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도주(3)2020.04.04.
‘하필이면 이때.’
하지만 때가 좋지 않았다. 임금은 친정을 선포하는 바람에 궁을 수호하는 금군들의 수가 적었고 원래라면 상주하고 있을 조선제일검과 세자의 호위인 이찬도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일단 그곳으로 가는 수밖에.’
하지만 궁궐을 넘는다는 것 자체가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 은월루야 임금과 밀월 관계였기 때문에 상관 없었지만 저들은 아닐 것이다. 바꿔 말하면, 광문자는 저들의 기세를 느끼자마자 도주를 결정할 정도로 저들의 기세가 대단하다는 뜻이었다.
“웬 놈들이냐!”
광문자는 저들의 정체를 캐내기 위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어둠 속에 잠겨 있던 여섯 명 중 장대한 기골에 대부를 어깨에 걸친 남자가 걸어나와 공력을 담아 소리쳤다.
“십 년 전, 네놈들이 약속한 황금 팔십만 냥을 받기 위해 친히 마교의 소교주께서 오셨느니라!!!”
쩌렁쩌렁!!!! 거구의 남자, 일산 웅풍의 목소리가 한양의 고요했던 밤을 시끌벅적하게 만들었다. 여기저기서 꺼놨던 불이 들어오는 것이 보였지만 광문자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마교!!!!’
동방제일살객이라 불린 광문자였다. 광문자는 단 한 번도 중원에서 살행에 나선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귀가 있기 때문에 풍문을 들어 알고 있는 것들이 있었다.
‘은원이로구나. 과거의 은원.’
광문자의 신형이 번쩍하더니 있던 곳에서 다섯 장을 떨어진 곳에 그의 신형이 나타났다. 광문자의 관자놀이를 타고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방금 전까지 자신이 서 있던 곳에 갑자기 나타난 남자 때문이었다. 남자의 기개가 느껴지는 곧은 검미를 가진 준수한 청년이었지만, 얼굴 전체에 살기와 박력이 뒤섞인 청년, 주창이었다.
“발이 빠른 놈이로구나.”
광문자는 이를 악물었다. 그는 살수다. 살수의 기본 덕목은 은밀함이었다. 이렇게 훤히 모습을 드러낸 살수는, 아무리 광문자라고 해도 마교의 고수들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냥 발과 몸이 빠른 무인일 뿐이다.
‘가야 한다.’
텅!!!! 광문자의 신형이 벼락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주창은 광문자와 함께 거의 비슷한 순간 몸을 날렸다. 그런 주창과 광문자의 뒤를 따라 은월루의 흔적을 조우한 투귀대 고수들이 몸을 날렸다. 단 한 명. 주창의 뒤를 따라 몸을 날리려던 나찰사화 옥령의 고개가 무너진 건물의 잔해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곳에 내려선 옥령의 두 손에 붉은 혈수가 깃들었다. 촤자자작!!!! 붉은 실선이 허공에 몇 번 그어지자 무너진 잔해로 가득하던 곳의 잔해가 사방으로 날아갔다. 위에서 짓누르던 잔해가 날아간 그곳에, 정신을 잃은 김향이 쓰러져 있었다.
기적적으로 무너진 잔해들이 지지대를 만들어 다치지는 않았지만, 충격에 정신을 잃은 모양이었다. 스윽. 옥령이 그런 김향을 옆구리에 꼈다. 어린 김향을 본 옥령의 눈이 잠시 흔들렸지만 이내 옥령은 침착함을 되찾고는 시린 냉기를 내뿜었다.
‘이 아이가 은월루주, 그대의 소중한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죽은 테무르가 우리에게 소중한 동료였듯이.’
김향을 옆구리에 낀 옥령의 신형이 밤하늘 속으로 사라졌다. ***** 파천서생 마일의 서신을 받은 광호검 기무는 손에 들린 서신을 와락하고 구겼다.
