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하룻강아지 검주 무서운 줄 모르고(2)2020.02.29.
“한양으로 갈 필요 없다. 내가 아까 어디로 가고 있다고 했지?”
만우는 정말 아이를 교육하는 것처럼 양녕에게 말했다. 양녕은 만우가 말한 바에 느낀 것이 큰 것인지 고분고분하게 대답했다.
“함주.”
“그곳에는?”
“함주…… 아! 설마. 할바마마?”
양녕의 눈이 반짝였다. 이성계가 아무리 아들을 싫어한다고 해도 손자는 늘 아꼈다. 아들이 미워도 손자는 장차 조선을 이끌어나갈 동량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양녕이 이성계를 반가워하지 않을 리 없다.
“그래. 그곳에 가서…….”
만우는 헝클어진 양녕의 머리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는 허리를 쭉 폈다.
“할아버지한테 맡겨 버리면 끝이니까. 그렇지?”
이찬이 움찔했지만 이내 그도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의 상황이 급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그러니 동행하는 수밖에 없다. 이찬은 자신의 힘으로도 세자 하나 지킬 수 없다며 자책했다.
“가자고. 다음이 어디라고 했지?”
“운림?”
방매가 대답했다. 방매는 일행의 길잡이였다. 운림이라는 소리에 간장이 반색을 했다. 만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슌스케에게 말했다.
“우마! 오늘 밤을 지새고 내일 일찍 출발할 예정이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예, 주인님.”
내일 해가 밝으면 또다시 개처럼 산을 내달려야한다는 것에 슌스케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 파악! 후두둑. 주창의 다리를 조각난 나무뿌리가 섞인 흙더미가 두드렸다. 하지만 주창은 아랑곳하지 않고 마련검으로 땅을 파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으…… 으으…….”
그 모습을 걱정스런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던 마일이 고개를 휙하고 돌렸다.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던 웅풍이 신음소리를 내면서 눈을 떴기 때문이다.
“내, 내가 살아 있는 건가?”
“일산!”
마일의 목소리에 웅풍이 고개를 돌려 마일을 쳐다봤다.
“으음…… 저승에 와서 파천서생이라니. 눈을 떠서 보는 것 치고는…….”
“안 죽었소. 걱정 마시오!”
웅풍이 눈을 크게 떴다. 웅풍은 자신이 죽었다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테무르를 죽인 이성계는 그가 타고 있는 호선 때문에 백영과 웅풍과는 극악의 상성이었기 때문이다. 테무르에, 혈성을 깨운 옥령까지 있음에도 이성계를 잡을 수 없었다. 웅풍은 ‘기동성’의 어마무시한 위력을 처음 경험했다. 전장을 달렸던 이성계는 잘 알고 있었지만 무림인으로 자란 마교 교수 넷은 모르는 것, 그 점이 정확하게 그들의 빈틈을 파고 든 것이다.
“화살이 꽂혔…… 크윽.”
웅풍은 상체를 일으키다가 붉게 물든 붕대를 보고서는 인상을 찡그렸다. 웅풍은 마지막 순간이 어슴푸레하게 떠올랐다. 사방에서 날아드는 화살은 웅풍과 백영의 접근을 철저하게 차단했다. 그러다 백영의 언월도가 경력이 담긴 이성계의 화살을 견뎌내지 못하고 깨져나가고, 그다음으로 날아든 이성계의 화살이 웅풍의 대부 또한 꿰뚫었다.
‘허공에서 움직이는 화살이라니. 이기어시라고 해야 하는 건가?’
웅풍은 고개를 저었다. 이성계는 높이 쳐줘야 화경 초입이었다. 그의 육체가 절정에 달해 있을 때는 모르지만, 순수한 내공 수치로만 따지면 화경 초입이거나 초절정의 극의에 도달해 있었다. 하지만 이기어시(以氣馭矢), 혹은 검(劍)은 화경의 극에 도달해야 겨우 흉내를 낼 수 있는 정도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움직이긴 움직였으니까.’
이성계의 화살은 자유자재로 움직이지는 않았다. 마지막 순간 아주 살짝 궤적을 틀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변주가 되어 웅풍을 나무에 꽂아버렸다. 웅풍은 쓰게 웃었다.
‘완패다.’
마교의 후기지수라 불리는 투귀대의 일원이 되어 이토록 압도적으로 패배한 것이 대체 언제였단 말인가. 대주인 주창과 주기적으로 비무를 했다고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비무였다. 목숨을 걸 정도로 각자 살수를 쓰지는 않았다. 그 외에는 전부 자신보다 약한 이들과만 싸워왔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다른 누군가와 싸워본 것이 언제적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퍽, 퍽, 퍽! 웅풍이 통증을 참고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주창이 마련검으로 땅을 파고 있었다.
