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네 소원은 이뤄졌다(4)2020.01.04.
“몰랐다? 아주 좋은 단어지. 그 단어 하나로 본주가 누그러질 정도로.”
만우의 입술이 열리고 고저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리는 고개를 저었다. 머리를 움직일 때마다 머리가 어질거렸다. 너무 바닥에 이마를 세게 찧은 탓이다.
“더불어, 광산군 김약항에게 일어났던 사건은…….”
어리는 만우를 쳐다봤다. 어리는 그 때 은월루의 수장이 아니었다. 그러니 엄밀히 말하면 어리는 그때의 일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그녀도 그저 ‘그런 일이 있었다’ 정도로 배운 것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과연 그렇게 말 한다 해서 만우가 ‘미안했다’라고 할까? 쿵. 어리는 무릎을 꿇었다. 분명히 무릎이 깨지는 고통이 있을 테지만 어리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만우는 그런 어리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은월루의 잘못이 아니라고는 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은월루에게 복수를 하시려거든, 소녀의 목만 거둬가 주세요.”
“네 목이라?”
“저를 포함한 광문자도, 은월루의 다른 이들도 그때의 일과 관련이 있는 이들은…… 거의 없습니다. 전부 바뀌었기 때문이지요.”
어리는 만우보다도 어렸다. 은월루의 차세대로 키워지고는 있었으나 어떤 회의에도, 어떤 작전에도 참여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 제 목을 거둬주시고, 부디 분노를 풀어주세요 검주 대협. 부디.”
동군영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임금은 침묵을 유지했다. 임금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둘 중에 택하라면 무조건 검주. 허나 은월루주는 버리기에 아까운 인재다. 이를 어떻게 하면…….’
임금은 인재 욕심이 있는 남자다. 정확히는 그가 왕위에 오르면서 너무나도 많은 조정의 인재들을 잃었다. 그렇기 때문에 임금은 인재라면 가리지 않고 포섭했다. 그중 은월루주는 정식으로 조정에서 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그녀와 은월루의 힘은 임금이 포기하기에 너무나도 아까운 세력이다.
“만우!”
동군영이 어리를 쳐다보고는 만우를 소리쳐 불렀다. 만우는 동군영을 보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번에는 끼어들지 말라는 확고한 의사 표시였다. 이건 해묵은 만우와 은월루 간의 은원이다.
“그래서, 김향은 어디에 있지?”
만우는 김향을 애기씨라 부르지 않았다. 만우는 김약항의 은혜를 입은 사람일 뿐, 그 집안의 머슴이 아니다.
“……검주께서 찾아오신 그 집에 있었사오나, 자리를 비운 듯합니다.”
“그래. 보지도, 느끼지도 못 했으니까.”
조말생의 집에 있었다는 것에 만우의 눈이 커졌지만 그 집의 일반인 중에는 김향이 없었다.
“…….”
어리는 고개를 들어 만우를 쳐다봤다. 만우의 얼굴에는 일말의 인정(人情)도 보이지 않았다. 만우는 손가락 하나만 까딱이는 것만으로도 어리를 죽일 수 있다. 어리는 만우를 향해 넙죽 엎드렸다.
“김향, 그 아이에게 확인을 해보셔도 좋습니다. 아니, 절 죽이신 다음 그 아이에게 물어보십시오. 소녀는 그 아이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데려왔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굳이 데려간 이유는?”
만우의 서늘한 목소리가 어리의 귀로 날아와 꽂혔다. 어리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에 만우가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의지는 많이 가신 듯했다. 그게 아니었다면 자신의 목은 벌써 땅에 떨어졌을 것이다.
“소녀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네 모습?”
“함주에서 기녀 행세를 하는 동안, 제 몸종이었던 아이였습니다. 머리가 영특하고 눈치가 빨랐습니다. 그 나이에 걸맞지 않은 눈빛과 언행도 그러했습니다.”
