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세자의 고모(1)2020.02.11.
두두둑, 두둑. 흙먼지를 일으키면서 도착한 기마대는 50명 남짓의 소규모 부대였다. 하지만 복장이 조선군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비켜라! 끼럇!!!”
그 흔한 투구나 갑옷은 보이지도 않았고, 기다란 마상도를 허리춤에 찬 이 일련의 무리들은 성내에서도 속도를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어, 어어엇!”
“우억!”
안 그래도 좁은 성내를 기마대가 질주하니 난리가 나는 것은 당연했다. 품이 넓은 옷에 펄럭거리는 치마 같은 바지를 입은 기마대의 복장을 본 만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놈?”
“왜놈? 왜라면…… 동쪽 섬나라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감령은 왜인을 처음 보는 눈치였다. 만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함주에서 만났던 슌스케의 일월조와 같은 복장을 한 왜인들이 말을 몰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사의가 보낸 놈들인 것 같군. 왜와 마교와 손을 잡았다고 하더니.”
“왜인이라. 쫓으시겠습니까?”
상대는 말을 탄 기마대였지만 경공으로 따지자면 만우와 감령도 말보다 더 빠르게 달릴 수도 있었다. 단지 오래 달리기를 한다면 체력이 못 따라줄 따름이다.
“그래야겠지. 저놈들이 이 군성을 그냥 통과하는 것을 보면 이 지역의 부사놈도 조사의 편에 붙은 게 확실한 것 같고.”
하지만 그전에 저 기마대가 왜 저리도 급하게 어디론가 달려가는 것인지 그 이유를 알아야 했다.
“세자가 발견된 게 아닐까요?”
“이 성에 들리지 않고 지나쳤다?”
“예. 흔적이 이곳으로 이어져 있기는 하나, 오래 체류하지 않고 떠났을 가능성도 높습니다.”
“쳇. 일단 탐문부터 해볼 걸 그랬나.”
만우는 혀를 쯧하고 찼다. 그럴 가능성은 아예 제쳐놓았던 것이 화근이다. 어린 세자가 있기 때문에 작은 성이라고는 하나 이곳에서 휴식을 취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감령. 넌 가서 애들 데리고 이동해. 산등성이 타고 이동하고. 괜히 관도나 사람 눈에 띌 곳으로 내려오지 마.”
“대협께서는…….”
만우와 떨어질 수 있다는 것 때문인지 감령의 표정에 화색이 돌았다. 만우는 그런 감령의 얼굴을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난 저놈들 뒤쫓아야지. 뒤쫓아 가서 정말 세자가 나온다면 구하는 거고. 저쪽 방향으로 가면 어디가…… 네놈이 알 리가 없지.”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도 없었지만 감령은 일단 사과부터 하고 봤다. 그러다 혹시 만우가 괘씸하다며 변심해 자신을 데리고 갈까봐 무서웠기 때문이다.
“됐다. 쉬지도 못하고 움직이게 생겼네. 그 어린놈의 쉐키 때문에.”
만우가 투덜거리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사라지는 만우의 모습이 점점 멀어지더니 순식간에 한 줄기 점이 되어 사라졌다. 감령은 입을 헤하고 벌렸다.
“더 강해진 것 같기도 하고.”
감령은 어깨를 으쓱했다. 솔직히 만우의 실력이 대체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그러니 더 강해진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들 앞에서 단 한 번도 제대로 진력을 내본 적이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불쌍하네. 그 왜놈들. 슌스케 꼴이 나는 거 아닌지 몰라.”
만우의 손에 걸렸다가 한쪽 팔과 함께 인생이 아작이 난 슌스케를 떠올리며 감령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런데 그때 감령의 주변으로 병졸들이 우르르 달려오더니 감령을 향해 창을 들어 올리고 포위했다. 감령의 눈썹이 꿈틀했다.
“저놈을 포박하여라! 부사 어르신의 명이시다!”
*****
“세자에 국왕견에. 끌끌끌.”
문주부사 박양이 끌끌거리며 웃었다. 그는 만족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그의 앞에는 서신이 한 장 놓여있었다. 그리고 그 서신을 가져다 준 이를 쳐다본 박양이 기꺼운 표정을 지었다.
“세자를 붙잡으면 상왕, 그 늙은이를 생포하는 것보다 더 큰 공을 세우는 것일 터. 박만 그 욕심만 많은 돼지가 모든 것을 차지하게 놔둘 수는 없지.”
