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네 소원은 이뤄졌다(2)2019.12.28.
어리였다. 검은 천의를 늘어뜨리고 능라비단을 걸친 화려한 기생 복장의 어리가 김향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안았다.
“집이, 집이 갑자기 이렇게…….”
“괜찮아. 다 알고 있단다.”
“저 때문인 걸까요…….”
김향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한양으로 오면서 김향의 마음의 벽은 허물어졌다. 아직 어리기 때문에 김향은 기댈 곳을 찾고 있었고, 어리는 따뜻하게 모성애를 발휘해 그런 김향을 보듬었다. 그 때문에 김향의 집안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했다는 것을 어리도 알고 있었다.
“아니. 네 잘못이 아니야. 걱정 마렴.”
어리는 김향의 머리를 슥슥 문질러 주었다. 그리고는 뒤에 선 광문자에게 말했다.
“아저씨. 향이 데리고 안전한 곳으로 가주세요.”
“아가씨는…….”
“전, 궁으로 가야겠습니다. 누가 감히 우리 은월루를 건드렸는지…….”
어리의 턱근육이 꿈틀거렸다. 그녀의 두 눈에서는 분노가 일렁였다. 그녀는 분노를 거세게 토해내지 않기 위해 꾹 참고 있었다.
“하오문의 수작이 아니라면 대체 누구일지…….”
광문자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하오문은 이곳이 은월루의 거처라는 것을 알아낼 정보력도 없었고, 그럴 실력도 되지 못 했다. 그렇다면 대체 누구란 말인가.
“가서 아저씨랑 맛있는 거 먹고 있으렴.”
“네, 언니.”
여전히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해 어깨를 축 늘어뜨린 김향과 광문자가 사라졌다. 어리는 들것에 실려 나오는 은월루의 조직원들을 보면서 이를 꽉 깨물었다.
“……감히!!!”
***
“어사 동군영은 고개를 들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동군영은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을 가라앉히며 고개를 슬며시 들었다. 그러자 한 번 보면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강렬한 인상의 임금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호군 김옥겸을 만나 조사의에 대한 사정은 들었으나, 아바마마의 이야기를 듣지 못 하였구나.”
“예, 전하. 그러면…….”
동군영은 만우와 함께 했던 지난 삼개월 가량의 여정을 하나씩 풀어놓았다. 임금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런 만우의 이야기를 들었다. 권희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실력의 끝을 짐작할 수가 없구나.’
동군영의 이야기에서 상왕인 이성계와 만우가 부딪친 이야기, 곡산 척가의 인물을 구해준 이야기에 왜상으로 위장한 왜인 무사의 이야기까지 나오자 임금과 권희달의 눈이 점점 커졌다. 한양과는 달리 그곳의 정세가 파도가 이는 바다처럼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중원에서 들어온 마교와 사림곡의 무인들도 만났나이다.”
“마교? 사림곡?”
동군영은 관아에서 강순일을 심문하던 자신을 공격한 것이 마교의 무인들이란 것을 만우를 통해 들었다. 끔찍하기 그지없는 기억이었다. 만우가 동군영을 그렇게 굴리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활을 쏜 그 무인이 방심하지 않았더라면 동군영은 필사(必死)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만우가 해준 이야기다.
“아니, 그전에. 과인이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임금은 마교와 사림곡보다 그 전에 동군영이 말했던 것을 믿지 못하는 얼굴로 되물었다. 동군영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왜인 슌스케를 생포한 공로를 상왕께서 참작하시어 방매란 여아에게 전주 이(李)씨의 성을 내리고 수양딸로…….”
“딸? 내 동생, 그러니 옹주로 삼으라고 하셨더냐?”
임금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여동생이 하나 생겼다는 것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권희달도 놀란 듯 눈이 부릅뜨여 있었다. 동군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사옵니다, 전하.”
“허…… 허어…….”
임금은 이번에는 정말로 놀란 듯 한참을 말을 하지 못 하고 허벅지만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그러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서. 그 아이는 어디에 있느냐?”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만 어쨌든 전주 이씨가 되었고, 상왕에게서 직접 성을 하사 받았으니 동생이라면 동생이다. 진짜 옹주처럼 궁에 받아들여 생활할 것인지 말 것인지는 그 아이의 선택에 맡길 것이다.
