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9. 아, 네가 철권이구나?(4)2019.12.10.
그리고 그건 동군영과 방매도 마찬가지였다. 만우를 볼 때면 두려워하다가도 가끔 눈에서 살기를 번뜩이던 슌스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주군이라니.
“주군?”
“예 주군! 주군으로 모시겠습니다. 견마지로…… 아니 우마지로를 하겠습니다!!!”
“이미 넌 우마(牛馬)인데?”
“그……그러면 노비가 되겠습니다. 노비.”
슌스케는 교수를 상대할 수 없을 것 같자 곧바로 만우에게 무릎을 꿇은 것이다. 교수도, 만우도 비슷하게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존심도 없냐?”
“강자에게 무릎을 꿇는 것은 당연한 일! 청출어람이야말로 소장이 원하는…….”
“청출어람은 스승이고.”
“어, 어쨌든 주군께서도 중원에서 유명한 무인이라고 하시지 않으셨…….”
“중원?”
교수의 시선이 만우에게로 돌아갔다. 이미 의주의 객잔에서 한 번 만난 적이 있었지만 그는 자신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는 것을 몰랐다. 만우가 폭발하기 직전에 검인이 끼어들어 교수의 시선을 돌렸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곡산척가의 존재도 교수를 주춤하게 만들었었다.
“조선에서 만난 중원에서 온 무인이라…….”
교수가 만우의 얼굴을 뜯어보면서 히죽 웃었다. 그는 만우에 대해서 못 알아보는 눈치였다. 만우를 만난 이들은 패배한 것이 창피해서 만우에 대해서 최대한 숨겼기 때문에 무림십좌의 일인인 검주의 용모파기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만난 이들 외에는 없었다.
“저놈을 저렇게 만든 것이 네놈이겠지?”
교수는 흥미를 담아 만우를 쳐다봤다. 한 팔을 잃기 전 슌스케라면 자신과 비등할 것이라는 것을 교수도 느꼈다. 그런데 슌스케가 주군이라 부르는 이고,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만우가 슌스케를 저렇게 만들었다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슌스케보다 더 강한 무인이 만우라는 소리다.
“그런데 입는 옷은 하인이 입는 옷이고…… 뭐 하는 놈이지?”
교수는 만우를 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만우에게서 느껴지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교수의 눈가에 옅은 긴장이 스쳐지나갔다.
‘강자라고?’
자신이 기운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자기보다 윗줄의 고수라는 뜻이다. 아니라면 기운을 숨길 수 있는 특수한 무공을 익혔던가.
‘이 작은 조선에 강자가 이런 노상에 있을 리는 없다.’
교수는 만우를 독특한 무공을 익힌 이라 생각했다. 그리고는 만우에게 말했다.
“거기. 하인 옷 입은 놈. 중원에서의 별호가 뭐냐?”
“나? 내 별호를 알고 싶다면 네놈의 별호부터 말해야 하는 것이 도리가 아니더냐?”
“나?”
교수는 픽하고 웃었다. 놈의 당당함이 썩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교수는 주먹을 쿵쿵 부딪치면서 말했다.
“철권. 철권이라 부른다.”
철권 교수의 이름은 전국구다. 한 개 성(省)에서만 유명한 고수들보다 한 단계 윗줄의 명성을 날리는 고수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슌스케를 제압할 정도의, 중원에서 활약한 무인이라면 자신의 이름을 들었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리고 만우는 그 기대를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교수가 예상하지 않은 방향으로 말이다.
“아, 네가 철권이구나?”
마치 동네 똥개를 부르는 듯한 말투로 만우는 피식 웃으며 교수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교수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벙찐 표정을 지었다.
‘아니. 저 왜놈을 제압할 정도라면 나와 비슷한 경지니……. 놀라지 않을 수도 있다.’
교수는 울컥하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하지만 교수가 이렇게 만우에게 일부러 말을 거는 이유가 있었다. 기린대가 김옥겸을 제압하고 확보할 시간을 주기 위해 만우의 시선을 끌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교수는 부처님 손바닥 위에 있는 손오공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아. 눈깔 굴리지 마. 뭐 때문에 나랑 대화하는 ‘척’하는지 알겠으니까.”
여반장(如反掌). 만우는 손바닥을 한 번 뒤집었을 뿐이다.
“억?”
“어억!!!”
그러자 김옥겸에게로 향하던 기린대의 무인들이 동시에 허공으로 둥실 치솟았다. 그것을 본 교수의 눈이 커졌다. 대체 저게 무슨 사술인지 들어본 적도 없는 기사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주구우우우운!!”
슌스케가 그런 만우를 보면서 머리를 쿵쿵 땅바닥에 찧었다. 역시 만우는 자신이 함부로 비빌 수도 없는 경지의 고수였다. 폭력에 굴복하기는 했지만, 그 차이를 인정하고 나니 차라리 마음이 편해진 슌스케다.
“이 선 뒤로는 가지 마. 응?”
