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 복마전에 들어서다(1)2020.05.23.
“으으으…….”
산발이 된 머리카락에 잿빛 머리카락이 섞인 중년인이 신음을 흘렸다. 평범해 보이는 중년인의 가슴팍에는 손바닥 자국이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꺄아아악! 삼촌!!!!”
주막 안에서 삼촌이라 부르며 비명을 지르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여자는 뛰어나오지 않았다. 들리는 것이라곤 안에서 떠들썩하게 울려 퍼지는 남자들의 웃음소리뿐이었다.
“이런 숫캐 같은 놈들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방매는 단박에 파악했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그녀이기 때문이다. 매분구를 하면서 그녀가 겪은 것 중에는 이것보다 훨씬 더 심한 일도 있었다.
“이보시오. 괜찮소?”
동군영은 누구보다도 먼저 달려나가 중년인의 머리를 받치고 있었다. 넘어지면서 머리를 부딪친 것인지 중년인의 머리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으으…… 영아, 영아…….”
중년인은 기식이 엄엄한 상태에서도 누군가를 찾았다. 동군영이 입술을 꾸욱하고 깨물었다. 만우는 뒷짐을 진 채 걸어와 남자의 가슴팍을 쳐다봤다. 새까맣게 탄 피부와 나무껍질처럼 딱딱한 손을 가진 남자는 딱 봐도 농부였다. 흙과 평생을 싸우면서도 친구처럼 보듬고 지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세월의 흔적이다.
“장법(掌法)이야 나리. 기껏해야 삼류 정도가 친 거니까…… 달포 정도 정양하면 나을 정도야.”
“달포나?”
동군영의 눈이 커졌다. 만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삼류 무인이라고는 하지만 일반인에게는 사신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이런 일반인에게 달포나 누워 있어야 한다는 것은 굶어죽으란 소리나 마찬가지다. 만우는 손을 뻗어 중년인의 팔목을 짚었다. 웅!
“이러면 내일이면 일어날 것이고.”
커헉!!!! 만우의 내공이 부드럽게 중년인의 가슴팍에 찍힌 손바닥 자국을 풀어주었다. 그러자 막혔던 혈이 뚫리면서 중년인이 검게 죽은피를 토해냈다.
“독(毒)이야. 독을 쓰는 놈이면…… 사파인가?”
정파에도 독을 쓰는 가문이 있기는 했다. 사천당문(四川唐門). 정사지간이라 소리를 듣지만 그 이유는 그들이 가진 정의와 의협심만큼이나 오기와 독심으로 똘똘 뭉친 이들이기 때문이다. 사천당문의 구성원들은 당씨 성에 굉장한 자부심을 가진 이들로 당씨 성을 가진 일족이 누군가에 의해 겁박을 받으면 그것을 처절하게 갚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렇기 때문에 정사지간이라 소리를 듣지만, 동시에 그 어떤 무림인도 척을 지고 싶어 하지 않는 가문 중 하나였다. 독과 암기. 미리 알고 있다면 모를까 부지불식간에 독과 암기가 발휘하는 위력이란 아무리 절대고수라고 해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만우만 해도 웬만한 독이나 암기는 호신강기나 내공으로 태워버릴 수 있다고 하지만 사천당가에는 절대로 무시하지 못할 독이 있었다.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실력이 없으니 독을 쓰는 부류다. 독이라도 없었으면 삼류 수준에도 못 끼는 쓰레기 같은 놈들.”
만우는 동군영을 쳐다봤다. 동군영은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이게. 중원에서 온 무뢰배들이 조선에서 벌이는 일이란 건가?”
“그건 들어봐야겠지만.”
만우는 뒤를 쳐다봤다. 방매가 이미 사라지고 난 뒤였다. 그리고 누군가 없어서 찾아보니 척사영도 사라져 있었다.
“그 여자도 들어갔습니다, 주인님.”
슌스케가 만우에게 말했다. 만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 같았다. 방매야 원래 처음부터 이런 놈들을 그냥 두고 보지 못했고, 척사영은 곡산척가의 고수다. 곡산척가가 무(武)에 미친 가문이라고 하지만 나라에 환란이 생겼을 때도 침묵만 고수하고 있는 곳은 아니다. 오히려 곡산은 조선에서 가장 안전한 지역이라 불릴 정도로 백성들의 안위에도 힘을 썼다. 기본적으로 안민(安民)의 이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단지 그걸 위해 나서는 순간, 정치적인 행동이 되기 때문에 나서지 않고 곡산만을 책임질 뿐이지만, 눈앞에서 벌어진 부당한 일에 척사영이 참고 있을 리 없다. 애초에 그녀는 조사의의 반군이 백성들을 괴롭히는 것을 보고 단신으로 반군들을 쓸어버리지 않았던가.
