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가장 쓸데없는 조사의 걱정(1)2020.04.11.
“후욱.”
뜨거운 숨을 내뱉자 한계까지 다다랐던 근육이 살겠다는 듯 숨을 쉬는 것처럼 느껴졌다. 촤악! 쓰고 있던 투구를 벗어 한번 휘두르자 그곳에 묻어 있던 핏방울들이 주변의 수풀들을 붉게 물들였다. 설운은 그 모습을 보면서 씁쓸하게 웃었다.
“많이도 죽였구나.”
설운은 전신이 피로 물들어 있다시피 했다. 그렇게 설운이 앉아서 휴식을 취하고 있자 수풀이 들썩거리더니 설운과 함께 했던 결사대들 중 스무 명이 모여들었다.
“고작 스물인가.”
조사의가 이끄는 반군의 보급로를 끊임없이 괴롭히는데 성공한 설운이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결사대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었다. 적들도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보급로를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날이 갈수록 경계가 삼엄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 부장님.”
설운은 피식 웃으면서 결사대원이 내민 가죽 주머니를 받아들었다. 근처 냇가에서 떠온 차가운 물을 몇 모금 넘기자 멍하던 눈에 빛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오늘은 푹 쉬고, 내일부터 움직인다. 식사는 건량으로 대체하고.”
“예!”
결사대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작전이 성공하기는 했어도 매일같이 목숨을 걸어야 하는데 지치지 않을 리 없다. 초절정이기 때문에 체력과 정신력 모두 다른 결사대원들보다 압도적으로 뛰어난 설운도 지칠 정도였다. 그러니 일반 결사대원으로서는 버티기 힘든 것이 당연했다.
“조금만 힘을 내라. 역도의 무리는 곧 토벌대에 의해 진압이 될 것이다. 그러면 너희들은 큰 상을 받게 될 것이야.”
설운이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도 결국 보증 없는 미래에 대한 이야기일 뿐이다. 이미 아군이 큰 패배를 당하는 것을 지켜본 결사대원들은 설운의 말에도 표정이 그리 밝아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버틴 것이 용하지.’
애초에 사기가 바닥인 상태에서 그래도 이 정도 분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온전히 설운의 능력 때문이었다. 전장에 나서기 전까지만 해도 불안한 초절정이었던 설운이 수없이 많은 사선을 짧은 시간에 넘나들면서 완벽한 초절정에 들어서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속해서 피를 본다는 것은 견고한 초절정의 정신을 계속해서 깎아내렸다. 그 대상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같은 편에 속했었던 군졸들이란 것이 설운으로 하여금 정신적으로 지치게 만들었다.
‘조사의. 그리고 반군의 수괴들.’
당연히 같은 조선의 군졸들끼리 창칼을 들이밀게 만든 반군의 수괴들에 대한 설운의 살심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휘익!!! 파바바바박!!!
“으악!!”
“끄아아악!!!”
설운의 눈이 커졌다. 갑자기 숲속에서 화살들이 비처럼 결사대원들의 머리 위로 쏟아졌기 때문이다. 설운은 검을 꺼내 화살들을 모두 쳐냈지만, 결사대원들에게는 그게 불가능했다.
“추격대라니.”
“남은 놈들을 쓸어버려라!!”
와아아아!!! 설운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설운의 실책이었다. 설운은 너무나도 지친 나머지 적들이 근처에 오기 전까지 적들의 기척을 감지하지 못했다. 꼬리를 밟힌 것은 결사대원들이지만, 추격대를 놓친 것은 설운의 실책이다. 채앵!!! 설운은 결사대원들이 화살에 하나 둘씩 쓰러져가는 것을 보면서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수풀을 헤치고 나타나는 적들을 보면서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아직 임무는 끝나지 않았어!’
설운의 신형이 숲속으로 사라졌다. ***** 스윽, 스윽, 스윽. 숫돌을 꺼내 물을 떠다놓고 검의 날을 세우는 만우는 마치 숭고한 예식을 치루는 것처럼 경건하기 그지없었다.
다른 이들이 한창 꿈나라에 빠져있을 때, 만우는 어둠 속에 묻혀 적막을 벗 삼아 이룡검의 날을 세웠다. 날을 세우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한 만우의 표정은 진지했다. 생명을 맡길 수 있는 마지막 전우인 검을 대하는 만우는 항상 진지했다.
“그게 무슨 궁상인 것이냐?”
“그냥 계속해서 지켜보기만 하지 왜 이제 와서 아는 척이슈?”
그때 이성계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만우는 놀라지 않았다. 아까 전부터 이성계가 지켜보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버르장머리 없는 놈.”
“그러는 노인네는 버르장머리가 있어서 그렇게 숨어서 보고 있었수?”
상왕에게 하는 언사라고 하기에는 만우는 지나치게 말이 자유로웠다. 문제는 이성계는 그렇게 말하는 만우에게 이제는 적응을 했다는 것이다. 결국 무인들은 자신의 무예로 말을 한다. 그런 점에서 만우의 무위는 이성계가 나이를 가지고 그렇게 옹졸하게 굴 정도가 아니었다. 솔직하게 말해 이성계는 만우의 무예를 인정했기에 나이나 신분에 상관없이 만우를 대하기로 했다.
