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네 소원은 이뤄졌다(1)2019.12.24.
“무화! 허탕입니다!”
“하아.”
임수미는 땀 때문에 이마에 들러붙은 앞머리를 옆으로 쓸어 넘기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도 허탕이란 말입니까?”
“잔챙이들밖에 없소. 아마 철저히 점조직으로 움직이는 것 같은데…….”
“고생만 하고 아무런 소득이 없군요.”
“어쩔 수 없지 않소. 여긴 흑의 놈들의 앞마당이니. 우리가 너무 방심했소.”
임수미는 쓰게 웃었다. 하오문의 간부는 자신들이 방심했다고 했지만 그건 애써 일어난 사태를 보고 자기합리화를 하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것이다.
‘작은 나라라고 얕보았구나. 여전히 얕보고 있었어.’
흑의의 실력은 결코 하오문의 아래가 아니었다. 자신들이 중원에서만 삼류이지 조선 같은 작은 나라에서는 일류라 생각했던 하오문의 분석이 철저하게 잘못됐다는 뜻이다.
“관군들이 몰려오오.”
“빠지죠. 약속된 지점에서 만나기로 하고.”
“예, 무화.”
휘이이익!!! 간부가 길게 휘파람을 불자 흑의의 근거지 중 하나라고 생각했던 곳을 초토화를 시키고 있던 하오문도들이 개미떼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러면서 삼삼오오 짝을 지어 사방의 골목길이나 저잣거리로 빠졌다. 무화는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뒤 기와지붕 위로 뛰어올라갔다.
“흑의.”
무화의 두 눈이 무섭게 빛을 발했다. 이처럼 그림자 같은 놈들은 본 적이 없었다. 쫓아도 계속해서 허깨비처럼 눈앞에서 사라졌고 귀신처럼 흑의의 근거지를 습격하면 관군이 나타났다.
“하오문의 한양지부장이 여자라니, 놀랍군요.”
파앗! 쉬리릭! 임수미의 몸이 허공에서 팽이처럼 돌았다. 그런 임수미의 손끝에서 단검이 빛살처럼 뻗어 나와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쇄도했다.
“어마?”
놀란 여자 목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그와 함께 날아들던 임수미의 단검이 허공으로 튕겨져 올라갔다. 임수미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내공을 불어넣어 날린 단검이 너무나도 쉽게 막힌 것이다.
“미모와는 어울리지 않게 거치신 분이시군요. 반가워요.”
하늘거리는 검은 천의를 머리에 쓴 여자는 어리였다. 하지만 검은 천의 뒤로는 얼굴의 윤곽밖에 보이지 않아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무화의 눈이 가늘어졌다.
“반갑다고 하기엔 그쪽에게 약이 많이 올라서 말이야.”
임수미는 이렇게 감정적인 여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어리를 보는 순간 뒷골이 짜르르하고 울렸다. 자신의 앞에 선 여자가 흑의의 중요인물이란 직감이 왔기 섰기 때문이었다.
“기생인가?”
어리는 기생 복장을 하고 있었다. 하늘거리는 천의로 얼굴은 가렸지만 쨍한 원색의 능단으로 만들어진 치마를 가슴까지 치켜 올렸고 짧디 짧은 저고리를 입어 팔을 움직이면 금방이라도 젖가슴을 가리는 속곳이 보일 것 같았다. 거기에 금 노리개와 화려하게 수가 놓아진 가죽신, 천의 밖으로 삐죽 솟은 비녀는 옥으로 만든 것이 틀림이 없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요.”
어리는 임수미를 보면서 눈을 빛냈다. 어리도 자신의 앞마당에 자리를 깔고 차지한 하오문의 수뇌부를 만나고 싶었다.
“조선 땅에는 왜 들어오셨나요. 보셨다시피 이곳은 저희가 먹고 살기에도 좁은 곳이어서.”
어리의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는 날이 서 있었다. 임수미는 그런 어리를 보면서 웃었다. 무화라는 이름에 걸맞게 임수미의 복식은 수수했지만 그녀는 얼굴 자체가 화려한 장신구나 다름없었다.
“정보는 많을수록 좋은 법이지. 조선은 명의 바로 이웃나라니까 더더욱.”
“흐음……. 과연 그것뿐일까요?”
어리는 임수미를 쳐다봤다. 아직 서로 밝히지 않고 손에 쥐고 있는 패가 많았다. 임수미는 어리의 무공 수준이 자신보다 낮지 않다는 것에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우리 조금만 더 솔직해지기로 하죠.”
어리가 임수미에게 말했다. 하지만 임수미의 입가에 조소가 걸렸다.
“얼굴을 드러내기 싫어 가리고 있는 그쪽과 솔직이라니. 말이 되지 않는 말이에요.”
