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8. 암행어사 출도요(1)2019.11.02.
후두둑. 주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조선에 들어온 후 벗어던졌던 삿갓을 쓰게 만든 것도 모자라 주창의 온몸은 피로 푹 적셔져 있었다.
“오라버니. 괜찮으셔요?”
주창이 고개를 들어 옥령을 쳐다봤다. 옥구슬이 쟁반 위를 굴러가는 듯한 목소리와는 달리 옥령의 얼굴도 피로 잔뜩 젖어 있었다. 하지만 옥령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반짝이고 있었다. 혈성(血星) 때문이다.
“이거 사화만 이득 아니오?”
일산(一山) 웅풍이 그의 몸만큼이나 거대한 거부(巨斧)를 털어내자 수풀 위로 쫙하고 혈선이 그어졌다. 옥령이 무슨 소리냐는 듯 웅풍을 흘겨봤다. 하지만 혈성에 도질 때마다 피로 달래줘야 하는 천형(天刑)을 앓고 있는 사화에게는 확실히 이득이었다. 그를 비롯한 투귀대 전원의 몸이 피로 흠뻑 적셔져 있었다. 하지만 이들 중 그들의 피는 단 한 방울도 없었다. 전부 그들이 베어버린 이들의 핏물이었다.
“이래도 되나 모르겠소, 대주.”
마존과 곡왕의 공동전인으로 검공과 음공을 익힌 백영이 어두운 얼굴로 주창에게 말했다. 평소에는 과묵하지만 대쪽 같은 성품을 가진 그였기 때문에 죄 없는 관군들을 베어버린 것이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수백이요. 그리고 우리가 잡지 못 한 수백에 의해 우리의 소문이 퍼질 것이오.”
혈겁(血劫)이었다. 함주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니 사냥꾼들이나 약초꾼들에 의해 그곳의 참상이 금세 함주에 퍼질 것이다. 함주 인근에서 그렇게 많은 관군이 몰살당한 것을 함주에서 알게 되면 관아에서 진상을 파악하려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발 없는 소문은 천 리를 달려 조선 전역에 금세 퍼지게 될 것이다.
“검주에게 제대로 당했습니다. 대주.”
하얀 백호를 타고 달려오던 검주의 얼굴이 잊히지 않았다. 그렇게 천 명의 관군을 몰아와놓고서는 검주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완전히 놀아난 것이다. 그 때문에 마일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는 주창의 군사(軍師)요 참모다. 그런데 손도 쓰지 못하고 검주에게 놀아났으니 기분이 좋을 리 없다.
“검주.”
주창이 이를 빠드득 갈았다. 비슷한 표정의 위문이나 그런 위문을 삐딱하게 비웃던 광호검 기무도 지금 순간만큼은 침묵하고 검주에 대한 살의를 불태웠다. 이중에서 그나마 평온한 신색을 유지하고 있는 이는 테무르밖에 없었다. 그는 원과 명의 전쟁에서 이보다 더 많은 피를 본 적이 여러 번이었기 때문이다.
“마일. 생각하라. 검주가 이 관군과 우리를 상충시킨 이유를.”
주창의 눈이 귀기로 번뜩였다. 검주 만우를 높이 평가하던 그였다. 그런 그에게 이번에 만우가 그들에게 사용한 방법은 치졸한 방법이었다. 검으로 승부를 낸다면 모를까, 이건 이이제이(以夷制夷)였다.
“그 이유를 찾아내어 검주에게 복수한다.”
“대주. 흥분을 일단 가라앉히시지요.”
마일이 옆에서 주창을 말렸다. 그들은 마교의 천마에게 직접 명령을 받고 조선으로 파견된 마교의 정예들이다. 복수에 눈이 멀어 임무를 잊어서는 안 된다.
“마일. 그대의 눈에는 이 관군들이 왜 이곳에 있었고, 검주와 충돌한 것인지 아는가?”
“보아하니 관군에게 선공을 가한 것이 검주 같아 보입니다. 백호 위에 검주 이외의 다른 이가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마일이 주창을 쳐다봤다.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천 명의 관군을 향해 홀로 뛰어든 듯 보입니다.”
“그 미친 새끼. 지가 장판파의 장비나 조자룡도 아니고. 천 명을 향해 홀로 뛰어들다니.”
기무가 질렸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위문은 만우를 직접 겪어봤다. 검주는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그의 무공 수위라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대체!’
