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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도주(2) (131/400)

131. 도주(2)2020.03.31.

16553221118408.png“…….”

역도들이 고을들을 초토화 시켰다는 것을 전해들어 알고 있는 이성계였다. 이성계는 용맹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무정한 성품은 아니었다. 당연히 함주의 백성들이 신경이 쓰일 것이다.

16553221118412.png“함주본궁에서 농성을 펼칠 수는 있을 것이옵니다. 그사이에 함주 백성들은 큰 피해를 입겠지요. 그리고 설령 농성을 한다 하여도, 이 궁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시옵니까?”

이성계는 전쟁의 달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군영의 말대로 함주본궁에서 버틴다는 것이 어리석은 생각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단지 자존심 문제였다. 상왕인 자신이 기껏해야 역도인 조사의에게 쫓겨 함주를 벗어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다.

16553221118412.png“백성들을 먼저 굽어 살피시옵소서.”

동군영의 말에 이성계는 끄응하는 소리를 냈다.

16553221118412.png“전하의 자존심보다, 백성들을 먼저 살펴주시옵소서. 전하.”

동군영은 다시 한번 간곡하게 이성계에게 호소했다. 백성을 먼저 생각해 달라는 말에 이성계는 자신의 자존심을 내세울 수 없었다. 만우는 동군영이 말빨 하나로 저 고집 센 늙은이를 설득하는 것을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장원급제를 한 인재라고 하더니, 왜 동군영이 장원급제를 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16553221118412.png“전하. 유람을 떠나시지요.”

16553221118408.png“유람? 이 시기에?”

이성계의 목소리가 다시 높아졌다. 동군영의 말이 앞뒤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백성을 굽어살피라 하더니 이제는 또 유람을 떠나라는데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16553221118412.png“예. 원중포라는 작은 포구가 있사옵니다. 그곳의 풍광이 매우 수려하다 하더이다.”

16553221118408.png“소문을 내서 주상을 그곳으로 부르라는 소리냐?”

잠시 침묵했던 이성계가 불쑥 말했다. 동군영은 환하게 웃으면 고개를 끄덕였다.

16553221118412.png“예, 전하.”

16553221118408.png“고연고로. 아주 고연 놈이로다.”

원중포면 안주와 덕주 근처를 끼고 흐르는 살수(薩水) 인근에 위치한 작은 포구였다. 하지만 그곳을 지나가려면 서북면의 옛 맹주를 지나쳐야 한다. 맹주는 바로 어제 이천우가 조사의의 군대에 대패를 하고 쫓겨난 곳이다.

16553221118408.png“등잔 밑으로 들어가라?”

16553221118412.png“예, 전하.”

16553221118408.png“내가 상왕이고, 세자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으렸다?”

16553221118412.png“더불어 용맹한 가별초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사옵니다. 여기 검주, 만 장사와 그의 뛰어난 수하들도 있사옵고.”

만우는 재밌다는 듯 히죽 웃었다. 동군영은 이성계에게 함주를 비우고 떠날 것을 요청하고 있었지만 그게 조사의의 군을 피해 도망가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역도들이 함주로 몰려오는 것을 역이용해서 적들을 파고들자는 뜻이었다. 그러니 함주를 비우고 도망가는 것이긴 했으나, 도망가는 방향이 후방이 아니라 전방이었다.

16553221118408.png“우리의 수가 적은 것을 이용하자?”

16553221118412.png“그렇사옵니다. 소신이 함주로 오는데 험준한 산길을 이용해 와보니, 과연 이곳이 왜 그리도 험준한 곳인지 이해를 할 수 있었나이다.”

조사의의 반군은 수천이다. 하지만 제 아무리 수천이라고 해도 험준한 산맥을 전부 뒤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반면 이성계와 가별초는 백여 명이니, 산속으로 이동하는 것에 무리가 없다. 동군영은 그렇게 하여 백성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상왕과 세자의 안전도 도모하려는 것이었다.

16553221118408.png“좋다! 동 어사. 그대의 계책이 실로 빼어나니 그대의 말에 따르겠다!”

이성계는 언제 살기를 피워올렸냐는 듯 호탕하게 웃었다.

16553221118408.png“나가서 가별초에게 알려라! 함주에서 떠날 채비를 하겠다고. 그대들도 준비를 하라!”

16553221148899.jpg“예, 전하!!!”

16553221118408.png“그대가 이리도 당당한 사내일 줄 몰랐다. 앞으로도 이렇게 당당하게 굴도록 하라!”

이성계는 자신에게 대든 동군영이지만, 그런 동군영의 당당함이 오히려 마음에 든 듯했다. 이성계는 호방한 장수의 기질을 그대로 품고 있는 거친 사내였기 때문이다.

16553221118412.png“망극하옵니다 전하.”

16553221118408.png“으하핫. 역도들의 품으로 역으로 파고든다. 좋아. 아주 좋아.”

