울 수 있을 정도의 미혼약이다! 우리가 괜히 미혼방이라 부르는 것이 아니지. 큭큭.”
미혼방은 무공보다는 약, 그것도 마약이나 미약 쪽으로 이름이 정평이 나있는 이들이다. 그런 이들이 만들어낸 미혼약은 사람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어 잠에 빠져들게 하는 약이다.
‘이럴수……가…….’
소령은 단박에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끼며 참으려고 했지만, 이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수마(睡魔)가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땡그랑!!! 그리고 채 일다경이 지나기도 전에, 소령의 손에 쥐어져 있던 검이 스르륵 소리를 내면서 미끄러졌다. ***** [부여현에 모인 별 볼일 없는 무림인들에게 고(告)한다.] 부여현 전체에 하룻밤 사이에 방(榜)이 붙었다. 이리저리 복잡하게 내용이 적혀있었지만 그 요지는 간단했다. [나, 검주인데 부여현은 본주가 접수하니까 소란 일으키지마. 일으키면 어떻게 된다? 죽는다.] 동군영이 붙어서 머리를 짜내었기 때문에 양반식의 그럴듯한 미사여구들이 붙어 있었지만 직접 방을 쓴 것은 만우다. 무인의 붓은 그의 경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하룻밤 사이에 부여현 전체에 나붙은 방을 보거나, 혹은 수하들에 의해 그 사실을 보고 받은 이들 중 그나마 보는 눈이 있는 자들은 기함했다. 진짜 이 방을 붙인 사람이 검주인지는 모르겠으나, 방을 써내려간 글에 그들로써는 까마득한 수준의 검기(劍氣)를 느끼고는 몸을 잔뜩 웅크렸다. 검주 만우. 무림십좌의 일인인 그 절대고수가 대체 이 작은 조선에서 무엇을 하는지 정확하게 아는 이들은 없었다. 만우가 조선으로 떠났다는 것을 아는 건 정파와 사파, 마교에서도 최상위층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대협.”
“이게 누구야.”
만우가 히죽 웃으면서 철권이 통채로 빌려놓았던 객주의 2층에서 다리를 달랑거리면서 손을 흔들었다.
“무화 아니야?”
“오시는 줄 알았으면…….”
“에이. 알았으면서. 내가 한양 지부장을 그렇게 잡아놓았는데?”
“언제 오시는지는…….”
“됐어.”
무화 임수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가 가장 상대하기 껄끄러운 검주 만우가 부여현에 나타났다는 것에 임수미는 머릿속이 복잡하기 그지 없었다.
“오니까 개판이더라. 여기?”
만우가 무화를 향해 짙게 웃어보였다. 임수미는 침을 꿀꺽 삼켰다. 부여현에 이런 혼란이 일어나게 된 것은 전부 장보도 때문이었다. 제부투혼.
“저, 저희 하오문은 분명 그 사실을 다른 곳에 발설하지…….”
“본주가 말했잖아.”
만우는 임수미의 말허리를 잘랐다. 임수미의 뒤로 고개를 푹 숙인 채 따라들어온 하오문의 간부들이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하오문 따위가 정보를 숨긴다고 해서 구파일방이나 사림곡, 마교에서 모를 것 같냐고.”
하오문을 완전히 무시하는 언사였지만 사실 무림에서 차지하는 위치로 보면 크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거기에 원래 만우는 설령 상대가 무림맹이나 사림곡이라고 해도 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누군가의 눈치를 보고, 상대의 감정을 헤아릴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곳을 이 개판으로 만들어놓은 것에 대한 변명은 끝난 건가?”
검주 만우가 나타나 철권이 잘 만들어놓았던 밥상을 넙죽 집어삼켰다는 것은 부여에 모여든 방파들 사이에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철권 교수도 사림곡에서 알아주는 거두지만 검주 만우만큼은 아니다. 검주 만우가 부여현에 출현했다는 것은 말 그대로 작은 산을 차지하겠다고 용이 찾아와 둥지를 튼 것과 같은 일이다. 그러니 부여현을 하루가 다르게 난장판으로 만들어놓고 있던 이들이 아뜨거라 하면서 꼬리를 마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걱정 마. 제부투혼을 노리고 온 건 아니니까.”
만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자 임수미의 얼굴에 안도감이 떠올랐다. 혹시나 만우가 부여현에 온 이유가 제부투혼 때문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한양에서 난리난 거. 알아?”