박양은 야심이 원대한 남자였다. 문제는 그의 야심을 능력이 받쳐줄 수 없다는 것이지만, 항상 이런 경우에는 일이 실패해도 그것을 자신의 능력부족으로 돌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거기에 국왕이 보낸 견공들까지 잡아들인다면 당장에 내 공이 가장 커지는 법이지. 그렇지 않은가? 내 이럴 줄 알고 군사들을 미리 조련하고 있었지. 내 선견지명이야. 선견지명.”
박양은 만족스럽다는 듯 껄껄거리며 웃었다. 이 모든 일들이 자신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한적하고 작은 문주의 부사라는 것에 중앙으로 진출하고 싶은 야심만 컸던 박양이 조사의의 손을 잡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대업이 성공하면 모두 내 공이지. 내가 이곳을 맡지 않았으면 어떻게 할 뻔했는가. 안 그래?”
성공하면 내 탓, 실패하면 남 탓. 전형적인 소인배의 모든 것을 갖춘 박양은 서신을 전달해 준 남자에게 넌지시 말했다.
“가서 지부장에게 고맙다고 전해주게. 잘 쓰겠노라고.”
서신을 전달해준 남자, 광문자가 복면 사이로 눈을 빛내면서 씨익 웃었다. 그리고는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광문자는 소리를 내지 않고 문을 열고 나와 문주 관아의 지붕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한 줄기 검은 연기로 화해 사라졌다가 문주 관아로부터 수십 장이 떨어진 곳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가히 한 줄기 바람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표홀한 경신법이었다. 광문자는 문주 외곽에 허름하게 지어진 초가집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자 그 안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던 이들이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호법.‘
광문자의 정식 직함은 호법이었다. 은월루주 어리를 호위하는 최측근이자 은월루 모든 살수의 스승이기도 했다.
“그래. 서신은?”
“전서구를 통해 한양으로 보냈습니다. 헌데…… 정말 괜찮겠습니까?”
부하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광문자는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다. 무엇이 문제냐는 표정이었다.
“검주…… 그자는 너무 위험합니다. 그자를 이용했다는 것을 그자가 알게 된다면…….”
광문자는 히죽 웃으면서 소맷자락에 수를 놓았던 낫과 은병이 교차하고 있는 문양을 뜯어냈다. 그 문양은 하오문의 표식이었다.
“검주만 위험하더냐? 이 일을 주상전하께서 아시면 역모죄로 몰려 목이 잘려도 이상하지 않을 판인데.”
세자의 위치를 조사의에게 알려주고, 검주 일행의 위치를 박양에게 알려준 것이 모두 은월루의 작품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모두 어리의 계획이었다.
“허나 다르게 생각하면 간단한 일이 아니더냐?”
어리는 정보를 조작했다. 광문자를 하오문도인 것처럼 속여 조사의와 박양에게 정보를 넘겼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검주의 무력 하나만을 믿고 진행한 일이다. 어리는 본인이 직접 겪어봤기 때문에 그 전율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검주의 무력이라면,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것이 가능했다.
“이천우 장군이 안주에서 출전했으나 그 세력이 미미하다. 당장에 대군을 동원하는 것도 무리가 있고, 안변을 비롯하여 문주, 영흥부는 천혜의 자연을 가지고 있지. 헌데.”
광문자가 씨익 웃어보였다. 어리의 계략은 과연 절묘했다. 밖에서 들이쳐 조사의의 반군을 진압하려면 막대한 시간과 희생이 필요했다. 안변을 비롯하며 문주와 영흥부는 방어에 적합한 지형을 끼고 있기 때문이다.
“검주가 안에서 날뛰면 어찌 되겠느냐?”
“그러면…….”
“세자저하를 미끼로 쓰긴 하였으나 익위사 이찬이 동행하고 있고 검주도 있다. 그러니 세자저하가 위험에 처하실 확률은 지극히 미비하지.”
익위사 이찬은 뛰어난 무인이다. 권희달에 못 미친다고 하지만 궁에서 한 손 안에 드는 무인이기 때문이다.
“왜놈들이나 마교 놈들이 움직인다 하여도, 검주가 있다.”
왕은 검주에게 세자를 부탁했다. 그리고 검주는 내키지는 않지만 눈에 띄면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일부러 눈에 띄게 만들어 주었다. 세자가 이곳을 지나갔음을 조사의와 박양에게 알려줌으로 인해 그들이 움직이게 만든 것이다.
