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7. 아, 네가 철권이구나?(2)2019.12.03.
“뭐라고? 한 번 더 해봐.”
“들었잖아! 우씨!”
만우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하자 방매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일어섰다. 쿵!
“억!!”
그 바람에 수레의 균형이 흐트러지면서 수레가 쿵하고 바닥에 부딪쳤다. 동군영이 엉덩이에서 느껴지는 둔중한 충격에 억하는 소리를 냈다. 휙! 타닥! 방매는 붉어진 얼굴로 수레 위에서 뛰어내렸다. 누가 봐도 부끄러워하는 얼굴이었다. 방매가 붉어진 얼굴로 만우를 쳐다보며 손가락질을 했다.
“하, 하라고 해서 했다! 그러니까 만우 너도 약속 지켜!!!”
“오라버니라고 한 번 했다고?”
“어쨌든 남아일언 중천금이야! 거짓말하면 가운데 그거 떨어진다!!!”
방매의 협박에 만우가 중심을 슬그머니 손으로 가렸다. 하지만 그러고도 부끄러움을 해소하지 못한 방매가 숲 속으로 도도도 뛰어갔다.
“어디가!!”
“땔감 구하러!! 물어보지 마!”
방매가 빼액하고 소리를 질렀다. 만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성격이 보통 지랄맞은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좋겠어?”
“뭐가?”
엉덩이를 문지르면서 일어난 동군영이 만우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도 오라버니 소리 들었잖아.”
“그게 들은 거야? 그리고 말 한마디로 퉁치려고 하는 건데.”
“그 정도로 불안한 거라고 생각해 주면 되지 않나.”
“끙.”
만우는 방매의 불안함을 고스란히 읽었다. 그런데 그게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은 몰랐다.
“그래야지. 하는 수 없지.”
만우는 한숨을 살짝 내쉬고서는 주변을 둘러봤다. 만우가 수레에 몸이 묶인 채 주저앉아 있는 슌스케에게 말했다.
“가서 물이나 떠와.”
“예, 옛!”
만우의 목소리에 슌스케가 화들짝 놀라며 숲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초절정 고수의 청력이라면 개울가가 어디에 있는지 금방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잘 됐네. 딱 마지막 분량의 건량이 남았는데.”
맨 처음에는 만우가 슌스케에게 심부름을 시키는 것을 보면서 그가 도망갈까 걱정했던 동군영이었다. 하지만 만우의 공포가 각인된 슌스케가 맨날 알아서 잘 돌아왔기 때문에 동군영은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았다.
“흐음.”
수레에서 내려 근처에 자리를 깔고 노숙 준비를 하던 만우의 고개가 한 쪽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갸웃했다.
“왜? 또 뭐가 느껴져?”
만우가 저럴 때는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학습 효과로 깨달은 동군영이다. 하지만 만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아닌 것 같은데.”
만우가 다시 고개를 돌리자 동군영은 어깨를 으쓱했다. 한양이 바로 코앞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랴 싶었기 때문이다.
“끙…… 끄응…….”
“방매야?”
지익, 지익 그런데 그 때 수풀 쪽이 들썩이더니 방매가 낑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안간힘을 낼 때 나는 소리였기 때문에 동군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나리, 여기……끄응.”
들썩. 잠시 후 방매가 힘들어서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나타났다. 동군영은 방매가 힘들게 끌고 온 것을 보고는 눈을 크게 뜨고는 서둘러 달려갔다. 사람이었다.
“이, 이보시오. 이보시오!!!!”
방매가 끌고 온 사람은 의식을 잃은 채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다. 옷이 여기저기 헤져 있고 머리가 산발이 되어 있는 것이 흡사 산적을 보는 것 같았다.
“산적 아니에요, 나리?”
방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매는 이 사람을 산 언저리에서 발견했다. 불을 피울 바싹 마른 나뭇가기를 찾기 위해 땅을 보고 걷다가 발견한 것이다.
“한양 주변에 산적이 있을 리가 있는가!”
동군영은 방매를 원망의 눈길로 쳐다봤다. 안 그래도 아픈 사람을 방매가 끌고 오느라 여기저기 새로 상처가 나 피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전 산에 쓰러져 있길래…… 아니 애초에 왜 사람이 여기 쓰러져 있어요!”
아까의 부끄러움은 다 해소한 것인지 방매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동군영에게 말했다. 동군영은 쓰러진 남자의 옷매무새를 손으로 문질러보더니 만우에게 말했다.
“이 사람, 양반이다.”
“뭘 보고??”
만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만우의 눈에는 그냥 거지꼴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군영은 고개를 저었다.