“워낙…… 바람 같은 아이라…….”
“희달.”
“예, 전하.”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임금이 권희달에게 명했다.
“그 아이…… 방매란 아이에 대한 모든 것을 조사해 오라.”
그 말인즉슨 어리의 은월루에게 맡기란 셈이었다. 하지만 그때 어리의 목소리가 대전 안에 울려 퍼졌다.
“신 은월루주 어리, 전하를 뵈어요.”
“……!!!”
동군영이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감히 뒤를 돌아볼 생각은 하지 못 했다. 아무런 기척도 없이 대전 안에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놀란 것이다. 하지만 임금과 운검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은 하나다.
‘궁에 드나드는 사람이 있었다고?’
게다가 ‘은월루’라는 이름이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동군영이 어디서 들은 것인지 기억을 더듬고 있는데 임금의 묵직한 목소리가 대전 안을 울렸다.
“그래. 간 일은?”
어리가 함주에 갔다는 것은 임금도 보고를 들어 알고 있었다. 어리는 고개를 숙이며 뇌쇄적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조사의와 동북면의 준동과 관련된 자료를 드리겠습니다.”
어리가 동군영을 쳐다봤다. 동군영을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다. 동군영이 검주 만우와 함께 다니고 있다는 것은 그녀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대가 동 기사관 앞에서 모습을 드러내다니. 상관없다는 것인가?”
“검주와 함께 다니신 분이니, 놀라시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답니다.”
만우의 이름에 동군영의 어깨가 흠칫하고 놀랐다. 어리의 말을 들어보니 만우도 이미 알고 있는 듯 했다.
‘그 친구가 이런 일이 안 얽힌다는 것이 더 이상하지.’
만우를 처음 봤을 때도 임금에게는 한 마디도 지지 않으면서, 자신에게는 나리라고 불렀던 만우다. 거기에 삼 개월 동안 동행하면서 함께 한 만우는 비범하기 그지없는 남자였다.
‘아! 만우!’
동군영의 눈이 커졌다. 만우에게서 ‘은월루’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었다. 만우는 은월루에 의뢰를 넣으려면 최소한 양반이어야 그 방법을 안다는 것을 알고는 동군영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은월루를 찾는 것 같았는데.’
하지만 만우가 왜 은월루를 찾으려 하는 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때 어리가 임금에게 말했다.
“조말생 부사의 저택에 큰 습격이 일어난 흔적이 있었습니다.”
“조말생?”
임금의 눈이 커졌다. 조말생은 상왕이 아닌 임금을 도와 견마지로를 다한 충신이다. 그가 그 공으로 관직에 오른 지 이제 일 년여가 지났을 뿐이다.
“조말생의 저택이 어찌하여?”
“저택이 반파가 되었습니다. 다행히 큰 피해는 없었으나…….”
어리의 입술이 달싹였다.
[흉수는 그곳이 은월루의 본거지인 줄 알고 있었던 듯하옵니다.]
“…….”
임금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은월루는 임금이 손에 쥐고 있는 소중한 비수다. 적에게 쉽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만약의 상황에서 치명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그런 강력한 비수인 것이다. 그런데 그 비수를 쫓는 누군가가 있었다.
[안변부사 조사의가 왜의 일월조라는 무사들과, 중원의 마교의 무인들과 접촉하였다고 하니 혹여나 그들의 습격일지도……]
“…….”
임금은 은월루와 마교 사이에 오간 거래를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다. 더불어 마교에서 꾸준히 은월루가 진 빚을 받아내기 위해 조선에 무인을 보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 거기 너. 계집. 네가 은월루의 루주였구나.”
그런데 그때 대전의 대들보 위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낯선 목소리는 아니었다. 동군영의 고개가 단박에 위로 치켜올라갔다.
“은월루의 루주가 그분의 손녀를 데려가고.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모양이로구나.”
사아아!! 대들보 위에 앉아 있던 만우의 기척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권희달도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강해졌다고 자부한 권희달이지만, 그는 여전히 만우와 실력의 차이가 크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검주.”
“만우 자네!!!”