“대, 대주! 크으....”
“일산. 정신을 차렸구나!”
땅을 파내려가던 주창이 웅풍의 목소리에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웅풍은 자신의 옆에 누워있는 백영과 옥령을 차례대로 눈으로 훑고서는 주창을 쳐다봤다.
“마련검으로 무슨 짓을 하시는 겁니까.”
“마련검?”
주창은 쓰게 웃었다. 마련검은 마교의 신물이다. 그런 마련검이 고작 땅을 파는 삽 대용으로 쓰고 있다는 것이 교에 알려진다면 교에서 한바탕 난리가 날 것이다.
“마련검이 무슨 소용이더냐. 지금은 삽만큼 내게 필요한 것이 없으니, 그러면 된 것이다.”
주창은 테무르를 쳐다봤다. 머리에 꽂혔던 화살은 제거했지만 피가 빠져나가 푸르스름하게 변한 테무르다. 그런 테무르의 곁에는 적설청이 고개를 떨군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악궁…….”
마교의 고수들에게는 전우애란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강자존의 법칙이 제1 법칙으로 존재하는 곳이기 때문에 동료라고 해도 언젠가는 넘어서야 할 적이거나, 자신에게 도전을 해올 도전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투귀대는 달랐다. 투귀대는 대주이자 다음 대 천마가 될 주창에게 충성을 바치는 이들만 모인 곳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테무르가 죽었다는 것은 웅풍에게는 입맛이 쓸 수밖에 없었다. 주창은 가장 유력한 다음 대 천마이긴 하지만, 마교에는 여전히 재능이 넘치고 야심이 넘치는 인재들이 많았다. 그들과 경쟁을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테무르 정도의 인재가 죽었다는 것은 주창에게 있어 큰 손해다. 테무르가 죽었다면, 그와 함께 마교에 귀의한 살풍대도 부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죽은 것은 테무르 한 명이라고 할지라도, 주창이 입은 손해는 한둘이 아니다.
“이성계.”
웅풍의 두 눈에서 살기가 폭사했다. 그와 함께 그의 전신에서 마기가 뭉클거리며 뿜어져 나왔다. 주창은 고개를 돌려 마련검으로 다시 땅을 파기 시작했다.
“그렇게 화낼 시간에 와서 네 대부로 땅이나 파는 것을 도와다오. 그 커다란 대부면 금방 땅을 팔 수 있을 테니까. 테무르는 묻어줘야지.”
몰락한 원은 그 기원이 너른 북쪽의 초원이다. 북쪽의 초원에서는 사람을 묻지 않는다. 하지만 조선에 테무르를 그냥 두고 가기는 싫었다.
“알았소.”
웅풍은 이성계의 활에 맞은 부위가 지끈거렸지만 대부를 주워 들었다. 주창이 나서는데 수하가 되어, 그리고 테무르의 동료가 되어 그냥 가만히 있을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한 시진 뒤. 테무르를 위해 거대한 묘를 세운 주창은 마련검을 늘어뜨리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거대한 바위를 갈라 묘비로 다듬어 묘 앞에 박아 넣었다.
“대주.”
그때, 위문이 약재를 한아름 진 채 돌아왔다. 주창과 웅풍이 세운 거대한 묘를 보고서 잠시 말을 잃은 위문이 마일에게 약재를 내밀었다.
“근처의 의원에서 쓸어온 약재요. 뭐가 상처에 좋은지는 알 수 없지만…….”
투귀대도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금창약과 내상약을 항상 휴대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부족할 정도로 간신히 살아남은 이들의 상태는 위중했다. 이렇게 금방 일어난 웅풍이 괴물 같은 회복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퍼덕! 적설청이 묘가 다 만들어지자 묘 꼭대기에 올라가 알을 품듯 묘를 품은 채 주저앉았다. 해동청과 맞먹는다는 적설청의 충성심은 유명했다. 주창은 그런 적설청을 보면서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 너라도 테무르를 지켜주려무나.”
주창은 그렇게 적설청을 본 뒤 웅풍을 쳐다봤다. 그리고는 아직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백영과 옥령을 차례대로 쳐다본 뒤 웅풍에게 말했다.
“이성계. 너희 넷이 당할 정도로 강했나?”
“…….”
웅풍은 턱 근육이 불룩 튀어나올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고수가 되어서 자신이 다른 이보다 약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생각보다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이미 눈에 보이는 결과가 있었다. 그러니 아니라고 우길 수는 없었다.
“예. 강했습니다. 진저리가 쳐질 정도로.”
