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이성계 대(對) 투귀대(1)2020.01.28.
“이찬.”
“예, 저하.”
이찬은 궐 밖으로 나오자 아홉 살 또래 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며 모든 것을 신기해하는 양녕을 보면서 흐뭇하게 웃다가 그의 부름에 대답했다.
“운림이란 곳을 가 보았어?”
“가 보지 않았습니다.”
“그 렇지? 이찬도 가보지 않았지?”
양녕은 목검을 허리에 찬 채 이찬의 앞에 앉아 두 다리를 들썩였다. 양녕과 이찬은 말 한 필을 함께 타고 이동했다. 혹여나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정도로 양녕이 이찬을 총애하고, 신뢰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공부를 좋아하지 않는다고는 하나 양녕의 행동 하나 하나에는 나름의 수가 녹아들어 있었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이찬도 기꺼이 양녕을 모시는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참. 저하라고 부르지 말라니까?”
“아, 예. 도련님.”
이찬은 양녕을 도련님이라 불렀다. 저하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세자가 이곳에 있음을 광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헌데 도련님. 왜 운림에 가보고 싶어 하시는 겁니까?”
이찬은 양녕이 운림에 가보고 싶다고 하기 전까지 운림이란 곳이 있다는 것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함주로 가는 길목에서 약간 돌아가야 하긴 하지만 못 갈 곳도 아니었다. 하지만 만약, 이찬이 호군 김옥겸이 한 말을 들었더라면 기를 쓰고 양녕을 데리고 그곳을 가지 않았을 것이다. 문주부사인 박양이 안변부사 조사의와 손을 잡았다는 것이 김옥겸에 의해 고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운림은 문주에 속한 곳이고, 안변과도 가까운 곳이다.
“그곳에 이무기가 살고 있대.”
“……예?”
“충녕이 그랬어. 책에서 읽었대. 문주에 운림이란 곳이 있는데, 그곳에 이무기가 살고 있다고.”
이찬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 상왕인 이성계의 활이 용의 뼈로 만들어졌다 하여 대룡궁이라 불린다는 것은 들어봤지만 소문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 세상에 용이나 이무기 따위는 없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걸 진짜로 믿고 있는 듯한 양녕의 얼굴을 보니, 왜인지 동심을 지켜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이찬이었다.
‘어리긴 어리시구나.’
또래의 아이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교육을 받은 양녕은 확실히 또래보다 조숙했다. 적자로서, 세자로서 받아온 교육과 주변의 기대가 그를 조숙하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이무기를 말하면서 눈을 반짝이는 양녕은 딱 그 또래의 아이처럼 보였다.
‘이미 전하께서는 알고 계실 테니, 뒤에 남기고 온 흔적을 보고 알아서 따라와 준다면 좋겠는데.’
이 일이 임금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면 이찬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계방의 책임자이자 양녕의 근접호위로, 세자인 양녕을 말려야 한다. 그런데 함께 동조해서 궐을 나갔다는 것은 치명적인 직무태만이다. 하지만 권희달보다 강해질 수 있다는 것, 양녕의 달콤한 그 한마디가 이찬을 세자를 보필한 채 길을 나서게 만들었다. 어린 세자에게 휘둘렸다는 것에 자신도 어이가 없었지만, 세자는 이찬이 원해 바라마지 않는 그 부분을 정확하게 찌르고 들어왔다. 이찬 스스로가 이런 과감한 일탈에 놀랄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이 조선땅에서 나를 상대할 자가 몇이나 있다고.’
권희달에게는 손색이 있었지만 이찬은 자신의 실력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실제로도 조선에서 이찬을 꺾을 수 있는 실력자는 조선제일검인 권희달이나 곡산척가의 무인들을 제외하고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세자를 보필하는 이상, 세자의 신변에 문제가 생길 일은 없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설령 문제가 생긴다 하더라도, 내가 남긴 흔적이 있으니 시간만 벌면 되고.’
이찬은 이곳으로 오면서 꾸준히 이곳저곳에 흔적을 남겨놓고 왔다. 추적술의 기본만 알고 있다면 따라올 수 있을 정도로 노골적인 흔적들이었다.
“이찬, 어서 가자! 속도를 높여!”
“예, 도련님.”
