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5. 상왕의 결정(4)2019.11.26.
“검주도 모자라 이런 괴물들이라니. 대체 어떻게 된 나라인지.”
팽대수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조금 더 노골적이었다. 서 있을 힘도 없다는 듯 주저앉은 것에 나머지 소령과 일홍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아미타불.”
일홍은 불호를 한 번 읊고는 떨어지지 않는 다리를 힘겹게 옮겨 소령의 앞을 버티고 섰다. 이 중 가장 어리고 실력이 떨어지는 이가 소령이었기 때문이다. 화악!!! 일홍의 전신에서 은은한 열기가 퍼져 나왔다. 그는 소림의 기대주였기 때문에 특별히 극양의 내공심법인 구양신공을 익히고 있었다. 그 열기가 소령의 앞으로 쏟아지는 압력을 막아섰다.
“우리는 약자고, 전하의 군신들은 강자이옵니다. 약자인 것을 인정하겠으니 아량을 베푸소서.”
검인은 허리를 곧추세운 채 당당하게 그에게 요구했다. 원래 검인의 성격이 이랬다. 그렇기 때문에 만우와 친우가 될 수 있었다.
‘망할 군사.’
제갈명을 데려왔으면 다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갈명은 무공이 많이 떨어졌기 때문에 바깥에 놔두고 올 수밖에 없었다. 검인의 말은 세련되지 않았지만, 반대로 가장 진솔했다. 국왕의 눈썹이 푸르르 떨렸다.
“크하하하. 좋다. 그만 물러서라.”
“예, 전하.”
“예, 전하.”
국왕이 대소를 터뜨리며 손을 내젓자 운검과 이찬이 뒤로 들어갔다. 동시에 정의대를 짓누르던 압력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아미타불.”
“하악, 하악.”
소령의 입에서 가쁜 숨이 터져 나왔다. 간신히 내공을 움직여 버티고는 있었지만 한계에 달한 것이다. 국왕은 그런 소령을 보면서 혀를 쯧하고 찼다.
“이제 보니 소림의 승려가 아니라 그대가 이들의 우두머리였군. 맞나.”
“그렇사옵니다, 전하.”
검인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내색하지 않은 채 허리를 숙였다. 그런 그의 기개가 마음에 든 국왕은 검인에게 말했다.
“그대만 남고 남은 이들은 나가도 좋다. 왕사. 왕사께서도 세자와 왕자들을 데리고 나가주시겠습니까?”
“흘흘흘.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미타불.”
잠시 뒤 대전에 남은 것은 왕과 권희달, 그리고 검인뿐이었다. 왕의 말을 기록하는 사관과 내시, 궁녀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들은 없는 사람들이나 마찬가지다.
“하나 물어볼 것이 있다.”
선 채로 호흡을 고르던 검인이 국왕의 부름에 고개를 숙였다.
“그 비급이라는 것, 과인의 군대가 익혀도 도움이 되겠는가?”
검인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용안을 쳐다봤다. 왕은 여전히 대전 바닥에 오롯이 선 채 웃고 있었다.
“그대와 그대의 부하들은 조선에 들어온 무림인을 발본색원하여 과인에게 알려줄 것이다. 그리고 그 비급은…….”
국왕의 눈에 서늘함이 깃들었다.
“본래 조선의 것은 조선의 것. 그것을 탈취하려는 자, 과인의 징벌이 뒤따를 것이니. 그대의 소속과 이름은?”
국왕이 옥좌로 올라가 앉았다. 검인은 그 앞에 부복한 채 말했다.
“대(大)화산파의 일대제자이자 무림맹 정의대주 검인이라 하옵니다.”
“어명(御命)이다.”
“주상전하 천세, 천천세.”
어명이란 말에 운검이 무릎을 꿇고 천세를 외쳤다. 옥좌에 앉은 국왕에게서는 제왕의 기운이 흘렀다. 거인을 앞둔 검인이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조선의 땅은 작으나, 그 왕은 작지 않았다.
“정의대주 검인을 어사(御使)에 봉한다. 검인을 비롯한 정의대를 종구품(從九品) 장사(將仕)에 임명하여 어사 검인을 수행토록 한다.”
“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검인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명나라 사람인 자신에게 관직을 내릴 줄은 꿈에도 꾸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어사라는 것이 왕이 임명하는 임시직이고, 종구품이면 말단관직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명나라 사람에게 이렇게 관직을 내렸다는 것 자체가 파격적인 일이다. 당장 권희달만 해도 왕의 결단에 눈을 크게 뜬 채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어사 검인은 장사를 이끌고 장보도와 관련하여 조선을 어지럽히는 중원의 무뢰배들을 발본색원하여 처벌하라.”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국왕은 정의대에게 관직을 내려 조선을 안정시키도록 할 셈이었다. 무림인은 무림인으로 상대할 생각인 것이다.