만우가 손바닥을 세워서 뒤로 부드럽게 밀자 마치 바람에 밀려나는 민들레 씨앗처럼 기린대 무인들이 뒤로 날아갔다. 놀라운 것은, 그냥 날려 보낸 것이 아니라 속도까지 조절해 기린대 무인들이 털끝 하나 다치지 않도록 했다는 것이다. 교수의 모골이 송연해졌다. 촤악! 동시에 교수는 자신의 발가락에서 한 치 떨어진 지점에 땅이 패이면서 줄이 가는 것을 봤다. 주르륵. 교수의 목덜미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만우가 대체 어떻게, 무슨 수로 이 줄을 그었는지 그의 눈에도 기감에도 읽히지 않았다.
‘고수였어. 고수였다고!’
철권은 강자 앞에서 물러나지 않는 강한 투지를 가진 무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항거할 수도 없는, 마치 사람 앞의 개미 같은 위축감을 주는 상대에게 달려들 정도로 만용을 부리는 성격도 아니었다.
“자. 네 이름이 철권이라고?”
“그, 그렇다.”
철권 교수의 목소리에 힘이 빠졌다. 만우는 재밌다는 듯 목소리가 유쾌해졌다. 교수를 보니 단순한 것이 꼭 감령이나 필두를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뒤에 있는 저 사람을 쫓는 이유는?”
“…….”
교수는 만우를 쳐다봤다. 자신이 철권이란 것을 알았으면서도 저렇게 태연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만우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허장성세인가? 아니면 정말 고수인가.’
저게 허장성세라면 정말 하늘이 내린 연기의 신일지도 모른다. 교수는 자꾸만 만우가 자신보다 고수일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본능은 계속해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노오…….”
“그 주먹. 내지르면 평생 외팔이로 살아야 할 거야.”
사악!!! 타다닷!!! 만우의 입에서 섬짓한 한 마디가 흘러나옴과 동시에 교수는 자신의 어깻죽지가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 때문에 교수는 경악을 하면서 뒤로 몇 발자국이나 물러섰다. 하지만 영문을 모르는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교수가 갑자기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선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
기린대의 무인들 사이에서도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만우가 믿을 수 없는 공력으로 자신들을 뒤로 날려 보낸 것을 직접 겪어본 이들이 만우의 범상치 않음을 눈치챈 것이다. 거기에 자신들의 대주마저도 맥을 못 추는 듯 했으니, 기린대 무인들의 눈빛이 변했다.
“감이 좋은 놈이네.”
만우는 교수를 보면서 이죽거렸다. 하지만 교수는 입 하나 뻥끗할 수도 없었다. 교수의 안색이 시커멓게 변했다. 만우는 틀림없이 자신보다 고수였다.
‘이런 고수가 어찌하여 이 작은 반…… 설마!!!!!“
교수의 눈이 커졌다. 그가 그냥 한 귀로 듣고 흘려보냈던 소문의 내용이 위기에 처하자 또렷하게 떠오른 것이다. 교수의 두 눈이 떨렸다. 이내 교수가 힘들게 입을 열고는 만우에게 물었다.
“호……. 혹시……. 검주 되시오?”
“검주!!!!!”
기린대 무인들 사이에서 소리 없는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놀람을 참지 못 하고 비명을 내지른 한 명만 입을 턱 틀어막고 만우의 눈치를 본 것이 전부다. 만우는 히죽 웃었다.
“맞아.”
“아…… 아아…….”
만우가 가볍게 맞다며 수긍하자 교수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이제야 감이 오기 시작한 것이다.
‘동쪽. 동쪽으로 검주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었거늘…….’
왜 그 동쪽이 이 조선일 것이라고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인지, 교수는 자신의 무신경함에 치를 떨었다. 하지만 이미 일은 벌어졌다. 교수는 차라리 정체 모를 상대의 정체라도 알게 되자 긴장이 약간 풀리는 것을 느꼈다.
“이곳에서 검주를 뵐 줄은 몰랐소.”
“이제 말이 조금 공손해졌구나.”
만우는 재밌다는 듯 웃었다. 확실히 사파의 무인들은 정파나 마교의 무인들이 내세우는 쓸데없는 자존심이 별로 없어서 좋았다. 상대방과의 격차를 인정하면 깔끔하진 않더라도 일단 인정하는 척이라도 하는 놈들이었기 때문이다. 상대도 안 되는 것들이 자존심을 내세워 앞에서 깝죽대는 것만큼 사람을 열받게 하는 것이 없다.
“저…… 저 사람은 대체 누구요?”
김옥겸이 갑자기 순한 고양이가 된 것처럼 꼬리를 내린 교수와 기린대 무인들을 보면서 동군영에게 물었다.
“저도 잘 모르옵니다만…… 대국에서 유명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대국에서? 조선인이 아니오?”
“조선인이 맞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김옥겸에게 소근대던 동군영은 할 말이 궁벽해졌다. 사실 만우와 지난 몇 달을 함께 지냈으나 만우에 대해서 그가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당장만 해도 그가 왜 중원으로 넘어간 것이지를 몰랐다.
