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네 소원은 이뤄졌다(6)2020.01.11.
“쯧쯧. 잘해봐.”
“괜히 비명횡사하지 말고. 우리가 정이 있다고 그래도 마교 놈들한테 복수를 할 생각은 없어. 시체는 찾아서 잘 묻어주도록 하지.”
“힘. 내라.”
마익후까지 뚝뚝 끊어지는 목소리로 설운을 위로해 주었다. 설운은 어깨를 빙빙 돌렸지만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글쎄. 그대들이 도와주면 되겠군.”
권희달이 미묘한 미소를 띈 채 사인방을 쳐다봤다. 사인방이 고개를 돌려 권희달을 쳐다봤다.
“그대들을 예상보다 일찍 석방해 주는 이유가…… 검주에게 손이 필요하다 하더군.”
“손이라 하면…….”
문형일의 얼굴이 불길함으로 물들었다. 만우는 본래 무림에서도 독보로 유명한 인사였다. 그런 만우가 손이 필요하다고 그들을 찾는다면, 그 일은 결코 보통 일이 아닐 것이다.
“함주로 간다고 하더군. 상왕전하와 약속을 하였다 들었다.”
“…….”
“…….”
“…….”
무각에서 삼 개월 만에 풀려나오자마자 함주로 끌려가게 된 사인방의 얼굴이 시퍼렇게 물들었다. ***
“형님!”
“헉! 도야. 자, 잠든 것이 아니었더냐?”
“형님께서 그리도 이상하게 구시니 어찌 동생이 되어 잠들 수가 있겠습니까.”
세자인 양녕이 화들짝 놀라 충녕을 쳐다봤다. 자신의 동생인 충녕은 올해로 고작 여섯 살에 불과했지만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자신보다 열 살은 많은 이와 대화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 이 시간까지 침소에 들지 않고…….”
“책을 읽었습니다.”
“…….”
양녕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요즘 들어 동생인 충녕은 부쩍 학문에 대한 흥미를 키워가고 있었다. 서책이라면 소름이 돋는 자신과는 정반대였다.
“이찬.”
“예, 대군마마.”
충녕대군의 말에 이찬이 고개를 푹 수그렸다. 이찬이 할 말이 있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익위사인 그가 세자인 양녕이 나가겠다고 하는데 동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익위사라면 형님의 행동이 얼마나 무모한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송구하옵니다.”
여섯 살 꼬마에게 이런 소리를 할 줄 몰랐던 이찬은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충녕의 말이 맞다고 해도 양녕은 세자다. 양녕이 고집을 부리면 익위사인 이찬은 그 말에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하아. 형님. 전하께서 아시면 경을 치실 텐데 어째서 나가시려고 하시는 겁니까.”
양녕은 답답한 세자복 따위는 벗어버리고 바깥의 도령이 할 만한 복장을 입고 있었다. 그것도 주변에는 시녀와 내시들도 없었다. 아마 충녕이 거의 본능에 가까운 수상함을 느끼지 않았더라면 양녕은 그대로 사라졌을 것이다.
“무각의 그들이 오늘 낮에 풀려나 나갔다는 것을 들었느냐?”
“들었습니다.”
아버지인 임금이 세자와 왕자인 자신들이 검을 잡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충녕은 무각에 발걸음 한 번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양녕은 아니었다. 양녕은 궁에 갇혀 고루한 서책과 성현의 옛말을 외우는 것보다는 검을 쥐고 말을 타고 싶었다. 양녕은 실제로 아홉임에도 불구하고 말을 매우 잘 탔다.
“형님께서 그곳에 발걸음을 하셨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허나 그들이 나갔다고 하여 형님께서도 그들을 따라가실 셈이십니까?”
“그러지 말란 법이 있더냐?”
양녕은 짓궂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충녕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바마마께서 아시면 불호령이 떨어지실 겁니다. 아니, 형님이 아니라 형님을 막지 못한 익위사 이찬과 형님을 보필하는 상선께 불호령이 떨어질 겁니다.”
“음…….”
충녕의 정확힌 지적에 양녕이 잠시 침음성을 흘렸다. 상선(尙膳)이란 내시부 140명의 내시들 중 으뜸으로 종2품 환관(宦官)이었다. 더불어 왕세자인 양녕의 식사에 관한 일을 관장했기 때문에 얼굴을 가장 많이 마주보는 이였다.
“하지만 나는 이 조선의 세자다. 이 조선을 다스려야 할 세자인 내가, 바깥의 사정을 모르고 이곳에 앉아 책만 보고 앉아 있는 것이 대체 소용이 있겠느냐?”
“그것은…….”
이번에는 충녕이 할 말이 궁해졌다. 양녕의 말이 이치에 어긋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공자께서는 군자는 말하기 전에 행동하고, 그 후 자신의 행동에 맞춰 말을 한다라고 하시었다. 그러니 내가 논어를 읊으며 정(政)과 치(治)에 대해 논하기 전에 내가 다스려야 할 이들이 누구인지 보고자 함이다.”
