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복마전에 들어서다(2)2020.05.26.
“대주께서도 승부를 장담하지 못하는 검주. 그자와 관련이 있는 아이에요. 그런데 저 아이를 버려서 죽게 놔두면 검주의 분노는 어떻게 할 생각인거죠?”
“마교의 고수는 강적이라고 해서 물러나지도 않고, 피하지도 않는다 사화!”
“그렇다면 그 긍지 높은 우리가 마교의 무사들이라면 임무를 위해 아이를 버린다는 게 더 말이 안 됩니다!”
기어코 옥령과 백영의 언성이 높아졌다. 검주 만우가 하필이면 은월루, 그리고 자신들이 납치한 아이와 관계가 있다는 것에 투귀대의 진격은 그 자리에서 멈춰섰다. 검주라는 존재는 그렇게 쉽사리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존재감이 작지 않기 때문이다. 저벅, 저벅 그리고 그때 부엌 바깥에서 저벅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옥령과 백영이 가늠할 수 없는 실력자였다. 그런 실력자는 투귀대에 단 한 명뿐이다.
“사화. 마정.”
“대주.”
“대주님.”
주창이 무표정한 얼굴로 옥령과 백영을 불렀다. 그러자 둘이 식칼을 내려놓고 주창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언쟁을 하고 있었는가?”
“아닙니다 대주님.”
백영이 고개를 숙였다. 주창은 그런 둘을 보면서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주창의 손에서는 서신이 들려있었다. 전서구를 통해 온 서신인 듯했다.
“기무가 죽었다.”
“아!”
“…….”
옥령은 안타까움에 신음을 흘렸고 백영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모난 성격이지만 함께 하던 동료가 죽었다는 것은 투귀대 고수들에게도 참담했다. 죽고 사는 것이 흔한 무림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동료애가 생기는 것은 인간인 이상 당연한 일이다.
“누구…….”
“이 조선 땅에서 기무를 죽일 정도의 실력자가 몇이나 될 것 같은가.”
주창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자신의 수하가 죽었음에도 주창의 표정은 평온하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겉으로만 멀쩡할 뿐이다. 옥령과 백영은 주창의 눈빛이 흐려진 것을 보면서 입을 다물었다.
“검주. 검주 그자가 조선의 국왕을 도와 조사의의 난을 제압했다고 하더군.”
“그렇다면…….”
검주. 또다시 검주 만우였다. 대체 생전에 그들과 무슨 원수를 졌다고 이렇게 자신들 앞에 나타나 일을 훼방 놓는 것인지. 하지만 그것을 따지기에는 검주란 이름이 너무나도 컸다. 말석이라고는 하나 무림십좌의 일인이다. 거기에 직접 부딪쳐본 검주의 실력은 무림십좌의 말석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정도로 강대했다.
“그리고 신교에서 낭황과 살풍대가 출격했다고 하더군.”
“설마…….”
“그래.”
주창의 손에서 불꽃이 일었다. 삼매진화였다. 주창의 손에서 일어난 불꽃은 서신을 갉아먹었다. 잠시 뒤 주창의 뒤에서 완전무장을 한 웅풍과 폭혈도 위문이 부복하는 소리가 들렸다.
“검주고 뭐고 상관없다.”
주창의 두 눈에 빛이 돌아왔다. 번쩍하는 안광과 함께 주창의 전신에서 공력이 대기와 공명하며 벌떼처럼 울기 시작했다.
“검주라도 막아서면, 베어라. 그것이 교주님의 전언이다. 그러니.”
주창의 두 눈이 번뜩였다. 안광이 주창의 두 눈에서 폭사했다. 초절정 고수들인 투귀대의 고수들의 목덜미에 소름이 우수수 돋을 정도로 강렬한 기세였다.
“무슨 수를 사용해서라도 임무를 완수한다.”
“존명!!”
“사화!”
“예, 대주.”
주창의 말에 옥령이 고개를 숙였다. 주창은 여전히 무감정한 목소리로 옥령에게 말했다.
“정신을 잃은 아이. 데려간다. 검주와 조우할 경우 인질로 사용할 것이다.”
휙. 옥령의 고개가 들렸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주창은 패도(覇道)를 추구하는 강직한 무인이다. 인질 따위의 암수를 사용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주창이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그 길을 걸어가겠다는 것이다.
“교주님의 명령이다. 난 그것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이용할 생각이고. 그리고 상대는 검주다 사화!”
주창의 일갈이 터져나왔다. 옥령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고개를 다시 떨굴 수밖에 없었다.
“대답하라!”
“……예, 대주.”
“그래도 그 아이의 숨통은 검주를 만날 때까지 붙여놔야하니 네게 맡기도록 하겠다.”