“과인에게 제부투혼의 비급을 가져오라. 그렇게 된다면 그대들은 조선의 평화를 가져온 공로로 큰 상을 받게 될 것이다.”
국왕이 검인의 뒷통수를 보면서 씨익 웃었다.
***
“크아아아악!!!”
슌스케는 굵은 나무로 된 감옥 안에서 미친 듯이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몸이 정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목에 찬 큰 칼을 차고는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마치 짐승 같군.”
이성계는 그런 슌스케를 쳐다보면서 차가운 눈으로 말했다. 수도 없이 왜구를 쳐 죽였던 바로 그 눈이다. 슌스케는 핏발이 선 눈으로 이성계를 보면서 웃었다.
“늙은이. 그냥 우리가 하자는 대로만 움직였으면 좋았을 것을.”
“이노오옴!!”
이성계를 근거리에서 호위하는 가별초 수장이 슌스케의 말에 노성을 토했지만 슌스케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어디 깊숙한 곳으로 숨어, 늙은이. 우리가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이제 숨기지도 않는다는 건가?”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 숨길 필요는.”
낄낄낄-거리는 소리를 내며 슌스케가 웃었다. 그 때 만우가 나타나서는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그 방매라는 여아는 어찌되었는가?”
“어찌되긴. 아주 좋아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던데.”
“해줄 수 있는 게 고작 그것밖에 없지만 말이야.”
“그럼 옹주인가?”
이성계는 방매를 크게 치하했다. 도망친 죄인을 방매가 잡아왔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리고 방매를 도와 슌스케를 이곳까지 데려온 사냥꾼들도 이성계가 직접 비단을 한 필씩 하사하며 크게 치하했다. 하지만 방매가 받은 것은 그 어떠한 보물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옹주? 허허헛.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
이성계의 양녀. 자신의 출신도 모르는 방매에게 무려 왕족이란 혈통을 선물로 준 것이다. 물론 양녀지만, 그래도 이성계의 수양딸이 된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이성계는 그것 이외에는 방매를 치하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고, 방매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런데 그 아이는 그걸로 궁에 들어가 돈을 벌겠다는 생각만 하던데.”
“오라버니가 임금이니 그럴 수도 있지.”
“허, 정말 국왕의 동생으로 만드려고?”
“내가 준 핏줄이다.”
이성계는 엄한 표정을 지었다. 만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방매의 성격상 그런 핏줄이 얽매일 것 같지 않았다. 핏줄조차도 방매에게는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을 방금 보고 왔기 때문이었다.
‘사향은 어디서 그렇게 많이 구해 와서는.’
냄새가 지독한 사향을 방매는 어디선가 수십 개나 구해왔다. 며칠 간 보이지 않았던 게 그 사향을 사기 위해서라고 했다.
[역시. 그 왜인은 내게 귀인이야. 사향도 얻게 해줬을 뿐더러 선물만 주고 갔는걸?]
방매의 말을 떠올린 만우는 쿡하고 웃었다. 퉷!
“뭘 쪼개느냐! 칙쇼!”
그 때 슌스케가 뱉은 걸쭉한 침이 만우의 발치에 턱하고 묻었다. 만우가 고개를 들어 슌스케를 쳐다봤다.
“이거 완전히 미쳐 버린 건가?”
만우의 눈가에 주름이 잡히자 슌스케가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알아서 반응한 것이다. 초절정에 준하는 슌스케의 무의식은 만우가 위험하다고 알리고 있었지만, 자신이 겪고 있는 치욕에 반쯤 정신이 나가버린 슌스케는 무시했다. 어차피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었다.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고, 무려 상왕을 참살하려 한 이상 남은 것은 죽음뿐이었기 때문이다.
“노인장.”
“무엇을 원하느냐.”
만우의 목소리가 길어졌기 때문에 이성계가 먼저 선수를 쳤다. 만우가 히죽 웃으면서 슌스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어차피 사건의 전모는 다 밝혀졌으니 저 놈. 내가 제정신 좀 차리게 할까 하는데.”
“살려서 쓸 셈이더냐?”
이성계의 두 눈이 커졌다. 그때 가별초의 수장이 뒤에서 소리쳤다.
“감히 상왕전하의 목숨을 넘본 놈이다. 그러니 죽여야 한다!”
“에이. 나 아니었으면 거기 나리도 죽었어.”
