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네가 조사의냐(4)2020.05.05.
“미치지 않은 다음에야 그럴 리가.”
“명에서는 이런 일이 흔치 않은 모양이군.”
만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했다. 관과 무림은 엄밀히 상호불가침 관계였기 때문이다. 명의 건국 과정과 그로 인해 무림이 보장 받은 권리를 설명해 준 만우는 끝에 덧붙였다.
“국왕의 눈에는 나나 저 친구가 초인처럼 보이겠지. 아니, 무공을 쓰는 모든 이들이 그렇게 보일 거야. 그래서 무공을 익혀서 강군을 만들고 싶을 수도 있겠고.”
임금은 속으로 뜨끔했다. 이미 그걸 노리고 무림맹에서 온 정의대를 어사로 삼아 남부로 내려 보냈다.
“하지만 제아무리 뛰어난 무인이라고 해도, 뛰어난 문파라고 해도 황실에는 맞서지 못해.”
만우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임금은 궁금하다는 눈으로 만우를 쳐다봤다. 권희달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림인도 인간이거든.”
만우는 계속해서 말했다.
“백? 이백? 어쩌면 천? 그 정도까지는 무림인이 유리하겠지. 하지만 무공은 익히기 어려워. 거기에 익히다고 해도 모두 같은 수준으로 익힐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주 어린 나이에 무공이 입문하였다 해도, 무림에도 통할 정도가 되려면 족히 십오 년간은 수련을 해야 한다. 수많은 후기지수들이 약관을 전후로 무림에 출도하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다. 오성과 기감이 좋은 아이들만을 뽑아 무공을 가르치는 것임에도 무림에 나오기 위해서는 십 년이 넘는 세월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재능이 있는 애들? 사람이 그렇게 많다는 중원 전체를 뒤져도 대문파라는 무당이나 소림의 한 항렬이 삼십 명 남짓이야. 그렇다면 이 땅은 어떻겠어?”
임금은 만우가 하는 말이 이해가 대충 갈 것 같았다. 만우는 벌써 감을 잡아가는 임금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그런데 군대는? 그대가 이끌고 온 사만은? 어떨 것 같은데?”
“…….”
“막말을 해서 대나무 잘라서 죽창을 만들어 주면, 찔러 죽이는 건 할 수 있지. 그리고 전쟁을 경험해 본 왕이라면 잘 알 것 아닌가. 한 몸으로 움직이는 수천, 수만의 군대가 가진 힘을.”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수천, 수만 모이면 경천동지(驚天動地)할 것 같은 위압감을 풍겨낸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만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한 몸으로 움직이는 수만의 군대와는 맞설 수 없어. 기껏해야 동귀어진, 높은 확률로 내가 패배한다.”
무려 4만의 군대와 싸워도 이길 확률이 있다는 어마무시한 말이었지만 임금은 완벽하게 이해를 했다.
“눈 먼 화살이나 칼에는 무림인이라고 해도 맞으면 죽어. 언제까지 그 기감이 칼처럼 살아있는 것도 아니고. 지치거든. 끝이 있어, 인간인 이상.”
아무리 고강한 무공을 익힌 무인이라고 해도 수만이 격돌하는 전쟁터에서는 그냥 조금 큰 개미에 불과하다. 언제든지, 어디서 날아온 화살이나 칼에 맞고 죽을 수 있는 인간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무림은 절대로 황실과 관을 건드리지 않아. 그 무서움을 잘 아니까. 그런데 조선의 궁을 습격했다?”
“조선이 명보다 작기 때문에…….”
“아니. 고수들은 그렇게 멍청하지 않아.”
이천의 금군과 백 명의 내금위, 사인의 겸사복의 공세에 어려움을 겪었으니 몸을 빼서 도망간 것이다. 아마 그들이 앞뒤를 안 가리고 궐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만우는 그게 더 궁금했다.
“무슨 이유가 있었을 거야. 정신을 차려보니 그곳이 궁이란 걸 알았겠지. 어쩌면…….”
궐에 들어갔다가 몸을 빼내 도망갈 정도면 상당한 경지의 고수들이다. 만우는 자신이 조선에 와서 만난 무인들 중 궐에 그렇게 들어갔다가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는 이들이 누구인지 단박에 손에 꼽을 수 있었다.
‘마교의 투귀대 그놈들이거나 사림곡의 기린대. 그놈들인데.’
문제는 ‘왜’다.
“음? 전하. 은월루에서 보낸 서신인 듯합니다.”
지금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권희달이 고개를 휙 하고 돌렸다. 임금이 고개를 끄덕이자 권희달이 바깥에 나가 손을 모으고 그 사이로 부엉-하는 소리를 냈다.
“올빼미? 이 낮에?”
“정보는 밤과 낮을 가리지 않지. 그 때문에 올빼미를 쓰더군.”