“…….”
옥령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창은 그 정도로 만족하기로 한 듯 보였다.
“부여로 들어간다!”
“존명!”
검은 모피로 만든 망토를 펄럭이며 뒤돌아서는 주창의 전신에서 살갗이 베일 것만 같은 살기가 흘러내렸다. *****
“으, 으으…….”
정신을 잃었던 여인이 눈을 떴다. 고약한 약향이 여인의 콧가에서 느껴졌다. 그 순간 옆에서 방매가 여인의 눈 앞으로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엇! 정신을 차렸다. 이봐요. 이제 좀 괜찮아요?”
“여, 여기는…….”
“그쪽 집이라는데요. 뭐, 주인이 없어서 그냥 들어오기는 했지만.”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천장을 보니 자신의 집이 맞았다. 여인이 갑자기 눈을 뜨고 상체를 일으키려 했다. 꿍! 그러자 당연히 그녀 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있던 방매의 이마와 여인의 이마가 맞부딪쳤다.
“악!”
이마를 움켜쥔 방매가 뒤로 벌러덩 나뒹굴었다. 하지만 여인은 아픈 기색도 없이 다시 벌떡 일어나 주변을 둘러봤다.
“삼촌. 삼촌은, 제 삼촌은…….”
“다른 방에 있어요. 뭐, 괜찮다고 만우가 그랬으니까…….”
후다닥! 여인은 벌떡 일어나 방문을 열어젖히고는 마루를 뛰어넘어 옆방의 방문을 열었다. 문을 연 여인의 눈과 누워서 놀란 눈으로 열린 방문을 쳐다보는 중년인의 눈이 마주쳤다.
“여, 영아!!!”
“삼촌! 삼촌…… 흑흑.”
중년인의 옆에 앉아 있던 동군영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한창 이야기 중이었기 때문이다. 만우의 시기적절한 조치로 가슴팍에 파고든 독기를 밀어낸 중년인은 일찍 정신을 차렸고, 동군영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중이었다.
“영아. 손님이 계시니…….”
“앗, 죄송합니다. 나리.”
“아니네. 무사해서 다행이네.”
영이라 불린 여인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동군영이 양반이란 것을 깨달은 것이다. 동군영은 손을 내저었지만 영은 넙죽 엎드려 동군영에게 절을 했다. 동군영은 난처한 표정으로 중년인을 쳐다봤다.
“나리. 영이에게 물어보시는 것은 어떠십니까?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다 설명을 드렸습니다.”
“음…… 알겠네. 거기…… 영이라고 부르면 되나?”
“예, 나리.”
“일단 나가세. 그대의 숙부는 아무래도 휴식이 필요한 것 같으니.”
영이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어났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애틋한 눈으로 삼촌을 쳐다봤다. 삼촌이 고개를 끄덕이자 영이는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나리.”
영이 동군영에게 허리를 깊숙히 숙이면서 인사를 했다. 동군영은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상 동군영이 그 자리에서 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한 일이 아니라…….”
“나리가 한 일이 아니면, 누가 했단 말이오?”
그때 만우의 낭랑한 목소리가 영이라 불린 여인과 동군영의 사이를 파고들었다. 영이 고개를 돌려 만우를 쳐다봤다.
“아. 반갑소. 여기 저 안에 있는 아저씨가 먹을 약을 달이고 있지. 저 나리의 머슴이기도 하고.”
“머슴…….”
동군영이 질린 표정을 했다. 역졸이 천한 신분인 것은 맞지만 역졸이 역참이 아니라 밖에서 돌아다닌 것도 웃긴 일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머슴이라고 소개를 했지만, 만우 같은 머슴이면 동군영은 사양이었다.
“나리가 나서는 바람이 그 무뢰배들이 철퇴를 맞았으니 걱정 마쇼. 안 그렇습니까 나리?”
만우는 약탕기를 앞에 놓고 약을 달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약탕기에 들어있는 불이 나뭇가지로 붙인 불이 아니라 무려 삼매진화였다.
“여기요.”
그때 지붕 위에서 호선이 풀썩하고 뛰어내렸다. 영의 눈이 커졌다. 호선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약재.”
“잘 말렸지?”
“원기가 좋은 약초를 구해서 잘 말렸으니까 효과는 확실할 거예요.”
만우는 호선을 보면서 씩 웃었다. 영은 호선의 미모를 보면서 놀라고 있었다. 호선은 그런 영의 시선을 느끼고는 넓은 소매로 얼굴을 가리면서 고혹적으로 웃어 보였다. 퍽!
“쓸데없이 웃고 다니지 마!”
