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4. 상왕의 결정(3)2019.11.23.
“이 늙은이를 이리 맞아주시다니, 불가의 큰 홍복이옵니다. 흘흘.”
무학대사가 수염을 떨면서 임금에게 말했다. 임금은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무학대사에게 말했다.
“대사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면 큰일 납니다. 왕사께서 이리 정정하시니 제 부족한 아이들도 지도해 주셔야 합니다. 어서 와서 인사 드리거라!”
임금이 옆을 향해 말했다. 검인 일행은 그제야 임금의 옆에 어린 세자와 왕자가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툭, 툭. 멍한 표정을 지은 채 무학대사와 함께 들어온 소령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세자가 후다닥 정신을 차렸다. 옆에서 동생인 충녕이 건드려 준 덕분이었다.
“왕사를 뵙습니다. 세자 이제라 하옵니다.”
“왕사를 뵙습니다. 왕자 이도라 하옵니다.”
세자는 올해 아홉 살이었지만 덩치가 열서넛만큼 컸다. 셋째 왕자인 충녕은 여섯 살이지만 총명함이 열서넛만큼 뛰어났다. 무학대사는 껄껄 웃으면서 세자와 왕자에게 공손히 읍했다.
“원자께서는 더할 나위 없이 씩씩하시고, 왕자님도 총명하시니 전하의 홍복이옵니다. 두 원자와 왕자께서는 무럭무럭 건강하게 크셔야 합니다.”
“예, 왕사.”
“예.”
세자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곁눈질로 소령을 힐끔거렸다. 매화검을 몇 달 만에 익힌 무재와 더불어 소령은 이제 막 피어나는 꽃처럼 싱그러운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저 꼬마는 자꾸 뭘 저렇게 보는 거야?’
소령도 세자가 자신을 쳐다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눈에 찰 리가 없었다. 키가 크고 덩치가 크다고는 하지만 젖살도 빠지지 않은 애송이였기 때문이다.
‘흥.’
소령은 그래도 보는 눈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휙하고 돌렸다. 그러자 세자의 얼굴에 아쉬움이 떠올랐다.
“대사. 대사께서 데려온 저들은 누구입니까?”
“소승이 중원에 유학을 하러 떠났을 때 친교하였던 소림의 혜근이란 분이 계십니다. 미력하나마 그 분께서 소승의 도움을 필요로 하시었는데, 저들이 전하를 뵙고 전할 말이 있다 하더이다.”
“그럼 대국의 사람들이란 말입니까?”
“예, 전하.”
무학과 임금은 조선말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기 때문에 검인을 비롯한 일행들은 알아듣지 못 했다. 소령도 만우를 위해 조선말을 배우고는 있었으나 아직 부족했다.
“시주. 나와서 말을 올리시지요.”
무학이 웃으면서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자 긴장한 표정의 일홍이 앞으로 나와 불호를 읊었다.
“아미타불. 소승 하북 소림의 일홍이라 하옵니다.”
어느 나라든 왕을 알현한다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다. 하지만 무학대사 덕분에 그 어려운 일을 쉽게 이룬 정의대였다.
“소승을 비롯한 이 시주들은 무림맹이라는 곳에 속해 있나이다.”
“무림맹?”
국왕의 눈이 세자에게로 향했다. 세자가 검주와 그 부하들을 만나고 난 뒤 검을 배우겠다고 검을 휘두르던 것이 떠오른 것이다. 그런데 세자는 일홍의 말도 듣지 못한 채 한 곳만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세자가?’
그곳에는 역시나 어려보이는 소령이 서 있었다. 하지만 딱 보기에도 나이가 세자보다는 많아보였다. 임금은 속으로 피식 웃어보였다.
“무림맹이면…… 중원에 있는 무림이란 곳에 속한 이들인가?”
“그렇사옵니다.”
왕이 무림을 알고 있다면 이야기를 하기가 수월해진다. 그 때문에 일홍의 얼굴이 펴졌다.
“무림인이라 하는 이를 만나본 적이 있다. 아주 독특한 힘을 쓰더군. 계속하라.”
검주를 떠올린 국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검주가 강녕전을 무너뜨리면서 보여준 힘은 그냥 독특하다고 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무림인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반면 국왕의 뒤에 서있던 권희달의 눈이 반짝였다. 무각(武閣)에 있는 만우의 부하들, 그리고 설운과 함께 매일 밤마다 서로의 무공을 겨루며 실력이 부쩍 늘어난 권희달이다. 그런 권희달의 눈앞에 또 다른 무림인들이 나타난 것이다.
