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너처럼 강한 여자는 처음이야(3)2020.03.17.
만우는 살인마가 아니다. 그는 단지 검을 겨루는 것을 좋아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강해져 자신과 다시 자웅을 겨룰 수 있는 상대를 굳이 죽이고 싶지 않았다.
‘죽이지 않고는 제압하지 못할 정도로 강한 것도 아니니까.’
만우가 히죽 웃었다. 그와 함께 두 손으로 괘검을 손잡이를 제대로 잡은 만우의 몸에서 서릿발 같은 기세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도와 검을 들었다고 해서 도객과 검객과 싸우는 듯한 느낌이 든다?”
만우는 히죽 웃었다. 콰앙!!!! 그와 함께 공력을 끝까지 끌어모은 척사영의 신형이 만우를 향해 짓쳐들었다. 만우는 달려드는 척사영을 보면서 두 손으로 잡은 괘검을 들어올렸다. 검극이 척사영을 향하게 들어 올린 것이다.
“어줍잖은 상대나 그렇게 느끼는 것이고.”
척사영의 검과 도가 공력으로 만든 검풍과 도풍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흡사 삭풍이 사방을 할퀴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만우는 자신의 전신요혈을 노리고 쇄도해드는 검풍과 도풍을 가만히 직시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만우는 괘검을 앞으로 쭉하고 찔렀다. 단촐하지만 간결하고, 군더더기가 없는 찌르기. 광폭하게 쇄도해드는 척사영의 일초에 비하면 초라해 보일 정도의 만우의 일초였다. 쑤욱. 하지만 그 단순한 찌르기가 만들어낸 여파는 결코 작지 않았다. 검풍과 도풍이 만우의 찌르기 한 번에 차례대로 앞부터 소멸되기 시작한 것이다. 척사영은 살기를 토해내는 와중에도 두 눈을 부릅떴다. 그녀가 검과 도로 만들어낸 폭풍은 대기를 할퀴어버릴 정도로 강대했다. 하지만 만우의 찌르기는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돛단배처럼 아슬아슬해보였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마치 폭풍을 거슬러오는 것처럼, 만우의 찌르기는 그녀가 일으킨 폭풍을 가르며 일직선으로 뻗어오고 있었다.
“네까짓 게 검과 도, 두 개를 신경 쓸 정도로 대단한 실력이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지.”
만우는 검풍과 도풍으로 만들어낸 폭풍을 꿰뚫고 들어갔다. 만우의 괘검의 찌르기에 도풍과 검풍이 뚫리면서 폭풍이 휘청거렸다. 그리고 그렇게 몰아치던 척사영의 검풍과 도풍의 한 축이 무너져 그녀의 모습이 드러났을 때, 만우는 이글거리는 척사영의 눈을 보면서 히죽 웃었다.
“겉멋만 들어가지고. 천재여서 두 가지를 썼다는 소리는 안 하겠지.”
“이런 개…….”
“졌으면 입은 다물고.”
퍼억! 척사영의 폭풍을 단순한 찌르기 하나로 와해시킨 만우의 발끝이 척사영의 복부에 틀어박혔다. 몸을 기역자로 꺾은 척사영의 입에 떡 벌어졌다.
“그리고 누가 그렇게 함부로 흥분하래?”
뻐억! 수그린 척사영의 눈에 불꽃이 번쩍하고 튀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녀는 자신의 정신이 가물거리는 것을 느끼고는 이를 악물었다.
‘졌어…… 내가.’
털썩. 사방의 초목을 사정없이 할퀴어 버린 거대한 폭풍의 눈에 서 있던 척사영이 실신하면서 앞으로 고꾸라졌다. 만우는 나풀거리며 후풍에 휘날리는 자신의 옷자락을 손으로 꾸욱 누르면서 입맛을 쩝하고 다셨다.
“아깝네.”
만우의 괘검 여기저기에 흉한 상흔이 새겨져 있었다.
*****
[넌 우리 척가의 미래가 될 것이다.]