이찬의 말의 배를 가볍게 치자 속도가 빨라졌다. 그런 이찬과 양녕이 사라지는 곳을 바라보는 이가 있다는 것은, 이찬의 기감으로도 미처 알아낼 수 없을 정도로 은밀한 시선이었다. *****
“하오문의 무화라고 해요.”
“은월루의 어리라고 한답니다.”
극강의 미모를 자랑하는 임수미와 그에 못지않은 미색을 가진 어리가 한자리에서 조우하자 주변의 모든 색이 빛을 잃는 듯한 느낌이었다. 광문자는 물론, 임수미의 미모에 익숙해져 있던 하오문의 간부들조차 놀랄 정도였다. 하지만 두 여인은 서로의 미색에 감탄하지 않았다. 서로의 얼굴, 정확히는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일전에 일어난 일은 유감이에요.”
어리가 임수미에게 말했다. 임수미는 어리의 말에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유감이라고 하고 넘어가기에는 하오문의 피해가 컸다. 간장의 대장간이 불에 타버린 것이다.
“유감이라는 한 마디로 해결하기에는 곤란하다고 생각하지만, 넘어가도록 할게요. 그런 걸로 말다툼을 할 시간이 없으니.”
임수미는 흑의의 이름이 은월루란 것에 눈을 빛냈다. 어리는 만만치 않은 임수미를 쳐다보면서 혀로 입술을 살짝 핥았다.
“어떻게 한 거죠?”
“뭐가요?”
임수미는 다짜고짜 어리에게 물었다. 앞과 뒤를 다 자른 질문이었다. 어리는 임수미의 질문의 요지를 눈치챘지만 못 알아들은 척을 하면서 딴청을 부렸다.
“검주 만우 대협. 모르신다고 하실 건가요?”
하오문에서는 만우를 명예호법으로 대우를 해줄 정도로 만우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데 그런 하오문에 만우가 갑자기 찾아와 은월루를 건드리지 말 것을 선포했고, 당황한 임수미는 만우에게 물었다.
‘……그냥이라니.’
그런 만우는 임수미를 빤히 쳐다보다가 ‘그냥’이라고 간단하게 한 마디를 했다. 이러저러한 설명을 하지 않고 그냥 무작정 하오문에게 결정을 내릴 것을 강요한 것이다. 하지만 임수미도 그냥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래서 만우와 협상을 한 결과, 무언가를 얻어내기는 했다.
‘검주 이용권. 단, 은월루에게 해가 안 가는 선에 한 해서. 그리고 도를 넘지 않는 선에 한해서.’
그것 하나로 임수미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만우가 검을 뽑아들고 내 말을 듣지 않으면 죽여 버린다고 해도 하오문으로서는 울며 겨자 먹기로 들어야 할 판이었다. 그나마 만우가 일말의 미안함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임수미로서는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검주를 어떻게 구워삶았기에?’
분명 은(恩)과 원(怨)을 갚으러 조선으로 간다고 했던 만우다. 그런 만우가 일방적으로 은월루의 편을 들어준다는 것은, 은월루에 만우의 은(恩)이 있을 확률이 높았다.
‘…….’
임수미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만우가 저들 쪽에 서있다면 하오문은 은월루를 건드릴 수 없다. 이제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수밖에 없어진 것이다.
“자세한 사정은 말씀 못 드리는 점, 양해해 주시길 바랄게요.”
어리는 승지라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어리의 얼굴도 멀쩡하지는 않았다. 만우 앞에서 바닥에 이마를 찧어서 생긴 상처가 아직 낫지 않았다. 검은 천의로 가리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향이. 그 아이가 우리 편을 들어준 게 천만다행이지.’
만우는 은월루가 예뻐서 봐준 것이 아니다. 만우를 유일하게 제어할 수 있는 소녀가 은월루의 품에 들어온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우리 은월루의 보배야. 그 아이는.’
그러니 김향이 예뻐 보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어리는 임수미에게 고개를 약간 숙여 보였다.
“치열하게 싸움을 벌이던 하오문에 할 이야기는 아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저희 쪽에서도 그냥 입만 다물고 있기에는 뭐해서 한 가지 정보를 가져왔답니다.”
“……들어보고 결정하도록 하죠.”
정보를 다루는 하오문에서 보유하지 못한 정보를 은월루에서는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하지만 임수미는 자존심을 내세워 얻어야 할 것을 못 얻는 그런 실수는 범하지 않았다.
