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6. 한양 환도의 조건(7)2019.10.26.
‘삼 보.’
삼 보면 눈 한 번 깜박하는 사이에 베어낼 수 있다. 일월조가 익히고 있는 발검술은 왜 전체를 살펴도 견줄 이가 없는 속도의 발검술이다.
‘이후에는 이성계를 제압한다.’
이성계까지 관군의 존재를 알게 되었으니 조사의가 격문을 일으킨 후 이성계를 모셔가기 위해 함주로 온다는 계획의 근간 자체가 흔들릴 것이다.
‘저놈만 아니었다면.’
슌스케는 만우를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만우만 아니었더라면 이성계는 주줏쯔에 당해 쓸데없는 사실을 알지 않아도 됐을 것이고, 관군의 존재도 들킬 일이 없었을 것이다.
“연막!”
“하이!”
한번 결정하면 뒤는 돌아보지 않는다. 그런 추진력이야 말로 슌스케를 일월조장으로 만든 일등공신이다. 슌스케는 주저하지 않고 명령을 내렸고 함께 온 이들 중에는 사무라이만이 아니라 인자들도 섞여 있다는 점을 적절하게 이용했다. 쨍그랑! 펑, 펑, 펑!! 인자들이 품에서 연막항(缸)을 꺼내 터뜨렸다. 주먹만 한 항아리 안에 연기가 많이 나는 풀과 불씨를 집어넣어 항아리를 깨뜨리면 풀에 불이 붙으며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른다.
“상왕전하를 보호하라!!!”
가별초들이 검을 빼들면서 앞으로 튀어나왔다. 그와 동시에 슌스케의 얼굴에 악귀가 내려앉았다.
“흐읍읍!!!”
슌스케의 허리춤에서 번쩍하고 빛이 터져 나왔다. 이성계는 자신과 가별초들을 지나치게 신뢰한 나머지 슌스케를 비롯한 다른 이들이 무기를 패용하는 것을 허락했다.
‘그것이 당신의 목줄이 될 것이오. 상왕!’
하지만 지금 당장은 바로 옆에 있는 만우를 먼저 처리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저자에서부터 시작해 자신들과 얽혀 불행을 자초한 놈이다. 슈가아악!! 슌스케의 검이 얼마나 예리하고 빨랐던 것인지 주변을 자욱하게 물들인 연막항의 연기들이 쭉 하고 갈라졌을 정도다. 서걱!!
‘갈랐다!’
슌스케의 왜검 끝에 피륙에 걸려 서걱하고 잘리는 소리가 눈에 들어왔다. 발검술로 하나를 베어버린 슌스케는 주저하지 않고 곧바로 앞으로 치고 나간 사무라이의 뒤를 따랐다. 서거걱!
“크악!”
“크아악!”
상왕 앞을 가로막았던 가별초들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슌스케와 대동한 두 명의 사무라이는 일월조에서도 실력으로는 한 손에 꼽히는 이들이다. 일류 수준인 가별초들이 막아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거기에 뒤에서는 인자들이 독이 발린 수리검과 단검들을 던져대고 있는데다 갑작스레 일어난 일로 인해 슌스케와 일월조들이 기세까지 탔다.
“상왕을 제압한다!”
“하이!”
슌스케가 달려 나오자 옆에 서있던 사무라이들이 비켜서면서 길을 내주었다. 동시에 슌스케의 두 눈에 광기가 깃들었다. 서거거거거걱!!! 끄아아악!!! 슌스케의 앞을 가로막았던 가별초가 수십 조각으로 썰리며 고깃조각으로 변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자욱한 혈향이 주변으로 풍기면서 슌스케의 끈적한 살기가 주변을 잠식했다.
“상왕을 제외한 다른 놈들은 죽여라! 필요 없는 놈들이다!!!”
크아악!!! 주변에서 서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슌스케는 땅을 박차고 이성계가 서있던 곳으로 달려들었다. 아무리 늙은 호랑이라고 해도 호랑이는 호랑이다. 이성계의 활 솜씨는 그가 늙어도 빛을 바래지 않았기 때문에 이성계에게 시간을 줘서는 안 된다.
“상왕!!!!”
푸화아악!!! 슌스케가 연막항의 연기를 온몸에 휘감으면서 이성계가 서있던 곳으로 짓쳐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 우두커니 서있는 이성계를 향해 슌스케는 왜검을 날리듯이 휘둘렀다. 슈가가각!!! 공기가 왜검의 예리함에 잘려나갔다. 공기를 자를 정도로 극쾌의 검술을 펼치는 슌스케는 한 마리의 오니(鬼神)였다. 풍덩.
“난다요(なんだよ)?”
그런데 그 순간 슌스케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의 검격이 마치 거대한 바다에 빠진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 이게…….”
