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5. 한양 환도의 조건(6)2019.10.22.
“금창약, 금창약거리면서 중얼거리더니 약재를 직접 채취해 오겠다고 사라졌어요.”
“……채취?”
만우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방매의 재물에 대한 욕심을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탕재를 달이는 약재와 금창약으로 쓴 연고가 아까워 직접 약초를 캐오겠다고 나갈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비싼 건가요?”
호선은 의외로 이렇게 약재를 달이는 것을 마음에 들어 했다. 호랑이인 그녀의 원 모습을 생각하면 어울리지 않았지만 호선은 생각보다 훨씬 조신한 성격이었다.
“금창약?”
“네.”
호선이 궁금증이 담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만우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가 끄덕였다.
“그런 편이지. 아마도.”
금창약은 외상에 탁월한 효과를 가진 약이었다. 칼밥을 먹고 사는 이들에게는 여벌의 목숨이나 다름없는 약이기도 했다. 아무리 큰 검상(劍傷)을 입어도 칠 주야면 아물게 해주는 것이 바로 금창약의 힘이다. 물론 그것은 강인하게 단련된 무인의 몸과 회복력을 높여주는 내공이 뒷받침을 해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문제는 손바닥의 반만 한 금창약의 가격이었다. 금자 한 냥. 금자 한 냥이면 은병으로는 오십 개가 넘는다. 만우는 그 금창약을 척준영을 치료하기 위해 다섯 통이나 썼다.
‘어차피 필요도 없는데.’
만우는 자신이 쓸 일이 없기 때문에 당장 사람을 살리기 위해 쓴 것이었다. 만우가 무림을 활보할 때 만우에게 금창약을 쓰게 할 만한 적은 무림십좌밖에 없었다. 만우가 검주에 등극한 이후 만우에게 화친의 손길을 보내고자 하는 문파나 귀족 가문으로부터 이러저러한 선물을 많이 받았었다. 금창약은 수많은 그 선물들 중 하나였다. 하지만 재물만 바라보는 방매에게는 그런 전후사정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약초만 쓰면 되는 그런 검상에 만우가 금창약을 무지막지하게 발랐다는 것이 아까운 것이다.
‘내 돈만이 아니라 남이 쓰는 돈도 아까워하다니. 오지랖이 넓은 성격이야.’
만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는 호선에게 말했다.
“난 본궁에 다녀올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본궁으로 와.”
“네, 대협.”
호선이 조신하게 고개를 숙였다. ***
“왜상의 시인(侍人)이라.”
“그렇사옵니다, 상왕전하.”
슌스케는 이성계 앞에서 이마를 땅에 붙이고는 비굴한 자세로 일관했다.
“그들이 저자에서의 일을 억울하게 생각한 나머지 제 지시 없이 움직인 것이옵니다. 부디 의심은 거둬 주시옵소서.”
이성계가 마음에 들어 한 방매를 죽이려고 했던 일월조다. 그리고 그것을 이성계에게 들켜 버렸으니 어떤 식으로든 변명을 하고 용서를 구해야만 한다. 조사의의 계획에 따르면 이성계와는 대립각을 세울 것이 아니라 잘 구슬려 조사의가 일으킬 군대에 명분을 주는 존재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왜상의 호위라고 하기에는 실력이 상당하던데.”
이성계는 의심스런 눈길을 거두지 못 했다. 앞의 슌스케가 괘씸했지만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를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것보다도 자신의 잘못을 귀신처럼 눈치채고 먼저 굽히고 다가와 잘못을 비는데 무조건 잡아다가 문초를 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보잘 것 없는 소생을 본국에 계신 대행수께서 어여삐 봐주시는지라…….”
“흐음.”
이성계는 의심의 눈초리를 쉽게 거두지 못했지만 슌스케의 말에서 딱히 흠도 찾지 못했다. 확실히 그 시인이라는 상단의 호위가 무인이라면 그들의 자존심을 모르는 바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모두 죽어버렸으니 더 이상 탓해야 할 이도 없었다.
“허나 함주에서 그런 소동을 벌였고, 그것 때문에 전하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어 송구하다는 의미로 이것을 전하께 바치옵니다.”
슌스케는 조심스럽게 비단에 쌓인 기다란 것을 내밀었다. 이성계가 눈짓을 하자 가별초 하나가 그것을 가져와 이성계에게 바쳤다.
“이것이 무엇인고?”
“후예사일도(后羿射日圖) 불리는 화폭이옵니다.”
“후예사일?”
이성계는 흥미가 돋은 얼굴로 비단을 풀어 화폭을 펼쳤다. 그리고는 나지막하게 감탄했다.
