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너도 내 동생해라(1)2020.01.14.
“그랬군. 진인께서 말씀하신 그 아이가 바로 네놈이었어.”
조씨 할아범은 생각에 잠긴 듯 눈으로 보이는 곳이 아닌 추억 저 너머를 응시하고 있었다. 만우는 그런 조씨 할아범을 보면서 혀를 쯧하고 찼다.
“그렇다고 해도 무작정 때리고 보다니, 그러다 죽소 노인장.”
만우는 가슴께를 손바닥으로 탁탁하고 털었다. 그것을 보고 놀라 달려왔던 사인방도 비슷한 표정이었다. 조씨 할아범이 때린 상대가 다름 아니라 검주였기 때문이었다.
“죽을 때가 된 노인네가 뭐가 무섭다고?”
조씨 할아범은 언제 눈물을 흘렸냐는 듯 씨익 웃어 보였다. 하지만 눈가가 벌겠기 때문에 만우는 화도 못내고 뒷머리를 긁적였다.
“내 수박희도 대양진인께서 가르쳐주신 손과 발놀음이지.”
“그게 놀음이라고?”
만우는 헛웃음을 지었다. 조씨 할아범의 수박희는 수준급이었다. 괜히 방매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는 듯, 그 깊이가 대단했다. 만약 조씨 할아범이 상대를 상하게 하고자 마음을 먹었다면 정말 만우의 손에 죽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정제된 살기도 뿜어낼 줄 알고 말이야.’
조씨 할아범은 자신이 살기를 뿜어냈던 이유가 대양진인의 기천의 진전을 이은 것이 확실해 보이는 만우를 시험해 보기 위함이라 변명했다. 뭐, 시험이라고 하기에는 만우를 긴장조차 못 하게 만들었지만, 어쨌든 조씨 할아범이 만우의 가슴에 일장을 먹인 것만큼은 확실했다.
“대양진인의 수박희를 본 적이 없으면 말을 하지 할아. 그 분의 일장이면…… 전력이라면 산도 무너뜨릴 수 있다 생각했으니까.”
“그 정도였단 말이요? 진인이?”
만우는 무공에 무(武)자도 모르던 시절 대양진인으로부터 기천을 배웠다. 김약항과 젊은 시절부터 인연이 있다 하였던 대양진인은 만우를 보면서 흐뭇하게 웃곤 했는데, 만우의 오성과 재능을 보고 그런 듯했다. 하지만 그때도 만우는 대양진인이 그렇게 대단한 고수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기천이란 게 얼마나 익히기 난해한 것인지 네놈은 모르니까 그런 소리가 나오는 게다. 그걸 다른 이에게 가르쳐 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것이니까.”
“그건 그런데…….”
만우는 입맛을 쩝하고 다셨다. 사실 지금의 만우도 기천을 다른 이에게 가르치려면 어디서부터 가르쳐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기천은 몸을 혹독하게 단련하는 연단(煉丹)과 기를 몸에 받아들이는 조식(調息)으로 안과 밖의 조화를 이룬다. 그런데 이 몸을 혹독하게 단련한다는 단학의 일종인 연단이 사람마다 전부 다르다는 점이었다. 그러니 만우가 연단을 했던 방법을 다른 사람에게 하게 해봤자 소용이 없다. 사람이란 모두 몸이 다르기 때문에 연단 방법이 같을 수가 없었다.
‘그런 걸 보면 대단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의 만우도 기본적으로 6개월 이상은 기천을 배울 사람을 관찰만 해야 그 사람에게 맞는 연단 방법을 내놓을 수 있다. 그런데 대양진인은 그것을 불과 보름 만에 해냈다. 만우를 그냥 종일 관찰하더니 보름 만에 연단이라면서 가르치기 시작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대양진인께서는 어디에 계시는지 알고 계시오?”
지금의 만우로도 대양진인의 경지를 가늠할 수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대양진인이 만우보다 고수라는 뜻이다. 자신이 전력을 다할 수 있는 고수가 있다는 것은 만우에게도 큰 복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우가 눈을 빛내며 대양진인에 대해 조씨 할아범에게 물었지만,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지. 워낙 바람 같으신 분이라. 어쩌면 벌써 신선이 되어 선경이 드셨을 수도 있고.”
“흐음…….”
만우는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조씨 할아범은 그런 만우를 보면서 씩 웃었다.
“어차피 기천을 배운 건 네놈 하나이니, 때가 된다면 진인께서 네놈을 찾아가실지도 모른다. 지난번에 내가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 일인전승으로 내려오는 기천의 후계자를 드디어 찾았다면서 기뻐하셨으니까 말이다.”
“…….”