“크아아악!!!”
“으억!!!!!”
그리고 잠시 뒤, 주막 안에서 요란한 비명 소리가 들리더니 아래위로 검은 옷에 ‘독(毒)’이란 글자가 목 부분에 수놓인 옷을 입은 놈들이 주막 밖으로 튕겨져 나와서는 몸을 떨어댔다.
“뭐한 거냐?”
두 놈이었는데 그중 한 놈의 얼굴이 퍼렇게 물들어 있는 걸로 봐서는 독에 중독된 것 같았다. ‘독(毒)’이라 옷에 써놓고 다니는 것을 보면 독을 쓰는 사파의 문파 중 하나인 것 같은데, 만우는 처음 보는 놈들이었다.
“이상한 걸 뿌리려고 하길래 냅다 걷어차 줬지.”
방매가 발을 탁탁 털면서 걸어 나왔다. 상대가 삼류라고는 하지만 독을 사용하는 무인을 내공도 없는 방매가 해치운 것이다.
‘실력이 더 는 것 같은데?’
방매를 따로 훈련시킨 기억은 없는 것 같은데, 그녀의 수박희 실력이 진일보 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잠시 뒤 척사영이 한 여인을 데리고 나왔다.
“그 여인은?”
“저 사람의 조카인 것 같습니다. 삼촌이라 부르더군요.”
척사영이 데리고 나온 여인은 하얀 얼굴에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해 예쁘장하게 생긴 여인이었다. 그런데 안색이 창백한 것이 겁에 잔뜩 질려있었다.
“사, 삼촌!!!!”
눈물 자국이 말라붙은 여인이 동군영의 품에 안겨있는 중년인의 곁으로 비틀거리면서 뛰어왔다. 털썩거리는 소리와 함께 중년인의 옆에 주저앉은 여자의 눈에서 눈물샘이 다시금 터졌다.
“…….”
동군영은 울음을 멈추지 못하는 하얀 얼굴의 여인을 보면서 입술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꼭 깨물었다. 만우는 혀를 쯧 하고 찼다. 여자가 꺽꺽대면서 숨을 쉬기 힘들어할 정도로 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윽. 스르륵. 여인의 수혈을 짚자 여인이 그대로 눈을 감으며 쓰러졌다. 만우는 삿갓을 쓴 채 몸을 부르르 떨고 있는 동군영에게 말했다.
“어디로 옮길까 나리.”
“…….”
동군영은 고개를 돌려 만우를 쳐다봤다. 만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사 나리 아니야? 여기가…… 정상인 것 같지는 않은데.”
만우가 괜히 이곳을 작은 무림이라고 한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흠 잡을 수 없을 정도로 활발해 보였다. 읍치가 활발하다는 것은 그곳에 사는 백성들에게 절대로 나쁜 것이 아니다. 그런데 활발한 것에 비해 백성들의 표정이 너무 어두웠다. 그렇다는 것은 활발함과는 별개로 이곳에 문제가 크다는 증거다.
“하지만 만우 자네는 할 일이 있어서…….”
“겸사겸사. 일을 처리한다고 생각하지 뭐. 마교 놈들이 마음먹고 숨으면 찾기 힘든 건 나도 마찬가지이니까.”
은월루주와 광문자가 마교 고수들로부터 무사히 도망쳤는지 아닌지도 알 수 없었다. 중간부터 흔적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남쪽으로 내려가기 위해서는 중간에라도 부여현을 들려야만 했다. 부여현이 근방에서 가장 큰 곳이었기 때문이다. 거리상으로 봐도 아무리 도주 중이라고 해도 이곳에서 한 번은 보급을 해야 한다. 그건 추격하는 마교 고수들도 마찬가지다.
“고맙네, 만우.”
“내가 안 된다고 하면 안 할 생각이었나?”
만우는 히죽 웃었다. 부들부들 떠는 동군영을 보니 만우가 말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먼저 물어봤을 것이다. 어사로써, 국가로부터 녹봉을 받는 관리로써 이곳의 참상을 보고 그냥 지나칠 동군영이 아니었다.
“그리고 나도 역졸이니까. 역졸 노릇 해주겠다는 거지.”
이곳에 무림인들이 이렇게 많이 모인 이유. 만우는 바로 이곳, 부여에 제부투혼이 있는 곳이란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이곳에 하오문의 총분타주인 무화가 있을 것이다.
‘정보가 필요한 시점이니까.’
못 미더운 한양지부의 그놈보다는 무화가 더 나았다. 동군영은 자리에서 중년인을 품에 안은 채 일어났다. 만우가 슌스케를 쳐다보자 슌스케가 달려와 여인을 안아들었다.