“대단한 솜씨로구나.”
땅바닥에 얼굴을 처박은 슌스케의 입꼬리가 히죽하고 올라갔다.
‘얌전해져라, 늙은이.’
이성계는 화폭 안의 그림이 자신을 끌어당긴다는 느낌을 계속해서 받았다. 한번 보니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흡사 자신이 후예가 되어 하늘의 태양을 향해 활을 들어 올리는 것 같았다.
“부디 소생의 정성을 받아주시옵소서.”
“호오…….”
이성계는 앞의 슌스케가 있다는 것도 희미해졌다. 슌스케는 고개를 살짝 들어 이성계의 얼굴을 보고서는 히죽 웃었다.
‘게이샤(藝者: 예자)는 얼굴과 웃음으로만 사내를 홀리는 것이 아니지.’
왜는 천황 아래 난립하는 수많은 다이묘(大名)들로 인해 늘 암투와 전쟁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붓보다는 칼을 숭상하는 사람이 많았고 슌스케와 같은 사무라이(侍)들은 길거리에서 백성을 죽여도 그 죄를 묻지 않았다. 세력과 세력이 전쟁을 할 때 가장 손쉬운 방법은 상대측의 다이묘를 죽이는 일이다. 머리가 잘린 뱀은 그냥 몸부림치는 정도 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이묘를 가장 확실하고 손쉽게 죽이는 방법은 바로 미인계였다. 게이샤. 예쁜 얼굴과 웃음은 세월이 흐르면 빛을 잃는다. 그래서 더욱 오래 살아남기 위해 게이샤들은 춤과 노래, 시서예화(試書藝畵)를 배웠다. 그중 특별한 수법을 배운 게이샤들이 돈에 매수가 되어 미인계로 상대측 다이묘를 유혹하여 암살하기 시작했는데, 게이샤들만이 배우는 주줏쯔(呪術)의 탄생이다. 그리고 지금 슌스케가 내민 화폭에는 주줏쯔가 담겨있었다.
‘미개한 조선놈들은 생소할 수밖에 없지.’
게이샤의 주줏쯔는 모르고 있으면 당할 수밖에 없다. 그건 아무리 가진 바 무위가 뛰어나더라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공력과는 다른, 영력이라 사무라이나 게이샤들이 부르는 차크라를 사용하기 때문이었다. 화폭에 담긴 주즛쯔는 최면이었다. 최면에 빠진 상대는 슌스케에게 본능적으로 호감을 느끼게 되고 그의 말을 따르게 된다.
‘이렇게 되면 명분과 관련된 것도 해결할 수 있다.’
슌스케는 매우 영악한 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위기라 할 수 있는 당금의 상황을 자신의 꾀를 이용해 오히려 기회로 만들었다. 만우가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분명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우수수! 부릅. 순간 엎드린 채 이성계가 화폭에 담긴 주줏쯔에 빠져들기를 기다리고 있던 슌스케의 눈이 커졌다. 팔의 솜털이 일어나면서 전신에 소름이 쫘악 돋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런 경우를 슌스케는 잘 알고 있었다. 덕분에 살아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강자!’
콰직! 잠시 후 콰직하는 소리와 함께 정신을 잃은 가별초 하나가 문과 함께 통째로 대전 안으로 굴러들어왔다.
“음?”
슌스케는 당장이라도 몸을 피하고 싶은 것을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았다. 하지만 이성계가 주줏쯔로부터 빠져나오는 것까지 어찌할 수는 없었다.
“무슨 일인가!”
굴러들어온 가별초가 잠시 멍한 눈으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다가 이성계의 노성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는 그 앞에 부복하며 말했다.
“사, 상왕전하. 지금 대전 밖에 무뢰한이 침입하여…….”
“무뢰한?”
이성계의 눈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잠시 뒤 이성계는 그 무뢰한의 정체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뭐야. 노인장. 노인장이 데리고 있는 애들 원래 이렇게 약해?”
가별초가 대전 안으로 날아들면서 뜯어진 문 안으로 만우가 뚜벅거리며 걸어 들어온 것이다. 만우는 소맷자락을 스윽 쓸어내렸다.
“네놈이냐?”
“그럼. 내가 아니면 누구라고.”
슌스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난 번 저자에서 방매 옆에 서있었던 볼 품 없는 놈이었다.
“가별초들은…….”
“죽이진 않았어. 부러진 놈들도 없고. 그냥 기절? 쯧. 조금 더 강하게 키워야겠던데?”