이내 푸드득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권희달이 서신을 들고 들어왔다. 작은 나무통에 든 서신을 꺼내든 임금의 안색이 일변했다.
“…….”
만우는 딱딱하게 굳은 임금의 얼굴을 보면서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철혈왕이라고까지 불릴 정도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임금이다. 그런 그의 표정이 저토록 변한다면, 큰일이 일어났다는 뜻이다.
“이건…… 검주 그대도 읽어봐야 할 내용인 것 같군.”
임금이 서신을 만우에게 내밀었다. 만우는 자신도 읽어봐야 할 내용이란 것에 고개를 갸웃했다. 은월루가 자신에게 보낼 이야기가 있다니.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루주 습격(襲擊). 남향(南向) 도주. 루주 전언(傳言).] 만우는 흠칫 놀랐다. 은월루와 관련된 쪽에서 일으킨 일이란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보를 다루는 곳인 은월루의 수장인 은월루주의 위치가 발각되었다는 것은 큰 변고가 일어났다는 뜻이다.
‘하오문?’
그들과 자웅을 겨루고 있는 하오문이 정보를 흘렸다면 말이 된다. 만우는 이를 뿌득 갈았다.
‘김향.’
원래는 은월루가 누구에게 습격을 받건 말건 만우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단, 김향과 관련만 없다면 말이다. 김향은 은월루가 사라지지 않기를 바랐다. 어쨌든 만우는 ‘루주 전언’이라 적힌 부분의 다음을 읽어 내려갔다. 동시에 만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김향 생사불명(生死不明). 원인, 안가(安家) 습격.] 손바닥보다도 작은 종이였기 때문에 짤막하게 몇 글자 적혀져 있지 않았지만 이 서신을 보낸 이의 급박함이 전부 담겨져 있었다.
“김향이라는 아이가 아무래도 이번 일에 휘말린 것 같군. 만우. 그대가 가주시게. 동군영과 함께 가시게. 가서 무슨 일이 일어졌는지…….”
임금은 옆에서 종이를 꺼내 일필휘지로 써내려갔다. 왕의 교지였다. 어명이 담긴 교지에는 동군영을 이번 일의 책임자로 임명할 테니 모든 수를 써서 이 일의 원흉을 반드시 밝혀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사별위를 써도 좋다. 이 서신은 사별위장에게 전하시게. 손이 많을수록 좋을 테니.”
“전하!”
사별위라는 소리에 권희달이 놀라 눈을 부릅떴다. 금군은 그 성격이 궁궐을 수호하기 위해 전국에서 뽑힌 이들로 이뤄진 군대라면, 사별위(司別衛)는 말 그대로 왕의 친위조직이었다. 왕의 말이라면 옳음과 그름 없이 실천하는 이들이 바로 사별위다. 이성계의 가별초 같은 존재가 바로 그들인 것이다. 임금은 가별초를 본 따 자신만의 무력 세력을 키웠는데, 겸사복, 내금위, 우림위가 전부 왕이나 궁궐을 수호하기 위한 것이라면 내시위는 누군가를 공격하기 위함이었다. 첩보 수집부터 시작해 군대 육성까지 왕의 한마디라면 죽음이라도 불사할 이들 500인으로 이뤄진 부대가 바로 내시위였다. 그들은 임금의 명령 밖에 따르지 않았는데, 그들의 통솔권한을 어사인 동군영에게 준다는 것 자체가 파격적인 조치였다.
“내시위가 아니라면 원흉을 찾아도 버틸 수조차 없을 터. 운검의 걱정은 알겠으나 과인의 뜻에 따르라.”
“……예, 전하.”
놀랐던 운검은 단호한 임금의 눈을 보고는 부복했다. 그리고 옥새를 들어 찍어 교지를 만든 후 임금은 만우에게 건네주었다.
“보고는 필요 없다. 지금 즉시 떠나도 좋으니 동 어사에게 복잡한 절차를 거치지 말라 전해주게.”
“이 일은…….”
“섭섭지 않게 챙겨주겠네. 놀랄 정도로.”
조사의가 난을 일으킨 것만큼이나 궁에서 난리가 났다는 것은 임금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일이다. 그 때문에 임금은 반드시 이번 일의 원흉을 잡아내겠다는 의지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내 말을 듣지 않으면?”
하지만 만우는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더 물었다. 주어가 없었지만 임금은 단박에 만우의 말을 알아들었다. 내시위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을 경우를 상정한 것이다.
“죽이지만 마시게.”
“좋아. 마음에 드는데?”
만우가 씩 웃어 보였다. 그런데 즐거워서 웃는 웃음이 아니라 살기가 가득 서린 웃음이었다. 만우는 일단 돌아가면 하오문부터 족칠 생각을 하며 서신을 손에 쥐고 몸을 돌렸다.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지. 어차피 이젠…….”