“네.”
임수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자신이 은월루를 쳐내기 위해 마교에게 정보를 흘렸다고는 밝히지 않았다.
“은월루주랑 그 호위무사. 여기 들어왔어?”
“드나드는 사람이 워낙 많아서…….”
중원에까지 이곳의 소문이 퍼진 것인지 배를 타고 너른 바다를 건너 부여현으로 드나드는 이들이 대단히 많았다. 그리고 그 전에도 이곳 부여는 백마강을 끼고 있어 물류의 운송이 용이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럼…… 그것도 모르겠네. 마교 그 빌어먹을 새끼들이.”
만우의 두 눈이 번쩍하고 빛났다. 임수미는 헉하고 헛숨을 들이켰다. 만우가 잠깐 드러낸 기세만으로도 오금이 저리고 다리에 힘이 풀렸기 때문이다. 하마터면 실금을 할 뻔한 무화는 다시 장난기 많은 얼굴로 돌아온 만우를 보면서 침을 꿀꺽 삼켰다.
‘무, 무슨. 대체 왜…….’
중원에서의 만우는 먼저 건드리지 않으면 절대로 먼저 나서는 일이 없었다. 그 때문에 임수미는 만우가 왜 마교를 언급하면서 살기를 내뿜은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김향이 은월루에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교, 그 찢어죽여도 시원찮을 놈들이 여자아이를 데리고 다니고 있다는 것도 모르겠네?”
“여자아이…… 혹시 김향이라는……?”
“그래. 그 아이. 본주가 은월루에 맡겨놨거든.”
“…….”
“근데 그 아이가 실종됐다 이거지. 마교 놈들이 습격한 바로 그날. 그래서…….”
만우가 하얀 이를 드러내면서 웃었다.
“본주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대, 대협.”
“그러니까.”
만우는 무화의 입을 막아버렸다. 무화는 입을 꾹 다물어다. 검주가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그를 건드려 좋을 것이 없었다. 지금 그에게는 상대가 여자든 남자든, 미녀든 추녀든 상관 없었다. 무림인. 그냥 모두 무림인으로 보일 뿐이다. 그리고 만우가 중원을 독보하면서 깨부순 무림인은 네 자릿수가 넘는다.
“아는 거 있으면 다 불어. 마교 놈들, 은월루 애들 보이면 바로 알려. 제부투혼? 장보도? 필요없어.”
만우의 전신에서 서릿발 같은 기세가 흘러나왔다. 털썩거리는 소리와 함꼐 가장 실력이 떨어지는 하오문 간부가 쓰러지는 소리가 임수미의 귀에 들렸다. 하지만 임수미는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아니, 돌리는 것이 불가능했다. 만우의 기세가 그녀의 몸을 옭아매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향. 그 아이를 찾아내는걸 가장 우선순위에 올려놔야 할거야. 너뿐만이 아니라 이곳에 있는 무림인들 전부.”
임수미는 만우가 왜 하오문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하오문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알리기 위함이다. 단순히 부여현을 조용하게 만들기 위함이 아니었다. 만우는 이곳에 모여든 천 명이나 되는 무림인을 동원해 김향을 찾을 셈이었다.
“알았지?”
“……예, 대협. 분부하신 대로.”
임수미가 간신히 입을 열어 대답하는 순간 그녀와 간부들을 누르고 있던 압력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뒤에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들렸다. 임수미도 가빠진 호흡을 가라앉히면서 입술을 앙 깨물었다.
‘우리가 그 정보를 마교에 넘겼다는 걸 검주가 알게 되면…….’
끝장이다. 아니, 그걸 대비해서라도 만우가 원하는 바를 들어줘야 한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 무화와 하오문 간부들의 머리를 뛰어넘었다. 수준급에 이른 경공이었다. 화악! 그 인형이 무화 앞에 내려앉음과 동시에 그 인형이 지나가면서 만들어낸 바람이 임수미의 옷자락을 흔들었다.
“만우!”
“……검인?”
임수미의 눈이 커졌다. 그녀의 앞에 내려앉은 이의 소맷자락에 수놓인 매화문양을 때문이다. 부여현에 있을 화산파의 고수라면 딱 두 명밖에 없었고, 그 중 남자면 딱 한 명밖에 없었다. 정의대주 매화극검 검인.