척사영은 고작 다섯 살의 나이에 검을 쥐었다. 또래의 다른 여자아이들은 노리개나 인형을 쥐고 놀 시간에, 척사영은 검을 쥐었고 흙을 얼굴에 묻혀야만 했다. 하지만 척사영은 그게 좋았다. 척사영이 검을 쥐면, 그녀를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 봤으니까. 기대와 애정에 찬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봤으니까.
[사영아. 넌 패배해서는 안 된다. 곡산척가는 패배하지 않으니까. 넌 그런 우리의 미래니까.]
하지만 언제부턴가, 척사영은 자신의 어깨 위에 너무 많은 짐에 자신이 휘청거린다는 것을 느꼈다. 가문의 원로들은 척사영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녀에게 하나라도 더 알려주기 위해 늘 그녀를 자신들의 앞에 붙잡아 놓았다. 그런 원로들에게서 간신히 빠져나오면 실전과도 같은 대련을 해야만 했다. 다른 아이들과는 어울릴 시간조차 없었다. 아니, 아이들은 그녀를 어려워했다. 그들은 감히 말도 붙여보지 못할 가문의 대단한 어른들과 척사영은 매일같이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외로웠다. 그런 그녀에게 검과 도는 유일한 친구였다. 검을 휘두르고, 도를 휘두르는 그녀들에게는 찬사가 이어졌다. 척사영은 그럴 때마다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꼈다. 동시에 그녀는 다른 이들에게 뒤쳐지지 않기 위해, 지지 않기 위해 밤을 새면서 노력을 했다. 그런 부단한 노력으로 그녀는 화경이 되었다.
[이제 나가서 우리의 자랑이 될 수 있겠구나.]
곡산척가의 가주이자 가문의 큰 어른이 화경이 된 그녀를 보고 기뻐하며 말했을 때, 그녀는 세상을 다 가진 듯했다. 검과 도. 곡산척가에서 자랑하는 곡산검법과 곡산도법을 익혀 양손으로 그 두 가지의 무공을 전부 펼칠 수 있는 그녀가 곡산척가의 기둥이 될 것이라며 그녀에게 기대를 했다. 그리고 더 이상 그녀가 진심으로 대련을 임할 수 있는 사람이 더 이상 가문 내에 존재하지 않은 순간, 그녀는 가주에게 찾아가 요청했다.
“유람을 하고 싶습니다.”
가문의 어른들은 늘 곡산척가의 무공을 중원무림의 무공과 비교를 하곤 했다. 중원이란 거대한 세상이 있고, 그곳에는 곡산척가처럼 무공을 익히는 이들이 존재한다고. 하지만 대국이라고 하여 곡산척가의 무공보다 뛰어난 것을 익힌 이를 본 적이 없다고 말하곤 했던 것이다. 그들의 시조는 무려 고려무신인 척준경이기 때문이었다. 척준경이란 걸출한 장수는 그 강대한 무력으로 고려를 비롯하여 원과 여진에까지 널리 이름이 알려졌었고, 척준경의 칼 아래 고혼이 된 이들이 수백 명, 어쩌면 수천 명이 넘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우리가 더 강하다. 그러니 넌 갈 필요 없다.]
그래서 늘 중원에 출도를 하여 그들과 무공을 겨루어보고 싶었던 그녀였지만, 가주는 단호하게 그녀의 요청을 거절했다. 어차피 강하니 굳이 가서 확인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저는 늘 가문 내에 있어야만 하는 겁니까. 가주나 호법께서는 늘 출타하시지 않습니까.”
척사영은 가주에게 그렇게 따졌다. 하지만 가주는 척사영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넌 여자다. 다 큰 여자가 어딜 가문 밖을 돌아다니려 하는 것이냐. 너는 우리의 가문을 지키는 검이 되어야 한다.]
곡산척가의 수호검. 척사영에게 그 수호검 역할을 시키는 이유는 그녀가 여자이기 때문이다. 여자이니 가문 밖에 돌아다니지 말라는 것이다. 암탉이 울면 가문이 망한다면서 말이다. 검을 가르쳐놓고 작은 가문, 그리고 곡산에만 있게 할 것이라면 더 큰 세상이 있다는 것을 자신에게 왜 알려줬단 말인가. 그리고.