“제부투혼.”
“…….”
제부투혼이 어리의 입에서 흘러나왔지만 임수미는 눈가만 한 번 꿈틀거렸다. 하지만 놀라지는 않았다. 중원에서 조선으로 향하고 있는 무인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그녀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상전하께서 제부투혼을 탐내고 계세요.”
“……?”
임수미의 표정이 굳었다. 궐에서 일어나는 일까지 하오문의 귀에 들어올 확률은 지극히 적었다. 은월루와의 치열한 세력다툼으로 정보망 자체가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림맹에서 온 정의대? 뭐,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들에게 관직을 내리셨어요.”
정의대!
“…….”
임수미는 입을 꾹 다물었다. 정의대라니. 무림맹의 정의대가 벌써 궐에서 조선의 국왕을 만났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 했다.
‘조선의 국왕이…….’
임수미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어리는 그런 임수미를 보면서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니 이제 한양에서는 손 떼세요. 원래 집중하시던 웅주 쪽에 온 힘을 기울이시고.”
임수미의 표정이 일변했다. 임수미는 어리에게 말했다.
“알고 있었나요?”
“알 수밖에요. 그렇게 노골적으로 싸우자고 나오시는데.”
어리는 웃었다. 하오문이 은월루에게 세력전을 걸어오는 것을 보면 정보를 다루는 곳이 아니라 문파전을 펼치자고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노골적으로 시끄러운 일을 계속해서 만들고 있던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하오문이 무언가를 숨기는 것이 있다는 증거였고, 어리는 하오문이 제부투혼을 노리기 위해 조선으로 들어왔다는 것에 집중했다.
“한양에서 세를 늘리는 것도 좋지만, 원하는 것은 제부투혼이었겠죠. 그런데 하오문이 한양에서 자리를 잡기 위해 우리와 싸움을 한다?”
어리의 눈이 반달을 그렸다. 어리는 무화처럼 전형적인 미색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다른 선의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계속해서 사람의 시선을 잡아끌었던 것이다.
“그걸 왜 우리에게 말해주는 거죠?”
어리의 눈빛을 보면 그녀가 한 말에는 거짓이 없어보였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임수미는 어리가 한 말을 신뢰할 수 없었다. 은월루와 하오문은 적이다. 지금은 검주라는 완충재로 인해 휴전을 선포하긴 했어도, 근본적으로 같은 일을 하기 때문에 경쟁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경쟁자에게 정보를 준다?
“……은월루도 경계하는 것이군요. 왕을. 왕의 군대가 무공을 익히는 것을.”
“마음대로 생각하시길. 그럼.”
어리는 자리에서 대답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임수미는 그렇게 일어나는 어리를 보면서 침음성을 삼켰다.
“무화. 명령을! 이 자리에서 잡아 죽여야 합니다.”
어리의 은월루는 쥐고 있는 정보 자체가 하오문보다 뛰어났다. 어쩔 수 없는 차이였다. 그렇기 때문에 어리가 건네준 정보를 완벽하게 믿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어리는 하오문까지 움직여 자신과 은월루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고자 하고 있었다.
“경거망동하지 마세요.”
하오문 간부 중 하나가 어리를 죽여야 된다며 건의했지만 임수미는 그를 묵살했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간부를 보면서 임수미가 흐릿하게 웃어보였다.
“정의대, 그 온실 속에서 자란 화초들의 발걸음을 지체시키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에요. 그리고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가 저들에게 빚을 진 셈이고.”
“허나…….”
“그리고 검주. 검주가 저들 쪽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
검주의 이름이 하오문 간부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하지만 임수미의 입가에서 은밀하지만 화려한 미소가 피어났다.
“무슨 묘책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임수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오문 간부는 ‘역시’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임수미를 쳐다봤다.
“이이제이(以夷制夷), 구호탄랑(驅虎呑狼).”
“오랑캐는 오랑캐로 잡고, 호랑이를 몰아 늑대를 잡는다…… 저희가 나서지 않는 겁니까?”
하오문 간부의 말에 임수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두 눈이 시리게 빛났다.
“발이 날랜 자를 뽑아주세요. 서신을 보낼 겁니다.”
“서신이라면 어디로…….”
“안변.”
임수미의 두 눈에 살기가 깃들었다.
“투귀대. 그 싸움귀신들에게 은월루에 대해 알려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