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너도 내 동생해라(4)2020.01.25.
“저는…….”
“또한!”
이성계는 위엄 넘치는 목소리로 척준영의 입을 막았다. 척준영은 이성계의 박력에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물고 이성계가 먼저 말하기를 기다렸다.
“곡산척가의 대장로나 호법이 오지 않는 다음에야…… 개죽음이다.”
이성계는 척준영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곡산척가는 이 조선 땅에서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무예를 수호하는 가문이다. 그곳에 구멍이 뚫리면, 조선의 기상이 무너진다.”
“…….”
척준영은 이성계를 쳐다봤다. 이성계는 변함없는 표정이었다. 곡산척가의 대장로나 호법급 이상이 오지 않는다면, 저들과 맞서 싸운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곡산척가가 강하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지금 조선 땅에서 활개를 치고 다니는 저놈들도 강하다. 애초에 강하기 때문에 저렇게 두려울 것 없이 기세를 드러내며 도발해 오는 것이다.
“그 기상이 무너지길 나는 바라지 않음이다.”
이성계는 근엄한 표정으로 척준영에게 나섰다. 평생을 전장에서 살아온 우직하고 단호한 야전 장수의 표정이 그의 얼굴에서 그대로 묻어났다.
“그래서 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척준영은 물러서지 않았다. 순간 이성계의 눈이 커졌다.
“뭐라?”
“척가는, 은원을 잊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적들을 경시하지 않습니다.”
척준영은 차갑게 웃었다.
“호랑이는 토끼를 사냥할 때 전력을 다한다 들었습니다. 저희 곡산척가가 호랑이도 하는 것을, 하지 않을 것 같으십니까?”
“……좋다. 그리 자신 있게 말하니 가도록 하지.”
이성계는 척준영의 눈을 보고서 깨달았다. 애초에 곡산척가에서는 이 문제를 가볍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소사각주인 척준영과 소사각의 단원들이 거의 몰살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사건인 것이다. 그러니, 이성계는 척준영의 말에서 그들이 대장로나 호법급 이상의 인물을 파견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굉? 아니면 척도철이? 누가 온다고 하였는가?”
호선의 등 위에 올라탄 척준영에게 이성계가 물었다. 곡산척가는 외부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들이 가진 힘이 너무나도 강하기 때문에, 척가가 가진 힘이 정치의 희생양이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들은 철저하게 조선의 무예를 맥을 수호하기 위한 가문으로 남을 것을 천명하였는데, 그 때문에 그들은 중앙정치에 나서지 않고 무과에도 응시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사굉, 사광 장로님께서는 최근 들어 부쩍 중원에서 넘어오는 무림인의 숫자가 급증하였기에 패수 근처의 국경선에 나가 계십니다. 가주께서는 남쪽에 내려가셨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온다는 겐가.”
척사굉과 척사광은 곡산척가의 장로로 합격술이 일절에 다다른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각기 독문병기로 편(鞭)과 추(錐), 채찍과 작은 팔뚝만 한 송곳을 쓰는 초절정급의 고수였다. 척도철은 곡산척가의 가주로 그 무위가 하늘에 달했다 알려져 있었고, 곡산척가의 독문무예인 곡산검을 익힌 화경의 무인이었다. 그리고 호법이 두 명 있었는데, 호법은 가주와 장로들이 본가를 비웠을 때 본가를 수호해야 하는 임무가 있었으니 이성계가 아는 한 그들을 제외하면 이곳으로 올 수 있는 초절정급 이상의 고수가 없었다.
“늘 패수의 물은 흐르는 법이고, 뒷물이 앞물을 밀어내는 법 아니겠습니까?”
척준영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이성계는 단박에 그런 척준영의 말을 알아들었다.
“또 다른 천재가 탄생하기라도 한 것인가…….”
“보고 놀라지 마십시오, 전하.”
크와아앙!!! 척준영이 씩 웃음과 동시에 호선이 신경질을 내면서 땅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주변의 풍경이 뒤로 주욱하고 밀려났다.
“이 몸을 기다리고 있는 놈들이라…… 재밌는 고로!”
이성계는 여전히 산등성이 너머에서 느껴지는 불길한 기운이 입꼬리를 씩 끌어 올렸다. 비록 몸은 늙었다고는 하나 감각은 녹슬지 않았다. 지금 자신을 도발하고 있는 이놈들이 함정을 파고 있어도 상관없었다.
[제 뒤에서 내리지 마세요.]