“테무르가…… 테무르가?”
기무의 눈에서 살광이 번뜩였다. 그 눈을 본 사람이 있다면 살귀의 눈이라며 공포에 질릴 정도로 강렬한 살기였다.
“조사의라…… 찾아 나서야 하는가?”
서신의 내용은 기무에게 조사의에게 지금까지 일한 대가를 이자까지 쳐서 톡톡하게 받아내고, 그것을 거부하면 죽여도 좋다고 쓰여있었다. 한 마디로 조사의의 효용가치가 다 떨어졌다는 뜻이다. 뜻을 함께 했던 동료 중 하나인 테무르가 허망하게 죽었다는 것에 기무는 이를 뿌득 갈았다.
“조선인…….”
상왕이란 자의 무위가 그 정도로 뛰어나다는 것은 기무에게도 의외였다. 하지만 대마교의 고수를 죽인 것이 조선인이란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광호검 기무는 자신의 독문병기인 톱날검을 챙겨들면서 비릿하게 웃었다. 어차피 조사의에게는 기무도 좋은 기억이 없었다. 아니, 지랄 맞은 성격의 기무는 조사의의 깔보는 눈을 보면서 저 눈깔을 파내고 싶다고 누누히 불만을 터뜨렸었다. 그런데 어찌되었건 그간의 수모를 갚아줄 수 있는 명분과, 테무르를 죽인 조선인에게 복수를 한다는 명분이 선 것이다.
“딱 기다려라. 조사의.”
광호검 기무의 눈에서 살광이 재차 번뜩였다. *****
“살수? 안주와 덕주를 가르는 그 살수 말인가?”
“예, 전하.”
동군영은 상왕을 향해 고개를 숙여보였다. 상왕은 하얀 수염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의 등에 걸린 대룡궁이 말이 걸을 때마다 같이 흔들렸다.
“그곳에 원중포라는 포구가 있었는 줄은 몰랐으이.”
“작은 포구라 모르셨을 겁니다. 하지만 다행히 아주 뛰어난 길잡이가 있사옵니다.”
“방매 말인가? 허허허.”
상왕은 일행 가장 앞에서 슌스케가 말처럼 끌고 있는 수레에 올라탄 방매를 보면서 흐뭇하게 웃어 보였다.
“어쨌든 좋은 발상이었네. 하지만 조사의가 그 말을 믿을까?”
동군영은 가별초를 동원해 백성들에게 소문을 냈다. 조사의가 이끄는 역도를 피하기 위해 상왕이 대피를 하는 것처럼 온 함주에 소문을 내놓은 것이다.
“만약 그 소문을 믿지 않고 함주를 지나쳐 동북면으로 올라간다면, 함주는 전화에 휩쌓일 터. 그렇다면 떠나는 것만 못한 결과가 나올 것인데.”
동군영의 계책과 그 발상이 뛰어나다는 것은 상왕도 인정했다. 그게 아니었더라면 그 강고한 상왕이 뜻을 꺾고 소문이 그렇게 나는 것을 감수하면서 함주를 떠났을 리 없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한 것도 사실이었다. 동군영은 장원급제까지 한 인재이지만, 적을 속여먹는 전장터의 계책에 경험이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반드시 저들은 저희를 믿을 것이옵니다.”
“어찌하여서?”
“조사의의 반군을 흔들 수 있는 이들을 내려 보내지 않았습니까. 검주의 말을 들어보면 그들 역시 중원에서 손꼽히는 강자라 하옵니다.”
“여벌의 가별초 의복을 달라는 이유가 그것 때문인가?”
상왕은 그제야 앞장선 수레의 일행 중 네 명이 자리를 비웠다는 것을 눈치챘다. 이성계가 처음 보고 감탄했었던 그 무인들이었다.