“몇몇이 사라진 것 같은데. 어디로 보낸 것이냐?”
이성계는 만우의 일행 중 몇몇이 사라졌음을 알고 있었다. 만우 일행 중 초절정에 속하는 육인방 중 세자를 지키는 이찬과 수레를 끌어야하는 슌스케를 제외하고는 다들 자리를 비웠다.
“할 일이 있어서. 좀 보냈수다.”
칠천에 달하는 적군이 득시글거리는 험난한 행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엄청난 전력들을 과감하게 빼버린 만우였지만 이성계는 그냥 고개를 끄덕거려 보였다.
“굳이 앉아서 적들을 기다릴 필요는 없다는 건가?”
“그런 것도 있고.”
만우는 말을 잘하는 문형일은 임금에게 보냈다. 원중포로 향하고 있음을 알려야 하기 때문이다. 전서구는 날아가는 족족 반군에 의해 격추를 당하고 있기 때문에 인편에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한 명씩 상대하기 귀찮으니까. 몰아서 상대하려고 그렇수다.”
칠천이나 되는 적군을 일일이 상대하는 것은 만우에게도 귀찮은 일이다. 게다가 저들이 이쪽의 힘을 빼겠다고 차륜전이니 뭐니 하면서 귀찮은 방법을 쓰면 괜히 피곤만 하다. 애초에 이쪽에 세 명의 화경의 고수가 버티고 있는 순간, 반군의 승산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단지, 조사의와 그 머저리 같은 주변의 반군 수괴들이 글쟁이들이기 때문에 현실을 직시하지 못 하는 것뿐이다. 만우, 척사영. 그리고 이성계. 이 세 명은 못해도 일당천이다. 험난한 산세를 끼고 치고 빠지는 식으로 적들을 괴롭히면, 아니 마음만 먹으면 칠천의 군세를 뚫고 들어가 조사의의 목만 날려버릴 수도 있었다.
“주상을 위해 시간을 벌어주려는 셈인가.”
“뭐.”
만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내색하지 않았음에도 이성계도 정치판에서 머리가 굵었기 때문인지 만우가 말하지 않은 부분도 꿰뚫어 봤다.
“못난 아들이지만 늦지는 않을 테니까.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말거라.”
임금을 떠올릴 때마다 이성계의 얼굴은 일그러졌지만, 그래도 보기 싫은 아들보다는 반군이 더 괘씸했다.
“그나저나 노인장이나 조심하쇼. 예전 같이 않은 것 같던데.”
만우의 두 눈에서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이성계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늙으니 마음 같지가 않아서.”
“그러니까 조심하셔야지. 늙으면 뼈도 약해지는데 말이오.”
이성계는 상당한 노구였다. 단지 무인으로써 다져놓은 신체가 그를 강건하게 유지해주고 있었지만, 잡아두고 싶어도 공력은 계속해서 줄어들고 세월에 육체는 약해져만 갔다. 그럼 이성계에게 마교 고수 넷과 싸운 여파는 그의 육체를 갉아먹는 세월에 박차를 가했다. 마기 때문이다. 마교의 내로라하는 고수들을 압도했다고는 하지만 이성계도 그때 거의 모든 힘을 전력으로 쏟아부었다. 호선과의 상성이 좋아 그들을 압도하였다지만, 끝까지 발버둥쳤던 악귀 같은 마교 고수들의 마기에 공력을 소진한 몸이 노출이 되자 그에 악영향을 받았다.
“내 나이 정도 되면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을 해야 되는 법이거늘. 너무 신이 났지 뭐던가. 크핫핫.”
만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지금은 티가 나지 않지만 만우는 마기에 노출이 되었던 이성계의 상태가 훤히 보였다. 이건 치료해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세월의 힘을 대체 무엇으로 이겨낼 수 있단 말인가.
“가서 잠이나 자시오. 밥 잘 먹고. 잠과 밥이 보약이오. 아무리 늙으면 잠이 없어진다고 해도 그 몸을 생각하면 쉬어야 할 거요.”
만우가 혀를 쯧하고 차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룡검을 검집 안에 조심스럽게 넣은 만우는 검을 다시 허리에 잘 찬 후 이성계를 쳐다봤다.
“안 가시오?”
“먼저 가거라. 밤공기가 좋구나.”
이성계는 만우를 향해 손을 내저어 보였다. 만우는 어깨를 으쓱한 뒤 고개를 돌렸다. 그런 만우의 코로 비릿한 혈향이 맡아졌다.
“쯧…….”
어두워서 육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공력이 심후한 만우의 눈에는 또렷하게 보였다. 이성계의 입가에 번진 핏물이 이 혈향의 근원이리라.
“노인네가 적당히 몸을 굴려야지. 쯧.”