“자네의 도움이 필요하네.”
“내 도움?”
만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이내 만우는 고개를 저었다. 만우에게는 지금 그 무엇보다도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바로 김향을 찾는 일이었다.
“바빠. 도와줄 시간도, 여유도 없어.”
“소령이!”
소령이란 소리에 만우가 움찔했다. 소령이라면 중원에서 만우가 검인 다음으로 정을 준 아이다. 만우가 조선으로 돌아간다고 했을 때 가지 말고 남아달라면서 매달리기까지 했던 아이가 아니던가.
“소령이가 왜.”
만우가 몸을 비스듬히 돌리고 묻자 검인이 입술을 뿌득하고 깨물었다. 핏기가 검인의 입가에 번지기 시작했다.
“사라졌네. 사라진 이후로…… 돌아오고 있지 않아.”
“소령이가?”
검인은 이를 악물었다. 만우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것은 최후의 수단이었다. 그녀도 일류의 반열에 든 고수인데, 고작 하루 없어졌다고 도움을 청한다는 것이 말이 안된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어제, 밤새 정의대 전원이 부여현을 쥐 잡듯이 들쑤시고 다녔음에도 소령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흔적을 발견할 수가 없어. 대체 어디로 간 것인지…….”
“호, 혹시.”
나중에 투귀대에서 자신들이 정보를 알렸다는 것이 들켰을 때를 대비해 점수를 따놓아야 하는 임수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만우나 검인이나 중원이라면 아무리 하오문의 총분타주인 무화 임수미라고 해도 얼굴도 쳐다볼 수 없는 이들이었기에 그녀의 목소리에는 긴장감이 맴돌았다.
“검주 대협께서 마교 고수를 찾고 있다고 하셨는데, 그들이 벌인 일이 아닐는지…….”
“마교!!”
검인이 고개를 휙 돌려 만우를 쳐다봤다. 이 말이 사실이냐는 뜻이었다. 만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맹과 마교. 이 둘은 견원지간이란 말이 부족할 정도로 철천지원수다. 무림을 실질적으로 통치하고 있는 무림맹과 그런 중원을 상대로 천하일통의 야욕을 드러냈던 마교. 마교가 중원에 출두하면 늘 피가 내천처럼 흐르고 시체가 산처럼 쌓였기 때문에 모든 마교 고수들은 무림공적으로 찍혀있었다. 그 때문에 중원에서도 혹여나 마교 고수와 무림맹 고수가 길거리에서 만나면, 한 쪽의 죽음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생사결이 펼쳐지곤 했다. 그런데 무림맹,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무림맹의 검파이자 중심인 화산파의 소령이 마교 고수인 투귀대의 눈에 띄었다면?
“안 돼. 소령아!!!!”
검인이 이를 악물었다. 만우는 임수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투귀대의 마교 고수라면 충분히 그게 가능했다. 투귀대 고수들의 경지는 모두 초절정이다. 그러니 아무리 소령이 매화검을 5성까지 익힌 촉망받는 후기지수라고 해도 소령을 제압하는 것은 손쉬웠을 것이다.
“한 시진 주지.”
만우는 팔짱을 꼈다. 임수미의 눈이 커졌다. 만우가 임수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협. 그게 무슨…….”
“소령이와 관련된 모든 일. 찾아와.”
“……예.”
소령이 정말 마교 고수에 의해 납치를 당하거나 횡액을 당했다면 그것을 시작으로 마교를 추적해 나가면 된다. 만우와 검인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 검인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만우는 검인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소령에게 만우가 정을 준 것은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원의 무림인들이 조선에 넘어와 이 깽판을 친 데에는, 그것을 방조한 정의대에게도 문제가 있었다. 그리고 그 정의대의 책임자는 바로 검인이다.
“관직을 제수 받았다지?”
“……그렇네.”
잠시 움찔했던 검인인 고개를 끄덕였다. 만우가 저렇게 묻는다는 것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괜히 숨길 필요도 없다.
“그럼 됐어.”
만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검인은 그게 무슨 소리냐며 고개를 들려 만우에게 물으려는 순간, 목이 턱하고 막히는 것을 느꼈다.
“크, 크윽…….”
“죄를 물을 책임자가 하나 더 늘었으니까.”
어느새 검인의 멱살을 움켜쥔 만우가 섬전처럼 객주 위를 딛고 허공으로 치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