어리는 눈을 내리깔았다. 만우는 그런 어리를 빤히 쳐다보다가 괘검을 다시 박달나무 지팡이 속으로 집어넣었다. 스르릉, 턱! 괘검의 시린 예기가 사라지자 어리의 입에서 가쁜 숨이 새어나왔다. 긴장이 풀린 것이다. 만우가 뽑았던 검을 다시 넣었다는 것은, 이번 일에 대해서 보류하겠다는 뜻이다.
“안심하지 마라.”
만우는 여전히 서늘함을 지우지 않고 어리를 쳐다봤다.
“김향에게 물어본 다음 네 처우를 결정할 것이다. 혹여라도 네 행동에, 네가 한 말과 조금이라도 다른 거짓이 있다면…….”
예를 들어 김향이 누구인지 짐작을 했더거나, 김향을 강제로 데려온 것이라면 그녀의 목숨을 거두고 은월루를 멸(滅)할 생각이다.
“아니에요. 그때는 소녀의 목숨을 거두시어요.”
어리의 이마에서 피가 계속해서 흘러내렸다. 만우는 혀를 쯧하고 찼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만우는 고개를 돌려 임금을 쳐다봤다. 임금은 굳은 얼굴로 만우에게 말했다.
“과인에게 원하는 것이 있는가?”
광산군 김약항과 관련된 일을 뜻하는 것이다. 만우는 차갑게 웃었다.
“아니. 하지만 김향, 그 아이가 무슨 말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
“크음…….”
임금은 불편한 소리를 냈다. 임금이 옥좌에 오른 지 고작 삼 년째다. 그러니 그 전의 일과 임금은 상관이 없었지만, 그래도 불편했다.
“상왕은 내 만나보니 그럴 만한 머리가 없어 보였다. 틀림없이 조정대신들이 꾀를 낸 것이겠지. 삼봉 정도전, 그자를 명에 보내지 않기 위해서.”
만우는 싸늘하게 웃었다. 삼봉의 이름은 임금 앞에서는 금기어나 마찬가지다. 지금 임금이 왕좌에 오르기 위해 베어버린 건국공신이 바로 삼봉이기 때문이다.
“허나 그렇다고 해도 만약 김향, 그 아이가 왕의 죽음을 원한다면.”
만우의 눈빛이 칼날처럼 변해 임금의 눈을 파고들었다.
“조선은 새로운 왕을 맞이해야 할 것이다.”
“네 이노오오옴!!!”
무도하기 그지없는 만우의 말에 권희달이 노성을 터뜨렸다. 권희달의 전신에서 공력이 뭉클거리며 뿜어져 나왔다.
“그 입 닥치지 못할까!”
권희달의 분노가 노도처럼 만우를 향해 쏟아졌다. 만우는 자신을 찍어 누르는 권희달의 기세를 느끼면서 히죽 웃었다.
“우리 애들한테 교육 잘 받았나보네? 제법이야.”
“노옴!”
권희달의 눈이 커졌다. 만우는 오롯하게 권희달의 기운 속에서 고고하게 서 있었다. 권희달은 이를 악물었다. 만우는 권희달의 기운을 받아내고 있지 않았다. 마치 만우가 그 자리에 없는 것처럼, 권희달은 자신의 공력이 만우 주변으로 접근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절대영역. 만우의 주변 일정 공간 이상은 만우만의 영역이었다. 공력을 끌어올렸던 만우의 주변으로 자연스럽게 그런 영역이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그 영역은 권희달의 것보다 네 배 이상 넓었다.
“안내해라.”
만우는 권희달을 무시한 채 어리에게 말했다. 동군영은 권희달의 뒤에서 나와 더듬거리며 만우를 불렀다.
“만우! 자네 대체 무슨 망발을…….”
“동군영. 아니, 어사 나리.”
만우가 등을 돌린 채 고개를 반만 틀어 동군영을 눈에 담았다.
“제가 하고자 한다면, 조선의 왕이나 명의 황제도 바꾸지 못할 것 같습니까?”
“…….”