그렇게 웃은 호선은 결국 만우에게 한대 맞고 울상을 지었다. 정신이 없는 통에 영이 혼란스런 표정을 지었지만 그때 동군영이 말했다.
“이 부여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알려줄 수 있는가? 그런 무뢰배들이 버젓이 대낮에 저잣거리에 돌아다니다니, 이해가 가지 않아서 말일세.”
동군영의 말에 영이라 불린 여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시작된 이야기는 만우가 흔히 알고 있는 무림의 풍경이었다. 관은 무림으로부터 돈을 받고 눈과 귀를 닫아 웬만한 일에는 나서지 않는다. 백성을 돌봐야 할 현감과 향리들은 무림인들이 주는 얼마 되지도 않는 돈에 두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그 와중에 무림인들은 자유롭게 부여현을 활보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찾는다고 했는데, 뭘 찾는진 모르겠어요. 그래도 확실한 건 그들이 수시로 문제를 일으키고, 사람들에게 폭력을 휘두른다는 점이에요. 아주 질 나쁜 놈들이라고요.”
기분이 나쁘면 사람을 묵사발로 만드는 건 일도 아니었다. 거기서 덤벼들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 이들도 있다고 했다. 저들을 관리할 강력한 문파나 세력도 없으니, 저런 삼류들이 제 세상인것처럼 활개를 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제부투혼.’
무얼 찾는 무림인이라고 하면 제부투혼을 찾는 것이 확실한 듯했다. 그때 동군영이 주먹을 부르르 떨며 평상을 쿵하고 쳤다.
“이런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놈들을…….”
만우나 호선, 방매가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만들어주었기 때문에 여인의 입이 쉽게 열렸고, 그 전후사정을 들은 동군영은 분노하고 있었다.
“나라의 녹을 먹는다는 놈들이, 뇌물에 미쳐서는 제 할 일을 하지 않고 있단 말인가!”
동군영의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만우는 그런 동군영을 보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고. 한양에는 없는 줄 아십니까, 나리?”
“하지만…….”
이미 한양에서 벗어나 몇 개월을 함주와 한양을 오가며 본 것이 있는 동군영이었다. 개중에는 사람을 팔아먹는 놈도 있었지만 매번 분노가 치밀어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현감을 잡아다가 치도곤을 하면 이곳이 원래대로 돌아올까?”
동군영이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만우에게 던졌다. 만우는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원인을 제거해야 하지 않겠소?”
“허나 이곳에 들어오는 이들을 어떻게 막는다는 말인가? 부여현을 봉쇄해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곳의 혼란은 무림인들이 들어와 관에 뇌물을 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감을 벌한다고 해서 뇌물을 준 이들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부여현 자체를 봉쇄해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동군영은 턱에 손을 괴고 곰곰히 생각하다가 손가락을 튕겼다.
“장보도라고 하였지? 그것 때문에 이곳이 혼란스러운 것이라면…….”
무림에서 장보도가 출현하면 그 장보도는 늘 피를 불러왔다. 그건 조선에서도 마찬가지다. 단지 중원에서 멀고, 동이족의 무공이란 것 때문에 삼류 문파들이나 달려들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수가 천을 넘었으니 그냥 넘길 일은 아니다.
“장보도에 적힌 그 보물을 빨리 찾아내면 되는 일이 아닌가?”
동군영의 말은 쉬웠지만, 실천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만우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역시, 먹물을 좀 먹어서 그런지 머리가 잘 돌아가는 것 같소 나리!”
“근데…… 왜 이렇게 만우 자네가 순순히 도와주는 것 같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든 것인지 동군영이 만우를 쳐다봤다. 하지만 만우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럴 리가. 이번엔 나리의 일을 도와주려는 것뿐이오! 사람의 진심을 오해하면 억울하지.”
“그래……?”
의심 섞인 눈빛으로 쳐다보는 동군영을 보니 한양에서 봤던 그냥 서생 수준에서 조금 발전한 것 같았다. 만우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뭐, 겸사겸사 일을 처리하는 거지.’
조선을 어지럽히는 무림의 잔재들로부터, 그리고 김향을 찾기 위해서 만우는 이 부여를 크게 흔들 생각이었다. 김향을 데리고 수풀 속에 숨어있는 마교 놈들을 불러내기 위해. 그 정보를 넘긴 하오문 놈들을 불러내기 위해. 자꾸만 문제를 일으키고 김향을 지키지도 못한 은월루를 불러내기 위해. 그리고 조선을 어지럽히는 이 썩을 중원의 칼잡이들을 쓸어버리기 위해.
‘나의 평온을 흐트러트리지 말라고 분명히 경고하였다. 그렇지 않은가 검인?’
친우인 검인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린 만우의 입가에 스산한 미소가 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