‘약하군.’
하지만 이내 권희달의 눈에는 아쉬움이 떠올랐다. 감령과 필두, 문형일과 마익후는 전부 초절정의 고수들이다. 하지만 정의대 중에서 가장 무공이 높은 검인도 절정의 끝자락이었다. 그러니 상대적으로 약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기운은 정갈하나 폭발력이 없어 보이고.’
만우가 반쪽짜리 화경이라고 매도하기는 했으나 권희달도 어엿한 화경의 무인이었다. 그 때문에 절정급인 정의대 무인들의 수준이 모두 읽혔다.
‘단단한 거산 같기도 하고, 묵직한 강물 같기도 하고 정말 각양각색이구나!’
네 명의 초절정들과 두 달이 넘는 시간을 지지고 볶으면서 권희달의 실력인 일취월장이란 말이 적합할 정도로 늘었다. 이제는 네 명 중 두 명이 합공을 해야만 동수를 이룰 정도가 된 것이다. 힘들기는 하나 셋도 상대할 수 있었다. 그 네 명의 초고수들이 각기 다른 형식으로 싸우고, 그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이들이란 것을 생각하면 실력이 대단히 늘어난 것이다.
‘고작 두 달 만에 설운 녀석은 초절정에 도달했고.’
절정의 끝자락이던 설운은 두 달 동안 화경과 초절정 사이에서 구르고 또 구르다가 초절정 초입에 도달했다. 재능이 뛰어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훨씬 빠른 성장이었다. 그 정도면 궁 전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자다.
‘음?’
순간 권희달의 눈이 커졌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정의대 중 검인에게서 강한 기세가 느껴진 것이다. 권희달이 검인을 쳐다보자 경악한 얼굴의 검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기세가 풀린 건가.’
하지만 호승심이란 것이 생겨버린 권희달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아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세가 흘러나온 듯 했다. 그리고 정의대 중 가장 실력이 뛰어난 검인이 그런 권희달의 존재를 눈치 챈 것이다.
“과인에게 할 말이 무엇인가.”
국왕은 일홍에게 물었다. 일홍이 침을 한 번 크게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중원에서 무인들이 조선으로 넘어오고 있다는 것, 아시고 계십니까.”
“알고 있다.”
국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은월루를 통해 전해 들었기 때문에 알고 있었다. 의주에서도 무인들이 들어오고 있었고 함주로 떠났던 은월루주는 그곳에서도 왜의 무인들과 만났다는 전갈을 보냈다.
“그들이 조선으로 넘어오는 이유는 장보도 때문이옵니다.”
“장보도?”
“백제 싸울아비의 비급이 담긴 제부투혼이라는 장보도가 돈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그 비급이 조선에 있다는 것 때문에 중원에서 수많은 무인들이 조선으로 향하고 있나이다.”
“장보도라…….”
국왕은 장보도가 가지는 위력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무림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장보도가 무림에 어떤 혈사를 불러일으켰는지 모르고 있었다.
“무인의 탐욕이 무림에서는 수많은 혈사를 불러일으켰나이다. 자칫하면 이 조선에서도 그런 혈사가 일어날 수도 있어 무림맹에서는 저희를 파견하였사옵니다.”
“혈사를 막기 위해서라?”
혈사란 말에 국왕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감히 과인의 조선에서, 중원의 무뢰배들이 과인의 재가도 받지 않고 함부로 들어온단 말인가?”
왕의 목소리에 분노가 은은하게 깃들기 시작했다. 일홍은 침묵했다. 국왕이 분노할 것이란 것은 예상한 바였다. 아니, 분노해야 했다. 그래야 중원으로 넘어와 혈겁을 일으킬 그 장보도를 조선에서 처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림인에게 비급을 얻어 강해진다는 것은 부자가 재물을 탐내는 것과 같은 이치이옵니다. 그러니 조선의 백성들을 위해서라도 이를 막아야 하옵니다. 아미타불.”
일홍은 불호를 읊으면서 읍했다.
“또한 그 비급은 조선의 것. 이건 도적질이나 다름없사옵니다. 허니 부디 왕께서 이 혼란을 잠재워주시옵소서.”
“…….”
국왕은 분노했지만, 동시에 냉철했다. 분노에 몸을 맡겨 앞뒤를 재지 않는 성격이라면 철혈왕이란 칭호를 듣지 못했을 것이다. 가슴이 뜨거울수록 가슴은 차갑게 해야 한다. 국왕은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분노가 들끓는 유리알 같은 투명한 눈을 번뜩였다.