동군영이 일어나 고개를 숙이며 만우의 팔을 잡아끌었다. 어깨를 으쓱한 만우는 휙하고 일어나 고개만 까닥인 후 먼저 나가 버렸다. 이성계는 그런 만우를 보면서 혀를 한 번 찼지만 그를 탓하진 않았다. 서로 사과를 할 성격들도 아니고, 계속해서 마음에 안 들면 무기를 들고 한번 부딪치면 된다. 그러면 금방 풀리는 것이 무인들 간의 앙금이다.

16553221118408.png“신경 쓰지 말고 어서 나가서 준비를 하라.”

동군영은 예법에 따라 뒷걸음질을 해 대전에서 빠져나왔다.

16553221118412.png“만우! 만우! 우악!!!”

우당탕탕!!! 동군영은 만우를 쫓아 급히 나가려다가 다리가 풀려 그대로 복도에 나뒹굴었다. 앞서 가던 만우가 뚱한 얼굴로 뒤를 쳐다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저 안에서는 그토록 냉철해 보이더니, 바깥에 나오더니 푼수떼기 같은 원래 성격으로 돌아온 것이다.

16553221118412.png“저…… 삐졌나?”

동군영은 아픈 정강이를 문지르며 얼른 만우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165532211789.png“뭐가?”

16553221118412.png“아니, 내가 자네에게 막 뭐라고 하고 그 뺨도…….”

165532211789.png“…….”

만우는 다시 소심해진 동군영을 보면서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세히 보니 동군영의 다리가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소심증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꾹 참은 것이다.

16553221118412.png“이렇게 하지 않으면 자네도 내 말을 듣지 않을테고, 상왕 전하께서도 내 말에 귀를 기울이시지 않을테니까. 어쩔 수 없었네.”

동군영은 쓰게 웃었다. 만우는 마음고생이 그대로 드러난 듯한 동군영의 얼굴을 보면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동군영이 존재감을 드러내기 전까지 그를 꿔다 놓은 보릿자루 취급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6553221118412.png“앞으로는 안 때리겠네. 그러니 화를 푸시게. 응?”

동군영이 만우에게 말했다. 만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165532211789.png“차라리 아까 모습이 훨씬 나아. 그러니까 그렇게 살아. 답답하게 소심하게 살지 말고.”

16553221118412.png“나도 아네. 그런데…… 천성이라.”

동군영은 천성이라 말하고 있었지만 만우는 고개를 저었다. 동군영은 분명히 바뀌고 있었다. 자신의 성격이 천성인 줄 알고 바꿀 생각도, 기회도 잡지 못 한 채 살던 동군영은 많은 것을 겪으면서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165532211789.png“안 되겠어. 아무래도 확실하게 바꿔야겠어. 아직도 검, 배울 거지?”

16553221118412.png“보, 복수인가?”

만우가 검 이야기를 꺼내자 동군영의 안색이 파리하게 질렸다. 동군영의 소심증이 천성이라면, 그 천성을 고쳐주면 된다. 만우는 그런 동군영을 보면서 씨익 웃어 보였다.

165532211789.png“제대로 가르쳐 줄 마음이 생긴 것뿐이야.”

16553221118412.png“돼, 됐…….”

165532211789.png“됐고. 앞으로 매일 밤에 한 시진씩. 더 빡세게 할꺼야.”

16553221118412.png“…….”

만우는 그렇게 말하고 휘적거리며 걸어가 버렸다. 동군영은 그런 만우에게 하기 싫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에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16553221118412.png“하아. 아프고 힘들어서 싫은데…….”

이성계 앞에서 그의 말을 자르면서 또랑거리며 말하던 동군영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지 오래였다. 그렇게 한참을 서있던 동군영은 서둘러 함주를 떠날 차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정신을 차리고는 뛰어서는 골목을 돌아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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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553221239793.jpg“아가씨.”

김향의 머리를 빗어주고 있던 어리가 광문자의 목소리에 빗던 손을 멈췄다.

16553221239798.png“향아.”

16553221239801.png“네, 언니. 이만 물러갈게요. 안녕히 주무셔요.”

김향의 몸에서는 은은한 약재 냄새가 났다. 안국방의 조가 할아범의 일을 매일같이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어리는 김향이 그런 여유를 가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그녀를 막지 않았다. 하지만 조만간 은월루의 일원이 되기 위한 수련을 그녀도 시작해야 할 것이다.

16553221239798.png‘검주가 그리도 아끼는 아이이니…….’

검주가 김향을 아낀다는 것은 정말로 김향 그 자체를 ‘아껴서’가 아니었다. 검주는 김향에게 일종의 부채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김약항의 유언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었다.

16553221239798.png“들어오세요.”