“형님…….”
충녕은 양녕을 불렀지만 이미 자신의 말에 매료된 양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옆에서 이찬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전 즉시 전하께 가 이 일을 고할 것이옵니다.”
“넌 그럴 수 없다.”
양녕은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충녕 역시도 기세를 꺾지 않았다. 고집이라면 충녕도 양녕 못지않은 똥고집이다.
“그럴 수 있습니다. 당장이라도…….”
툭. 스르륵. 이찬이 충녕의 수혈을 짚고는 쓰러지는 충녕의 몸을 부드럽게 안아들었다. 양녕은 악동 같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이찬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찬도 어두운 표정을 거두시게.”
“아닙니다 세자저하. 소신이 어찌…….”
“운검의 실력이 부쩍 늘어난 것은 그대도 알 터.”
“…….”
이찬의 표정이 변했다. 조선제일검이자 운검인 권희달은 이찬이 넘어야 할 벽이었다. 하지만 그 벽이 너무나도 높았는데, 최근에 들어 그 벽이 더욱 높아지고 두터워졌다.
“운검이 주상전하의 명령으로 무각에 드나든 것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 후부터 운검의 실력이 부쩍 늘었다지. 주상전하께서 운검을 칭찬하시는 것을 나도 들었고.”
“저하…….”
“그대도 무인. 나도 어리다고는 하나 동북면을 호령하던 할바마마의 기상을 물려받은 무인의 피가 흐르고 있지.”
양녕이 씩 웃었다. 어린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양녕의 두 눈은 이글거리는 열정으로 가득했다.
“그대도 이번 기회에 운검을 뛰어넘을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운검이라 하여 그 모든 기회를 독식하는 것은 공평하지 않은 처사.”
이찬은 쓰게 웃었다. 양녕의 말에 동요하는 자신의 감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양녕의 말을 거부할 수 없는 것을 보면, 양녕의 말은 분명 사실이었다.
“거기에 그들이 누누이 말한 자가 있었지.”
“누누이 말한 자라면…… 검주?”
“그래.”
양녕은 씩 웃었다.
“검주란 자가 돌아왔기에 그들이 무각에서 풀려난 것이다. 아바마마께서는 약조를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분이니까.”
양녕은 사실 정의대가 왔을 때도 무림에서 온 무인들이라길래 그들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기질은 양녕과 별로 어울리지 않았다. 양녕은 한눈에 그들이 대쪽 같은 정의를 가진, 올바르기 그지없는 가치관을 가진 이들이란 것을 알아봤다. 정파에, 구파일방의 제자들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대쪽 같은 올바름은 양녕보다는 충녕과 더 잘 어울렸다. 양녕은 차라리 자유로운 사인방과 어울리는 것이 더 좋았다.
“그들 사인방은 자신들이 모두 덤벼도 검주란 자에게 십초지적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했다. 그러니 익위사 이찬.”
“예, 저하.”
“운검은 사인방을 만나 더 강해졌다. 헌데 그대가 검주를 만난다면, 그래서 그에게 검의(劍意)를 한 조각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어떻게 될 것 같은가?”
양녕의 달콤한 속삭임에 이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더욱더 견고해진 운검이란 벽을 본 순간, 이찬은 양녕의 말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소신, 견마지로를 다해 세자저하를 모시겠나이다.”
***
“여기냐?”
“네. 데려다 주시지 않아도 되는데…….”
김향은 여전히 만우를 어려워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만우는 갑자기 김향의 앞에 나타난 사람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어리가 만우를 대하는 것을 보면 말투나 행동거지 하나에도 만전을 기함을 알 수 있었으니 김향에게는 그런 만우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내가 불편하느냐?”
만우는 안국방 조씨 할아범의 약재상 앞에 서서는 김향에게 물었다. 김향은 난처하게 웃었다.
“제가 어찌…….”
“불편하다면 어쩔 수 없지. 나중에 진실을 알고 억울하다고 해도 나는 모르는 일이다.”
만우는 고개를 휙하고 돌렸다. 그런 만우를 보면서 김향은 혼란스런 표정을 지었다. 만우가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만우는 분명히 자신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김향은 만우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다.
‘이십 대 중반…… 오라버니의 친우라고 하기에는 나이가 많고, 아버님의 지인이라고 하기에는 어려…….’
김향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만우는 그런 김향을 보면서 표정을 풀고는 픽하고 웃었다.
“어려워할 필요 없다. 아니, 내가 말한다 하여 될 일이 아니니 어쩔 수 없지. 여기서 일을 한다고?”
만우는 화제를 돌렸다. 만우는 안국방이라 쓰인 약재상의 현판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안국방이라. 내가 어디서 들었지?”
만우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방매가 흘러가다 하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기억에 없었다. 만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데 그때 약재상의 문이 열렸다.
“억. 뭐야. 이 냄새는?”