필두와 감령, 문형일과 마익후를 떠올린 만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슌스케는 고개를 돌려 뚫린 대전 바깥을 쳐다보고는 헛숨을 들이켰다. 가별초들 수십이 땅바닥에 누워 있었다.
“네놈이라면 굳이 저렇게 때려눕히지 않더라도 들어올 수 있었을 텐데.”
이성계는 손짓으로 주변의 가별초들을 뒤로 물리면서 만우에게 말했다. 만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굳이 그렇게 들어올 필요가 없는데 왜.”
“끄응…… 그래. 네놈에 대해 말해놓지 않은 이 노부의 잘못이 크지.”
이성계가 스스로를 노부라고 칭했다. 슌스케의 눈이 더 커졌다. 그와 동시에 만우에 대한 궁금증이 와락 일었다.
‘대체 저놈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분명 만우에게서 자신을 수도 없이 구했던 그 본능의 경고를 느꼈다. 거기에 가별초들을 혼자 뚫고 본궁까지 들어왔다는 것은 뛰어난 실력자라는 뜻이다. 그런데 지금 슌스케가 느끼는 만우는 그 정도의 강자는 아니었다. 강하긴 하나, 자신이라면 상대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 정도?
‘종잡을 수 없는 놈이다.’
이곳 본궁의 가별초들을 뚫어내는 것은 초절정 정도만 되면 할 수 있었다. 이성계 주변을 지키는 가별초들이 아니라 본궁 주변을 지키는 가별초들은 잘해야 일류가 최고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냥 쓰러뜨리고만 들어올 수는 없다.
‘강한 것인가, 약한 것인가.’
그렇기에 슌스케는 만우가 얼마나 강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보다 얼마나 약한 것인지 감이 서질 않았다.
“왜놈들이네?”
“그래. 기루에서의 일 때문에 왔더군.”
“아, 그 새끼들?”
만우가 슌스케를 내려다보면서 히죽 웃었다.
“노인장. 강순일이랑 노인장이랑 각별한 사이라고 했지?”
“내가 총애하는 아이다.”
“그놈. 저 왜놈이 머물고 있는 기루에 들어갔다가 나오던데?”
“뭐라?”
이성계는 얼굴을 찌푸렸다. 자신은 분명 강순일에게 근신을 명령했다. 자신의 명을 거역한 것이다.
“그것을 이르러 온 것인가? 내 분명…….”
하지만 만우가 찾아올 정도는 되지 않았다. 그 때 만우가 이성계의 말허리를 잘랐다.
“뭐, 그건 아니고.”
슌스케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누군가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어디까지 만우가 알고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슌스케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만약의 상황에 대비하라.]
슌스케가 얼굴을 땅에 박은 채로 따라온 일월조의 사무라이들에게 말했다. 그러자 사무라이들의 눈빛이 변했다. 만약의 상황에 대비한다는 것은 한 가지를 뜻했다. 이성계의 제압. 이도 저도 안 통하는 상황에서는 이성계를 제압하여 강제로 조사의의 군대에 합류시키겠다는 뜻이었다. 지금 눈앞에 자신들의 계획을 눈치채고 있을지도 모르는 만우가 등장했다는 것에 슌스케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함주 동남쪽. 20리 정도 떨어진 지점에 천 명 정도 되는 규모의 군진이 있던데, 그곳으로 가더군.”
“군진? 관군이 있다는 소리냐?”
이성계의 눈이 커졌다. 그가 모르고 있던 사실이다. 가별초들에게서도 아무런 보고가 올라오지 않았다.
‘저들도 모르고 있었군.’
만우는 이성계와 가별초들의 얼굴에 일어난 파문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이성계는 이번 일과 관련이 없는 듯 보였다. 하지만 슌스케는 아니었다. 움찔.
‘어떤 병신 같은 놈들이…….’
저절로 욕지기가 치밀어오를 수밖에 없었다. 조사의의 격문이 전국팔도에 나붙기 전까지는 그토록 만전에 만전을 기하라고 하였는데.
‘들키면 죽이던가!’
만약 들켰으면 죽여야 했다. 슌스케는 그것을 보고 비명횡사 한두 명의 남자들을 떠올렸다. 모두 지금처럼 이성계를 한양으로 환도시키기 위해 국왕이 보내 온 이들이었다. 그 후에는 정보를 조작하여 상왕이 국왕에 대한 분노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커 쏴 죽였다고 소문을 내기는 했지만.
‘죽여야 한다.’
슌스케의 두 눈에 살의가 깃들었다. 슌스케는 만우와 자신 사이의 거리를 가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