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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네 소원은 이뤄졌다(3) (105/400)

105. 네 소원은 이뤄졌다(3)2019.12.31.

김약항이 죽기 이 년 전, 표전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명에 억류가 되었었다. 표전이라 함은 신하국가인 조선에서 상국인 명나라의 황실에 지어 바치는 일종의 글(文)인데, 이 표현에 불손한 문구가 들어 있다며 그것을 빌미로 표전을 지은 자를 불러오라 한 것이다. 당시 표전 문제가 처음 일어났을 때 그 표전을 지은 이는 태조의 오른팔이자 조선의 건국공신인 삼봉 정도전이었다. 하지만 정도전을 명에 보낼 수 없었던 태조는 그 표전을 지은 이를 정도전이라 하지 않고 김약항이라 하여 보고를 하였고, 김약항은 분노한 명 황제에 의해 명에 구류되었다. 명 황제는 조선의 지낭인 정도전을 볼모로 삼고 조선을 조종하려 하였던 것인데, 눈에 보이는 속임수로 자신을 속였다는 것에 김약항이 괜한 불똥을 뒤집어쓴 것이다. 이후 이 문제가 해결이 되면서 김약항은 광산군으로 봉해졌지만 조선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러다 또 다른 죄목으로 양쯔강으로 귀양을 가게 되는데 그때부터 은월루의 살수들이 김약항과 만우를 죽이기 위해 습격을 해오기 시작했다.

16553213645783.png“살수만이 아니라 무인이란 놈들도.”

일 년 동안 만우와 김약항은 지독히도 쫓겨 다녔고, 추격을 피해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그런 수라장을 거쳤기 때문에 만우는 고작 약관의 나이에 검기를 쓰는 절정고수가 된 것이다. 만우의 타오르는 듯한 공력과는 다르게 침착한 목소리에 어리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16553213645783.png“결국 어르신께서는 은월루의 흑살수란 놈에게 당하셨다. 돌아가실 때까지 양반으로서의 기개를 잃지 않으셨지.”

김약항은 절체절명의 순간에서도 복면을 뒤집어 쓴 놈들과 대화를 할 생각이 없다면서 일갈했다. 만우의 표정이 엄숙해졌다.

16553213645793.png‘흑살…… 수…….’

어리의 표정이 변했다. 흑살수는 광문자의 스승이다. 광문자가 지금 은월루를 대표하는 이라면, 흑살수는 그 이전에 은월루를 대표한 이다.

16553213645793.png“광산군…… 의 복수인 것인가요?”

어리가 힘들게 한 마디를 뱉어냈다. 만우의 기세를 견뎌내면서 한마디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어리의 공력도 만만치 않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만우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16553213645783.png“아니. 어르신은 돌아가시면서 내게 복수 따위는 생각하지 말라 하시더군. 내가 원하는 대로 살라고. 그래서 중원을 유람했다.”

누군가는 만우의 행보를 보면서 중원을 독보(獨步)한다 하였지만 만우에게 그건 어디까지나 유람이었다. 큰 세상을 보기 위해, 쫓겨 다니는 것이 아니라 큰 세상을 보고 견문을 넓히기 위한 유람이었다. 그런 와중에 검주란 별호를 얻고, 덤벼오는 이들을 차례대로 상대하다보니 무공에 빠져들기 시작해 지금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오 년. 불과 오 년 만에 검기를 간신히 뿜어대던 절정에서 화경까지 다다랐다는 것은 만우의 무(武)에 대한 재능이 하늘에 닿았다는 것이다. 그런 만우는 변변한 스승마저도 없었다. 조선의 대양진인으로부터 기천(氣天)을 배웠으나 명으로 가는 바람에 대부분 홀로 수련을 하였고 중원의 무인들과 실전을 치르면서 그들을 스승 삼아 화경에 올랐다. 이런 만우의 재능은 능히 무공의 기초를 세웠다는 무당의 장삼봉이나 소림의 달마, 마교츼 초대 천마와 비교해도 결코 뒤떨어지는 재능이 아니다.

