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3. 상왕의 결정(2)2019.11.19.
“크으으…… 이노옴!”
“그만!!!!!”
가별초 수장이 어찌저찌 버티는 듯 했지만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 했다. 그때 이성계의 입에서 고성이 터져 나왔다.
“그래서, 나를 의심한다고?”
이성계의 고리눈 같은 두 눈이 만우에게로 향했다. 만우는 어깨를 으쓱하며 화살을 가리켰다.
“이 정도의 화살. 노인장의 대궁에만 걸 수 있을 텐데. 그리고 내가 이런 화살을 봤거든. 노인장이 쏜 것 중에.”
“그러겠지. 이런 대궁은 초원에서나 쓰는 활이니까.”
“초원?”
만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성계는 말을 덧붙였다.
“원나라에서 주로 쓰던 화살이라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너른 초원에 사는 유목민족이기 때문에 화살 한 대로 사냥감을 잡고 싶어 했지.”
이성계는 허리를 굽혀 화살을 집어 들었다.
“가별초 수장은 가별초들과 함께 물러나라. 몸을 보전하고 있으면 내 다시 부를 것이다.”
“전하!!!”
“나도 안다.”
이성계가 화살을 집어든 채로 만우를 쳐다봤다. 그의 눈 안에서는 불꽃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나도 이자의 입을 찢고 혀를 뽑아 개먹이로 던져주고 싶음이다. 허나 그럴 수 있느냐?”
이성계의 한마디 한마디에서 살기가 물씬 풍겨져 나왔다. 만우는 자신이 제대로 미움을 샀다는 표정으로 볼을 긁적였다.
“…….”
가별초들은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가별초의 수장도 만우가 쏘아 보낸 기세에 짓눌려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물러나라. 이자와는 독대하겠다.”
“대전 밖에서 대기하겠나이다.”
가별초 수장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허리를 꾸벅 숙였다. 그리고는 만우를 향해 살기가 줄줄 흐르는 눈을 들어올렸다.
“허튼 짓을 한다면 네놈을 구천까지 쫓아가 반드시 죽여 버릴 것이다.”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만우가 고개를 돌려 이성계를 쳐다봤다. 조선의 국왕은 이성계의 아들이다. 그런 아들이 다른 형제들을 죽이고 왕좌를 찬탈했다는 것이 그에게도 상처일 것이다. 본의가 전혀 아니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의 상처를 후벼판 셈이었다.
“그리고 위정자들의 얼굴도 믿을 수 없지만.”
만우는 이성계를 보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만우는 위정자들을 믿지 않았다. 다른 이들의 위에 군림하고 그들을 바른 곳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대를 위해 소를 쉽게 희생하는 이들이 바로 위정자들이기 때문이다.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뭐, 내가 손가락 하나 까닥하면 살아날 사람이 저 노인장 말고 이곳에 있던가?”
만우가 비릿하게 웃었다. 만우의 조소에 가별초 수장이 욱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만우의 말에 맞았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막아낼 것이다.”
가별초 수장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죽음을 각오하는 것 밖에는 없었다. 만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이성계에게 해코지를 하고자 온 것이 아니다. 그러려고 왔다면 지금 이곳에 두 발로 서있을 수 있는 가별초는 단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적설청이라고 아는가?”
“적설청……?”
가별초들이 물러나자 이성계가 만우에게 말했다. 만우는 이성계를 쳐다봤다.
“원나라 황족들이 기르는 애완동물이자 영물이다. 활을 다루는 이들에게는 돈으로 주고 살 수 없는 영물이지.”
“본 적이 있다.”
이성계가 적설청을 봤다면 확실할 것이다. 그리고 만우도 적설청을 본 적이 있다. 함주 인근에서 척준영을 구했을 때 봤다. 그 적설청을 보고 천 명의 관군과 투귀대를 부딪치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만우다. 그렇다면 강순일을 죽이고 동군영을 죽이려 했던 것은 바로 마교인 것이다.
“함주 인근에서.”
“원나라 황족이 조선에 들어와 있는 듯하다.”
“……마교군.”
몰락한 원나라의 패잔병들이 마교에 투항했다는 소문이 중원에 돈 적이 있었다. 그게 사실이었던 모양이었다. 그것도 적설청까지 다룰 줄 아는 황족이 마교에 몸을 의탁한 것이다.
“마교?”
이성계는 마교에 대해 몰랐다. 중원 무림에서도 가장 얼굴 보기 힘든 족속이 바로 마교였다. 십만대산 깊숙한 곳에 파묻혀 사는 그들은 무림의 공적이지만 동시에 두려운 힘을 가진 존재들이었다.
‘혈세천마 그 아재는 날 피하긴 했지만.’