“기마술…… 아니, 기호술(騎虎術)이라고 해야 하나? 그건 내가 제일 자신 있는 것 중에 하나다!”
하얀 백호 위에 올라탄 이성계의 두 눈에서 불이 뿜어져 나왔다. 그렇게 하얀 백호 위에 올라탄 채 질주하는 이성계의 모습을 본 함주 백성들이 놀라 그 자리에 엎드렸다.
“무신…… 무신께서 등선하신다!!!”
“무선이시다!!!”
와아아!! *****
“으, 음…….”
동군영은 필두와 마익후 사이에서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올 때는 세 명이서 타고 온 수레에 이제는 여덟 명이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내 양옆에 이런 장사들이 앉아서리…….’
동군영은 만우와 만나기로 했던 장소에서 사인방과 간장 보고는 또 다시 소심증이 도졌다. 딱 봐도 인상이 만만치 않아 보이는 사인방과 극강의 노안을 가진 간장이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바로 전날, 대전에서 본 만우는 세 달 동안 동군영이 봤던 만우와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에 뭐라 말할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어사 나리는 왜 굳어 있어요?”
그때, 유일하게 이들 모두를 편하게 대하는 방매가 동군영을 쳐다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동군영이 식은땀을 흘리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그, 글쎄?”
“아! 불편하구나! 아저씨들. 어깨 좀 모아요!”
방매가 필두와 마익후의 어깨를 찰싹하고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필두와 마익후는 어깨를 꼼지락거렸지만 그런다고 해서 커다란 덩치가 줄어들 리 없었다.
“괘, 괜찮…….”
“안 되겠다. 너네 둘. 너네 둘도 내려서 달려. 밀어도 되고.”
바로 뒤에서 일어나는 소란에 만우가 뒤를 힐끗 쳐다보고는 필두와 마익후에게 손가락을 까닥여 보였다. 투두두두!! 그 와중에도 수레는 덜컹거리면서도 빠른 속도로 관도 위를 달리고 있었다. 물론 그 수레를 끄는 것은 말이 아니라 우마를 자처하기로 한 슌스케였다.
“헉, 헉, 헉.”
여덟 명을 싣고 달리다보니 자연히 속도가 떨어지고, 체력이 빠르게 소모될 수밖에 없었다. 그걸 알면서도 슌스케는 입 하나 뻥긋하지 않았다. 자신보다 강한 이들이 한 둘도 아니고, 넷이나 늘어났기 때문이다.
‘크흑. 일월조 조장이던 내가 어째서 이런 꼴이…….’
상대의 강함을 가늠하지 못하고 들이받았던 자신의 자만심을 속으로 욕한 슌스케는 울분을 집어삼키고는 내달렸다. 파바바박!!! 만우의 한마디에 필두와 마익후가 수레에서 내려 달리기 시작하자 동군영와 슌스케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사실 말이 네 명이지 필두와 마익후의 덩치는 웬만한 여자 두 명분의 무게와 덩치였기 때문이다.
“만우!”
“왜 어사 나리.”
동군영은 조금 여유가 생기자 만우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동군영은 만우에게 물었다.
“그 어리라는 여자…… 죽였나?”
만우는 대전에서 은월루주라 불린 어리라는 여자를 죽이겠다며 살기까지 내뿜었다. 그때의 만우는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철혈왕이라 소문난 왕조차도 입을 꾹 다물었다.
“왜. 죽이면 안 돼?”
“그게 아니라…….”
“형님! 누굴 죽였소? 어? 잠깐만. 어리라면…… 한양제일기녀를 말하는 거요?!”
그때 간장이 불쑥 끼어들었다. 간장은 아주 소중한 보물이라는 것처럼 천년한철을 두드려 만든 금속덩어리를 천으로 잘 싸매서는 품 안에 껴안고 있었다.
“한양제일기녀?”
“모르오? 임금님도 몇 번 가신 기루가 있는데 운중능(雲中踜)이라는 이름의 기루요.”
“구름에 머물다. 좋은 이름이구나.”
만우는 피식하고 웃었다. 그 구름 사이에 숨은 것이 바로 은월, 숨은 달이다. 운중능이라면 만우도 은월루를 찾기 위해 기둥서방들을 족치다가 들은 적이 있었다.
‘그곳의 기녀라.’
임금이 그곳에 간 이유는 기녀를 끼고 놀기 위함이 아닐 것이다. 뭐, 루주인 어리를 만나기 위함이겠지. 한양제일기녀라는 유명세까지 떨치고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내가 여인을 왜 죽여. 얻을 것도 없는데.”