동군영은 말을 할 수 없었다. 원래부터 만우가 대단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만우의 진지한 모습을 처음으로 눈앞에서 본 동군영이다. 그런 동군영에게 만우가 누군가에게 진다는 것은 쉽게 예상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제가 왕이나 황제가 되고자 함이 아닙니다, 나리. 그렇다면 저는 홀로 이리 망아지처럼 날뛰지 못할 겁니다. 허나.”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 주지 않는다면 왕이나 황제가 될 수 없다. 세력이란 게 원래 그런 법이다. 그래서 한고조 유방이 초패왕 항우를 이겼듯, 왕이나 황제가 되고자 한다면 지켜야 할 것이 많은 만우는 홀로 날뛰지 못한다. 하지만 만우는 왕이나 황제가 되고자 함이 아니다. 그저 그들이 그릇된 권력이나 잘못 휘두른 전횡을 단죄할 수 있는 검(劍)일 뿐이다. 만우는 날카로운 눈으로 임금을 쳐다봤다. 임금은 만우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자신이 휘두르는, 휘둘렀던 권력이 칼이 되어 자신에게로 돌아올 수 있음을 위정자들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저 같은 놈들이 있으니까요.”
말을 마친 만우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꺼지듯이 사라졌다. 그런 만우의 뒤를 따라 어리가 신형을 날려 사라졌다. 투두둑. 어리가 사라지면서 떨어진 그녀의 핏방울이 대전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만이 천둥소리처럼 대전 안에 울려 퍼졌다. ***
“악!”
한양에 도착해, 사향 중 덜 말린 것과 바짝 마른 것을 골라내는 고된 노동까지 한 김향은 자신도 모르게 까무룩하고 잠이 들었다가 눈을 번쩍 뜨며 비명을 내질렀다.
“헉…… 헉…….”
김향은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마에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꾸기 싫은 꿈, 악몽을 꿨기 때문이다.
“아버님…… 오라버니…….”
조부인 김약항이 명에서 그리 비명에 간 이후 김향의 집안은 급격하게 몰락했다. 부친의 부고를 들은 김향의 아비는 쓰러져 곧 부친을 따라갔다. 그리고 몰락한 집안으로 인해 빈민촌으로 쫓겨난 김향의 오라비인 문(文)은 좋아하던 글공부도 하지 못하고 역병에 죽었다. 그리고 홀로 남은 김향은 가문에 남은 작은 전답까지 빌린 돈을 받아가야 한다면서 찾아온 웬 파락호들에게 빼앗기고 노비로 팔려나갔다. 그런데 그런 김향의 꿈속에는 가끔씩 아버지인 김선과 오라비인 김문이 가끔씩 나왔다. 하지만 결국 꿈에서 깰 때는, 아버지와 오라비가 죽는 것으로 끝났다.
“흑…….”
그럴 때면 유독 더 외로웠기 때문에 김향은 무릎을 끌어안은 채로 눈물을 찔끔 흘렸다. 그렇게 울던 김향의 앞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김향. 맞느냐?”
만우였다. 김향은 고개를 들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분명히 광문자가 나간 뒤에 방문을 걸어 잠갔기 때문이다. 광문자는 어리가 김향을 각별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고 그냥 주막이 아니라 한양에서 가장 큰 객주의 방을 한 칸 빌려 그곳을 내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경비가 각별한 이곳에, 자신의 방에 들어온 만우를 보고 놀라지 않을 리 없었다.
“맞구나. 어릴 때 얼굴이 약간이지만 남아 있어.”
그때는 먼발치에서만 봤던 김향의 얼굴이다. 하지만 경지에 도달한 만우의 오성은 그 때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귀엽고 발랄했던 김향은 사고뭉치였지만 온 집안의 사랑을 듬뿍 받은 아이였다.
“누, 누구신데 이 방에!”
김향이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물러서면서 만우에게 말했다. 만우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과거의 잔재라고는 하나 김향을 보니 가슴이 떨렸다. 설레서가 아니다. 김약항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은인.’
김약항은 만우에게는 은인이었다. 머슴이었던 만우를 손자처럼 따뜻하게 대해준 사람이다. 명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 유대감이 쌓였기 때문이지만 그래도 은인인 것은 은인인 것이다. 더불어 대양진인을 통해 기천이라는 무공을 익힐 수 있게 해주었고.