“그대들도 무림인이다. 헌데 비급을 탐내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일홍은 국왕의 말에서 무림에 대한 이해가 전무하다는 것을 느꼈다. 무림맹은 정파다. 그리고 무림맹에 속한 정파는 수십 년, 수백 년을 이어져 내려온 유서 깊은 대문파들과 세가들이 많았다. 실제로 정의대에도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소속이 아닌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그런 대문파와 세가는 자존심이 하늘을 찌를 정도로 높다.
“소승과 시주들은 그런 비급이 필요하지 않사옵니다.”
“어째서?”
일홍이 눈을 빛냈다.
“그런 비급을 찾을 정도로 나약하지 않기 때문이옵니다.”
“나약하다?”
“예, 전하. 아미타불.”
“자신감이 넘치는군.”
국왕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일홍이 가슴을 쭉 피면서 국왕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시험해 보시옵소서.”
검인의 머리가 퍼뜩하고 치켜 올라갔다. 여기까지는 정의대가 의도한 대로였다. 단지 검인이 왕의 옆에 선, 자신으로서는 감히 재단할 수 없는 경지의 고수를 보기 전까지였다.
“시험하라?”
무림맹의 수뇌부는 조선을 그리 대단히 보지 않았다. 조선은 명의 일개 주(州) 크기밖에 되지 않는 작은 국가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의대 정도면 그 나라에서 감히 대적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왕의 신뢰를 얻어내기 위해 정의대의 강함을 보여주려 했다.
‘아니 되네!’
검인이 뒤늦게 일홍의 승복을 잡아당겼지만 이미 늦었다. 국왕의 뒤에서 권희달이 성큼 앞으로 한 발 내딛었기 때문이다.
“명이 아니라 감히 중원무림 나부랭이들이 이 조선을 무시한단 말이냐!”
찌르르!! 허리를 곧추 세웠던 일홍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권희달의 묵직한 일갈에 담긴 공력이 느껴진 것이다. 검인을 제외한 정의대 모두는 권희달에게서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나선 순간 거대한 산 같은 존재감을 느낀 것이다. 동시에 세자의 뒤에 서있던 좌익위 이찬도 앞으로 나서며 기운을 발산했다.
“허억.”
좌익위 이찬 역시 초절정이었다. 앞과 옆에서 막대한 기세가 느껴지자 일홍의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국왕은 그런 일홍을 보면서 웃었다.
“그래. 증명하겠다? 내 운검과 좌익위를 이긴다면 그 말을 믿어주도록 하지. 허나 만약 이기지 못할 시에는…….”
샤아아! 일홍을 비롯한 정의대원들은 주변의 기온이 내려가는 것 같은 서늘함을 느꼈다. 국왕의 기세가 일변하자 서늘함이 목 주변에 어른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과인의 귀를 망발로 더럽힌 죄가 매우 크다. 허니 필히 그 목을 내어놓아야 할 것이야.”
부르르. 소령이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국왕의 목소리가 무서울 정도로 차가웠기 때문이다. 그때 검인이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크압!!”
펑! 검인의 주변으로 매화향이 훅하고 풍겨져 나왔다. 동시에 검인이 허리를 세웠다. 그런 검인의 행동에 권희달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겨냈다?’
만우가 했던 것을 떠올리며 만우처럼 기세로 상대방을 찍어 누르려 했던 권희달이다. 하지만 상대는 약해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기운을 다루는 것이 만우보다 부족하다는 뜻이며, 저자가 공력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줄 안다는 뜻이었다.
“할 말이 있는가?”
일홍이 불경을 외우며 몸에 가해지는 압력을 떨쳐내려고 열중을 하는 사이 검인이 고개를 들고 국왕을 쳐다봤다.
“소생들이 실언을 하였습니다. 한번 봐주십시오, 전하.”
“…….”
“대, 대주!”
“사형!”
검인은 허리를 곧게 핀 채 너무나도 당당하게 봐달라고 소리쳤다. 그런 검인의 말에 국왕이 벙찐 표정을 지었다.
“아니, 우리가 화경과 초절정을 상대로 어찌 이기겠느냐. 그렇다고 여기서 죽을 셈이냐?”
검인이 온몸을 조여오는 압력 속에서 태연한 표정을 지은 채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명문정파의 대제자로써 이렇게 굴복하는 것도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긴 마찬가지였다.
“젠장. 나도 마찬가지요. 정저지와(井底之蛙)였소!”
만우에게 처참하게 깨진 이후 나름 무공에만 몰두했다고 할 수 있는 팽대수였다. 하지만 이 작은 조선에서 또 다른 벽을 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