자신이 배운 것이 기천의 전부가 아니다? 조씨 할아범이 말하는 것이 꼭 그렇게 들렸기 때문에 만우의 눈에 열기가 서렸다 사라졌다. 당장 찾을 수 없는 대양진인에 대해서 깊게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뭐, 만나서 반가웠소. 방매 그 아이가 어디서 그런 각법을 배워왔나 궁금했는데, 노인장이 스승이었구료.”
“스승? 헐헐. 그래, 스승이라면 스승이라고 할 수도 있지. 방매 그 아이가 살고자 배운 것이지만 말이다.”
조씨 할아범은 헐헐거리며 웃었다. 조손 같은 사이라고는 하나 피가 이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방매를 데려와 키운 것은 아니다. 그저 똘똘해 보이는 거지 아이가 주변에 맴돌기에 데려와 길렀을 뿐이다. 그러면서 제 몸 하나 건수할 수 있도록 수박희를 가르쳐준 것뿐이고.
“그런데 왜 운 것인지, 말 안 해줄 것이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대체 왜 울음을 터뜨린 것인지, 그것도 늙은 노인이,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씨 할아범은 고개를 휙하고 옆으로 돌렸다.
“대양진인의 그림자를 보니 반가워서 그리 하였다.”
“원래 눈물이 많소?”
“나이가 먹으면 눈물이 많아진다, 이놈아.”
“말 해주기가 싫은 모양이구려.”
“운 게 무에 자랑이라고! 볼 일 끝났으면 썩 꺼지거라, 이놈!”
조씨 할아범이 버럭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사인방이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만우 앞에서 저렇게 소리를 지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니,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뭐, 보아하니 무림인들과 썩 좋은 관계는 아닌 듯한데.”
하지만 만우는 조씨 할아범의 예상보다 훨씬 더 윗줄에 있는 고수였다. 조씨 할아범의 살기와 눈물이 만우 자신이 아니라 뒤에 선 사인방을 향해 있다는 것을 만우는 알고 있었다.
“뭐, 악연이라도 있소? 사람을 잃었다든가…….”
“에잉. 모른다, 이눔아. 가라!”
조씨 할아범은 휙하고 등을 돌렸다. 이야기를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더불어 축객령이기도 했다. 만우는 입맛을 쩝하고 다셨다.
“궁금하게시리.”
“중요한 게 아니니 썩 꺼지거라!”
“끙. 알았소. 방매!”
만우가 목청을 높여 방매를 불렀다. 사인방이 이렇게 나왔으니 이제 서둘러 함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함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방매가 필요했다.
“왜! 이야기 다 끝났어?”
“그래. 가자, 함주로.”
“엑, 벌써?”
그때 방매의 눈이 커졌다. 만우의 뒤에 선 사인방이 보인 것이다. 방매가 두 손을 흔들었다.
“와, 아저씨들. 나왔네요?”
“크흠…….”
“아저씨…….”
“저기 난 오라버니라고 불러주면 안 될까?”
감령과 필두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옥면산군과 역수교어는 무림 사파에서는 공포의 존재다. 녹림산적과 장강수적의 정점이 그 둘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들을 아저씨라고 부르는 계집아이가 생길 줄이야. 문형일은 잘생긴 얼굴을 빙글거리며 방매에게 슬쩍 애교를 부려봤지만 방매는 칼 같은 표정을 지었다.
“돈이라도 주면 모를까, 아저씨들은 아저씨들이라 불러야죠.”
마익후는 애초에 그런 호칭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문형일이 실망한 듯 어깨를 늘어뜨렸을 뿐이다.
“할아범! 사향은? 저기 향이라는 아이랑 같이 일을 한다면서?”
순간 만우가 고개를 돌려 조씨 할아범을 쳐다봤다. 사향을 말려서 희석시켜 향료로 쓰는 것은 꽤나 복잡한 공정이 필요했다. 올해 열다섯이 된 아이가 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상당히 고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 향이의 손이 아주 빠르고 아주 영민하더구나.”
조씨 할아범은 만우의 시선을 느끼고는 만우를 쳐다봤다. 만우는 눈으로 여러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왜 이놈아.”
“그 일을 열다섯 아이에게 시키는 것은 너무 고된 일 아니오?”
“그래서.”
“다른 이에게 시키시오.”
만우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 순간 방매의 뒤를 따라 김향이 뛰어나오면서 만우를 말렸다.
“할 거예요.”
“이 일을 말이냐?”
만우의 눈이 커졌다. 김향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불필요한 설전은 피하고 싶다는 표정이었지만, 반드시 이 일을 하고 말 것이라는 의지도 보였다.
“돈을 벌어야 해요. 어리 언니에게 짐이 될 수는 없으니까요.”
“돈…… 하아.”
만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은월루주를 언니라고 부르는 아이가 돈 걱정을 하다니. 은월루는 무려 조선의 임금과 같은 배를 탄 사이다. 돈이 넘치면 넘치지 부족할 리는 없었다. 하지만 아직 김향은 아직 그런 것까지는 모르는 모양이었다.
