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3. 한양 환도의 조건(4)2019.10.15.
검객이 오른 발목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이제 검을 놔야 한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검을 휘두르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상체를 받쳐줄 하체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끄으으으으…….”
강현이 피를 콸콸 쏟아내는 발목을 붙잡은 채로 버둥거렸다. 척준영은 멍한 눈으로 그런 강현과 만우를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자. 가십시다.”
덥썩. 만우는 불문곡직하고 척준영의 뒷덜미를 잡아들었다.
[빨리 와요!]
크와아앙!!! 저쪽에서 호선이 펄쩍거리면서 뛰어다니는 것이 보였다. 정신을 차린 군졸들이 호선을 향해 이리 몰렸다 저리 몰리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간다. 이리로 와!”
크와아아앙!!
“허, 허억! 호랑이!!!!”
저 멀리서 호선이 뛰어오자 그제야 호선을 발견한 척준영의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하지만 동시에 만우의 무릎이 굽혀지더니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팡!!! 턱. 크와아앙!!! 눈 깜짝할 사이에 호선의 등 뒤에 올라타게 된 척준영에게 만우가 말했다.
“떨어지기 싫으면 딱 달라붙어서 털 쥐고 계시오.”
[살살 쥐어요! 털 빠지면 아파요!]
“허억!”
척준영은 자신의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여자의 목소리에 기겁했다. 거대한 백호와 어울리지 않는 여자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어디로 가요?]
허공에 솟아오른 호선의 등에 탄 만우의 눈에 사방에서 몰려드는 군졸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대장인 강현이 쓰러진 탓에 갈팡질팡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쪽으로.”
하지만 강현의 두 눈에 서린 독기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린 만우가 웃었다. 그리고는 한쪽을 가리켰다.
“속도 줄여서 적당히. 우리가 독박 쓸 필요 없으니까.”
[대체 무슨 생각인건지는 당최 모르겠지만…….]
만우는 저 너머에서 느껴지는 하늘을 찌를 듯한 마기를 느끼고는 히죽 웃었다.
“달려라!”
***
“테무르. 무언가 보이는 것이라도 있어?”
폭혈도 위문이 한 자리에 움직이지 않은 채 가만히 서있기만 하는 테무르를 보면서 투덜거렸다.
“위문.”
그런 위문을 주창이 나서서 불렀다. 위문이 주창을 돌아봤다.
“테무르의 적설청은 교내에서도 따라올 자가 없는 뛰어난 척후(斥候)다. 그러니 그만 재촉하거라.”
“끄응…… 죄송합니다, 대주.”
위문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는 다혈질이었고 성격이 급했지만 자신이 괜히 짜증을 냈다는 것을 모를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도 신경이 쓰이더냐?”
주창이 위문에게 말했다. 위문은 주창을 쳐다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 솔직히 대주께서도 아직 후기지수신데 검주 그자가 무림십좌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 번 손을 섞어보니 어떻던가?”
주창이 그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빙긋 웃어보였다. 위문은 도병의 끄트머리로 옆머리를 북부 긁었다.
“무림십좌의 명성이 허투루 난 것이 아니라고 느꼈습니다.”
그것을 듣고 있던 기무가 옆에서 불쑥 끼어들었다. 마교에 투신한 낭황의 진전을 이어받은 광호검 기무는 자유분방한 낭황만큼이나 자유분방한 성격이었다.
“생각보다 폭혈도, 네가 약한 게 아니라?”
기무의 실력은 의심할 바가 없었지만 그는 낭황만큼이나 성격이 괴팍했다. 그래서 그는 상대방의 감정을 신경 쓰지 않고 나오는 대로 내뱉었다.
“기무. 한번 폭혈도의 맛을 보고 싶으냐?”
거기에 기무는 검이고 위문은 도다. 검객과 도객 사이에 얄궂은 경쟁심이 있다는 것은 모르는 자가 없었다. 신기하게도 그건 정파와 사파, 마교를 가리지 않고 두드러지는 현상이었다. 위문이 으르렁거리자 기무가 재밌겠다는 듯 입술을 혀로 핥았다.
“좋지. 몸이 안 그래도 찌뿌둥하던데.”
“두 분 다 그만두시지요.”
둘 사이의 싸움이 진짜로 시작되기 전에 파천서생 마일이 끼어들었다. 주창이 그런 마일에게 말했다.
“재밌지 않으냐. 검과 도로 교에서 한 손에 꼽히는 두 분의 진전을 이어받은 둘이다. 나도 어느 병장기가 더 강한지 궁금했거늘.”
“대주. 농이 지나치십니다.”
