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7. 한양 환도의 조건(8)2019.10.29.
“어쨌든…….”
이성계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본궁의 대전 안에서는 짙은 혈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거기에 왜인이 자신을 공격했다는 점, 그리고 함주 인근에 천 명이나 되는 관군이 은밀히 진을 구축하고 있다는 것 모두 심상치 않은 상황이 벌어지려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아. 내가 그곳에서 척가 놈 하나를 구해왔는데, 그 와중에 이상한 걸 들었어.”
만우가 이성계에게 말했다.
“강순일이 들어간 그 군진을 이끄는 장수가 강현이라는 놈이었다. 곡산 척가에서 파문당한 놈이라 하더군.”
“강현?”
이성계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강현이라면 이성계도 알고 있었다. 곡산 척가와 얼굴을 붉힌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놈은 안변에 있어야 했다. 조사의의 곁에 보내 경험을 쌓으라며 자리를 만든 것이 바로 이성계 그다.
“그리고 그놈은 이 이름을 입에 담더군. 뭐라 그랬더라…… 아, 그래.”
만우가 어꺠를 으쓱했다. 이성계는 제발 자신이 예상하는 그 이름이 만우의 입에서 나오지 않기를 바랬다.
“안변부사 조사의.”
“…….”
이성계가 눈을 질끈 감았다. ***
“뭐라? 강현이 죽어? 그리고 관군 천 명은 몰살?”
조사의의 두 눈에서 겁화가 튀어나왔다. 반 거지 몰골이 된 전령은 고개를 숙인 채 조사의의 눈치를 살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고하라!”
조사의는 인상을 썼다. 관군이라고 하지만 그 천 명은 사실 조사의의 사병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안변 소속의 관군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들을 먹이고 키우는 데는 조사의와 안변 호족들의 사비가 들어갔다. 물론 안변에서 거둬들이는 세금을 은밀히 빼돌려 사용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그런 관군이 천이 거의 몰살당했다는 소리였다.
“강 종사관께서 관군을 동원하시어 일단의 낭인 무리들을 선공하셨습니다.”
“낭인?”
“예.”
“관군을 동원했다? 고작 낭인에?”
이해할 수 없는 강현의 결정에 고민하던 조사의의 눈이 커졌다. 강현의 신상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조사의다.
“미친 새끼. 설마 곡산 척가를 건드린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강현이 곡산 척가와 원수지간이란 것도 알고 있었다. 만약 그 낭인 무리가 곡산 척가의 무인들이라면 강현이 관군을 사사로이 움직였을 동기로 충분했다.
“곡산 척가라니. 곡산 척가!”
조사의는 마음 같아서는 두 발목을 잃고 반병신이 되어 돌아온 강현을 끌어내 목을 베어버리고 싶었다. 패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씨 집안의 눈치가 보여 함부로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호족은 또 무슨 말로 달래야 하나…….”
또 하나의 문제는 바로 호족들이었다. 관군들을 기르는데 호족들의 재물이 상당히 많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들도 곧 소식을 들을 테니 우르르 몰려올 것이다.
“그리고?”
하지만 아무리 곡산 척가의 무인들이라고 해도 가주나 원로들이 아닌 다음에야 천 명이나 되는 이들을 몰살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거기에 강현도 반병신이 되어 돌아왔지 않던가.
‘그놈의 성격이 폭급하고 무식하다고는 하나 검술 하나만은 뛰어났거늘.’
그런 강현에 관군이 천이다.
“강 종사관께서 그 낭인의 수장을 보이는 이와 단기로 싸우시던 도중 커다란 백호를 탄 신선 같은 이가 난입하여서…….”
“백호? 신선?”
조사의는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당최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령은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전령도 자신이 하는 말이 쉽게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이놈. 찬바람을 맞더니 혹시 돌기라도 한 것이더냐?”
조사의가 노성을 터뜨렸다. 그만큼 허무맹랑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한번 물어보십시오. 전부 소생과 똑같은 것을 보았습니다.”
전령이 억울하다는 듯 조사의에게 말했다.
“이놈이 그래도?”
“정말이옵니다. 모두 물어보셔도 저처럼 대답할 겁니다.”
천 명의 관군들 중 살아 돌아온 이들은 삼백여 명이 채 되지 않았다. 반면 그들을 그렇게 만든 적은 여덟 명이라고 했다.
“허어…….”
조사의는 필시 이놈들이 단체로 미친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놈을 끌어내어 목을 베어라! 패한 나머지 정신이 나간 놈이다!”
조사의는 그 전령의 말을 묵살했다. 그러자 바깥에 서 있던 이들이 들어와 전령의 어깻죽지를 누르고 겨드랑이 사이에 팔을 넣어 들어올렸다.
“정말이옵니다! 한 치의 거짓도 없사옵니다. 왜 소생이 부사 나리께 그런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전령은 죽기 싫어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조사의는 고개를 돌린 채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러자 전령이 비명을 내지르면서 바깥으로 끌려 나갔다.
“여덟 놈에게 천 명이 당하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일 리가 없지.”
조사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렇더라도 대체 어떤 놈들에게 들킨 것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조사의는 초조한 표정을 지었다.
