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네 소원은 이뤄졌다(5)2020.01.07.
만우는 박달나무 지팡이를 엄지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김향이 그러기를 원한다면, 문 밖에 있는 어리부터 베면 된다. 은월루와 임금은 만우의 칼을 피해가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다른 건요?”
하지만 김향은 놀랍게도 만우에게 다른 선택지가 있는지를 물었다. 만우의 눈이 살짝 커졌다.
“다른 것?”
“선택권이라 하셨잖아요. 그 말인즉슨, 다른 선택지도 있다는 뜻이겠지요.”
김향은 나이가 어리지만 산전수전을 다 겪은 영악함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김향은 알고 있었다.
‘모두를 죽인다고 해도 능사가 아니야. 그다음에는?’
김향에게는 앞으로 미래를 살아가는 것이 더 우선이었다.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와 죽은 오라버니는 살려낼 수 없다. 더불어 그녀가 받은 노비의 인(印)도 되돌릴 수 없는 일이다.
“……네가 원하는 삶을 살게 해줄 수 있다.”
만우는 주저하다가 그녀에게 말했다. 김향이 죽여달라는 사람을 죽이는 것과 김향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그 누가 보더라도 후자가 훨씬 더 어렵다. 잠시 고민을 하긴 했지만 만우는 속으로 풀썩하고 웃었다.
‘어쩔 수 없지.’
애초에 두 개의 선택지를 준 것은 만우 자신이다. 그러니 김향이 두 번째를 선택한다 하더라도 만우는 최선을 다해 그녀를 도울 것이다.
“원하는 삶이요?”
“그래. 돈이 많은 부자로 살고 싶다면 네게 부를 줄 것이다.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다면 좋은 남자를 만나게 해줄 수도 있다.”
“……그런 삶.”
“그래. 그런 평범한 삶.”
김향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만우를 쳐다봤다. 김향의 눈에는 결의가 서려 있었다.
“벌써 선택을 한 것이냐?”
“오래 생각한다 하여 달라질 게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리.”
김향은 자신의 앞에서 당당한 만우를 보면서 나리라고 불렀다. 만우는 그런 김향의 말을 고쳐주었다.
“나는 나리가 아니다. 차라리…… 아저씨나 대협이라 부르거라.”
사실 김향 앞에서 아기씨라 불러야 하는 것은 만우다. 그러니 자신이 그녀를 애기씨라 부르진 않아도 그녀에게서 나리란 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다.
“칼밥을 먹고 살아가는 낭인일 뿐이니.”
마교의 광호검 기무의 스승인 낭황이 듣는다면 기함을 할 소리지만 만우는 태연하게 말했다. 만우는 딱히 정사마에 적을 둔 적이 없으니 낭인이라 하는 것도 틀린 표현은 아니다.
“네, 아저씨. 그래서 저는.”
“너는?”
“재인(才人)의 삶을 살겠어요.”
“……재인?”
만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녀가 말하는 재인(才人)이란 악공을 뜻하는 말이었다. 기녀들을 위해 악기를 연주하는 악공, 그게 바로 재인(才人)이었다. 본래 재인이라 함은 고려 말 때는 화척이라 불리며 천한 일을 도맡아 하는 이들이자 달단(韃靼)의 후예들이었다. 그들은 법적으로는 양인(良人)이나 백정, 광대를 직업으로 삼아 유랑을 했기 때문에 천민으로 여겨지곤 했는데 그중 한 갈래가 바로 기녀들을 위해 악기를 연주하는 악공이었다.
“어째서.”
“저를 도와주신 분이 있어서요. 그런데 그분이 기녀에요.”
김향은 또랑한 얼굴로 만우를 향해 말했다. 만우는 그것이 어리임을 깨달았다. 그때, 뒤에 있던 문이 스르륵하고 열렸다.
“어, 언니! 언니 얼굴에, 얼굴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어리였다. 어리의 얼굴을 뒤덮은 피딱지를 본 김향이 대경해 만우를 스쳐지나가 어리의 얼굴을 닦으며 안절부절못했다.
“…….”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리.”
하지만 어리는 입가에 미미하게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이제는 상황이 완전히 반전이 되어버렸다. 김향은 은월루나 왕, 조정대신들에 대한 복수를 꿈꾸고 있지 않았다.
“왜, 왜지?”
만우는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으며 김향에게 물었다. 김향은 어리를 물끄러미 쳐다보고는 만우에게 말했다.
“제게 유일하게 손을 먼저 내밀어 주신 사람이 어리 언니니까요. 그리고 언니는 항상 바빴거든요. 그리고 어리 언니는…… 그냥 보통 기녀가 아니니까요.”
어리의 눈이 살짝 커졌다. 김향은 확실히 눈치가 빨랐다. 어리의 몸종으로 얼마 지내지 않았지만 김향은 어리가 자신 마음대로 한양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한 순간부터 어리가 그냥 평범한 기녀가 아니란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저도 보통 재인(才人)이 되지 않을 테니까요.”
김향은 어리를 보면서 싱긋 웃었다. 만우는 그런 김향을 보면서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제기랄…… 복잡해졌군.”