바로 저 너머에 이성계가 있었는데, 흡사 진법에 빠진 것처럼 슌스케가 검을 아무리 휘둘러도 닿지 않았다. 끼기기긱!! 그리고 그 다음 순간, 이성계의 두 눈에서 분노로 충천한 살의가 드러나면서 이성계가 대룡궁의 시위를 당기기 시작했다.
전설로 내려오는 용의 뿔(龍角)을 깎아 만든 이성계의 신물(神物)이다. 대룡궁으로 쏘아 보낸 화살은 천 보 이상을 날아 두터운 찰갑(札甲)도 뚫을 수 있다 알려져 있었다.
‘주, 죽는다.’
슌스케의 눈이 흔들렸다. 이성계의 화살 앞에 고혼이 된 아지발도의 심정이 이러할까. 슌스케는 이를 악물고 손을 뻗었다.
“오, 오야붕!!!”
투캉!!! 퍼어억!!! 부르르. 슌스케가 침을 꿀꺽 삼켰다. 아슬아슬한 순간에 자신의 부하를 잡아당겨 고기방패로 삼았다. 그런데 이성계의 화살은 부하의 몸을 꿰뚫고 난 뒤에도 힘이 남아 슌스케의 눈 바로 앞에서 부르르 떨었다.
“쓰레기 같은 놈. 왜구란 이름이 딱 걸맞은 놈이로고!”
이성계의 입에서 노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슌스케는 사는 것이 우선이었다. 슌스케는 이성계의 활을 피하기 위해 땅바닥을 굴러 뒤로 몸을 날렸다.
‘몸을 빼내야 한다. 여기서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지.’
사무라이가 검에 인생을 걸고 살아가는 이들이라고는 하지만 무인과는 엄연히 다른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살기 위해 검을 잡은 이들이다. 그리고 다이묘를 지키고, 그를 위해 싸우다 죽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는 이들이다. 그런 슌스케에게 조선에서 죽는 것은 다이묘를 위해 죽는 것도 아니고 그냥 개죽음일 뿐이다. 투각! 푸가각!!! 한번 대룡궁을 손에 쥔 이성계는 섬짓할 정도였다. 슌스케는 활을 든 이성계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존재인지 소름끼치도록 깨달았다.
‘이상한 그것만 아니었더라도!’
그래서 슌스케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이성계에게 닿을 수 있었던 최초의 검격이 어디론가 흡수된 듯 사라져 버리지만 않았더라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체 어떤 놈이. 사술인가?’
슌스케는 눈알을 주변으로 굴렸다. 만약 자신이 사술에 빠졌거나 진법에 빠진 것이라면 생문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기감을 끌어올려도 진법이나 사술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왜. 신기해?”
그런 슌스케의 두 눈이 커졌다. 슌스케의 바로 옆에서 웬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슌스케의 검이 빛살처럼 허공을 그었다. 슈가가각!!! 일격이 아니라 슌스케의 검은 극쾌에 닿아 있었기 때문에 그냥 휘둘러도 이격, 삼격이 연달아 펼쳐졌다. 이 연격의 늪에 빠지면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다. 그게, 만우만 아니라면 말이다.
“빠르지만…….”
기천으로 이성계에게 향하는 슌스케의 검격을 막아섰던 만우다. 제 아무리 강력하고 빠르며 천변만화하다고는 해도 하늘에는 생채기 하나 새기지 못한다. 만우의 기천이 바로 그 하늘이었다. 슌스케의 검은 번개처럼 빨랐지만, 수천 번 수만 번이 휘둘러진다고 해도 하늘을 베지 못한다. 그러니 슌스케의 검은 만우를 벨 수 없었다.
“빠르기만 해.”
게다가 쾌검이라면 만우도 질리도록 경험해 봤다. 중원에서 만우는 정·사·마를 가리지 않고 거의 모든 무기를 쓰는 이들과 거의 모든 경지에 도달한 이들과 겨뤄보았다.
‘현경은 없었지만.’
달마대사와 마교의 초대 교주인 천마, 그리고 무당파의 개파조사인 장삼봉이 현경에 도달한 이래 무림사에서는 단 한 명의 현경 고수도 배출하지 못했다. 그 때문이 인간의 한계는 화경이라고 모두가 생각하고 있었다.
“빠르기에만 치중한 검은…….”
차자자자장! 슌스케의 눈이 커졌다. 만우가 제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슌스케의 모든 검을 쳐내버렸기 때문이다.
“변(變)에 먹히지.”
만우의 검이 천변만화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슌스케는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조화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만우의 검은 때로는 연검인 듯, 때로는 단검인 듯, 때로는 거검인 듯 수시로 모양을 바꿔가며 슌스케를 향해 몰아쳤다. 슌스케가 내뻗는 쾌검은 연검과 거검에 의해서 가볍게 튕겨져 나갔고 틈이 보이면 예리한 단검이 찔러 들어왔다.