“그들의 무위를 보면, 조사의는 착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소문을 들은 조사의는 상왕께서 북쪽이 아니라 맹주를 거쳐 안주로 간다는 것에 의문을 품을 겁니다. 하지만 그때 검주의 수하들이 빼어난 무력을 보이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정말 내가 안주로 향하고 있다?”
“예.”
“진실을 조사의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그 수고를 해야 한다니, 믿을 수가 없군.”
그렇게 말하는 상왕이었지만 그의 입가에 서린 미소는 어쩔 수 없었다. 상왕은 태어나서 처음 미끼가 되어 고작 백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칠천 명에 달하는 역도로부터 도망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전부 함주의 백성들을 살리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원중포에 도착한 그다음은?”
상왕은 그다음 계획을 동군영에게 물었다. 동군영은 상왕의 뒤에 전원 기마병으로 구성된 백여 명의 가별초들을 힐끗 보고서는 어깨를 으쓱했다.
“선박을 징발하여 강을 끼고 적들과 대치를 하거나, 계속해서 도망을 쳐야지요.”
“선박이라…….”
“그사이에 한양에 계신 주상께서 토벌군을 규합해 보내신다면, 전하와 세자저하를 손에 쥐기 위해 길게 늘어져 헐거워진 조사의는 큰 타격을 입게 될 것입니다.”
“좋아. 아주 좋아. 그 정도면 충분해. 크하핫.”
주상이 토벌군을 편성해 조사의의 옆구리를 찌르기 전까지 저들의 발목을 붙잡고 혼란을 주는 것이 상왕과 가별초들의 임무다.
“아무리 주상이 싫다 하여도, 반기를 든 놈들보다는 나으니까.”
상왕의 눈에서 심상치 않은 살광이 번뜩였다. 동군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다행히 자신이 타고 있는 말이 전마(戰馬)여서 망정이지, 그냥 보통 짐말이었다면 난리가 났을 것이다.
“어사 나리!”
그때 슌스케가 끄는 수레를 타고 유유자적함을 즐기고 있던 만우가 크게 소리쳤다.
“앞에 반군인데. 피해 갈깝쇼?”
듣는 다른 귀들이 많았다. 가별초들이 백 명이나 있었기 때문이다. 동군영은 이상한 만우의 존대를 들으면서 피식 웃었다.
“아니. 피해 가지 마. 상왕 전하와 세자 저하의 행차신데.”
동군영이 웃었다.
“역도의 무리 따위가 막아서게 해서는 안 되겠지. 그래도 몇 명 적당히 놓아주고.”
상왕의 행렬이 맹주를 지나고 정말 살수의 원중포로 향하고 있음을 알려주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전달한 몇 명은 필요했다.
“좋아.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다고.”
만우가 희희낙락한 표정으로 수레에서 몸을 일으켰다. 만우의 허리춤에는 그전까지 차고 있던 괘검이 아니라 붉은 띠 모양의 무늬가 휘감고 있는 민무늬의 하얀 검집이 매달려 있었다. 무려 천년한철로 만든 검집이다. 그 검집 위로는 구름골, 운림에서 조우했던 이무기의 붉은 비늘과 물소의 뿔로 만든 검병이 한 자(尺) 정도 솟아 있었다. 툭툭. 만우는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간장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검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붉은 손잡이와 백색의 검신이 어우러진 이 검은 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까막눈에도 보검(寶劍)이었다. 이룡검(螭龍劍). 만우가 이무기를 때려잡아 비늘을 강탈한 것이 인상적이었던 것인지 간장은 검신에 이룡검이라 쓴 뒤 이룡검이라 명명했다.
“갔다 온다.”
만우가 히죽 웃어보이고는 수레 위에서 꺼지듯이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본 양녕이 감탄했다. 양녕은 아직도 만우를 검 스승으로 모시겠다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
“아, 뭐요. 그렇게 쳐다봐도 안 됩니다.”
“…….”
“아니 보지 말라니까요!”
