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4. 한양 환도의 조건(5)2019.10.19.
“검주가 대체 왜 여기에!”
위문이 이를 악물었다. 검주와 부딪쳤던 위문에게 검주는 넘을 수 없는 거대한 태산이었다. 자신이 자랑하던 폭혈도를 어린아이를 상대하듯 다뤘던 검주다.
“마일!”
주창이 마일을 쳐다봤다. 마일도 군사를 몰아오는 것이 검주라는 것을 알고는 경악했다. 마일이 두 눈을 부릅뜨고는 주창에게 말했다.
“저희를 저 조선군과 충돌시키는 것이 목적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악궁님!”
악궁은 테무르의 별호다. 테무르가 마일을 쳐다봤다.
“검주, 맞추실 수 있습니까?”
테무르가 아무 말 없이 대궁을 그의 등 뒤에서 꺼내들었다. 거대한 물소의 뿔로 만들어진 대궁이었다.
“쏜다. 맞춘다.”
끼기기긱!!! 1000보 바깥의 나무에 매달린 사과를 쏘아 맞추는 테무르다. 물론 내공의 힘이 있고, 선천적으로 안력이 뛰어난 원의 황족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테무르는 활의 시위를 힘껏 잡아당겼다가 놨다. 그러자 화살촉이 십자로 갈라진 화살이 무서울 정도로 대기를 찢어발기면서 달려오는 하얀 점을 향해 날아갔다.
“이제 검주와 우리가 한 패가 아니라는 것을…….”
“늦었다.”
주창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마련검에 공력을 불어넣자 마기가 물씬 피어오르며 대기가 짜르르 울렸다.
“대주, 어찌하여…….”
마일이 주창에게 말하는 순간 뒤에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콰앙!!! 후두둑.
“이런 망할…….”
위문이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욕지거리를 씹어 내뱉었다. 화살이 날아간 곳을 바라본 마일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파바바박!! 분명 테무르가 쏘아낸 화살의 과녁이 된 커다란 백호와 만우는 계속해서 달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뒤를 쫓아오던 천 명의 관군들이 개미떼처럼 사방으로 흩어져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수십 갈래로 찢져 나간 육편과 피보라가 관군들의 진열을 흐트러뜨린 것이다.
“피했다고?”
기무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 옆에 서 있던 마정, 백영이 기무의 말을 받았다.
“호랑이가 피했다. 그냥 범이 아니야. 영물이다.”
백영은 감탄한 표정이었다. 그는 무림십좌의 2인인 마존과 곡왕의 공동전인으로 주창, 옥령에 이어 투귀대의 세 번째 실력자였다.
“범. 영물. 맞추지 못한다.”
테무르가 그런 백영의 말에 쐐기를 박았다. 테무르는 낭패한 표정이었다. 테무르는 뛰어난 활과 활솜씨를 가지고 있지만 영물 호랑이를 맞출 정도는 아니다.
“……대주. 죽립을 다시 쓰시지요.”
투귀대는 이렇게 관군을 공격한 셈이 되어 버렸다. 주창이 마일을 쳐다봤다.
“저들을 돌파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 후 쉬지 않고 안변으로 달려가 조사의라는 자를 만난다면 해결될 일입니다.”
“대체 검주 저자는 우리와 무슨 원한이 있다고.”
위문이 옆에서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주창은 마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죽립을 다시 쓴 뒤 돌파한다.”
“존명!”
검주가 끌고 온 관군이니 검주에게 무슨 또 다른 꿍꿍이가 있을지 모른다. 그 때문에 투귀대는 그냥 관군을 강행돌파하기로 마음먹었다. 파바바밧!!!!
“으하핫. 이보시게들! 내가 자네들을 위해 선물을 가져왔네!!!”
그사이 불쑥 가까워진 만우가 오래 헤어진 친우를 만난 것처럼 손을 흔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주창을 비롯한 투귀대가 이를 으드득 깨물었다.
“검주를 피해 적을 돌파한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관군이 천이나 몰려오는데 검주와 싸울 수는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검주와 결판을 내고 싶지만, 주창은 투귀대주로서 최선의 명령을 내렸다. 동시에 여덟의 투귀대가 큰 원을 그리며 만우를 회피해 달려오는 관군의 속으로 파고들었다.
“적이 더 있다!”
“잡아! 잡아야 한다!!”