“함주의 관군? 아니. 아무리 실력 차이가 난다고 해도 최소한 삼백 이상의 적이었을 터.”
삼백 명으로 천 명을 이겼다는 것도 믿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 정도는 이해가 갔다. 정예함의 차이나 전략전술의 차이로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수준이기 때문이었다.
“도순문사(都巡問使) 박만 어르신께서 드셨사옵니다.”
조사의는 얼굴을 찌푸렸다. 도순문사 박만은 동북면의 도순문사다. 동북면의 군사들을 관장하는 자였다. 또한 국왕에게 억하심정을 품고 있는 사람이기에 대업에 끌어들였다. 하지만 속이 좁고 소심하고 겁이 많아 이런 일이 있으면 쪼르르 달려와 걱정을 한 바가지를 늘어놓는 위인이었다. 그러나 반대로 그렇기 때문에 그 공포를 잘 이용해만 주면 동북면의 군사를 뜻대로 움직일 수 있어 옆에 두고 있던 조사의였다.
“조 부사. 내 급한 기별을 받고 이리 왔소. 그 소식이 참말이오? 함주 근처에 보냈던 부사의 병사들이 기습을 당해 태반이 죽거나 다쳤다 들었소.”
그를 마냥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기다렸던 조사의는 예상대로 박만이 들어오자마자 얼굴을 찌푸렸다. 그가 잔뜩 겁을 집어먹은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괜찮소. 별일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오.”
조사의는 몇 마디 말로 그런 박만을 달래주었다.
“그러면 그 왜인들에게도 문제가 생긴 것 아니오?”
“아…….”
조사의는 이마를 탁하고 짚었다. 관군에 이어 왜인들에게까지 문제가 생긴 것이라면 거사를 더 뒤로 미뤄야 한다.
“걱정 마시오. 그래봤자 명분은 우리에게 있소. 상왕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테니 말이오.”
“정말이오?”
박만이 의심 섞인 눈으로 조사의를 쳐다봤다. 벌써부터 대업이 시작하기도 전에 일이 어긋나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겁이 많은 박만으로서는 조사의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박만은 보신제일주의를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조사의의 대업에 참여하겠다고 한 것도 지금의 국왕이 자신을 동북면 구석으로 좌천시킨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이 조금이라도 위험해지거나, 이 대업이 반역으로 끝날 것 같으면 언제든지 발을 뺄 사람이다.
“정말이오. 우리가 모여 작성한 연판장이 있지 않소. 그것을 상왕께 보여드리면 상왕께서도 기꺼이 우리와 함께하실 것이오. 그분께서는 이방원을…… 증오하시니까.”
조사의의 눈이 번득였다. 연판장이라는 말에 박만은 헛기침을 큼하고 했다. 연판장에 서명을 한 순간 이미 한 배를 탄 것이나 다름없다.
“그냥 걱정이 되어서 그랬소이다.”
“걱정하실 필요 없소. 대신 군사나 공을 들여 조련해 주시오.”
“그것은 걱정하실 필요가 없소이다. 내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조사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박만은 소심하고 겁이 많았지만 그랬기 때문에 군사를 조련하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유사시에는 그 군사들이 자신의 구명줄이기 때문이란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동북면은 요동에서 도망쳐 온 도망병 출신의 오랑캐들이 많았기 때문에 먹을 것과 잘 곳만 주면 충성을 다하는 강인한 군사들이 많았다. 조사의가 군사를 일으키고, 박만이 동북면에서 호응을 해준다면 왕도 조바심이 날 것이다.
“그러면 먼저 일어나겠소. 공사가 다망하여.”
조사의는 박만을 안심시킨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직접 발품을 팔아 함주에서 도망쳐 온 패잔병들에게 직접 물어볼 생각이었다. 적의 규모는 어땠는지, 어떻게 그들이 패배하게 되었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알아야만 한다.
‘슌스케 그놈에게도 연통을 넣어 봐야겠구나.’
바빠진 조사의가 목소리를 높여 하인을 불렀다.
“병영으로 갈 것이다. 채비를 하거라!”
***
“아미타불.”
“아미타불. 어서 오시지요.”
경기 양주(楊州)에는 고려 충숙왕 시절 천축국(인도)에서 원을 거쳐 들어온 천축의 승려 지공이 천축국의 아라난타사(阿羅難陀寺)를 본떠서 창건한 266칸의 대규모 사찰인 회암사(檜巖寺)가 있다. 이 회암사의 감주(監主)의 환대에 소림의 사대승(四代僧) 중 일인으로 이번 무림맹 정의대에 참여한 소여래(小如來) 일홍이 서둘러 깊게 읍했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왕사(王師).”
“허허허허. 왕사라니, 소승에게는 과분한 호칭입니다. 그냥 시주라 불러주시지요.”
회암사의 감주는 왕의 스승까지 했었던 승려였다. 더불어 조선을 세운 건국공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존자(尊者)의 명성은 중원에서도 들었습니다. 화산의 검인이라 하옵니다.”
“존자라…… 그 역시도 과분한 말입니다. 아미타불.”