“제 얼굴에 큰 흉이 있어서. 호호.”
어리는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임수미도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평행선만 달리다가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을 둘 다 알고 있었다. 어리가 임수미에게 먼저 말했다.
“조선에 들어온 이유. 정말 정보력을 넓히기 위해서인가요? 개방과는 다른 경쟁력을 가지기 위해?”
임수미가 움찔했다. 그것이 조선에 들어온 첫 번째 목적은 아니지만 확실히 그것을 노리는 바도 없지는 않았다. 정보를 모으고 그것을 사고 팜으로 인해 다른 강자들에게 존재의 이유를 인정받는 하오문에게는 다른 이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정보를 손에 쥐고 있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조선이다. 명과 이웃나라이며 동시에 만만치 않은 잠재력을 품고 있는 조선의 정보를 손아귀에 넣음으로써 무림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명 황실과도 연을 만들어놓기 위함이었다.
“그게 다는 아니겠죠. 이미 상당수의 중원 무림인들이 조선에 들어온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
임수미는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과연 상대는 조선의 정보를 손에 넣고 주무르는 이들이었다. 그게 아닌 다음에야 무림인들이 몰려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리 없다.
“어차피 그쪽, 하오문은 조선에서 살아남지 못해요.”
“뭐라고요?”
임수미의 눈이 뾰족해졌다. 하오문은 개방과 함께 중원에서도 가장 역사가 유구한 곳에 속한다. 소림사, 무당파 등이 없을 때에도 중원에는 거지와 기녀들은 항상 있어왔다.
“조선의 임금께서 아셨거든요. 뭐더라…… 제부투혼인가? 그걸 노리고 들어왔다는 것까지도.”
어리의 말에 임수미의 호흡이 순간적으로 가빠졌다. 제부투혼. 그것을 얻어가기 위해 막대한 비용을 감수하면서 조선에까지 손을 뻗은 하오문이다. 그런데 이미 그 사실을 조선의 임금이 알고 있다?
“무림맹의 정의대란 양반들이 왔다 갔어요.”
어리는 함주에 있었지만 그녀는 실시간으로 무슨 일이 조선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는지 마음만 먹으면 받아볼 수 있다. 전서구 한 통이면 한양에서 일어났던 일을 하루만에 받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주상전하께서는 그들에게 관직을 내리셨어요. 그 목표는…….”
“…….”
임수미의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어리는 재밌다는 듯 씨익 웃었다.
“제부투혼. 임금님께서는 조선의 군대에게 무공을 익히게 할 생각이신 모양이네요.”
임금이 그렇게 생각을 하게 된 데에는 만우의 영향이 지대했다. 조선제일검이라 불리는 권희달조차도 만우에게는 십초지적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 충격이 컸다.
“그러니 우리 영역은 침범하지 마세요. 아마 후회하실 일이 생길걸요?”
어리의 말에 임수미는 입을 다물었다. 조선의 임금이다. 조선이란 나라가 작다고는 하지만 그 조선의 임금이 동원할 수 있는 권력이란 것은 하오문을 멸문시키고도 남을 것이다. 한 나라의 국왕의 권력인 것이다.
“목표를 가지고 오셨으니, 목표만 노리고 가시라 이거예요.”
어리의 입꼬리가 하늘로 올라갔다. 임수미는 그런 어리의 말을 반박할 수 없었다. 어리가 조선 임금의 심중까지 이야기한다는 것에서 깨달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의 왕을 뒷배로 두고 있는 정보단체.’
그렇다면 이방인이자, 고작 삼류인 하오문과 승부가 될 리가 없다. 하지만 임수미는 고개를 내저었다. 임수미도 마지막 순간에는 팔아먹을 이름이 하나 있었다.
“글쎄요. 우리도 반드시 해야 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어서 말이에요.”
임수미는 검주를 떠올렸다. 검주는 하오문을 애용했다. 하오문은 그런 검주를 위해 시시콜콜한 일들까지 전부 처리했고, 수발을 들었다. 그러니 한 번쯤은, 검주 스스로의 편의를 위해서라도 하오문을 도와줄 것이다. 검주라면, 하늘에 닿은 그의 무위가 있다면 조선의 왕도 두렵지 않다. 명 황제를 상대로도 물러서지 않았던 검주다. 결국 명 황제는 검주를 무시하는 쪽으로 결정을 내렸다. 황궁에서 내로라하는 무장들도 검주에게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다음이다. 검주 하나를 위해 막대한 피해를 감수하느니, 그냥 무시하는 쪽을 택했다. 저 광활한 영토를 다스리는 명 황제가 말이다.
“이유?”
어리의 눈 사이에 고랑이 파였다. 어리는 다른 이유까지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아니, 다른 이유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우리가 사라지면 곤란해하실 분이 한 분 계셔서.”