만우는 어리를 쳐다봤다. 어리는 김향을 보면서 입가에 미소를 살짝 띠운 채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것을 보자 만우는 속에서 울화통이 터지는 느낌이었다.
“운이 좋구나. 은월루주.”
만우는 심통을 담아 어리가 은월루의 수장인 은월루주라는 것을 밝혔지만 김향은 놀라지 않았다. 김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냥 보통 기녀가 아니었어요.”
“그래. 그냥 기녀가 아니란다. 그리고 널 그냥 재인으로 만들 사람도 아니고.”
“하아.”
만우는 엄지손가락으로 박달나무 지팡이를 쓰다듬던 것을 멈췄다. 어리는 그런 만우를 보면서 눈치채지 못하게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죽었다 생각하였거늘.’
자신이 이 열다섯밖에 되지 않은 계집애한테 목숨을 구원 받을 줄이야. 어리는 김향의 머리를 더욱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니 도와주세요, 아저씨.”
김향은 만우가 한 말을 잊지 않았다. 만우가 그녀가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도와준다 하였으니, 이제 만우는 꼼짝없이 자신이 한 말을 지켜야 한다.
“……코가 제대로 꿰였군.”
만우는 희미하게 웃고 있는 어리의 얼굴이 보기 싫다는 듯 고개를 휙하고 돌렸다.
“네 소원은 이뤄졌다.”
“네???”
만우가 그 말만을 남기고 방에서 사라졌다. 김향이 고개를 갸웃했지만 만우는 이미 바람만을 남긴 채 사라진 뒤였다.
“향아.”
“네? 네 언니.”
김향이 사라진 만우의 뒷모습에 황망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어리가 김향을 불렀다.
“저분의 말대로, 네 부탁은 이뤄진 것이란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김향은 불만에 찬 표정을 지었지만 어리는 희미하게 웃었다.
‘네 덕분에 은월루는 살아남았으니까.’
만우의 분노는 무시무시했다. 동시에 어리는 확실하게 깨달았다. 만우는 자신을 농락하고 능욕한 자에게는 자비가 없다는 것을 말이다. 만우는 김향을 어리가 데려간 그 행위 때문에 분노한 것이 아니었다. 김향의 가문을 몰락하게 만드는 데 일조를 하고서는, 김향을 데려갔다는 것 자체에 만우는 자신이 농락을 당했다 생각하여 분노를 한 것이다.
‘그 덕분에 내가 살았고, 넌 네가 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김향이 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만우가 어리를 살려준 순간 이미 이뤄진 것이다. 그다음 일은 이제 어리와 은월루가 해야 할 일이다.
“지금은 이해하지 못 하겠지만, 나중이 되면 너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란다.”
“……네.”
김향은 불만이 많은 표정이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김향은 만우에 대한 불만을 마지막까지 토해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거짓말쟁이.”
어리는 그런 김향을 보면서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줄 따름이었다.
***
“가라고?”
“그래.”
“아니, 왜?”
권희달은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대전에서 만우가 벌인 악행이 여전히 못마땅했던 것이다. 더불어 그런 만우를 막아설 수 없었다는 자괴감이 권희달을 괴롭히고 있었다.
“그냥 나가라면 나가라!”
무각(武閣)에서 나가고 싶다고 노래를 부를 때는 언제고, 나가라니까 왜 나가냐면서 의심의 눈빛을 던지는 사인방, 아니 오인방을 확 다시 잡아쳐넣고 싶어진 권희달이었다. 감령은 그런 권희달을 보면서 씩 웃었다.
“다시 잡아넣을 생각은 아니지?”
“왜. 못 할 성 싶어?”
권희달의 눈이 도끼눈이 되어 사인방을 쳐다봤다. 설운은 권희달 앞에서 감히 대들 수 없었기 때문에 옆으로 빠진 지 오래였다.
“크흥. 처음 들어올 때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그것 때문에 그냥 봐주는 거니까 더 이상 기분 상하게 하지 마라.”
권희달은 사인방에게 툴툴거렸지만 그래도 처음에 비하면 이 정도도 많이 나아진 것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권희달이라는 남자의 성격 자체가 이랬다. 그는 말을 예쁘게 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처럼 뾰족하게 말을 하는 것이 습관이었다.
“그럼. 못 보는 건가. 이제?”
마익후가 더듬거리며 조선말로 권희달에게 말했다. 지난 세 달 동안 감령과 필두, 그리고 문형일과 마익후는 조선말을 열심히 배웠다. 할 게 그것 빼고는 딱히 없었기 때문이다. 무공이란 것은 단순히 몸만 튼튼해서 익힐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성이 어느 정도 뒷받침을 해줘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삼 개월이란 시간은 그들에게 결코 짧지 않았다. 마익후는 한어(漢語)도 어색한 것처럼 조선말도 어순이 이상했다. 그 외에 감령과 필두, 문형일의 조선말은 이제 일상 대화를 나누는데 무리가 없을 정도였다.
“그래. 못 봐서 속이 시원하구만. 매일 오는 것도 슬슬 지겨웠는데 말이야.”