“견사(繭絲)로 만들어진 옷이다. 만져봐.”
“오, 진짜!”
방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만우는 견사나 천이나 그게 그것처럼 느껴졌다.
“명주로 만든 옷을 입으면 양반이지. 아니 그런가?”
“맞아요. 맞아.”
방매와 동군영이 그렇다고 하니 만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 양반이 이런 데…….”
“신발이 닳은 것을 보아하니 엄청 먼 길을 온 모양인데…….”
동군영은 남자의 신발을 보고서는 중얼거렸다. 가죽신이 여기저기 헤져 있었다. 명주로 된 옷을 입을 정도면 저 가죽신도 튼튼하게 만든 신이었을 것이다.
“누구에게 쫓기는 것이 아닐까요?”
방매가 남자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남자의 옷 여기저기는 긁혀 있었다. 거기에 방매가 발견한 곳은 수풀 안이었다.
“수풀 속에 정신을 잃기 전에 들어간 거라면 누군가를 피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요?”
방매의 말에 동군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으…… 으으…….”
그때 남자가 눈을 떴다. 간신히 눈을 뜬 남자는 바싹 마른 입술로 무언가를 헐떡였다. 그 때 동군영이 가죽 주머니에 담긴 물을 남자의 입가에 흘려주었다.
“으…… 으으으…….”
몇 번이나 간 것 같은 쇠 긁는 소리가 남자의 목에서 나왔다. 남자는 가죽 주머니에 담긴 물을 반이나 먹고서야 간신히 힘을 되찾아 눈을 떴다.
“배, 배고…….”
“…….”
만우는 고개를 돌려 아직 조리하기 전의 건량을 쳐다봤다. 여행이 용이하게 곡물을 말려서 만든 건량은 물에 풀어서 끓이면 먹을 만한 죽이 된다. 육포도 있었지만 육포는 이미 오면서 다 먹어버렸기 때문에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걸 먹여야겠네.”
“……우리는 굶고?”
만우는 굶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누가 보면 머슴 근성이라고 하겠지만 만우는 식도락을 삶의 중요한 요소로 여기는 사람이다. 특히 중원에서 이름을 날린 이후에는 단 한 번도 굶은 적이 없었다.
“내일이면 우리는 한양에 들어가지 않나. 당장 사람이 사는 것이 우선이지.”
“…….”
만우는 쓰러져 꿈틀거리는 남자를 쳐다봤다. 확실히 뭐라도 먹이지 않으면 금방 죽을 것 같은 형상이기는 했다. 만우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 먹고 싶으면 사냥이라도 해서 드시게. 그 무공은 익혀서 어디에 써먹을 참인가?”
동군영이 만우에게 핀잔을 주고는 건량이 든 주머니를 들고 남자에게로 향했다. 만우는 인상을 썼다.
“무공으로 사냥을 하라고?”
만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정도로 배고프진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공을 사냥하는 데 쓰는 것이야 말로 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을 쓰는 격이었다. 마침 만우에게는 아주 쓸 만한 사냥개도 있었다.
“내 무공이 아깝지.”
굶어 죽기 직전이면 뭐가 아깝지 않겠는가. 하지만 지금은 그 정도의 정신은 있었다.
“왜구!!”
후다다닥!! 만우가 내공을 담아 슌스케를 불렀다. 만우는 슌스케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만우에게 슌스케는 그냥 왜구였다. 파바박!
“부, 부르셨습니까.”
만우가 부르는 바람에 전력을 다해 달려오느라 떠오던 물의 반을 몸으로 뒤집어 쓴 슌스케가 만우 앞에 섰다. 만우는 몰에 빠진 생쥐꼴이 된 슌스케를 보고 인상을 살짝 쓰고는 슌스케의 옷자락을 손으로 잡았다. 화아아악!
“억?”
슌스케가 눈을 부릅떴다. 잠깐 따뜻한 느낌이 난다 싶더니 물에 잔뜩 젖었던 옷이 순식간에 말라버린 것이다.
‘괴물!’
슌스케는 눈을 크게 뜬 채 소리 없이 경악했다. 삼매진화는 매우 까다로운 기술이다. 엄청난 내공을 잡아먹는 것도 모자라 화력을 조절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내공의 조절이 경지에 다다르게 되면 이렇게 옷만 마르게 하는 것도 가능했다. 물론 슌스케는 이런 것을 듣도 보도 못 했다. 하지만 내공이 움직였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나도.’
화르륵
“우, 우악!!”