따로는 그를 일컬어 묘엄존자(妙嚴尊者)라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 호칭이 상당히 민망한 것인지 회암사의 감주는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빼빼 마른 몰골에 움푹 파인 볼, 그리고 파르스름한 머리는 그를 볼품없어 보이게 만들었지만 감주의 눈빛만큼은 정명하기 그지없었다.
“그냥 무학이라 불러주시지요.”
건국 초기 나라를 안정케 하고 조선의 새로운 법도를 정착시키게 하였으며 한양으로 수도 천도를 결정했던 무학(無學)이 바로 조선의 승려였다.
“예, 무학대사님.”
“허허허. 부처께서 제게 오늘 귀인들을 모셔다 주셨습니다.”
“방장께서 대사님의 안부를 전하라 하셨습니다.”
“아직도 정정하십니까?”
“예. 아미타불.”
무학대사는 50년 전 원의 연경에서 유학하여 그곳에서 소림의 불승(佛僧)인 혜근과 천축국의 승려인 지공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혜근의 제자이자 현 무림맹주인 무왕(武王) 천혜대사의 사제인 무혜대사와도 인연을 맺었었다. 그리고 현재 소림의 방장은 무혜대사였다.
“누추하지만 드시지요.”
누추하다고 했지만 회암사는 무려 266칸이나 되는 대규모 사찰이다. 조선이 건국되면서 사대부들을 중심으로 유학을 숭상하기 시작했으나 여전히 불교가 압도적으로 많은 백성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에 불공을 드리기 위해 온 사람들로 회암사는 북적였다.
“그래. 오시는 길은 평안하셨습니까?”
“예. 무탈하였습니다.”
정의대의 대주는 검인이었지만 여기서는 일홍이 다른 사람들 대신 입을 열었다. 무혜대사와 무학대사의 친분으로 조선에 머물 곳을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왕사 출신인 무학대사와의 친분까지.
“헌데 시주들은 어찌하여 이곳까지 오시게 된 것입니까?”
무학대사는 일홍에게 그 연유를 물었다. 검인이 순간 멈칫했다. 검주가 한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곳은 나, 아니 본주(本主)가 살아갈 곳이네. 자네들이 오가는 것을 막을 이유는 없으나…….]
수십 갈래로 쪼개지는 보름달 아래 만우는 고고하게 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나의 평온을 흐트러트리지 말라. 이건 내가 무림맹, 아니 중원무림에 하는 경고이니.]
그 때문에 검인은 솔직히 무학대사에게 전부 말하기로 했다. 자신들은 이방인이고, 이곳은 조선이기 때문이었다.
“아미타불.”
무학대사는 검인의 자초지종을 듣고는 불호를 읊었다. 듣자마자 무학대사도 깨달았다.
“시주들께서는 중원의 혼란을 이곳으로 옮겨놓으시고 싶으신 겁니까?”
“……아닙니다.”
검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때는 만우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만우의 말을 듣고 깨닫는 것이 있어 몇 번을 곱씹어봤기 때문이었다.
“이미 조선의 혼란은 시작이 되었습니다. 저희들은…… 그 혼란을 없애고자 왔습니다.”
이미 혼란은 시작됐다. 중원에서 마교와 사파가 넘어왔다. 하오문도 들어왔고 장보도에 눈이 먼 중소 방파들까지 모두 이곳으로 넘어오고 있었다.
“그러니 대사님의 힘이 필요합니다. 무량수불.”
검인이 무학대사에게 말했다. 무학대사의 눈에서 뿜어져 나온 정명한 안광이 검인을 응시했다.
“국왕전하의 조력이 필요합니다. 이는 조선을 위함이니 저희의 뜻을 곡해하지 말아주시옵소서. 무량수불.”
검인이 도호를 읊었다. 무학대사는 그런 검인을 빤히 쳐다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문 밖을 쳐다봤다.
“세자 저하들을 뵈러 가기로 한 날이 언제더냐?”
그러자 바깥에 대기하고 있던 동자승이 문을 빼꼼 열었다. 방 안의 무거운 공기에 눈치를 보는 표정이었지만 눈이 반짝이는 것이 영민해 보였다.
“글피이옵니다.”
“글피라…… 어떻소. 여독을 푸시기에는 충분들 하시겠소?”
무학대사가 빙그레 웃으며 검인을 쳐다봤다. 검인의 표정이 밝아졌다. 저 말인즉슨 무학대사가 도와주겠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충분합니다. 감사합니다, 대사님.”
“아미타불.”
무학대사는 그렇게 불호를 한 번 읊고는 일어섰다.
“조선을 위해 이 먼 길을 오신 시주분들께 소승이야말로 감사를 드리오.”
무학대사가 노구를 굽히자 기겁한 정의대의 대원들이 허리를 굽혔다. 비록 조선이란 나라는 작았지만 무학대사가 쌓은 불심은 정의대의 대원들이 함부로 경거망동을 할 수 없게끔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무학대사 앞에서 저절로 행동과 말을 조심하게 만들었다.
“그럼 글피 뒤에 이 땡중과 함께 한양으로 가십시다 그려. 끌끌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