강자존을 최고의 율법으로 떠받드는 마교의 교주가 자신의 비무 요청을 무시했었다.
“무림에서 세력을 일구고 있는 집단이다.”
“원나라 황족이 그곳에 있단 말인가?”
“그래. 그들은 명에서도 아주 먼 운남 쪽의 험준한 산맥에 숨어 있으니까. 몰락한 황족이 숨어서 힘을 기르기에는 딱 좋은 곳이지.”
“잘 알고 있는 듯하군.”
이성계가 만우를 보면서 눈을 빛냈다. 아무리 개차반이라고 해도 강순일은 자신의 총애를 받던 아이였다. 거기에 자신의 처인 현비 강씨의 혈족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이성계의 혈족이다. 남과 여가 만나 가정을 꾸리면 두 가문의 울타리가 이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잘 알지. 가별초로 그놈들을 추격할 생각이거들랑 접어둬 노인장.”
“가별초는 약하지 않다.”
“그래. 그놈들이 강하지.”
만우의 말에 이성계가 눈을 크게 치켜떴다. 만우가 강하다는 것이면 진정으로 강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의주에서 투귀대란 놈들을 만났다. 그중 마교 교주의 아들이 있더군.”
“투귀대…….”
“난 함주 인근에서 그 여덟 놈과 천 명의 관군을 충돌시켰다. 그런데 그중 최소 한 놈이 강순일을 저격하고 사라졌다.”
“여덟으로 천을 격퇴시켰다?”
“한 명의 사망자도 없이.”
만우는 확신했다. 천 명의 관군이라고 하지만 이미 강현이라는 수괴를 잃은 뒤였다. 그런 상황에서 마교의 교수 여덟은 양 무리에 뛰어든 늑대처럼 날뛰었을 것이다.
“그 마교란 곳과 조사의가 손을 잡은 것인가.”
이성계는 조사의가 대체 어디까지 갈 생각인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왜상으로 무장한 왜구에 이어 이제는 무림인까지 끌어들였다. 비록 왜구들이 이곳에서 거의 전멸에 준하는 타격을 입었다고는 하나 조선과 왜는 가깝다. 얼마든지 더 많은 왜구들을 불러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정리해 보자고.”
만우가 박수를 짝하고 쳤다. 원나라 황족이 쏜 화살이라면 이성계가 쏜 화살과 비슷한 모양인 것이 설명이 됐다. 그리고 그 원나라 황족은 적설청과 이성계의 대룡궁에 버금가는 활을 사용하고 있으며 그 실력이 출중하다는 것까지 알았다.
“흉수 중 한 놈은 그렇고. 여덟 중 다른 두 놈은 나와 손속을 겨뤄 봤고.”
만우는 주창을 떠올렸다. 동이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일패에 오르지 못하고 사주 중 하나에만 올랐던 만우를 일패, 일주로 올려주겠다고 한 놈이었다. 그래야 꺾을 때 자신의 명예가 드높아질 것이라 자부하던 시건방진 놈이었다.
“여덟 중 한 놈과 노인장의 사병들이 부딪친다 해도 필패요.”
“손속을 겨뤄보았는가?”
“제법이더군. 노인장이 활을 써서 정확하게는 모르겠으나…….”
이성계의 단전 안에는 노쇠해져 가는 그의 육체와는 다르게 팔팔한 내기가 꿈틀거렸다. 하지만 활을 다루는 무인이기 때문에 정확한 비교가 힘들었다.
“나와 백 합은 겨룰 수 있는 정도.”
“…….”
이성계도 만우의 실력을 정확하게 읽어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만우와 백 합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상대가 상당한 실력자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가별초들 전원이 달려들어도 상대가 될 수 없다.
“그런 놈들과, 그 왜구 놈들이 조사의를 돕고 있다는 거지?”
“……그래.”
“그리고 그 놈들은 노인장을 데려가고 싶어 하고.”
“명분을 세우고 싶은 것이다.”
이성계는 대룡궁을 챙겨들었다. 늙고 녹슨 몸이지만 대룡궁을 손에 쥐자 없던 용기까지 생겨나는 기분이었다.
“노인장이 한양으로 가야 내 부하들이 살아.”
만우는 이성계에게 말했다. 이성계는 만우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함주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목엔 전부 적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조사의란 놈이 그토록 대단한 놈인가?”
“반역을 도모하고 있는 놈이지만…….”
조사의는 화술이 뛰어났다. 거기에 학문이 딱히 부족하지도 않았다. 거기에 현비 강씨의 일족이라는 배경까지 있었다.
“동북면 도순문사를 가장 먼저 포섭하였을 것이다. 도순문사는 동북면의 모든 병권을 쥔 자.”