우와아아!!!! 여덟의 투귀대지만 그들은 하나하나가 초절정에 준하는 빼어난 무인들이다. 하지만 만우에게 꿍꿍이가 있다고 생각하여 만우를 의식하느라 관군들을 단박에 뚫지 못했다. 만우는 그 모습을 보며 씩 웃었다.
“원래 내가 마교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십만대산에 숨어서 꿍꿍이만 노리는 놈들 같거든.”
“으……으으…….”
[뒤의 인간이 죽을지도 모르겠어요!]
싸우는 모습을 더 구경하고 싶었지만 척준영의 상황이 좋지 않았다. 만우는 입맛을 쩝하고 다셨다.
“축지로 돌아가자!”
[알았어요!]
호선이 그 자리에서 번쩍하고 사라졌다. 연습만 하던 축지를 처음으로 제대로 펼친 것이다. 그렇게 만우와 호선이 그 자리에서 연기처럼 사라지자 투귀대와 관군들의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관군들은 당황한 것이고 투귀대는 검주 만우의 명성을 알기 때문에 조심스러워진 것이다. 하지만 그 한참 뒤로도, 정확히는 투귀대가 관군들 이삼백을 베어버리고 도주할 때까지 만우는 그 자리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검주우우우우!!!!”
주창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산골짜기에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 퍼억!
“흡!! 흐어어억!!!”
만우의 장심이 척준영의 명문혈을 내리치자 감겨져 있던 척준영의 눈이 번쩍하고 뜨였다.
“정신이 드오?”
“이, 이곳은…….”
척준영이 현실감이 없는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주막의 봉놋방이었다.
“함주 저자의 주막이오.”
“아!”
척준영이 정신이 돌아온 듯 눈을 크게 치켜떴다. 그리고는 몸을 일으키려고 힘을 줬다.
“으윽!!!”
하지만 척준영은 신음소리를 흘리며 벌러덩 드러누웠다. 몸을 일으키려고 한 순간 여기저기서 격통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무리하지 마시오. 여기저기 많이 상했으니.”
만우는 쯧하고 혀를 한 번 차고는 척준영에게 말했다. 척준영은 여기저기 널린 피 묻은 무명천을 보고는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를 완벽하게 떠올렸다.
‘강현…….’
으드득. 자신은 분명 강현과 생사결을 펼치고 있었다. 하지만 정확히는 생사결이 아니라 일방적인 농락이고 능욕이었다. 다리와 팔에 화살을 맞은 자신을 놓고 강현 그놈은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듯 장난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제, 사매…….’
그리고 그런 강현에게 희생당한 소사각의 단원들이 떠오르지 척준영의 눈에서 소리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비록 척준영이 각주였지만 그들은 전부 척준영의 사제와 사매들이었다.
“눈물 흘릴 힘이 있는 걸 보니 이제 살아난 모양이구려.”
내공을 불어넣어 강제로 깨웠던 만우가 히죽 웃으면서 사발을 내밀었다. 약재 냄새가 짙게 나는 탕약이었다.
“대충 금창약은 발라놓았고…….”
“금창약?”
놀란 척준영이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강현의 검으로 인해 난도질이 된 자신의 몸 여기저기에 고약한 냄새를 내는 연고가 덕지덕지 발라져 있었다.
“이 귀한 것을 어찌 나에게…….”
“궁금하오?”
만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척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정신을 잃기 전 모습이 떠올랐다. 전설이나 이야기 속에만 나오는 줄 알았던 공수입백인(空手入白刃). 발목이 잘려 울부짖는 강현. 그리고 백호를 타고 나타난 한 명의 남자까지.
“귀, 귀인은 누구십니까.”
강현의 무위는 척준영이 멀쩡할 때와 비슷하거나 반 수 정도 뛰어난 수준이었다. 그런 강현의 검을 어린아이 손목을 비틀듯 잡아챘다면, 감히 자신 따위는 올려다볼 수도 없는 고수라는 뜻이다.
“눈치가 빠르구려.”
“직접 두 눈으로 보았는데……혹시…… 검선(劍仙)이시오?”
“검선? 내가?”
“그게 아니고서야 어찌 인간이 백호를 타고…….”
만우는 척준영의 착각을 이해했다. 생각해 보면 착각할 법했다. 사람이 백호의 등에 탄 채 나타나 검을 휘두른 것이니 말이다.
“알려줘도 괜찮을 이름이긴 하나, 굳이 알려줄 필요가 없으니 그냥 은인 정도로만 생각하시오.”