16553213645783.png“그래서 이 힘을 가지게 되었고.”

콰가가각!!! 어리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만우는 손가락을 하나 까딱했을 뿐이지만, 단단한 나무가 속살을 드러내고 그 아래 깔려 있단 반석들이 퍽퍽 소리를 내면서 부서지면서 튀어나왔다. 그건 마치 거대한 짐승이 땅을 할퀴어 놓은 듯했다. 만우는 자신이 벌여놓은 흔적을 무감정하게 쳐다보고는 어리를 쳐다봤다.

16553213645783.png“조선에 돌아왔지. 내가 왜 돌아왔는지 궁금하지 않나?”

16553213645823.jpg“…….”

복수 때문이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중원을 유람하던 만우는 왜 조선에 돌아오게 되었을까? 임금과 어리의 얼굴에 비슷한 감정이 떠올랐다. 의구심이었다.

16553213645783.png“어르신께서는 고작해야 머슴일 뿐인 내게 잘 대해주지 못해 미안해하시면서, 네게 짐을 지워주지 않으시려고 했지만 그래도 가족에 대한 정을 버리시진 못하셨다.”

만우는 그렇게 말하며 임금을 쳐다봤다. 김약항을 명으로 보냈던 것은 지금의 임금이 아니라 상왕이다. 그럼에도 임금은 미간이 따가워지는 기분에 고개를 슬쩍 돌렸다.

16553213645783.png“어르신께는 몸이 약하신 아드님이 한 분 계셨지. 그리고 명에 계시는 동안 가끔씩 서신을 주고받으시며 몸이 약한 아들이 대를 이을 손자와 손녀를 낳았다는 것에 기뻐하셨다.”

어리의 눈이 커졌다.

16553213645793.png‘……그것과 은월루를 초토화시킨데에 관련이 있다? 대체…….’

16553213645783.png“조선에 오니 이미 어르신의 흔적은 사라진 지 오래였지. 그래도 어찌저찌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만우는 어리가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16553213645783.png“도련님은 돌아가셨고, 도련님의 아드님도 마찬가지였지. 하지만 한 명은 살아 있더군.”

만우의 목소리가 무거워졌다. 어리의 머릿속에 설마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16553213645783.png“김향. 함주의 관아에 속한 관기였다.”

16553213645823.jpg“……!!”

어리는 물론 임금의 눈도 커졌다. 임금은 만우가 함주로 가달라는 것을 처음에는 거절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런데 갑자기 가겠다고 했다. 그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16553213645783.png“본래 어르신께서 내가 원하는 대로 살라 하시었기 때문에 은월루 네놈들이나 왕에 대한 것도 접어두고 살려고 했다. 아니, 정확히는 아기씨께 물어보려 했지.”

김향이 복수를 원한다면 복수를 할 것이다. 표전 문제에 휘말려 명에 구류된 김약항으로 인해 김향의 집안은 박살이 나버렸으니 은월루와 왕을 죽여달라면 죽여줄 셈이었다. 대신 그것으로 만우와 김약항 집안의 인연은 끝이 난다.

16553213645783.png“그런데.”

만우의 두 눈에서 귀화가 뿜어져 나왔다. 어리의 어깨가 바들거리며 떨리기 시작했다. 만우가 말한 농락과 능욕이 이해가 간 것이다.

16553213645783.png“감히, 어르신 집안을 그렇게 만들어놓고, 어르신의 목숨을 앗아간 것도 모자라 김향, 그 아이를 은월루에서 데려가? 그것이 어르신 집안에 대한 능욕이 아니라면 무엇이더냐!!”

꽈르릉!!! 만우의 사자후가 터져 나왔다. 권희달은 급히 공력을 더욱 끌어 올렸다. 권희달의 입에서 비릿한 피맛이 났다. 공력을 과도하게 끌어올렸다는 뜻이다.

16553213645793.png“커헉!”