위문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리 마교가 강자존이고, 강자일수록 존경을 받는다고 하지만 지금 이런 순간에 만우에 대한 경외감이 들다니. 위문이 혼자 무슨 짓을 하고 있건 간에 마일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저들이 버리고 간 물건들을 한번 보시지요.”
마일은 저 멀리 보이는 공터를 가리켰다. 그들이 뚫고 나온 군사들이 머물렀던 흔적들이 남아 있는 군진이었다. 투귀대 단 여덟에 의해 와해된 천 명의 관군은 그것들도 챙기지 못하고 사방으로 도망쳐 버렸다.
“이곳에서 꽤 오랜 기간 머물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보이는군.”
주창이 안력을 돋우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함주가 아닌 함주 인근에 오래 머물고 있는 관군이라면…… 무슨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의도?”
“조사의.”
주창의 눈이 커졌다. 그들은 조사의에 합류하기 위해 가는 길이었다. 주창과 투귀대가 조사의가 있는 안변으로 향하는 이유에는 꽤나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다.
“조사의가 반역을 획책하고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자는 국왕에 대항할 힘을 끌어모으기 위해 우리 마교에까지 연통을 넣은 인물입니다.”
“그리고?”
“함주에는 상왕이 머무르고 있습니다.”
“……명분이구나.”
주창의 말에 마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이 우습게 되었다. 조사의의 군에 합류를 해야 하는데 조사의의 관군을 와해시킨 꼴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덤벼든 건 저쪽 잘못이니까.”
“저기 조(趙)라 쓰인 깃발이 보이는 걸 보니 맞군요.”
공력을 끌어 올리면 시력이 대폭 상승한다. 때문에 마일은 저 멀리 군진에 꽂힌 깃발에 나부끼는 조(趙) 자를 발견했다.
“빌어먹을. 그런데 하필이면 왜 지금, 교주께서는 우리를 이곳으로 보내신 겁니까? 우리가 뒷골목에서 염왕채를 하는 파락호는 아니지 않습니까, 대주.”
기무가 주창에게 말했다.
“금 팔십만 냥.”
“……!!”
주창이 기무를 쳐다보며 말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거금에 기무의 얼굴이 굳었다.
“은월루가 우리에게 갚지 않은 돈이지.”
“…….”
마교는 조선의 은월루라는 곳에서 의뢰를 받았었다. 그게 벌써 십 년도 더 된 일이었다. 그 때 은월루는 마교에 금 팔십 만냥을 의뢰금으로 걸었다. 그런데 은월루에서는 그 금을 갚지 않았다.
“그리고는 이 땅에서 비명횡사한 위대한 우리 교의 전사들이 몇인지 아는가?”
주창이 기무에게 말했다. 기무가 끄응하는 신음 소리를 냈다.
“그러면 계속해서 외당의 전사들이 바뀐 이유가…….”
“그래.”
몇 만 냥도 아니고 무려 팔십만 냥이다. 그리고 사기를 당한 곳은 무림에서도 공포로 군림하는 천마신교다. 은월루란 곳에서 천마신교에 약속한 의뢰비를 지급하지 않은 것도 모자라 돈을 받기 위해 파견된 마교의 무인들을 모조리 죽인 것이다. 아니,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연락이 모두 두절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십만대산부터 조선은 너무 멀었고, 중원은 정파와 사파의 세상이었기 때문에 마교는 적극적으로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러다 하오문과 장보도의 존재로 인해 조선과 중원이 혼란스러워지자 그때를 노리고 혈세천마는 마음을 먹고 투귀대를 조선으로 파견한 것이다. 그러니까, 돈을 받아내러 투귀대를 보냈다는 뜻이었다.
“금 팔십만 냥이면 나라를 세울 수 있지.”
금으로 팔십만 냥이면 은병으로 팔백만 냥이 넘는다. 은병 하나로 한양에서 15석의 곡식을 살 수 있으니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돈인 것이다.
“천마께서는 자금이 필요하시다 하시었다. 동시에 이것은…….”
주창의 눈이 번뜩였다.
“나, 주창의 천마 자격을 시험해 볼 기회라고 하셨지. 처음에는 반신반의하였으나.”
검주가 조선에 있었다. 그리고 주창은 이 조선에서 그와 벌써 두 번이나 만났다. 조선이 작은 나라라고는 하지만 길에서 만날 정도는 아니었다. 주창은 그런 검주에게 강한 운명적인 이끌림을 느꼈다. 그를 꺾으면 자신이 다음 대 천마가 될 수 있을 것이란 느낌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교주님의 말씀이 맞았다. 이곳에서, 우리는 임무를 완수하고, 내게 천마의 운명이 있다는 것을 증명할 것이다.”