만우의 두 눈이 광폭하게 번들거렸다. 가만히 있으려던 자신을 먼저 건든 것은 세상이다.
“남의 일도 아니게 되었으니까.”
펄럭! 만우의 신형은 천막 밖으로 한 발자국 내딛는 순간 사라졌다. 그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바람을 얼굴로 쐰 임금이 권희달에게 명령했다.
“운검! 당장 전 부대에 일러 회군 속도를 높인다 전하라!”
“예! 전하!”
*****
“이봐. 사화. 그 꼬마애는 왜 데리고 온 거야?”
아직까지 운신이 자유롭지 않은 웅풍이었지만 웅풍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거대한 대부를 휘휘 휘둘러 보이며 옥령에게 말했다.
“죽을 뻔한 아이니까요.”
“그러니까.”
웅풍이 상당히 가라앉은 분위기인 주창을 힐끗 쳐다보면서 옥령에게 말했다.
“대주 기분도 꿀꿀한데 왜 꼬마애를 데려왔냐고. 우리가 그런 애 챙길 때야?”
주창과 두 명이 바뀐 투귀대의 육인은 울창한 숲속에서 노숙을 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주창을 필두로 한 투귀대의 고수들이 조선의 왕이 기거하는 궁궐의 담을 넘은 순간 이미 일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그 쥐새끼 같은 놈들을 당장 잡아 죽여도 시원치 않을 판이데. 저 꼬마애 때문에 계속해서 늦어지잖아.”
옥령은 자신의 새하얀 섬섬옥수를 쳐다봤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불안에 떠는 김향을 쳐다봤다. 옥령과 웅풍이 한어(漢語)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기 때문에 김향은 저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 했지만, 결코 착한 인물들이 아님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열 명. 열 명을 죽였어.’
김향이 정신을 차린 것은 불과 사흘 전이었다. 그리고 그 사흘 전부터 지금까지 저들은 열 명을 죽였다. 전부 심마니나 사냥꾼 같은 이들이었다. 숲 속에서 만난 이들을 저들은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죽였다. 어린 김향이 눈치챌 정도로, 마교 고수들의 손에는 인정이란 것이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흔적이라도 남아서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내 손으로 저 여자애의 목을 부러뜨렸을 거야. 알아 사화?”
“…….”
옥령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투귀대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쫓아야 하는 목표가 있음에도 무인도 아닌 그냥 평범한 여자아이를 데리고 간다는 것은 이성적이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자신들로 인해 거대한 사건이 휘말린 아이다. 옥령은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그 잔해 속에서 김향을 발견한 순간 데려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산. 그만하시지요.”
“군사. 그대가 사화를 좀 설득해 주십쇼. 아시지 않습니까.”
웅풍은 테무르가 이성계에 죽은 이후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느긋함을 잃었다. 지금의 상황도 원래 웅풍이었으면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눈 감고 넘어갔을 일이다. 하지만 예상치 않게 한 명의 동료를 잃으면서, 이번 임무를 실패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마교 고수로 승승장구하던 웅풍에게 임무의 실패는 곧 교에서의 도태였다. 그것보다도 미래의 경쟁자이자 현재에는 등을 맡길 수 있는 동료가 죽었다. 처음이었다. 피와 수라의 길을 걷는 것이 마교 고수들이라지만, 웅풍은 그러기에는 여렸다. 겉으로 생긴 것과는 달리 잔정이 많은 그는 투귀대라는 울타리를 소중하게 생각했고 그것에 균열이 생긴 것에 초조해진 것이다.
“서두를 필요 없습니다.”
파천서생 마일은 그런 웅풍의 상태를 눈치채고 있었지만 나서서 그것을 자극하지 않았다. 지금은 불안정할지 몰라도 웅풍은 초절정 고수다. 초절정에가지 오른다는 것은 웬만한 정신력으로는 이뤄낼 수 없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온 저 혼란은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라 믿었다.
“우리의 임무는 은월루를 찾아내 그들에게 대가를 받아내는 것. 단지 그들에게 받아낸 대가가 더 늘어난 것뿐입니다.”
혈채. 은월루에게 받아낼 것이 더 늘어났을 뿐이다. 마일은 투귀대가 의도치 않게 조선의 중심부를 공격한 상황에서도 냉철함을 잃지 않았다.
“저 아이. 은월루의 안가에서 구한 아이라고 하셨지요?”
그리고 마일은 김향이 쓸모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가 발견된 곳이 다른 곳도 아니고 바로 은월루의 안가였기 때문이다.
‘루주와 그 호위무사가 있던 안가에 있던 아이라.’
마일은 뱀처럼 차가운 눈으로 김향을 쳐다봤다. 그것만으로 김향은 무언가를 느꼈는지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일단 말이 통해야 하니, 통역을 해줄 사람이 필요하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