“저도 언니를 도울 수 있는 재인(才人)이 되어야 하니까, 제 악기를 살 돈 정도는 제가 벌고 싶어요. 그러니까…….”
“에이, 네 맘대로 하거라.”
만우는 몸을 휙하고 돌렸다. 그러자 조씨 할아범이 히죽 웃었다. 그리고는 김향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만우가 들으라는 듯 말했다.
“그래. 사람이라면 제 손으로 제 밥 정도는 벌어먹고 살 수는 있어야지. 기특하구나. 그럼 가서 일을 마저 해보자꾸나.”
“네, 할아버지!”
김향이 밝게 소리치고는 조씨 할아범과 약재상 안으로 사라졌다. 만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가서 하오문 놈들에게 제대로 이야기 해놔야겠네.’
만우는 입맛을 쩝하고 다셨다. 김향은 어리를 언니로 부르기로 했다. 그리고 그 어리는 은월루의 수장이다. 하오문은 은월루와 전쟁 중이고, 어리에게 동생이 생겼다는 것을 알면 그 밑바닥 인생들이 무슨 짓을 할 지 모른다.
‘저 할아범이 있으니까 안심은 되는데.’
조씨 할아범은 몸에 한 줌의 내공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일반인이 생명유지를 하는 데 있어 필요한 아주 기본적인 내공뿐이다. 하지만 수박희는 내공을 바탕으로 펼치는 무예가 아니다. 극한까지 단련한 몸과 거리를 놓고 펼치는 무예이다. 만우가 겪어본 바, 조씨 할아범은 족히 일류에서 절정까지는 감당할 수 있는 실력이다.
‘그 정도면 하오문 간부들이 나서지 않는 다음에야 충분하지.’
만우는 문득 뒤를 보고는 따라오지 않는 방매를 불렀다. 방매는 약재상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방매. 왜 안 와?”
“응? 응! 갈게.”
만우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방매가 만우 옆으로 따라붙었다. 만우는 여전히 뒤를 힐끔거리며 보는 방매의 어깨를 툭하고 쳤다.
“앞 잘 봐라. 돌부리 걸려 넘어져서 코 깨질라.”
“익…… 네가 치지만 않아도 안 놀래!”
“너라니. 오라버니한테?”
사인방 중 문형일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만우와 방매가 친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형일이 기억하는 한 만우와 친하게 지내는 여자는 화산파의 소령이라는 소녀밖에 없었다.
‘혹시 대장이……’
문형일이 뒤를 힐끔 쳐다본 순간 문형일의 눈에 불이 번쩍했다. 따악!
“야. 눈 돌려. 무슨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그거 집어넣고……”
“아고오…….”
만우는 눈이 관자놀이에라도 달린 것 같았다. 그게 아니고서야 문형일의 머리통에 혹을 만들어 놓을 리가 없었다. 그 모습에 비슷한 표정을 지었단 감령이 고개를 휙하고 돌렸다.
“쯧쯧…….”
“하아. 뭔가 기분이 이상하네.”
“왜?”
방매가 입을 열자 만우가 옆을 돌아봤다. 방매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저 꼬맹이가 할아범을 할아버지라 부르는 걸 보니까 뭔가…….”
방매는 자신이 느끼는 이 기묘한 감정을 말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뭔가 허전하기도 하고, 시원하기도 하고, 다행인 것처럼 느껴지다가도 질투가 나기도 했기 때문이다.
“왜. 네 자리를 빼앗긴 것 같아서?”
만우는 피식 웃었다. 방매는 휙하고 고개를 돌려 만우를 올려다봤다.
“네 가족을 향이에게 빼앗긴 것 같아서 그런 거잖아. 뭐, 어제 처음 만났다면서 그렇게 친해진 걸 보니까 나도 신기하긴 하더만.”
“아니야 그런 거. 내 자리라니. 애초에 피가 이어진 가족도 아닌데.”
만우의 말에 방매는 애써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만우의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덜컹거린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만우는 피식 웃었다.
“야. 됐어. 그러니까 오라버니라고 불러보라니까? 동 어사, 걔도 오라버니라 부르면 되잖아. 야. 이런 오라버니들이 어디 있냐?”
“이익! 필요 없어, 너희들 같은 오라버니들은!”
“핫. 부끄러워하긴.”
방매가 쿵쾅거리면서 앞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 순간 문형일이 튀어나가서는 방매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방매의 눈이 커졌다.
“에에에엑!”
뒷덜미를 낚아챈 덕분에 앞섶이 목을 조이자 방매가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그사이 문형일은 다시 바람처럼 만우의 뒤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 만우가 앞으로 저벅하고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