만우가 손가락으로 가별초 수장을 가리켰다. 가별초 수장이 멈칫했다. 만우의 말에 틀린 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놈, 쓸 만하더라고. 뭐 팔 하나는 붙어 있으니까.”
팔 하나가 없고, 내상을 입은 채 달아났다고는 하지만 그것만 익숙해지면 쓸 만할 것이다. 이성계는 만우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놈처럼 악독한 놈이면 미친놈 하나 길들이는 것은 일도 아니겠지.”
“흐으. 그럼. 당연하지.”
만우는 슌스케가 빛처럼 빠르게 움직이던 것을 떠올렸다. 대개 쾌검에 능한 이들은 경공도 빠르기 마련이었다.
“마침 아주 좋은 우마(牛馬)가 필요했거든.”
“지독한 놈…….”
이성계는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만우가 무슨 용도로 슌스케를 길들이려 하는지 알아챈 것이다. 이성계는 훽하고 뒤돌았다.
“마음대로 하거라.”
“고맙수다. 흐흐흐.”
만우의 눈에서 흉악한 빛이 번쩍하고 뿜어져 나왔다. 가히 악마의 눈빛이나 다름 없어 뵈는 얼굴이었다.
“크아아악! 죽여라! 죽여라 이놈드으을!!!”
슌스케는 칼을 찬 목을 돌려대면서 악귀처럼 소리쳤다. 이성계가 감옥에서 사라지고 난 뒤, 만우가 몸을 돌렸다. 히죽. 만우의 입가가 말려 올라갔다. 이렇게 미친놈은 길들이는 맛이 있었다. 게다가 놈은 제법 질긴 것이 굴복시키는 재미가 있을 것 같았다. 스윽. 만우가 손가락을 세워 두툼한 감옥의 창살을 잘랐다. 그러자 아주 예리한 보검으로 자른 것처럼 창살이 툭하고 잘려나갔다. 뚝.
“…….”
만우의 손에 의해 창살이 잘려나가자 슌스케의 발광이 멈췄다. 만우가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죽여라! 그냥 날 죽여!!!”
만우가 눈을 반짝였다. 그냥 미친놈이 아니었다. 감옥에 있으니 이성계나 만우가 굳이 감옥 안으로 들어오려는 수고를 하지 않을 것이란 것을 알고 발광하는 척을 했던 것이다.
“그렇게 미친놈인척 해서 우리가 질려서 가면 뭐를 하려고 했을까아?”
사람 좋은 미소를 지은 만우가 감옥 안으로 쑤욱 들어왔다. 그러자 슌스케의 얼굴이 파르르 떨렸다. 방매의 발에 직격 당해 흉하게 부어오른 얼굴로 슌스케가 더듬거렸다.
“무슨…… 그게 무슨…….”
“이놈을 믿고 있구나!”
만우가 재밌는 장난감을 발견한 것처럼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검은 야행복을 입고 눈만 내놓은 닌자의 목줄기가 만우의 손에 턱하고 잡혔다.
“데리고 도망가려고?”
“으…… 으으…….”
만우가 손아귀에 힘을 주자 닌자의 눈에 핏발이 서면서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만우는 그런 닌자를 쳐다보고는 슌스케를 향해 히죽 웃었다.
“상왕이라고 몰랐을 것 같아?”
닌자의 은신술은 수준급이었다. 하지만 알아채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성계도 알고 있을 터였다. 단지 견제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약한 닌자였을 뿐.
“이 상황에서도 대장을 구하려고 온 충성심은 기특하나.”
만우의 두 눈에서 살기가 쭉 뻗어져 나갔다. 그 살기를 정면에서 마주본 슌스케의 몸이 맹수 앞에 선 사슴처럼 굳은 채 바르르 떨었다. 뚝! 닌자가 축 늘어졌다. 만우의 악력에 목이 부러진 것이다. 만우는 닌자를 옆에 내려놓은 이후 슌스케를 보면서 주먹을 들어올렸다.
“그러고 보니 일전에 방배를 죽이고자 수하를 풀었다지?”
슌스케의 눈이 커졌다. 언제 발광했냐는 듯 그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슌스케는 전형적으로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놈이었다.
“본주의 우마가 되는 것을 영광으로 알도록.”
슌스케는 딱 짐승이다. 아니, 짐승이 슌스케와 비교를 당하면 기분이 나쁠 것이다. 만우는 주먹을 들어 올리면서 해맑게 웃었다.
“미친놈은 맞아야 말을 듣던데. 과연 넌 얼만큼 맞아야 본주의 말을 들을까?”
“자, 잠…….”
뻐억!!!! 슌스케의 얼굴에 만우의 주먹이 작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