“그렇다고 해도 너희 넷이라면 나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헌데…….”
앞에서 적의 공격을 받아낼 수 있는 체력과 실력을 가진 웅풍. 큰 한 방을 먹일 수 있는 백영과 원거리의 테무르. 거기에 혈성을 깨운 옥령은 짧은 시간 동안 벽을 뛰어넘는 위력을 발휘한다. 이 넷이 공격한다면, 솔직히 말해 주창도 쉽사리 승기를 잡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한 명이 아니라 네 명의 초절정 고수가 해오는 공격은 화경 고수로도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그 괴물이라면 모를까.’
순간적으로 검주가 머릿속에 스쳐지나갔지만 노구인 이성계가 그런 실력을 보유하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웅풍은 이를 뿌득 깨물었다.
“백호. 기억하십니까?”
“백호…… 검주의 백호 말인가?”
주창의 눈이 커졌다. 이미 호선을 한 번 만나본 투귀대였다. 만우가 투귀대와 조사의의 반군을 격돌시키기 위해 나섰을 때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예. 그 백호를…… 이성계가 타고 있었습니다.”
“그렇군.”
주창은 깔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다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가 없었다. 호선과 이성계를 떠올린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이해를 한 것이다.
“이성계의 궁을 다루는 기예와 그 기이할 정도로 커다란 백호를 떠올린다면…….”
“그 백호. 제 수준 정도는 되어보였습니다. 영물입니다. 단순한 미물이 아니라.”
웅풍은 이를 꽉 깨물었다. 힘이라면 누구에게도 진 적이 없었지만 호선에게는 아니었다. 웅풍이 져 본적이 없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에 한해서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힘이 세다고 해도, 500년을 묵은 호선에 비교하면 손색이 있었다. 거기에 호선의 앞발과 발톱은 따로 무기를 두르지 않아도 그 자체가 충분히 강력한 무기였다.
‘손이 떨린 건 처음이었으니까.’
이성계의 활도 무서웠지만, 가장 골치 아픈 것은 바로 호선이었다. 호선은 영악하게도 자신의 속도를 제대로 활용할 줄 알았다.
“마치 고수와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잘 아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 모든 것이 만우와 지속적으로 대련을 했기 때문에 벌어진 결과였다. 호선이 악선(惡仙)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벌인 만우와의 대련이 그녀에게 차고 넘치는 경험을 안겨준 것이다.
“영물 백호. 그리고 이성계…….”
주창은 머릿속으로 이성계와 호선을 상대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그러자 쉽사리 승부가 점쳐지지 않았다. 주창은 낮게 신음을 흘렸다.
“오면서 본 범상치 않은 여자도 그렇고, 이 작은 땅에 무슨 고수가 이리도 많단 말이냐.”
조선은 명의 한 주(州)보다도 작았다. 그런데 중원에서도 제일을 논할 수 있는 고수들이 벌써 셋이나 있었다. 이성계, 척사영. 그리고 검주. 한 주(州)를 주름잡는 고수라고 해봤자 구파일방 정도의 거대한 문파가 없다면 절정이 고작인 것이 바로 중원이다.
‘조선제일검이란 놈도 있고.’
조선에 오기 전에 조선에 대한 조사를 하면서 암기했던 것과는 딴판이었다. 그때는 조선에서 가장 주의해야 할 대상이 조선제일검밖에 없었다.
“대주. 마일 군사의 지혜를 빌려주십시오. 이번에는 반드시 이성계를 잡겠습니다.”
“…….”
주창도 당장 이성계를 잡으러 가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이 미묘해졌다. 이성계를 잡기 위해 조사의를 겁박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는데, 이성계를 잡으러 간 이들이 패배했다.
“아마 지금쯤이면 군사를 일으켰을 겁니다.”
그때 마일이 주창에게 말했다. 그 말인즉슨 이성계를 굳이 잡으러 갈 필요가 없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주창은 아직까진 조사의가 필요했다.
“조선의 왕도 멍청하지 않다면 조사의가 노리는 것이 상왕 이성계란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굳이 저희가 조선의 권력 다툼이 휘말려 의미 없는 피를 흘릴 필요는 없습니다.”
테무르가 죽은 것은 안타깝지만, 마일은 군사로써 반드시 해야 하는 말이었다. 마일의 말에 웅풍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군사! 악궁의 죽음을 헛된 것으로 만드시려는 생각이시오?”
웅풍이 이렇게 화를 내거나 표정을 굳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는 커다란 덩치만큼 곰 같은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번 분노하면 숲 속에서 가장 무서운 짐승은 호랑이가 아니라 곰이다. 마일은 웅풍의 살기를 느끼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