임금이 허공을 밟고 내려오는 만우를 보면서 침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런 만우의 한 손에는 아혈이 짚인 채 만우의 손에 목줄기가 잡힌 조말생 저택의 행랑어멈이 매달려 있었다. 털썩. 하늘에서 계단을 밟으며 내려온 만우가 오른손에 들려 있던 행랑어멈을 어리의 발 어림에 던졌다. 어리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그녀의 눈에 분노가 차올랐다.
“검주!! 어째서!”
“어째서?”
만우는 어리가 김향을 데리고 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김향을 그렇게 만든 것은 어리가 속한 은월루였다. 그런데 김향을 데려갔다는 것은, 만우의 시선에서는 농락이고 능욕이다.
“그럼 너희 은월루는 어째서.”
만우의 두 눈에서 가공할 정도의 안광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이미 만우의 머리카락은 진즉에 거꾸로 서 있었고, 소맷자락은 터질 것처럼 펄럭이고 있었다.
“전하!”
권희달이 임금의 앞을 가로막으며 공력을 뿜어냈다. 그래야만 만우의 공력이 간접적으로 임금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을 간신히 막아낼 정도였다. 권희달은 만우를 보면서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어마어마할 정도의 공력이다.’
같은 화경이라고 해서 자신이 조금만 더 실전경험을 쌓는다면 만우를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권희달이 착각한 것이 하나 있었다. 경지가 높을수록, 같은 경지라 하더라도 그 경지 안에서의 실력이 하늘과 땅처럼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초절정까지만 해도 같은 초절정이라면, 숙련도에 상관없이 갓 초절정이 된 이가 숙련된 초절정을 격살하는 일이 있다. 그건 초절정이란 경지 안에서의 차이가 그리 크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경은 다르다. 화경은 인간을 벗어난 초인지경. 그렇기 때문에 같은 초인이라고 해도 재능이나 숙련도, 공력의 차이가 하늘과 땅처럼 벌어질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권희달에게 만우와 자신의 차이는 그 정도였다. 하늘과 땅 차이.
“크윽.”
만우의 공력이 뿜어대는 기세를 옆에서 비스듬히 받아내고 있던 권희달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전하. 물러나십시오.”
“…….”
권희달이 임금을 걱정하여 임금에게 말했지만 임금은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실로 무신이로구나.”
임금은 만우의 공력이 어리를 짓눌러 죽일 것처럼 뿜어지는 것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임금이 몸을 피하지 않은 이유는 만우의 진정한 실력을 보고 싶어서도 있지만, 다른 것도 있었다.
‘은월루에 검주가…… 김약항의 일 때문인가.’
임금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민했다. 어리냐 검주 만우냐. 그 결정을 자신이 내려야 한다.
“크읏…….”
만우의 어마어마한 기세를 정면에서 받아낸 어리의 입가에 혈흔이 번졌다. 만우의 공력만으로 내상을 입은 것이다. 어리 앞에 선 만우는 하늘에서 내려온 무신(武神) 바로 그 자체였다.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만우의 두 눈에서 시퍼런 기광이 일렁였다. 어리를 쳐다보는 만우의 두 눈에는 핏줄이 서 있었다. 만우는 힘겨워하는 어리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오 년 전.”
만우의 서릿발 같은 목소리가 대전 안에 내려앉았다. 이 대전의 주인은 붉은 곤룡포를 입은 임금이었으나, 만우의 목소리는 그의 위엄마저 뛰어넘을 정도로 차가웠다. 임금이 독대를 위해 주변을 물리지 않았더라면 아마 지금쯤 경복궁을 경군 전체가 몰려들어 포위를 했을지도 모른다.
“만우!!!”
동군영이 그런 만우를 불렀지만 만우는 동군영을 쳐다보지 않았다. 동군영은 움직이지 않는 자신의 몸을 보면서 이를 악물었다.
“으그극!!”
동군영이 몸을 움직이기 위해 온몸에 힘을 줬지만 내공 하나 없는 몸으로 만우의 공력을 풀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나마 만우가 동군영이 있는 곳은 절정을 뛰어넘은 공력 제어로 영향을 약하게 조절했기 때문에 동군영이 온몸을 누르는 압력을 제외하고는 멀쩡할 수 있는 것이다.
“아니, 정확히는 육 년 전 나와 어르신은 중원을 돌아다니면서 끊임없는 적들의 공격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