“어쨌든, 만우는 무지막지할 정도로 강합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강자이기도 합니다.”
“어찌하여 저런 자가 하인의 복장을 하고…….”
“신분이 미천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것에 크게 욕심도 없고요.”
김옥겸은 경탄에 찬 눈으로 만우를 쳐다봤다. 지난 열흘 동안 저 추격자들은 김옥겸에게 저승사자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눈앞에 저승사자를 점잖은 고양이로 만들어 버린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김옥겸도 무인이기에 만우를 보면서 전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본주에 대해서 알았다니 그러면 말이 술술 풀리겠구나.”
만우는 자신을 보고 쪼그라든 교수와 기린대를 보면서 히죽 웃었다. 자신에 대해 알고 있다면, 자신이 무엇을 원할 때 어떻게 해야 할지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무림에서는 강자가 곧 법이다.
“다시 한번, 하지만 마지막으로 물으마.”
만우는 두 번은 없다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교수는 눈을 질끈 감았다. 황금 열 냥에 눈이 팔려 사지로 뛰어든 셈이다. 검주가 저렇게 말했다면 검주가 원하는 답을 주든, 아니면 뻐팅기다가 검주의 검에 쓰러지는 양자택일밖에 남지 않았다.
“저 뒤에 있는 자, 왜 쫓은 것이냐?”
*** 교수와 기린대는 결국 꼬리를 만 강아지가 되어 잔뜩 기가 죽은 채로 만우 앞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황금 열 냥이 문제가 아니었다. 황금 백 관을 준다고 해도 결국 자신의 목숨이 가장 중요한 법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철권 교수는, 인생 처음으로 마주한 무림십좌의 높은 벽을 깨닫고는 자만심을 버리고 절치부심해 반드시 화경에 오르겠다는 동기부여가 되어 주었다.
“고맙네. 내 반드시 이 일은 주상전하께 고하여 그대들에게 상이 내리도록 하겠네.”
김옥겸은 그 고생을 다한 뒤 한양에 살아 돌아왔다는 것이 감격스러워 만우와 동군영에게 거듭 고마움을 표했다. 그렇게 김옥겸은 한양에 입성하자마자 임금을 알현하겠다며 경복궁으로 향했고, 동군영과 만우, 방매는 주막에 짐을 풀었다.
“설 대감님 집으로는 안 가?”
함주에서도 주막 생활을 한 것이 지겨웠던 것인지, 방매가 만우에게 말했다. 만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가 그곳에 가서 좋을 게 없어. 편하긴 하겠지만…….”
“왜! 어사 나리를 모시고 가서 상왕 전하도 뵙고 왔는데.”
“아. 넌 궁에 들어갈 수 있겠다. 주상전하의 여동생이 됐잖아?”
“돼, 됐어!!”
방매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이방매. 마침 방자 돌림인 이성계의 자식들이었기 때문에 이성계가 내린 이(李)씨에 방매의 이름이 잘 들어맞았다. 하지만 방매는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어차피 내가 입궐하여 함주에서 있었던 일을 고하면 주상전하께서도 아실 텐데.”
“으으…… 그건 나중에 생각할래요. 전 나갔다 옵니다. 이거 가공할 사람을 찾아야겠어요.”
방매는 동군영에게 둘러대듯 말하고는 바람을 일으키며 주막에서 빠져나갔다. 만우는 동군영을 쳐다봤다.
“너는 곧바로 입궐 안 하고?”
“어사란 걸 동네방네 알릴 생각이라면 그래도 되겠지. 그게 아니라면 아마 야심한 시각이 되면 알아서 나를 찾으실 거야.”
동군영이 이미 도성 안에 들어왔다는 것은 임금에게 알려졌을 것이다. 만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중에 궐에서 보도록 하지.”
“만우. 자네는 어디를 가려고?”
만우가 궁에 들어가는 데는 딱히 안내자가 필요 없었다. 어차피 안내자가 없이도 만우는 아무도 모르게 궁에 들어갈 수 있는 능력이 차고 넘쳤다.
“찾을 사람이 있거든.”
만우는 씩 웃었다. 어리와 광문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김약항의 손녀인 김향의 단서를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전에 간장도 가서 만나고.”
약 세 달 동안의 짧은 여정이었지만 간장이라면 괘검보다 더 쓸 만한 무기를 만들어 냈을 것이다. 만우는 콧노래를 부르며 주막을 나섰다.
“주, 주군!”
그때 슌스케가 주막 안에서 뛰어나왔다. 만우는 슌스케를 보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진짜 주군이라고 하게?”
“한 번 주군이라고 부르기로 했으니, 주군으로 모시겠습니다.”
슌스케는 만우의 무력에 완전히 굴복했다. 자신의 한 팔이 성해도 동수를 이룰까 말까 했던 철권을 상대로 공포에 질리게 한 만우의 무력을 똑똑히 본 슌스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