주창의 몸에서 시커먼 마기가 피어오르자 주창의 몸을 뒤덮었던 피딱지들이 후두둑하고 떨어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마일을 비롯한 투귀대원들이 그의 앞에 부복했다.
“존명!”
“대주를 따르겠나이다.”
“안변으로 향한다. 지금부터는 일체의 휴식도 취하지 않겠다.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달려 은월루 그 개잡놈들을 쳐낸 뒤 검주를 상대할 것이다.”
“존명!”
투귀대원들의 우렁찬 목소리가 숲을 떨쳐 울렸다. ***
“자자. 긴장 풀어.”
만우는 씩 웃으면서 동군영의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하지만 동군영의 어깨는 만우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아니, 뭐 이런 걸 가지고 이렇게 긴장을 하는 거야?”
딱딱하게 굳은 어깨로는 검을 휘두를 수 없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만우는 답답하다는 듯 동군영에게 말했다.
“으…… 내, 내가…… 그걸 어……. 어찌…… 알겠는가.”
지금까지 만우와 굵직한 사건들을 많이 겪었기 때문에 소심함이 나아졌다고 생각한 만우였다. 하지만 동군영은 지금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동군영과 만우의 옆에는 호선도 서 있었다. 호선은 유유자적하게 휴식 시간을 즐기려다가 억지로 끌려나와서인지 볼을 부풀린 채였다.
“에휴. 좀 사람이 됐나 싶었는데.”
동군영은 허리춤에 국왕이 하사한 유척과 마패를 차고 있었다. 주변 저잣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동군영을 힐끗거리며 쳐다봤다. 만우와 동군영, 호선이 지금은 영업을 하지 않아 문을 닫은 기루 앞에 서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감히 상왕의 대전에서 검을 뽑아든 왜구를 징벌하기 위함이라니까? 그리고 바빠. 여기 말고 관청도 가야돼.”
본궁에서 일어난 혈사로 인해 동군영이 할 일이 생겼다. 지금까지 동군영은 상왕을 설득하는데 중점을 두었지만 암행어사로서 동군영이 나서야 할 일이 생긴 것이다. 어찌 보면 암행어사로써 첫 공식적인 업무를 하는 것인데, 정작 그 업무를 이끌어야 할 당사자가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으니 실로 개탄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만우는 포기하지 않고 동군영의 등을 떠밀었다.
“그리고 강가, 그 집안도 털어야지. 강순일 그놈을 잡던가.”
오늘 하루에 모두 처리해야 할 일이었다. 암행어사를 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속 정확이었다. 암행어사임을 밝히기 전까지는 은밀함이 최고였지만 한번 신분을 드러내면 폭풍처럼 몰아쳐야 한다. 상대가 암행어사가 나타났다는 것을 알기 전에 들이쳐야 하기 때문이었다.
“근처 역참에서라도 역졸들을…….”
하지만 동군영은 벌벌 떨고 있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일전에야 먼저 이쪽을 겁박하거나 다른 이들을 겁박한 것을 두 눈으로 봤기 때문에 나설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같은 경우에는 먼저 공격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동군영의 소심증이 재발해 버린 것이다.
“겁 좀 먹지 마! 나랑, 여기 호랭이도 있잖아.”
“호선이에요.”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호선은 호랑이, 호랭이, 백호로 불리는 것을 싫어했다. 영성이 생겨나기 전 본능으로만 살아가던 그때가 창피하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그걸 신경 쓸 만우가 아니었다. 호선 역시도 만우 앞에서는 고양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거슬려도 꾹 참는 수밖에 없었다.
“빨리! 어사 나리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건데!”
만우가 흥하고 콧바람을 뿜으며 굳게 닫힌 기루의 문을 쳐다봤다. 안에는 분명 왜구 놈들이 있었다. 본궁에서 도망쳐 나온 그 슌스케란 놈이 이곳으로 온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꽤 많은데?’
근데 그 숫자가 족히 오십은 되어보였다. 그리고 다들 한가락하는 듯 살기와 혈향이 여기까지 나는 듯했다.
‘상단의 잡부라고 속인 그놈들까지 전부 칼 쓰는 놈들이었구나.’
만우가 히죽 웃었다. 재밌었다. 대체 그 왜구는 뭐하는 놈이길래 이렇게 많은 칼 쓰는 놈들을 데리고 상단으로 위장한 채 들어와 있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