“저보다 뛰어나시지도 않으면서 왜 저는 안 된다는 겁니까.”
당장 10년이 지나면 그녀를 이길 이는 곡산척가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가주가 그녀보다 아직 강했지만, 그녀는 늘 갈증을 느꼈다. 가주는 바빴고, 향상심을 추구하는 척사영은 검을 맞댈 상대조차 없다는 것에 답답함을 느꼈다. 그런 그녀가 가문의 인원이 부족해 어쩔 수 없이 함주에 가게 되면서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세상. 그리고 강자. 가문 내에서만이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강한지를 세상의 기준이 맞춰보고 싶은 것은 척사영의 당연한 욕망이었다.
[네 까짓 게 검과 도, 두 개를 신경 쓸 정도로 대단한 실력이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지.]
그런데 그 순간 척사영의 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낯선 목소리였다. 척사영은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 순간 척사영은 자신이 보고 있던 세상이 무너지는 것이 느껴졌다. 잔잔한 수면 위에 돌멩이를 던져 파문이 일어나듯, 그녀가 보고 있던 세상 전체가 물결치기 시작했다. 저기 동쪽이나 서쪽으로 가면 나온다는 바다에 일어나는 하얀 포말처럼 세상이 일그러졌다. 화악! 동시에 척사영은 자신의 몸속에 불길이 이는 듯한 뜨거움을 느꼈다. 그것이 너무 뜨거웠기 때문에 척사영은 화들짝 놀랐다. 손이나 발이 불에 덴 적은 있어도 몸속이 뜨거운 적은 없었다. 척사영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하…… 하앙.”
번쩍! 척사영이 눈을 번쩍 떴다. 눈을 뜬 그녀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지금 자신이 속곳만 간신히 걸친 채 거의 전라의 상태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자신이 전라란 것을 깨달은 척사영은 자신의 등판에 손바닥을 누군가 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척사영은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순간, 그녀의 뱃속에서 꿈틀거리던 뜨거운 것이 쑤욱하고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뱃속에서 뜨겁게 달구던 무언가가 등판에 댄 손바닥으로 몰려가면서 강렬한 쾌감이 그녀의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었다. 그런 척사영이 자신도 모르게 입을 살짝 벌렸다.
“하……!!”
그녀의 입에서 나온 신음소리가 한층 더 커졌다. *****
[하…… 하앙.]
“이, 이 변태 자식이!!!”
밖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방매가 안에서 흘러나온 야리꾸리한 소리에 얼굴을 확하고 붉혔다. 그리고는 뛰어 들어가려는 그녀를 동군영이 덥썩 붙잡았다.
“이거 놔요 나리!”
“방…… 아니 옹주! 흥분하시지 마시고 진정을.”
“아니 다 큰 남녀를 저 작은 방 안에 두는 법이 어디 있어요! 만우 그 변태 자식이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아저씨! 아저씨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아저씨라 불린 척준영이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방매를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방매와 비교하면 아저씨라 불리는 것이 맞았다.
“전 검주…… 그분을 믿습니다.”
“믿는다고요? 아저씨! 저기 안에 있는 싸가지 없는…… 아니 여자가 아저씨네 가문의 기재라면서요! 저기 만우 저 변태놈과 붙여놨다가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르는…….”
[하…… 하앙!!!!]
“주화입마로 사영이가 폐인이 되느니 차라리…….”
척준영은 굳건히 닫힌 방문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물론 여자에게 청백지신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지면 목숨이 위험하다. 청백지신보다 중요한 것이 목숨이다. 척준영은 무인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검주 대협 정도면 척가의 사위로…….’
척준영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안에서 거사가 치러지기를 바라는 부분도 없지 않아 있었다. 소사각주인 그는 검주 만우가 얼마나 대단한 이인지를 직접 두 눈으로 목도했다. 그런 그가 강호무림에서 온 무림인이라고 하나, 명나라 사람도 아니고 조선인이니 흠이 잡힐 것도 없었다. 사실 곡산척가에 만우만큼 완벽한 신랑감은 없다. 강하기 때문이다. 만우와 척사영이 거사를 치러서 혼인으로 이어진다면 만우의 가르침이 척가에 이어질 수도.