“이 두 사람 아시는 분?”
만우가 주변에 죽 늘어선 구경꾼들에게 말했다. 노상에 그냥 눕혀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구경꾼들 사이에서 손이 삐죽 올라왔다. *****
“사화.”
“기다리고 있었어요?”
“배가 고파서. 일산 그 녀석도 배가 고프다고 노래를 부르고 있고.”
“잠시만요. 금방 해 올게요.”
“나도 돕지.”
마정(魔正) 백영이 일어나 사화가 한아름 품에 안고 온 식재료들을 나눠들었다. 그리고는 식칼을 꺼내 식재료들을 썰기 시작했다.
“그 아이는 언제까지 데리고 있을 생각이지?”
“향이요?”
“그래. 그 향이란 아이 말이다.”
한참동안 침묵한 채 채소만 썰던 백영이 옥령에게 물었다. 백영은 이성계에게 호되게 당한 이후 부쩍 수척해졌다. 무공 증진을 위해 밤낮 없이 수련을 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겉모습은 수척해졌지만 눈의 정광은 한층 더 강해졌다.
“……정신을 잃은 아이를 그냥 두고 갈 수는 없잖아요.”
향이의 이야기가 나오자 옥령의 목소리가 뾰죡해졌다. 백영은 칼질을 멈췄다.
“그곳에 두고 오는 것이 옳았다. 데려오는 게 아니었어.”
“잔해 속에 파묻힌 죄 없는 아이가 그대로 죽어야 한단 말이에요?”
옥령은 마음이 여렸다. 혈성을 타고 났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주체할 수 없는 살의에 시달렸기에 마교에 들어와 내로라하는 여고수로 성장했지만, 그녀는 마교 같은 험한 곳 보다는 귀족가의 규수가 더 성격에 맞았다. 백영은 쓰게 웃었다.
“그래. 우리는 가엾은 이들을 보살피기 위해 조선에 온 것이 아니니까.”
“그렇지만…….”
옥령은 입술을 짓씹었다. 자신이 향이를 데려온 것이 잘못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녀도 했다. 하지만 지금 김향을 버릴 수는 없었다.
“그 아이에게 못된 짓을 한 것은 군사잖아요.”
“…….”
은월루의 안가에서 발견된 김향을 군사인 마일은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은월루 때문에 투귀대 고수 중 악궁 테무르가 상왕 이성계에 의해 유명을 달리했다. 그리고 조사의를 추살하라고 명령을 내렸던 광호검 기무는 보름이 넘도록 연락이 되고 있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군사가 내린 결정은, 백영이 생각하기에는 옳은 결정이었다.
“은월루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것이 너무 없으니까. 더러운 하오문 놈들이 우리가 원하는 정보를 순순히 넘길 리도 없고.”
“그렇지만, 그 어린아이에게…….”
“…….”
파천서생 마일은 김향을 데려가 은월루 안가에서 발견된 그녀로부터 은월루에 대한 것을 알아내기 위해 심령술을 펼쳤다. 건강한 성인이었다면 고문을 했을 테지만, 아직 어리고 몸이 연약한 여자아이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인(魔人)이다, 사화.”
“…….”
“네 그 연약한 성품을 내 모르는 바는 아니나.”
콰직. 백영의 손에 들린 식칼이 우그러들었다. 백영은 눈에 약한 살기를 띈 채 옥령을 쳐다봤다.
“공과 사를 구분하라. 투귀대로서, 천마신교의 일원으로써의 긍지를 가져라. 군사의 행동은 우리에게 필요한 행동이었다. 그 아이의 안위보다는 대주님의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 우선이니까.”
“…….”
옥령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테무르가 죽은 이후 주창의 말수는 줄어들었고 투귀대는 살얼음을 걷는 것 같은 긴장감이 흘렀다. 거기에 은월루주와 그의 수하를 눈앞에서 놓치자 주창은 더욱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파천서생 마일이 펼친 심령술(心靈術)의 여파로 인해 향이는 정신을 잃은 채 일어나지 못했다. 옥령이 그녀를 살리고자 죽을 쒀서 먹이고 물을 먹이지 않았더라면 진즉에 굶어죽었을 것이다. 그러고도 마일은 김향으로부터 아무것도 알아낸 것이 없었다. 아니, 알아낸 것이 한 가지 있기는 했다.
“은월루와 검주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다면요?”
“사화!”
백영이 두 눈을 부릅떴다. 주창을 비롯한 투귀대가 부여현으로 숨어든 은월루를 뒤쫓지 않고 인근 산기슭에 있는 사냥꾼의 오두막에 머무르고 있는 이유는 검주 때문이었다. 검주 만우. 마일이 펼친 심령술로 김향이 검주와 은월루주 어리를 만났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