그리고 그런 만우의 이룡검을 부러워하는 눈으로 계속해서 쳐다보던 척사영은 상처가 다 낫지 않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간장을 쳐다봄으로써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다. 물론 간장은 극구 거부를 했고 말이다.
“여우같은 기집애. 지도 그러면 재료를 가져와서 만들어달라고 하던가. 흥.”
방매는 괜히 주는 것도 없이 미운 척사영을 보면서 투덜거렸다. 그런 수레의 풍경을 쳐다보던 동군영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무려 칠천 명이나 되는 역도의 무리에 쫓기는 행렬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정도로 태평했기 때문이다. 쿠과가가가!!!! 그와 함께 만우가 달려 나갔던 방향에서 작은 언덕 하나가 거대한 바람이 몰아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 누군가 손으로 지워버린 듯 사라졌다. ***** 와아아아아-!!!
“이런 젠장. 또! 또란 말인가?”
조사의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대승으로 끝난 초전의 기세를 이어가기 위해 원래 같았으면 이천우가 꼬리를 말고 도망쳐 들어간 자성을 함락시키고, 안주까지 집어삼켜야 했다. 하지만 칠천이나 되는 규모의 군의 진군 속도가 자꾸만 늦어지고 있었다. 화르륵!! 저 멀리 충천한 화광을 보는 조사의는 이를 악물었다.
“대체 어떤 놈이길래…….”
조사의는 설마 도주하는 와중에 역으로 군대의 후방을 점거하고 보급로를 습격하는 이 간 큰 작전을 적들이 쓸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것도 고작해야 백여 명으로 말이다.
“더 이상은 안 된다.”
조사의는 이를 뿌득하고 갈았다. 함주로 먼저 향하라고 명령을 내렸던 김권 역시 연락두절이 된 지 오래였다. 그 말인즉슨 상왕에게 당했다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군을 둘로 나눈다.”
“군을 둘로 나눈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영흥부 판윤이자 동북면 도순문사인 박만이 화들짝 놀라 조사의에게 말했다. 조사의는 비축해 놓은 식량에 붙은 불을 끄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군졸들을 막사에서 쳐다보면서 이를 까득하고 갈았다.
“저들이 왜 우리 보급로를 습격하는지 모르시오? 우리의 발목을 잡기 위함이오. 아마 이방원이 군대를 규합하여 북진할 때까지 우리의 발목을 묶어놓기 위함이지.”
조금 있으면 12월이다. 12월의 동북면이나 서북면은 혹독한 추위로 유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정벌에 나선 토벌군은 시간을 끌면 끌수록 위험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보급부대의 병력을 충원하여 경계를 강화하고, 이천우가 자리를 비운 안주를 치기 위한 일군, 그리고 상왕과 세자를 억류하기 위한 일군으로 나눌 것이오.”
조사의의 눈에서는 형형한 안광이 쏟아져 나왔다. 조사의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후방을 습격한 자들의 규모라고 해봤자 일백 남짓. 그들을 이끄는 이의 무용이 뛰어나다고는 하나 체력이 무한일 수 없으니 병력을 충원하고, 계획대로 움직이자는 뜻이오.”
“자성의 이천우는 어찌할 셈인가?”
“덕주를 거쳐 안주로 가겠소.”
덕주를 점령한 뒤 살수의 물길을 따라 남하하면 안주가 나온다. 살수 유역을 점거할 수 있다면 서해로 나가는 길과 서북면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인 평양과 의주를 손에 넣을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이방원은 명으로 향하는 길목이 바다 이외에는 모두 봉쇄되는 셈이다.
“자, 장군!”
그런데 그때 누군가 한쪽에서 구르듯이 조사의를 향해 달려왔다. 안 그래도 정신이 없는데 호들갑을 떠는 이가 좋아 보일 리 없었다. 하지만 꽤 큰 규모의 병력을 이끌고 합류한 황길지였기 때문에 조사의는 화를 터뜨리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