만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자 동군영과 간장이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동군영은 만우가 정말 그 여인을 죽이지 않았다는 것에, 간장은 제일기녀가 살아 있다는 것에 안도한 것이다.
‘그렇게 예쁘진…….’
무화와 비교하면 무화가 더 예뻤다. 만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기녀라는 것이 얼굴이 예쁘다는 것 하나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니까 다른 재주가 뛰어난 모양이었다.
“형님! 어디부터 가실 겁니까. 문주가 더 가까우니 문주로 가시겠지요?”
만우는 턱을 쓰다듬었다. 간장의 질문에 만우는 고개를 돌려 감령을 쳐다봤다.
“감령!”
“예, 대협.”
감령이 바짝 긴장하면서 만우의 부름에 답했다. 삼 개월 동안 떨어져 있었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해서 만우에 대한 공포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흔적!”
“계속해서 말발굽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감령은 산적이다. 그것도 산적 중의 최고봉인 녹림십팔채의 대채주다. 산적이 하는 일 중에 가장 많은 시간을 잡아먹는 일은 상행이나 지나가는 행인을 덮쳐 털어먹는 일이 아니다. 흔적을 지우고, 흔적을 발견하여 기다리는 것. 그렇게 매복하고 기다리기 위해서는 지나갈 행렬을 기다리거나, 이미 지나간 행렬을 산을 통해 앞질러 가서 기다리는 방법 두 가지가 있었다. 산이란 것이 워낙 길이 많기 때문에 산적들이 모든 길에 매복하고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산적들은 추적술을 익히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언제 지나간 흔적인데?”
“깊이로 봐서는…… 약 다섯 시진 전인 것 같습니다.”
만우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는 간장에게 고개를 돌리고는 말했다.
“문주의 운림이라고 했지?”
“응? 뭐 말이오?”
“내 검 손잡이가 될 놈. 이무기가 산다는 연못.”
“그렇소. 정확히는 문주 북쪽 천달산(天達山)에 구름골이라는 계곡이 있소. 그곳에 있는 것이 운림이오. 지금 갈 생각이오?”
안변부터 시작해 문주, 영흥부, 함주로 이어지는 길이다. 일전에는 관도로 가기 위해 의주를 들렸다 갔지만, 슌스케라는 쓸 만한 우마가 생긴 이상 그냥 길을 가로지르면 된다.
“음…… 아니, 일단 함주로 가야 해. 그리고 세자란 놈도 찾아야 하고.”
만우는 덜컹이는 것을 수레 위에 미동도 없이 앉아 팔짱을 끼고 고민을 했다. 함주까지 갔다가 내려오면 괜히 가는 동선만 꼬이고 시간만 버리게 된다. 하지만 문주로 가기에는 안변이 바로 코앞이다. 왕은 최대한 빨리 선봉군을 꾸려 보내겠다고는 했지만, 만우보다 빠를 리 없다. 쿠르르…… 덜덜덜. 그렇게 고민을 하던 만우는 수레의 속도가 느려지는 것을 느끼고는 쌍심지를 돋웠다. 슌스케가 속도를 늦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감령이 만우에게 말했다.
“대협. 길이 두 갈래입니다.”
“그런데?”
“왼쪽으로 가면 함주로 가는 길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문주로 가는 길이랍니다.”
“문주?”
방매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응. 뭐, 함주로 가는 길이나 문주로 가는 길은 아니지. 길이 끊기면 산을 넘어야 하니까. 어쨌든 직선상 차이가 난다는 소리야.”
“그럼 함주로 가면 되잖아?”
만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 감령이 만우에게 말했다.
“그런데 말발굽이…… 문주 쪽으로 이어집니다.”
“뭐?”
만우는 눈을 크게 뜨더니 이마를 손으로 찰싹하고 때렸다. 골치 아픈 상황은 이쪽에서 거절하고 싶었지만,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모두의 시선이 만우에게로 날아와 꽂혔다. 만우는 고민을 하다가 문득 자신이 왜 고민을 해야 하는지를 깨닫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는, 동군영이 앉아 있었다.
“어사 나리. 어사 나리가 정해주시지. 어쨌건 난 비천한 역졸이고, 어사는 그쪽이잖아?”
함주의 상왕과 왕가의 적자. 둘 중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의 공이 동군영에게로 넘어갔다. 소심증이 발동해 조용히 있던 동군영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