“으아아아아!!!!”
슌스케가 이를 악물고는 검속을 한층 더 높였다. 만우는 그런 슌스케를 보면서 씨익 웃었다.
“제법 발버둥을 치기는 한다만…….”
“차아아압!!!”
서거거걱!
“끄아아악!!!”
만우가 슌스케를 검과 함께 베어버릴 생각으로 괘검을 크게 휘둘렀다. 그런 만우의 검에서는 검강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슌스케는 초절정에 불과했고, 발검술만으로 만우에게서 검강을 끌어냈다는 것만 해도 칭찬받을 일이다. 물론 만우에게 말이다.
“이런 미친 새끼!”
하지만 만우의 검강이 베어버린 것은 슌스케가 아니었다. 그 찰나의 순간에 슌스케가 자신이 살기 위해 닌자를 만우의 검강이 떨어지는 곳을 향해 던져 버린 것이다. 촤아아악!!! 덕분에 만우의 검강은 슌스케를 베지 못했다. 대신 철퍽하는 소리와 함께 슌스케의 팔이 바닥에 떨어졌다. 하지만 슌스케는 만우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신음소리도 내지 않았다. 만우 정도의 고수의 오감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살아야 한다!’
부하의 몸을 미끼로 던져준 슌스케가 대전의 문을 부수고 밖으로 굴렀다. 그리고는 곧바로 몸을 일으켜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퍼억!!!
“끄르륵!!”
슌스케의 입에서 피거품이 일었다. 만우를 상대하느라 이성계가 있다는 것을 잊은 것이다. 하지만 슌스케도 독기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아서, 그 절체절명의 상황에도 몸을 틀어 화살이 어깨에 틀어박혔다.
‘이런 미친!!!’
으드득!! 슌스케의 어금니가 부서져 나갔다. 이성계의 화살이 무서운 것은 정확도나 속도가 아니라 맞은 다음이었다. 화살에 담긴 경력이 슌스케의 어깨짝을 걸레로 만들어 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들어온 경력에 준하는 공력을 끌어올려 그 부분을 보호하지 않으면 나머지 어깨마저 평생 쓰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외팔이 검객이 아니라 이제 더 이상 검을 잡지 못한다. 그렇다는 것은 슌스케란 사무라이의 인생만이 아니라 그 자체의 인생도 끝난다는 뜻이다.
‘산다!’
산다는 것에 대한 욕망이 엄청났기 때문에 슌스케는 기어코 도망쳤다. 만우는 부지불식간에 끼어든 닌자를 베는 바람에 피를 잔뜩 뒤집어써서 슌스케를 쫓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그 정도 피를 뒤집어쓰는 것만으로도 신경을 끌 정도로 만우에게 여유가 있다는 뜻이었다.
“놓쳤다.”
“알고 있어. 에이…… 드러워!!!”
피를 뒤집어쓰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만우다. 사람을 베어도 검에 혈흔이 묻지 않는 수준에 도달했기 때문에 마음에 들어 하던 만우다. 유랑과 방랑의 경계선에 있던 만우였기 때문에 만우는 더러워지는 것을 싫어했다.
“애들 많이 상했어?”
“별로. 덕분이다. 고맙군.”
슌스케가 들은 비명 소리과 피육음은 가별초의 비명소리가 아니었다. 이성계는 슌스케와 그 부하들이 움직이자마자 만우가 닌자를 하나 허공섭물로 끌어 슌스케의 공격을 대신 막아내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물론 가별초에도 피해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사무라이에게 둘 정도 중상을 입었지만 검을 다시 못 잡을 정도는 아니다. 그 외에는 전부 슌스케의 부하들이 만우에게 당하면서 낸 소리였다.
“그런데 그렇게 굼떠서 활로 밥 벌어먹고 살겠어?”
살아남은 가별초들은 만우의 무례한 말에도 무례하다 말할 수 없었다. 만우가 아니라면 분명 이성계도 부상을 입었을 수도 있다. 활을 들고 화살을 쏠 근력은 남아 있다고 해도 반사신경 등은 젊었을 때보다 못했기 때문이다.
“나도 늙은 모양이다. 네놈의 그 이상한 기해(氣海)가 아니었더라면 그랬겠지.”
이성계는 만우가 검으로 펼친 그 기예를 기의 바다라고 불렀다. 만우는 인상을 썼다.
“기해가 아니라 기천.”
“기천이라. 좋은 이름이구나. 기천…… 기천…….”
이성계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우가 중원에서 왔기 때문에 자신이 알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중원과 조선은 가깝지만, 무림과 조선은 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