“아니, 대체 국왕이란 놈이 자기 부하 관리도 제대로 못하고 뭐하는 거야?”
만우가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꽤나 능력이 있어 보이던 국왕이었는데 이렇게 반란의 불씨를 가진 놈들이 버젓이 벼슬을 하게 만들다니.
“그러니 난 떠날 수 없다. 이곳에 있어야 해. 함주를 벽으로 삼아 버텨야 한다.”
“지금은 노골적이지 않지만 저들도 급해지면 무슨 수를 쓸지 알 수 없어 노인장.”
만우는 김향을 찾는 것부터 시작해 할 일이 산더미였다. 그러니 이성계를 데리고 서둘러 한양으로 돌아가야 했는데, 이 와중에도 이성계는 못 간다고 버티고 있었다.
“그랬다가 조사의의 손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이 조선은 무너질 것이다.”
“후.”
만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성계의 말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노구의 이성계가 조사의의 추격을 받으면서 한양까지 갈 수 있을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지금은 건강해 보였으나, 늙은 몸은 찬바람과 여독에 쉽게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노인장. 나한테 방법이 있다면?”
“방법?”
“솔직히 아무리 나라고 해도 조사의란 놈이 본격적으로 군사를 동원하면 노인장을 데리고 나가는 건 무리란 걸 알아.”
만우에게는 호선도 있었지만 동군영과 방매도 있었다. 그들에 이성계까지 더해지면 아무리 만우라고 해도 대대적으로 움직이는 군사들을 모두 맞상대할 수는 없었다. 다른 인간보다 훨씬 강하고, 느리게 지친다고는 하지만 결국은 지치기 때문이었다.
“부하놈들이 있다면 충분해. 그러니까 연통 하나만 써서 나한테 줘.”
만우는 문형일과 마익후, 그리고 감령과 필두를 떠올렸다. 넷 전부 초절정에 들어선 무인들이다. 거기에 만우 자신까지 더해진다면 웬만한 군사들로는 앞길을 가로막을 수 없을 것이다.
“노인장 옆에는 내 쓸 만한 호위 하나를 남겨두고 갈 테니까.”
만우가 전력으로 경공을 펼치면 열흘 밤낮이면 한양까지 갈 수 있다. 물론 내공이고 체력이고 전부 끌어다 써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해주는 대신 노인장도 내게 약속해야 할 게 하나 있지.”
“말하시게.”
조사의의 손에 넘어가 아들을 공격할 명분이 되느니 차라리 한양으로 돌아가는 것이 나았다. 이성계가 두 눈을 크게 뜨자 만우가 이성계에게 말했다.
“국왕한테도 말할 거긴 한데, 사람 하나만 수소문 해줘.”
김향. 이제는 김향이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모든 수단을 동원해 그녀를 찾아야 한다.
“어렵지 않은 일이지. 그것이면 되겠는가?”
이성계는 만우를 쳐다봤다. 만우가 찾으려는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괜히 그것을 물어 만우의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우는 범하지 않았다.
“충분해.”
만우는 잠시 후 이성계가 쓴 서신을 품에 안고 걸어 나왔다. 그런데 그때 기별이 급하게 달려와 대전 안으로 들어갔다.
[자신을 방매라 밝힌 여아가 지금 왜상 슌스케를 포획해 왔습니다, 전하.]
“방매?”
펑! 만우의 몸이 그 자리에서 펑하는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
“전하. 무학대사와 소림 승려 외 오인이 알현을 청하옵니다.”
[들라 하라!]
일홍과 검인, 그리고 소령이 침을 꿀꺽 삼켰다. 팽대수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무림이 좁다하고 중원을 질타하는 그들이라고 하지만 한 나라의 왕을 보는 것은 또 다른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끼익.
“들어가시지요. 헐헐.”
무학대사가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쩔렁이는 선장을 들고 근정전 안으로 쑥하고 들어갔다. 그 뒤를 긴장한 일홍과 검인 일행이 뒤따랐다. 바닥만을 쳐다본 채 조심스럽게 들어간 검인 일행의 눈이 커졌다. 옥좌에 앉아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던 국왕이 대전까지 내려와 무학대사의 손을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방원. 조선의 삼 대 임금이자 태상왕인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한 건국 공신 중 하나. 하지만 이복동생 하나와 동복동생 하나를 베고 피로 물든 옥좌에 오른 효웅.
‘날카롭게 생기기는 하였으나…….’
이방원은 검은 수염을 기르고 있었지만 평가와는 달리 유해 보였다. 물론 순간적으로 번뜩이는 눈과 눈매는 간담을 서늘케 했지만 잔혹하고 냉혈한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