권희달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복잡한 표정이었다. 사내들이 가까워지는 두 가지 방법 중에 하나가 바로 몸을 부대끼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술이었는데 술자리는 가진 적이 없었다. 대신 서로의 땀냄새는 지겹도록 맡았다. 그게 이들 사이에 묘한 유대감을 형성한 것이다.
“가끔씩 놀러오겠습니다 나리. 그때는 술 한 잔 사주시지요.”
문형일이 씩 웃었다. 천축국 출신인 그의 이빨이 하얗게 반짝거렸다. 피부보다 유난히 하얀 문형일의 치아 색깔 때문이다.
“됐다. 오지 마라. 나 바빠. 이래봬도 운검이다. 조선제일검.”
권희달은 턱을 치켜 올렸다. 필두는 그런 권희달을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권희달은 자기애가 아주 강한 사람이었다. 조선제일검이란 별호를 마치 자신의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겼다.
“가봐라. 그리고…….”
권희달은 이를 꽉 깨물었다.
“다음에 왔을 때는, 지지 않겠다 전해주거라.”
“응? 전해줘?”
권희달의 말에 감령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때 필두가 박수를 짝하고 쳤다.
“검주! 검주 대장이 돌아온 것이구려!!”
“캬! 벌써? 함주까지는 못 해도 6개월 정도 걸린다더만!”
만우가 돌아와 자신들을 빼내줬다는 말에 다들 기뻐했다. 권희달은 그런 그들을 보면서 고개를 가로젓고는 설운에게 말했다.
“좌익찬 설운.”
“예, 운검.”
설운은 계방의 좌익찬이다. 하지만 임금에게 만우를 대적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했다가 불경죄로 무각에 갇혔다.
“원래의 임무로 복귀하라는 어명이시다. 계방으로.”
“헛. 저, 정말이십니까?”
설운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당대의 임금은 용서가 없기로 유명했다. 그렇기 때문에 설운은 자신이 다시는 계방으로 돌아가지 못 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네 무재(武才)를 전하께서 아끼셨다.”
정확히는 권희달의 조언을 임금이 받아들인 것이다. 이립(而立)이 되지 않은 나이로 초절정에 올라선 설운이다. 그의 무재는 가히 천재적인 것이어서, 무각에서 세 달을 지내면서 네 명의 초절정 고수들과 화경 하나의 무리(武理)를 무섭도록 흡수했다. 권희달은 설운이 차세대 조선제일검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을 설운에게 말해주진 않았다.
‘버릇 나빠지니까.’
어쨌든 무각에서 가장 눈부시게 발전한 이가 바로 설운이다. 절정의 벽을 깨고 초절정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단.”
하지만 임금은 자신에게 불경죄를 저지른 설운이 계방으로 다시 복귀하기 위해서는 그전의 죄를 참작할 수 있을만한 전공을 세워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계방은 거의 모든 무과 급제자들이 들어가기를 원하는 곳이다. 그곳에 들어가면 세자와 왕자를 비롯한 대군(大君)들과 안면을 틀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출세의 지름길이었기 때문이다.
“좌익찬 설운은 어명을 받아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권희달은 자신의 허리춤에 달린 검을 끌렀다. 그는 검을 두 개를 차고 있었다. 하나는 운검의 독문병기고, 하나는 특별히 임금이 하사한 장군검(將軍劍)이다.
“동북면 반역도당의 진압군으로 출병할 안주도 도절제사(都節制使) 이천우(李天佑)의 부장으로 좌익찬 설운을 임명하노니 출병하려 전하의 위엄을 만방에 고하고 와라.”
“명을 받드옵니다.”
권희달은 설운에게 검을 건네주었다. 어명과 함께 하사된 검이다. 가보로 삼아도 좋을 물건인 것이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설운은 그렇게 한 번 더 절을 한 뒤 일어섰다. 권희달은 어명이 적힌 교지를 접어 설운에게 건넨 뒤 그에게 말했다.
“이 도절제사를 잘 뫼시게. 전하의 사촌이 되시는 분이니.”
“예, 운검. 소신, 견마지로를 다해 반역도당들을 진압하겠나이다.”
“조심하시게. 그곳에는 왜의 무인들과 중원에서 넘어온 무인들이 합류해 있음이니.”
“……!”
설운의 눈이 커졌다. 그때 감령과 필두가 끼어들었다. 문형일과 마익후도 궁금하다는 얼굴이었다.
“중원? 웬놈들이?”
“마교라 하던가? 검주가 그리 말하였다.”
권희달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마교란 소리에 감령과 필두, 문형일과 마익후의 표정이 일제히 변했다.
“그 투귀들?”
“아, 맞아. 투귀대라고 검주가 그랬던 것 같은데. 이미 한번 함주에서 조우했다고 하더군.”
“투귀대?”
“으익. 그 지독한 놈들이?”
설운과 권희달은 사인방의 표정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마교의 투귀대는 악명 높기로 유명한 곳이지만 만우에게는 그리 위협적이지 않은 놈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만우의 설명이 부족했는데, 사인방의 입에서 줄줄이 흘러나오기 시작한 투귀대의 화려한 악의 족적을 들은 설운의 표정이 창백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