***** 조사의는 득의양양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뒤에서 깔짝거리던 놈을 급습하였고, 그 수괴를 죽이지는 못 했지만 그 수괴라는 놈이 며칠 동안 조용할 뿐만 아니라 드디어 눈앞에 상왕과 세자의 행차가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달달달달. 고작 백여 명으로 이뤄진 행렬의 맨 앞에는 외팔이 사내가 이끄는 수레가 탈탈거리며 굴러가고 있었고, 그 뒤로는 대룡궁을 등에 맨 이성계와 가별초가 천천히 걷고 있었는데 그게 그렇게나 초라해 보일 수가 없었다. 칠천의 병사를 거느린 자신과 비교하면, 그냥 손가락으로 꾹 눌러도 죽을 것 같은 초라한 모습이었다.
“조사의!!!”
쩌렁쩌렁!!!! 칠천의 군세가 포위망을 형성한 것을 눈치챈 이성계의 노성이 산의 능선을 넘어 쩌렁쩌렁하게 울려퍼졌다. 하지만 조사의는 나서지 않았다. 이 조선에서 신궁(神弓)이라 불리는 이성계의 활솜씨를 모르는 이는 없다. 그러니 괜히 모습을 드러내서 이성계가 쏘는 활의 제물이 될 필요는 없다.
‘내가 나설 때는 상왕 당신과 세자 그 꼬마가 내 손아귀에 떨어졌을 때다.’
조사의는 말하지 않고는 수신호로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조사의의 반군 중 가장 무예가 뛰어난 도진무 박문숭이 검을 번쩍 치켜들고는 고함을 쳤다.
“이성계! 항복하라! 항복하면 세자를 비롯한 다른 이들의 목숨을 보장해 주겠다!!”
이성계가 분기탱천한 표정을 지으며 박문숭을 노려봤다. 하지만 박문숭도 부리부리한 눈을 돌리지 않았다. 박문숭에게 이성계는 그저 과거의 유산일 뿐이다. 자신도 무예라면 한 번도 져본 적이 없기 때문에, 박문숭은 이성계를 향해 투기를 뿜어댔다.
“네 이놈! 감히 뉘 앞이라고!!!!”
퉁! 이성계의 손에 들린 대룡궁에서 퉁하는 소리와 함께 박문숭의 머리통이 날아갔다. 조사의는 그런 이성계의 활솜씨를 보면서 가슴이 서늘해졌지만 적은 하나일 뿐이다. 반면 이쪽은 칠천이다. 제 아무리 이성계의 무위가 뛰어나다고 해도, 한 손으로 열 손, 천 손을 막아낼 수는 없는 법이다.
“공격! 공격하라!!!”
이성계의 활을 피하기 위해 전원 하마한 지휘관들이 깃발을 흔들면서 소리를 치자 반군의 무리들이 이성계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이성계는 자신을 향해 개미떼처럼 달려드는 수백의 군사를 보면서 이를 악물었다.
‘공격하지 않았던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구나.’
이성계는 무겁게 느껴지는 손을 들어올렸다. 조사의의 군세는 만우가 느끼고 난 다음 이성계도 또렷하게 느꼈다. 수천이나 모인 군세가 발하는 군기는 이성계에게 가장 익숙한 기운이었다. 그런데 바로 공격하지 않은 이유가 적들이 공격을 시작하고 나니 눈에 들어왔다. 파바바바박!!!! 하늘을 새까맣게 물들었다. 화살이 만들어낸 거대한 그림자 때문이다. 수백의 궁수들이 쏘아내는 화살이 이성계를 향해 날아들었다.
‘자리를 만들어놓고 있을 줄이야.’
이성계는 궁수들이 포진한 곳을 바라보면서 이를 악물었다. 궁수들은 야트막한 구릉에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그런 그들의 앞으로 대충 지은 목책이 서 있었다. 이쪽이 낮은 위치에 있는 반면 궁수들은 높은 위치에 있었다. 거기에 목책까지 세우고 있으니 이쪽에서는 활로 공격해도 저곳까지 닿지 않는다. 반면 저들이 쏘는 화살은 이곳까지 날아온다. 조사의는 상왕과 세자를 잡겠다는 일념 하나로 미리 이런 준비를 해놓은 것이다.
“방어진을 펼쳐라!”
가별초 수장이 목청을 높이자 가별초들이 전원 말에서 내린 다음 말 아래로 숨어들었다. 이런 곳에서 전마를 소진한다는 것이 아깝기는 했지만 죽는 것보다는 나았다. 작은 방패까지 세워놓은 가별초들의 위로 화살비가 쏟아져 내렸다. 터더더더덩! 전마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이성계는 말 위에서 허리춤에 찬 검을 뽑아들어 휘둘렀다. 후두두둑! 이성계가 활로 유명하다지만 전장에 나선 장수는 무기를 가리지 않는다. 그 때문에 이성계의 칼질 한 번에 이성계를 노리고 날아들던 화살들이 허공에서 허리가 꺾여서는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