만우가 히죽 웃었다. 그가 척준영을 데려온 이유는 간단했다.
“은인이라…… 알겠소.”
척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우가 별로 밝히고 싶어 하지 않으니 은인에게 더 이상 묻는 것도 실례였다. 만우가 그런 척준영에게 말했다.
“곡산 척가라 지난번에 들은 것 같은데, 어찌하여 관군과 싸우고 있었던 것이오?”
강순일이 왜상이 있던 기루에서 몰래 빠져나와 향한 곳이 산중턱에 진을 차린 관군이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쪽과 싸우고 있던 그자는?”
“강현…… 으드득.”
강현이란 이름에 만우의 눈이 커졌다. 강순일과 성(姓)이 같았다.
‘그놈이 그쪽으로 향한 이유가 그 관군과 관계가 있다.’
“그놈은 우리 곡산 척가에서 파문을 당한 강현이란 놈이오. 손속이 잔인하고 악독하여 가문의 어르신들이 파문을 시켰소.”
“원래 파문이라면 근맥을 끊거나 단전을 폐하거늘. 그놈은 그런 게 없었소만?”
만우는 그 이유를 짐작하면서도 척준영에게 물었다. 척준영의 입을 통해 그 이유가 나와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놈은 상왕전하의 배필이신 현비 강씨 집안의 일족이오. 그러니 파문만 하였을 뿐, 그냥 자신의 가문으로 돌아간 것이지.”
“쯧……그래도 옛 사문의 동료들인데 그렇게 활을 쏘아 죽였단 말이오?”
만우가 죽은 소사각의 단원들을 상기시키자 척준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나에게 억하심정이 많았을 테니까.”
“흐음…… 그런데 천 명도 넘는 관군을 이끌고 함주 근처에 숨어 있는 것이 무슨 의미 같소?”
“천 명? 그 관군이 천 명이나 됐단 말이오?”
강현은 현비 강씨의 일족이니 관군을 동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천 명이나 되는 규모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강현은 그들이 안변부사 조사의 대감의 병력이라고 하였소.”
“안변부사 조사의.”
만우가 그 이름을 되뇌었다. 중요한 인물임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역당이오. 그 정도 규모의 관군이 움직였다면 강씨 가문에서 역심을 품고 있는 것이오.”
척준영이 만우에게 말했다. 만우의 눈썹이 꿈틀했다.
“역당이라?”
“그렇소.”
“흠.”
만우는 본궁의 이성계에게 직접 대답을 들어야 할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반역자들로 의심되는 군대가 함주 근처에 상주하고 있다는 것을 이성계가 아는지 모르는지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반역의 무리가 왜 상왕이 기거하는 함주 근처에 온 것이지?’
만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 상왕전하의 윤허를 받고자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주상전하께는 옥새도 없고, 상왕전하의 인정도 받지 못 했으니까. 그래서 명분을 얻으려고 하는 겁니다.”
척준영이 만우에게 말했다. 지금의 현 국왕이 상왕인 이성계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한양 저잣거리의 삼척동자들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지금의 국왕이 형제들을 죽이고 그 핏값으로 왕좌를 얻어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현 국왕이 꼴 보기도 싫다는 이유로 함주로 내려와 한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이성계가 버티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명분.’
그 정도로 상왕인 이성계가 국왕을 싫어하는 것이라면 반역의 무리들이 이성계를 옹립함으로써 얼마든지 패륜한 아들을 벌한다는 명분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일단은 이성계를 직접 만나봐야겠군.”
만우가 중얼거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성계를 찾아가 척준영에게 들은 것을 이야기해 주고, 그의 반응을 살펴보면 될 일이다.
“그럼 보중하시오. 약재는 내 동료를 시켜 계속해서 넣어줄 테니.”
“은인. 한 가지만 더 부탁해도 되겠소?”
척준영이 만우에게 말했다. 만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시오.”
“내 염치가 없으나 부디 곡산 척가에 연통 하나만 넣어주시오. 사제와 사매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현 상황을 알려야겠소.”
“흐음…… 그러리다.”
만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척준영은 그제야 기절하듯 잠에 빠졌다. 만우는 봉놋방에서 나오면서 주막 뒤뜰에서 탕재를 달이고 있는 호선을 쳐다봤다.
“방매는?”
동군영은 본궁에 가있었다. 어떻게든 이성계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방매가 자리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