어리의 입에서 붉은 피가 후두둑 떨어졌다. 어리는 지금 만우의 공력에 짓눌려 완전히 오체투지를 한 모습이었다. 만우는 그런 어리를 내려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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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3213645783.png“차라리 너희들은 함주에서 날 만났어야 했다. 그랬다면 김향, 그 아이에게 손을 뻗치기 전이었으니 나의 용서를 바랄 수 있었을 터.”

스르륵. 만우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괘검이 그 푸른 예기를 터뜨리며 뽑혀져 나왔다. 만우는 손가락 두개만한 굵기의 괘검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검면에 비친 임금의 얼굴이 보였다.

16553213645783.png“조선의 왕. 그대는 할 말이 있는가?”

역발산기개세의 공력을 뿜어내는 만우의 앞에서 어리를 죽이지 말라고 할 담력이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으랴. 게다가 임금은 만우와 척을 지는 것보다는 어리를 버리는 것이 낫다고 이미 판단을 내린 뒤였다.

16553213712634.jpg‘저자는 건드리는 순간부터 조선의 손해다.’

만우는 비록 홀몸이었으나, 가진 바 무력은 경군 전체와 비교해도 오히려 경군에 손색이 있을 정도다. 그렇다면 만우를 상대하는 것은 조선의 큰 손해다. 척을 지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 임금은 생각했다. 그것이 옳은 결정이라고 임금은 생각했다. 임금은 이득이 없고 피해만 예상되는 싸움을 고집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16553213712638.png“그만!!!!!!”

스릉!!! 그런데 그때 동군영이 만우의 공력을 이겨내고 만우 앞에 서서 검을 들이밀었다. 동군영을 본 만우의 눈이 커졌다.

16553213645783.png“너, 너가 어떻게?”

동군영의 몸에는 공력이 없다. 공력이 없다면 만우의 공력에 항거할 수 없다. 만우가 힘을 경감시켰다고는 하지만 공력이 없는 만우가 이겨낼 정도는 아니다. 주르륵.

16553213645783.png“어리석은.”

하지만 그런 동군영의 허벅지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동시에 자신을 향해 들이민 검신에 피가 묻어 있었다. 본능의 경고에 움직이지 않는 자신의 몸을, 검으로 허벅지를 베어 뇌의 명령에 따르도록 만든 것이다. 만우는 혀를 한 번 쯧하고 차고서는 검을 들지 않은 손을 휘저었다. 그런데 그 순간 동군영이 만우에 의해 파헤쳐 속살을 드러낸 바닥에 검을 박아 넣었다. 카가각!

16553213712638.png“끄윽!!”

만우는 동군영을 다치게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조금 귀찮기는 했지만 그의 천성 자체가 악하지 않고, 어쨌거나 만우의 첫 번째 제자였기 때문이다.

16553213645783.png“후우…….”

그에 동군영이 땅에 검을 박아 넣으면서까지 물러서지 않자 한숨을 내쉬면서 들었던 손을 내렸다.

16553213645783.png“동군영…… 아니, 나리 때문에 기회를 한 번 더 얻은 줄 알거라.”

만우의 눈이 서늘하게 빛이 났다. 동시에 어리의 입에서 피가 왈칵 튀어나왔다. 어리를 짓누르던 압력이 사라지자 내부가 진탕되며 고여 있던 피가 흘러나온 것이다. 저벅, 저벅, 저벅.

16553213712634.jpg“후욱…… 후욱…….”

하얗게 변했던 권희달의 안색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하지만 권희달의 얼굴은 격한 비무라도 벌인 것처럼 땀으로 흠쩍 젖어 있었다. 임금은 대전에서 유일한 소음인 발소리를 내며 대들보에서 내려왔던 자리로 돌아가는 만우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그런 임금의 두 눈은 욕심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16553213712634.jpg‘저자가, 저자가 나의 검이 되어준다면.’