문이 열리고 그곳에서 조 할아범이 비틀거리며 나왔다. 동시에 열린 문으로 강렬한 냄새가 뿜여져 나오자 만우가 화들짝 놀랐다. 화경의 오감이란 일반인의 그것보다 훨씬 더 예민하기 때문이다.
“사, 사향이에요.”
“오! 왔느냐?”
김향을 발견한 조씨 할아범이 다가왔다. 그러더니 김향의 옆에 선 만우를 보고는 흠칫 했다.
“누구냐 저 허여멀건한 놈은?”
만우는 중원을 유람하고 노숙을 밥 먹듯이 했다고 보기에는 어려울 정도로 피부가 햐얗고 뽀얬다. 경지에 오르니 피부에 노폐물이 끼지 않았고 피부 재생속도가 올라가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게…….”
“혹여나 이른 아침부터 이 아이에게 집적댈 생각이면 썩 물러가거라!”
“아, 아니에요 할아버지.”
김향은 조씨 할아범을 할아버지라 불렀다. 지난 하루 반나절 만에 조씨 할아범은 김향이 마음에 쏙 들었기 때문에 만우를 보면서 눈을 부라렸다.
“할아버지?”
“음…… 여기서 일하시는 분인데…….”
“할아범!!! 어? 만우다!!!”
그때 시끄러운 목소리가 들리더니 방매가 만우의 옆으로 달려왔다. 만우는 방매가 조씨 할아범을 보고 아는 체를 한 것을 보고는 방매를 쳐다봤다.
“아는 노인네야?”
“어! 내가 말한 안국방의 조씨 할아범. 지난번에 말했잖아. 수박희!”
“아!”
조씨 할아범은 갑자기 튀어나온 방매가 만우에게 아는 척을 하자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반면 만우는 그제야 조씨 할아범과 안국방이 익숙하게 느껴졌던 것을 깨닫고는 손뼉을 짝하고 쳤다.
“노인장이 방매에게 수박희를 가르쳤소?”
방매의 몸에서는 내공의 흔적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방매의 수박희는 내공을 익히지 못하는 이가 익혀도 내공을 익힌 이들을 상대로 능히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상승의 무리(武理)가 담긴 무예였다.
“그게 무…….”
“호오! 그게 진짜였구려!”
부정하려고 했던 조씨 할아범의 얼굴이 굳었다. 만우의 두 눈에서 안광이 번쩍했기 때문이었다. 만우 정도의 경지에 오르게 되면 서 있는 자세나 걷는 것만 보고도 상대방의 무위를 가늠할 수 있다. 그런 만우는 조씨 할아범이 자연체(自然體)를 체화시킨 고수란 것을 단박에 알아봤다. 내공의 흔적은 느껴지지 않으나 조씨 할아범은 모든 자세에서 상대방을 공격하는 것이 가능할 정도로 수박희를 자신의 손과 발처럼 체화시킨 고수다.
“……방매야. 향이를 데리고 먼저 들어가려무나.”
자신을 단박에 파악해 낸 만우를 보는 조씨 할아범이 방매와 김향에게 말했다. 방매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만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무래도 이 노인장과는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들어가 봐.”
만우는 조씨 할아범에게서 순간적으로 느껴진 것이 ‘살기’라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는 흥미가 와락 일었다. 대체 왜 이 노인은 자신의 공력을 감지하자마자 살기를 내뿜은 것일까?
“노인 이제 애들도 들어갔으니…….”
휘릭, 타닥, 탁! 그 순간 만우가 자신의 팔을 들어 몸통에 최대한 밀착했다. 그사이 가까이 다가와 있던 조씨 할아범의 두 손이 어깨를 뒤로 밀고는 만우의 가슴팍에 장력을 꽂아 넣었다. 퍼억! 타닥, 탁. 그 장력에 만우의 몸이 두 발자국 정도 밀려났다. 뒤로 밀려난 만우는 자신의 가슴팍에 시퍼렇게 찍힌 손자국을 보면서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대장!”
“이 무슨!!!”
그때, 사인방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문형일의 신형이 섬전처럼 만우의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그 순간, 만우가 손을 뻗어 바짓자락을 잡으며 문형일을 멈춰 세웠다.
“대장!!!”
“움직이지 마라.”
만우의 입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별다른 기세가 실려 있지 않았지만 문형일은 이를 갈고는 조씨 할아범을 노려보며 뒤로 물러났다. 그런 문형일의 뒤로 마익후와 감령, 필두가 차례대로 내려섰다.
“검주! 어째서 저 노인이…….”
조씨 할아범이 만우를 공격하는 것을 보고 대경해 속도를 높여 달려온 사인방이다. 그런데 그런 조씨 할아범을 가리키면서 뭐라 한마디 하려던 감령이 말끝을 흐렸다. 만우가 대신 느릿느릿한 목소리로 조씨 할아범에게 물었다.
“왜 우는 거요 노인장?”
조씨 할아범의 두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깊게 패인 주름을 따라 뚝뚝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