퍽, 퍽. 만우의 그것을 보고 따라하고 싶었던 슌스케가 만우가 움직였던 것처럼 내공을 움직였다. 그러자 슌스케의 옷자락에 순식간에 옷이 화악하고 붙자 놀란 슌스케가 주먹을 자신의 가슴팍을 때려댔다.
“뭐하냐.”
“코, 콜록.”
눈썹이 후두둑하고 떨어져 내리는 것이 슌스케의 눈에 들어왔다. 만우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슌스케를 쳐다봤다.
“안 그래도 별로인 얼굴에 눈썹도 없으니까 진짜 못 봐주겠네.”
눈썹이 사라진 슌스케가 눈을 씰룩였다. 만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배고프니까 사냥 해 와.”
“예, 옛!!!”
자신이 직접 삼매진화를 펼쳐보고서 그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깨달은 슌스케가 삼매진화의 막대한 내공 소진으로 무거워진 몸을 한 채 숲으로 다시 달려갔다.
“조, 조사의라 하셨습니까?”
그때 동군영의 목소리가 하늘 높이 울려 퍼졌다. 조사의란 말에 만우 역시 고개가 동군영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우걱우걱. 끄덕끄덕. 그곳에는 양 볼이 미어터지게 건량을 밀어 넣은 거지꼴의 남자가 동군영의 말에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고 있었다. *** 정파의 무림맹에 맞서 사파의 대방파들이 모여 만든 사림곡은 사파인 중 그 무공과 명성이 강호에 널리 알려져 있는 철권 교수를 대주로 임명하여 일류 고수 서른 명으로 구성한 기린대를 만들었다.
“그놈 참, 미꾸라지 같은 놈이로구나.”
교수는 산중에 희미하게 남은 흔적을 보고는 입맛을 쩝하고 다셨다.
“무공 실력과 잠행술이 어찌 이리도 차이가 날꼬?”
그런 교수는 지금 한 남자를 쫓고 있었다. 문제는 초절정 고수인 교수와 일류 고수로 구성된 기린대 전원이 나섰음에도 무공 실력도 변변치 않은 그 놈의 뒤꽁무니만 쫓아다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 시진 내에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파의 무인들은 살기 위해 별의별 잡술들을 다 익힌다. 교수처럼 재능이 특출나 잡술을 익힐 필요가 없다면 모를까, 사파의 무인들은 살아남기 위해 잡술을 서너 가지는 익히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개중에 어떤 놈들은 방중술까지 익히고 있었으니, 기린대의 무인들도 유명하다 싶은 놈들을 다 모아놓은 것이기 때문에 익히고 있는 무공과 잡기가 각양각색이었다.
“한 시진. 닷새가 지나도록 잡지 못하다니 이거 제대로 우스워 보이겠구나.”
교수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그러자 기린대의 무인들이 자신들도 모르게 움찔했다. 교수의 성격이 무공만큼이나 단순무식하기 그지없어 잘못 걸리면 뼈도 못 차린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대주가 감히 누구시라고.”
“이곳은 조선이지 않더냐. 안 그래도 삼류 파락호 보듯 무시하는 것이 영 걸리적거렸거늘…….”
교수는 쯧하고 혀를 찼다. 교수는 한방이란 이름의 사내에게 한 가지 의뢰를 받고 움직이는 중이었다. 그가 의뢰의 대가로 내건 보상이 금 열 냥이었기 때문에 재물에 욕심이 많은 교수가 덜컥 받아들인 것이다.
“얼른 잡고, 발 빠른 놈이 가서 돈 받아 오거라. 우린 내려가고 있을 터이니.”
마침 가는 방향이 남쪽이었는데, 한방이란 자가 잡고자 하는 놈이 남쪽으로 도망갔다는 소리에 겸사겸사 돈도 벌고자 덥썩 받아들인 것이다.
“대신 앞으로는 나한테 모두 보고해라. 빼놓지 말고.”
“예, 대주.”
교수가 묵직한 목소리로 말하자 기린대 중 몇이 입을 삐죽 내밀면서 고개를 숙였다. 사실 원래라면 교수는 이번 의뢰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사파 무인들은 자유분방했기에 목표가 있지 않은 다음에는 교수도 그들을 방임했다. 그런 기린대 무인들 중 몇이 한방에게 의뢰를 받고 잘생긴 말을 타고 다니는 웬 놈을 잡아달라길래 잡아놓고 있었는데, 그놈이 도망을 쳐버린 것이다.
“도망치는 데 아주 이골이 난 모양이지 잡히면 두 다리를 분질러 버려라.”
교수는 짜증난다는 듯 소리쳤다. 기린대 무인들도 그 점은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