검주 만우. 검주와 대면한 임금이 만우에 대한 조사를 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 조사에 쓰인 것들이 거의 저잣거리의 이야기꾼들이나 할 법한 내용들이었다. 일검멸봉(一劍滅峰), 일검에 산봉우리를 없앴고, 이검단해(二劍斷海), 이검에 바다를 갈랐으며, 삼검관천(三劍貫天), 삼검에 하늘을 꿰뚫었다. 전부 이런 식의 내용뿐이었다. 거기에 중원에 출두한 지 오 년 동안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었고, 중원무인의 최고봉이라는 무림십좌의 일인이라는 것과 명 황실과도 무슨 사건이 있었던 것 같다는 것까지. 중원에서 만우의 족적은 말 그대로 무신이자 검선이라 불려도 아깝지 않을 행보들뿐이었다.

16553213712634.jpg‘명!’

대국이라 불리는 명, 그 명의 그림자는 너무나도 거대했기에 작고 약한 조선의 왕인 임금은 명과 동등한 위치에 서고자 하는 야망이 있었다. 고려를 통틀어 모든 왕이 한 번쯤은 꿈을 꿔봤을 것이다. 중화(中華)가 아닌 한화(韓華)가 중심이 되는 것. 동이(東夷)라 불리는 것이 아니라 중원, 저들을 서이(西夷)라 부를 수 있는 것. 그런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말이다. 불가능하고, 그것이 공상이라 치부했지만 만우를 보는 순간 그것이 어불성설(語不成說)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실현 가능한 진정한 제국(帝國)의 꿈! 그것을 깨닫게 된 임금의 숨결이 거칠어졌다. 자신도 모르게 ‘제국’이란 것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숨이 거칠어진 것이다.

16553213645793.png“으아아!!”

쾅!!! 하지만 그런 임금의 상념은 깨졌다. 오체투지를 한 채로 머금고 있던 피를 울컥하고 토해낸 어리가 기합을 내지르며 단단한 대전의 바닥에 이마를 찧은 것이다. 주르륵. 어리는 욱신거리는 통증이 이마에서 느껴지자 만우의 공력에 짓눌렸던 몸에 힘이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거대한 태산이 짓누르는 것 같던 만우의 공력이 사라진 지는 오래였지만, 놀란 어리의 몸은 그 공포를 기억하고는 움직이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털썩. 만우가 등을 돌리자 잔뜩 긴장했었던 동군영은 그 자리에서 털썩하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허벅지도 아팠거니와, 긴장이 풀리면서 다리도 함께 풀린 것이다.

16553213712634.jpg“희달. 동 어사를 데려오라.”

16553213712634.jpg“예, 전하.”

권희달은 검을 검집에 넣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만우를 보니 이 검을 손에 들고 있다고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16553213712634.jpg‘아니, 나는 운검이다.’

권희달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왕을 수호하는 운검이다. 상대방이 강하다고 해도, 자신이 몸을 날려 만우의 검을 찰나라도 만들 수 있다면 기꺼이 몸을 던져야 한다. 권희달은 비장한 표정으로 동군영을 부축해 뒤로 빠졌다. 그사이 어리는 찢어진 이마에서 흐르는 피가 얼굴을 뒤덮음에도 안간힘을 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16553213645783.png“할 말이 많은 표정인데?”

만우는 피가 흐르는 어리의 얼굴을 보고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어리는 피에 흠뻑 젖은 검은 천의를 벗었다. 그러자 피에 젖은 어리의 얼굴이 드러났지만 만우는 서늘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16553213645793.png“김향, 그 아이의 성이 김(金)가인 줄은 몰랐습니다. 그리고 알았다고 해도, 그 소녀가 광산군 김약항의 손녀라는 것은 알지 못했습니다.”

어리는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며 만우에게 말했다. 어리는 은월루의 수장이었지만, 만우에 대해서 철저하게 오판하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했다.

16553213645793.png‘길들이거나 구슬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평소 만우의 모습에서는 절대자란 것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검주라는 이름이 너무나도 멀어 보였다. 조선의 임금처럼 멀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단지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다.

16553213645793.png‘무릎을 꿇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는 맹수.’

어리는 만우를 보면서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자신은 은월루의 수장으로써 누군가에게 공포심을 가져서는 안 됐다. 조선의 임금에게도 공경은 했을지언정 공포심은 갖지 않았다. 하지만 만우는,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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