“조사의는 세자저하를 잡기 위해 안간힘을 쓸 것이다. 상왕전하와 함께 세자저하까지 손에 쥐게 되면 명분은 자신의 손에 떨어지니까.”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검주를 뚫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검주는 움직이겠지. 검주가 공세로 나서지 않고, 조사의가 보내는 이들의 발만 묶는다 해도 선봉군이 국지전으로 저들의 진격을 막아내는 데는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
국왕은 안변과 문주, 영흥부에서 가까운 안주의 도절제사 이천우를 움직였고 그의 부장에 설운을 임명했다. 하지만 안주 자체에 병력이 많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국왕은 이천우에게 이길 생각을 하지 말고 철저히 국지전으로 시간을 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과정에서 조사의가 마교 고수들을 검주에게 보내주면 우리에겐 나쁠 것이 없지.”
은월루에게도, 국왕에게도 나쁠 것이 없는 일석이조의 방법이다. 검주가 약간 피곤하긴 하겠지만, 어리는 김향을 믿었다.
“김향. 그 복덩이가 있는 한 검주는 우리를 건드리지 않을 것이다. 그게 약조였으니까.”
광문자가 어둠 속에서 하얀 이를 드러내면서 씨익하고 웃었다. *****
“대주. 그렇게 조사의에게 겁박을 하셔서는…….”
“마일.”
“예, 대주.”
“먼저 가 있겠다. 예감이 좋지 않아.”
주창은 마일의 조언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렇게 말한 주창이 점이 되어 사라지자 마일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마일에게 옆에서 나란히 달리고 있던 위문이 말했다.
“소군사. 소군사의 천기를 읽는 것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주군께서도 걱정하시는 것이지요.”
“허나…… 하아. 이렇게 가볍게 말씀 드릴 일이 아니었거늘.”
투귀대 8인 중 네 명에게 이성계를 생포해 오란 명령을 내렸던 주창이었다. 하지만 바로 어젯밤 마일은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
‘흉(凶).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네 개.’
그 말인즉 투귀대 8인 중 네 명에게 흉이 깃들었다는 소리였다. 그것이 대흉인지, 소흉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마일은 그것을 곧바로 주창에게 알렸다. 주창은 투귀대를 자신의 수족만큼이나 가깝게 여겼기 때문에 곧바로 함주에게로 향하겠다고 결정을 내렸고, 이를 조사의에게 통보했다.
“조사의. 그자와는 아직 대립각을 세울 때가 아닌데…….”
마일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사의란 자가 속이 좁고 어리석은 자라는 것을 마일은 알고 있었다. 그는 질투심이 많고 우월주의가 있어 마교의 고수들을 낭인 정도로밖에 대우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주창이 참은 이유는, 그가 이 조선에 오게 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이었다. 황금 팔십만 냥을 은월루로부터 받아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조사의는, 투귀대의 흉조를 보고 가겠다고 하는 주창을 면전에서 모욕했다. 칼이나 쓰면서 살아가는 칼잡이 나부랭이들이 자신의 명령을 감히 거부하냐면서 언성을 높인 것이다. 중원에서는 그 어떤 귀족이나 고위 관료도 마교 교수에게 그렇게 언성을 높이지 않는다. 뼛속 깊은 사대부 우월주의와 자신이 이제 곧 조선의 왕이 될 것이라는 장밋빛 환상에 젖은 조사의의 눈에는 주창과 투귀대가 딱 그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주창은 조사의를 향해 마련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그 마련검 아래 조사의의 호위대 전원이 몰살당했다. 그래도 마지막 한 줄기 인내심으로 주창은 조사의만은 죽이지 않았고, 그대로 광호검 기무만을 남겨둔 채 함주로 향한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보복을 하려고 할 터.’
마일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처럼 옹졸하고 속 좁은 이가 조사의이니, 그는 이 일을 절대로 잊지 않을 것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놈을 죽이고 다른 놈을 세우면 된다. 야망을 가진 놈은 많으니까.]
주창은 그 말로 마일의 걱정을 막았다. 조사의가 걸리적거린다면 그를 죽여 없애고 다른 놈을 올리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잠시 뒤, 주창이 먼저 가겠다고 달려간 방향에서 거대한 폭음이 울려 퍼지자 위문의 표정이 변했다. 그 폭음 안에 담긴 거대한 공력을 느낀 것이다.
“소군사. 몸조심하시오!”
휘익!! 위문이 이를 악물고 앞으로 튀어나갔다. 마일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폭음이 터져 나왔다는 것은 주창과 손속을 나눌 만한 강자가 이 조선 땅에 존재한다는 소리다.
“말도 안 되는…….”
그리고 그것은 마일의 예상을 크게 벗어나는 것이다. 땅을 박차는 마일의 발걸음이 무거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