마일이 주창을 흘겨보자 주창이 껄껄거리며 웃었다. 주창은 고개를 돌려 나찰사화 옥령을 쳐다봤다.
“령아. 너는 궁금하지 않더냐?”
주창이 말을 걸자 옥령의 양 볼에 은은하게 홍조가 피어올랐다. 혈성이 도지지 않았을 때의 옥령은 규수도 그런 규수가 없을 정도로 조신했다.
“소녀는 맨손을 사용하는지라. 별 관심이 없사옵니다.”
혈마공은 맨손으로 펼치는 무공이다. 그러자 주창이 껄껄거리며 웃었다.
“그래. 저 둘이라 해도 령이 너보다는 약하니 관심이 없다는 말이로구나.”
“주…… 주 오라버니. 소녀는 그런 말이 아니라…….”
“역시 우리 사화는 촌철살인의 대가구나. 크하하하.”
웅풍이 웃기다는 듯 껄껄거리며 웃음을 터뜨리자 옥령이 울상을 지었다. 그녀는 주창에게 그렇게 무지막지한 마녀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으음…… 그렇지. 분하긴 하지만.”
“제길. 사화만 아니었다면.”
하지만 문제는 위문과 기무도 웅풍의 말에 반박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정말로 혈성이 도진 옥령의 무위는 주창이 아니면 투귀대에서는 대적할 수 있는 자가 없었다.
“몰라요.”
옥령이 두 눈을 가리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모습이 퍽 귀여워 주창이 껄껄거리며 웃었다.
“위문이 좋은 경험을 한 것이다. 너희들도 검주 그자를 봤으면 좋았을 것을.”
방매와 호선, 동군영을 구하러 가던 만우의 발목을 붙잡으며 그와 조우했던 것은 위문과 주창이 다였다. 다른 이들은 한 발 늦게 도착해 만우와 직접 마주치지 못 했다. 그것을 주창은 아쉬워했다.
“또 다른 하늘(天)을 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도움이 되었을 터.”
위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만우와 그렇게 손을 섞고 난 다음에 자신의 실력이 늘어났다는 것을 체감했기 때문이다.
“대주께서 그리 극찬하는 이는 처음 봤습니다.”
마일이 신기하다는 듯 주창을 쳐다봤다. 동시에 마일 스스로도 검주란 이에게 호기심이 이는 것을 느꼈다. 주창의 자존심은 하늘을 찔렀기 때문에 그가 인정하는 무인은 자신의 아버지인 혈세천마가 전부일 정도였다. 그런데 주창이 이토록 높이 평가하는 무인이라니.
“아마 그자가 무언가에 그렇게 다급해하지 않았더라면, 좋은 싸움이 되었을지도 모를 터. 허나…….”
주창이 빙긋 웃으며 투귀대원들과 한 명씩 차례대로 눈을 마주쳤다.
“내가 졌을 것이다.”
“대주!”
“!!”
주창의 인정에 투귀대원들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주창이 누구던가. 마교의 유구한 역사에서도 손으로 꼽을 정도의 기재가 바로 그였다. 아버지인 혈세천마도 손 꼽히는 기재였지만 주창은 불과 서른의 나이에 화경지경에 도달한 초유의 천재다. 그 때문에 세월이 흐른다면 마교의 고금제일인인 초대 천마만이 대성했다는 천마신공(天魔神功)을 대성할 재목이라 여겼다. 그런데 그런 주창이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하지만 다음에는 내가 이길 것이다.”
주창이 호승심을 강하게 드러냈다. 그러자 옥령이 옆에서 말했다.
“맞아요. 다음번에 주 오라버니는 꼭 그 검주란 자를 손쉽게 꺾으실 수 있을 거예요. 주 오라버니니까.”
옥령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로 투귀대원인 그들에게 대주인 주창은 하늘이었다. 하늘인 주창에게 패배란 없다. 그들은 그렇게 믿었다.
“전방에 군대, 온다.”
그런데 그때 테무르가 눈을 떴다. 눈을 뜬 테무르의 한 쪽 눈은 적설청의 그것처럼 붉었다. 그 눈으로 적설청의 시야를 공유한 테무르였다.
“군대? 조선의 군대란 말인가?”
“맞다. 군대, 천 명 정도.”
테무르는 멸망한 원의 황족이었다. 명에 대한 복수를 위해 마교에 투신한 그는 마교의 최고 전투집단 중 하나인 살풍대의 주인이기도 했다.
“천 명?”
주창의 눈이 커졌다.
“조사의란 자가 이곳까지 우리를 맞이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을 리도 없고.”