“미쳤어! 저걸 말려…….”
“옹주마마! 옹주마마가 왜 그렇게 난리를 치는 겁니까? 만우가 뭘 하건 말건 말입니다!”
동군영은 방매를 옹주라 부르고 있었다. 그 이유? 간단했다. 이곳은 함주본궁이었기 때문이다. 만우 일행은 정신을 잃은 척사영을 데리고 함주본궁에 들어왔다. 그 사흘 동안 척사영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척사영이 갑자기 주화입마 증상을 보이자 만우가 그녀를 데리고 방문을 닫아버린 것이다.
“나, 난리가 아니라!!”
동군영의 말에 방매는 말을 더듬었다. 그녀도 알 수 없었다. 만우의 일에 왜 자신이 성이 난 것인지, 그냥 저 안에 만우와 척사영이 있는 것이 싫었다.
“호선! 호선을 시키면 되잖아요! 나리도 아시면서. 호선이 얼마나 도술에 능한데요!”
방매가 호선을 퍼뜩 기억해내고는 호선을 찾아오겠다는 것처럼 몸을 돌렸다. 동군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니. 사람 치료하겠다는 걸 보고 변태 행위를 생각하는 걸 보면…… 일상생활 가능하십니까, 옹주마마?”
“나리!!!!”
“제게는 나리가 아니라 말씀을 편하게 하셔야 합니다. 기사관이라 불러주십시오 옹주마마.”
동군영이 느물거리며 방매에게 말했다. 방매는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어차피 호선은 바쁩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함주본궁에 도착해 할바마마를 뵙겠다고 간 양녕이 호선을 보고는 홀딱 빠져버린 것이다. 그 때문에 호선은 팔자에도 없는 보모 노릇까지 하고 있었다.
“……고모가 필요하다는데.”
“옹주 안 하시겠다고 하셨으면서.”
“나리이이이!!”
“나리 아니라니까요?”
동군영이 발끈한 방매를 보면서 웃었다. 방매가 왜 저렇게 예민하게 구는지 눈에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척준영도 비슷한 눈으로 방매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척준영과 동군영의 눈이 마주쳤다.
“송구합니다. 그런 일이 벌어졌을 줄은…….”
“괜찮습니다. 아무도 다치지 않았으니까요. 하핫.”
척준영은 척사영이 정신을 잃고 실려 왔다는 것에 한 걸음에 달려왔다. 하지만 전후사정을 듣고서는 동군영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먼저 실수를 저지른 것은 척사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력이 정말 대단하더군요.”
“글쎄요. 전 저런 사영이를 제압하신 검주 대협이 더…….”
척준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검주란 것이 어떤 이들에게만 붙는 호칭인지 척준영은 알고 있었다. 곡산척가가 무가이기 때문에 중원의 정보에 늘 귀를 어느 정도는 열어두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중원무림에 무림십좌라 불리는 절대고수들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검주라는 것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사영이 정도면 충분히 먹힐 것이라 생각했는데.’
하지만 척사영은 졌고, 만우는 이겼다. 만우와 척사영이 동갑이란 것을 봤을 때 대단한 일이었다. 역시 세상은 넓고 고수는 많았다.
‘우리 척가가 세상 돌아가는 것에 너무 눈과 귀를 닫고 살았구나.’
척준영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문제는 가주와 호법, 그리고 원로들이 이 사실을 인정할 것인가였다.
‘저분을 모셔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게 아니라면 소문이라도 내서 가주와 호법의 귀에 들어가게 만들어야 했다. 그렇지 않고 척준영이 가서 보고를 한다면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다. 중원의 웬만한 한 성(省)보다도 작은 조선에서 뱀의 머리로 산 세월이 너무 오래 됐다.
[아…… 아하악!!]
그 때 다시 한 번 방안에서 야릇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뒤가 딱하고 끊기는 것이 절정에 달한 듯했다. 방매가 참지 못하고 달려가 문을 벌컥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