“한 분? 고작 한 사람 때문에 우리에게 대적하겠다는 건가요?”
어리의 눈이 커졌다. 한 조직을 끄는 수장의 입장에서 볼 때 임수미의 답변은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는 대답이었다.
“그 한 사람이 조선의 국왕보다 더 두렵다는 뜻?”
어리는 임수미에게 물었다. 하지만 임수미는 그런 어리의 궁금증에 대답을 할 필요가 없었다. 임수미는 씩 웃으며 양손에서 단검을 뽑아들었다.
“궁금하면 요금을 내고 정보를 사시면 됩니다. 손님. 그리고 요금은…….”
임수미의 두 눈에 살기가 피어올랐다.
“당신의 목숨이 되겠죠.”
흑의의 중요인물로 보이는 저 여자가 자신의 앞에 나타난 것 자체가 실수다. 임수미가 어리에게 뛰어들려는 찰나, 임수미의 표정이 변했다. 파바박!!! 임수미의 손에 들려 있던 단검이 부채꼴 모양을 한 채 전방으로 쏘아졌다. 그런데 아무도 없던 허공에서 임수미가 던진 단검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아가씨.”
“무슨 일이죠?”
임수미가 자신을 공격하려 했다는 것에 눈이 뾰죡해졌던 어리의 표정이 바뀌었다. 당혹스러워하는 음성이 어리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거기가…… 네? 대체 무슨…….”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허공에서 뚝 떨어진 사내, 광문자는 임수미를 힐끗 쳐다봤다. 그와 눈을 마주친 임수미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고수!’
상대는 임수미가 감히 손도 섞을 수 없을 만큼의 고수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기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사람은 눈까지 변장할 수는 없다. 부르르. 임수미의 양팔에서 소름이 우수수 일어났다. 임수미는 이를 악물고 몸을 날렸다. 휙! 하지만 광문자는 그런 임수미를 쫓지 않았다. 하오문의 지부장 따위를 잡는 것보다 더 큰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조말생 부사의 저택이 반파가 되었다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어리가 광문자를 쳐다보며 높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광문자가 그 연유를 알 리 없었다. 광문자는 다른 곳에 가있었기 때문이었다.
“모시겠습니다.”
“네. 네…….”
조말생 대감의 저택은 은월루의 진짜 본거지 중 하나다. 그곳이 습격을 받았다는 소리는 누군가 은월루의 진신(眞身)에 한 발자국 가까워졌다는 뜻이다. 휙! 어리의 손을 잡은 광문자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꺼지듯이 픽하고 사라졌다.
“조말생이라?”
사라진 줄 알았던 임수미의 얼굴이 처마 밑에서 불쑥하고 튀어나왔다. 코를 킁킁거린 임수미가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씩하고 웃었다.
“천리추종향(千里追蹤香)을 묻혀 놓았을 줄은 몰랐겠지.”
임수미가 날쌘 고양이처럼 지붕을 밟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
“여기. 오늘 품삯이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흘흘흘.”
조 할아범은 꾸벅 고개를 숙이는 김향을 보면서 귀엽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김향은 양손을 꼭 움켜쥐고는 자신이 이제부터 머물 고래등같은 기와집으로 향했다.
“……어?”
“물러서라! 물러서!!!”
북촌에 위치한 그 기와집은 보기만 해도 숨이 탁 트일 정도로 넓었다. 그런데 불과 반나절만에 그 커다란 저택에 반파가 되어 있었다. 그 주변으로는 소란을 듣고 온 사람들과 그런 군중을 밀어내려는 포졸들의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김향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망연자실하게 그곳을 쳐다봤다.
“어, 어떻게 된 거지?”
저 거대한 저택이 반파가 될 정도로 소란이 벌어졌으면 약재상에서도 그 소리가 들려야 한다. 하지만 김향이 장담하건데, 약재상이 위치한 운종가는 고요했다. 북촌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운종가에 이런 소란이 일어났다면 들리지 않을 리가 없다.
“아줌마! 아줌마!!”
놀란 김향은 무너진 저택을 향해 뛰어갔다. 하지만 김향은 포졸에게 막혀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었다. 김향은 포졸에게 말했다.
“아저씨. 저 원래 여기 살던 사람이에요. 아줌마가, 아줌마가…….”
“들어가면 안 된다는 엄명이 내려졌다. 안 돼. 돌아가.”
김향이 간절하게 말했지만 포졸은 가차 없었다. 김향은 결국 포졸에게 막혀 들어갈 수 없었다. 이게 무슨 팔자인지, 김향은 고개를 툭 떨궜다.
“무사했구나.”
“어, 어…… 언니!”
그런데 그 때 들려온 어리의 목소리에 김향이 고개를 퍼뜩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