어리가 문 밖에 대고 말하자 문이 열리고 광문자가 들어왔다. 어리는 반갑게 광문자를 맞아주려 했지만, 딱딱하게 굳은 광문자의 얼굴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16553221239798.png“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은월루의 하루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늘상 각 지방과 한양 전역에서 올라오는 정보들을 중요도에 따라 분류하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임금이 직접 역도들의 친정을 나서게 되면서 그쪽에 전해줘야 정보가 늘어 신경을 쓸 일이 늘어나긴 했지만 무리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16553221239798.png‘하오문도 조용하고.’

얼마전까지만 해도 치열하게 세력 다툼을 하던 하오문도 요즘은 조용했다. 올라오는 정보에 의하면 하오문의 한양지부에 득시글거리던 정예들이 숭례문을 빠져나갔다는 것이었다. 그중에는 하오문을 이끌던 무화 임수미도 포함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한양은 유례 없이 조용했다.

16553221239793.jpg“연락이 끊긴 아이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16553221239798.png“……연락이 끊긴 아이들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에요?”

어리가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광문자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16553221239793.jpg“구역장들이 보고를 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조사를 진행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16553221239798.png“설마. 조사를 위해 투입한 인력들도...”

16553221239793.jpg“실종되었습니다. 전부.”

이건 은월루에 대한 도전이었다. 누가 이런 은밀한 짓을 벌이고 있는지는 모르나, 어리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16553221239798.png“하오문일까요?”

16553221239793.jpg“모르겠습니다. 전혀 흔적이 남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하오문은…….”

16553221239798.png“그 정도 실력을 가진 이들이라면 하오문의 간부들이 나섰다는 이야기인가요?”

16553221239793.jpg“예.”

어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이 되지 않았다. 하오문의 간부들의 행적은 은월루에서도 신경을 써서 관리하고 있었다. 임수미가 중원에서 데려온 하오문의 간부들은 은월루의 간부들보다 실력이 더 좋았기 때문이었다.

16553221239798.png“아무리 하오문의 간부들이라고 해도 우리가 붙여놓은 눈까지 피해가면서 우리를 공격할 수는 없어요. 오라버니 정도가 아니라면…….”

어리의 표정이 변했다.

16553221239798.png“오라버니 정도의 실력자가 중원에서 들어온 것이 아닐까요?”

16553221239793.jpg“아닙니다. 그 정도의 실력자라면…….”

그리고 그 순간, 광문자의 고개가 휙하고 옆으로 돌아갔다. 광문자는 지금 자신의 감각을 예리하게 갈아 최대한으로 펼쳐놓은 상태였다. 한양에서 은월루가 모르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으니, 주의에 주의를 기울이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광문자가 어리의 허리를 낚아챘다. 콰자자자작!! 우르르! 어리를 끌어안은 광문자의 신형이 천장과 지붕의 대들보를 부수면서 허공으로 치솟았다. 갑작스런 상황에 눈을 크게 떴던 어리는 경악했다. 콰가가가각!!! 방금까지 자신과 광문자가 서 있던 그 방이, 거대한 폭음과 함께 무너져 내리고 있었기 떄문이다. 다음 순간 광문자가 잇 사이로 까득하고 이를 갈았다.

16553221239793.jpg“아가씨. 꽉 잡으십쇼.”

16553221239798.png“오라버니…….”

어리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광문자의 전신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공력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광문자가 이렇게 긴장하는 것은, 광문자가 만우를 보고 돌아왔을 때밖에 없었다.

16553221239793.jpg“궁으로 가겠습니다.”

16553221239798.png“……!!”

궁으로 가겠다는 광문자의 말에 어리는 눈을 치켜떴다. 광문자가 궁으로 가겠다는 것은 광문자의 실력으로 침입자들을 상대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어리는 시선을 아래로 돌려 그곳에 건물이 서 있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완벽하게 부서진 건물의 잔해를 보면서 이를 악물었다. 고오오오-! 그와 함께 어리는 저 멀리 초가의 지붕을 밟고 선 인형들에게서 느껴지는 전율적인 기세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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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3221239798.png‘아! 향이!’

어리가 다급히 고개를 돌려 김향을 찾았다. 무려 검주고 맡기고 간 아이가 김향이다. 그 아이를 챙겨야 하는데, 라고 어리가 생각하는 순간 광문자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주욱 늘어났다. 쐐액!!! 붉은 혈수가 남긴 잔영이 광문자가 있던 허공을 헤집었다. 어리는 그 혈수에 담긴 광폭한 기세에 자신도 모르게 약간 실금을 했다. 어린 나이에 수많은 고초를 겪었다고 자부하는 어리가 그 한 수에 거의 완벽한 죽음의 공포를 느낀 것이다. 그 공포의 크기는 만우의 기세를 온전히 받아냈을 때와 비교해도 뒤쳐지지 않았다. 어리의 눈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광문자는 그런 어리를 보고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16553221239793.jpg‘궁으로 가야 한다.’

궁궐은 왕이 기거하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사특하고 무도한 무리라도, 역심을 품지 않은 이상 넘어오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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