‘내가 살아남은 건 어르신 덕분이니까.’
그 기천을 익혀 검주까지 된 것은 만우의 노력이지만 그 기회를 제공한 것은 김약항이다.
“광산군 김약항 어르신의 손녀 김향. 맞느냐고 물었다.”
만우는 김향에게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물었다. 만우를 경계하던 김향은 만우가 김약항의 이름을 입에 담자 눈가에 서린 경계심을 약간 누그러뜨렸다.
“제 조부 되시는 분이신데…….”
“아비는 김선. 오라비는 김문.”
“…….”
김향의 눈이 커졌다. 김향이 노비가 된 후 그녀는 가문에 대한 것은 입을 꾹 다물었다. 입 밖에 꺼내 좋을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녀의 가문을 아는 사람이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다.
“어르신이 내게 부탁하신…… 일을 하러 왔다.”
만우는 박달나무 지팡이를 손으로 툭툭하고 건드렸다. 원래라면 아기씨, 혹은 애기씨라 불러야 하지만 지금 둘의 격차는 하늘과 땅 차이로 벌어졌다. 만우는 지고무상한 화경이란 경지에 도달한 무인. 하지만 김향은 몰락한 양반 신분조차도 잃어버리고 노비가 된 어린 소녀일 뿐이다.
“조부…… 조부께서!”
김향이 가슴께를 가렸던 두 손을 내렸다. 만우에게서 그 어떠한 적의도 읽히지 않았고, 조부와 아비, 오라비의 이름이 전부 나왔기 때문이다. 관기의 몸종을 하면서 비상하게 늘어난 눈치로 김향은 만우의 얼굴에 일말의 그리움마저 담겨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네 조부께서는 임종하시면서 본주에게 부탁하셨다.”
만우는 김향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최대한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자신의 핏줄이 곤란함을 겪고 있다면 한 번만 도와달라고. 돌봐달라고.”
“…….”
김향은 입을 꾹 다물었다. 입을 열었다가는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조부께서는 죽는 순간까지, 그래도 자신의 자식과 손녀들을 걱정하셨다.
“본주의 눈에는 네가 곤경에 처해 있는 것 같구나. 그래서 네게 선택권을 주고자 한다.”
만우는 김향에게 말했다.
“네 아비와 오라비의 복수를 원하느냐? 아니면 삶을 원하느냐.”
꿀꺽. 만우를 이곳까지 안내한 어리가 침을 꿀떡이는 소리가 만우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하지만 만우는 김향의 얼굴에 고정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 않았다.
“고르거라.”
“복수…….”
김향은 눈을 들어 만우를 쳐다봤다.
“제 아버지는 건강이 약해 돌아가셨고, 오라비는 역병에 걸려 죽었습니다.”
“그것이 아니다.”
만우는 김향에게 진실을 알려주었다. 정도전을 지키기 위한 조정대신들의 결정과 그로 인한 김약항의 유배. 김향이 노비로 전락할 수밖에 없던 것이 인재(人災)였음을 알려준 것이다. 김향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녀도 대충은 알고 있었다. 그녀의 집이 기울기가 무섭게 그녀는 인간의 무서움을 깨달았다. 아비가 죽자마자 염왕채를 빌려준 검계들이 몰려와 전답은 물론 그녀까지 노비로 전락했다. 양반일 때와 노비일 때의 세상은 너무나도 다르고, 사람들도 달랐다.
“네가 원한다면 그 일과 관련된 모두에게 죄를 물을 수 있다.”
만우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김향에게 말했다. 김향이 그렇게 부탁을 한다면 만우에게는 차라리 편한 일이었다. 그냥 죽이면 간단하니까.
“왕이라 해도, 양반이라 해도 전부…….”
“그래.”
만우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왕을 죽여줄 수 있다 말했다. 김향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만우는 훈풍 같은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누구를 죽인다는 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미소다.
“네가 원한다면 기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