의주에서 투귀대를 만난 만우는 그들이 제부투혼을 노리고 조선으로 들어온 것이라 생각했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투귀대가 노리는 것은 바로 다른 것이었다. 그 때문에 안변부사인 조사의를 만나기 위해 안변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쪽으로 오고 있다. 누군가를 추격. 누군지는 모르겠다. 처음 보는 남자.”
테무르의 한어(漢語)는 완벽하지 않았지만 알아들을 정도는 됐다. 그러니까 천 명이나 되는 군대가 누군가를 쫓고 있다는 뜻이었다.
“커다란 호랑이. 백호를 타고 있다. 젊은 남자.”
“미친. 천이나 되는 군대에게 쫓기고 있다고? 단 한 명이?”
기무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중원의 무인들은 군대의 군졸들을 무시하지만 낭황의 제자인 기무는 아니었다. 그는 천이 넘는 난전 상황에서 군대가 발휘하는 힘을 잘 알고 있었다. 낭황의 밑에서 무예 수련을 하면서 변방의 전쟁에 참여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수와 소수 간의 싸움에는 무림인이 압도적으로 유리하지만, 서로 부딪치는 숫자가 천을 넘어가면 군대가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아무리 무림십좌라고 해도 눈 먼 칼이나 화살에 맞아죽는 곳이 이상하지 않은 곳이 바로 전장이다. 전장의 격류 속에 빠지게 되면 제 아무리 화경지경이라고 해도 아차하는 사이에 죽어나자빠진다. 등 뒤에서 날아오는 화살이나 검을 피할 수 있는 기감? 군기와 광기가 휘몰아치는 그 속에 들어가게 되면 아무리 경지가 높다고 해도 기감을 잃게 된다. 그렇게 되면 사실상 그냥 조금 더 강한 무림인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쪽. 오고 있다.”
테무르의 말에 웅풍의 눈이 커졌다.
“뭐라? 이쪽으로? 우리가 있다는 걸 알고?”
“……적설청.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적설청?”
테무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도 확신할 수 없었다. 땅에 두 발을 딛고 다니는 인간이 적설청과 눈이 마주치다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인가.
“전원 도열.”
그때 주창의 입에서 위엄 서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자 모두의 얼굴이 굳었다. 투귀대의 전원 도열은 한 가지를 뜻한다. 전투 준비.
“재밌어. 조선이란 곳.”
주창이 입꼬리를 씩 끌어올렸다. 그와 함께 투귀대 전체에서 투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백호를 타고 다니는 남자라. 거기에 적설청과는 눈이 마주치기까지?”
“확실. 안 하다.”
테무르가 뚝뚝 말을 끊어 말했다. 하지만 주창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마 진짜인 것 같다.”
“대주?”
마일이 다급히 주창에게 말했다.
“조선군과 부딪쳐서는 안 됩니다. 자칫하면 저들에게 경각심을…….”
“조사의란 자에게 왜 교주께서 가보라고 하신 것인지, 알고 있나?”
“예. 알고 있습니다. 조선의 은월루라는 비밀조직에…….”
“그렇지. 헌데, 조사의란 자에게 우리가 무작정 찾아간다하여 우리를 믿을까?”
“…….”
마일은 침을 삼켰다. 그럴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주창은 조사의에게 찾아가 마교가 원하는 것을 요구하기 위해 실력 행사를 하고 싶어 했다. 주창의 말을 들은 투귀대원 중 옥령을 제외한 모두의 두 눈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전부 죽입니까?”
위문이 주창에게 말했다. 8 대 1000이라는 말도 안 되는 싸움이지만 겁을 집어먹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전부 죽였다가는 소문이 나지 않을 테니, 적당히 휘젓기만 하면…….”
그 순간 주창의 눈이 커졌다. 그와 함께 주창이 다급히 마일에게 말했다.
“빌어먹을. 마일. 저 조선군과 충돌 없이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라.”
“대, 대주?”
마일이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주창의 태도가 180도 뒤바뀌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마일이 마교의 지낭인 마군자의 아들이라고는 하나 이런 상황에서 바로 새로운 계책이 떠오를 리 없다.
“검주!!!”
그 순간 위문의 입에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와 함께 모두의 시선이 군대가 오고 있다는 쪽으로 돌아갔다. 그냥 육안으로는 하얀 점 하나만이 보였지만 내공으로 시력을 높인 이들의 눈에 한 사람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저 애송이가?”
“검주라고?”
기무의 전신에서 공력이 파르르하고 터져 나왔다. 주변으로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지만 기무가 튀어나가기 전에 주창의 일갈이 먼저 터졌다.
“나서지 마라! 이쪽으로 군사들을 몰아오는 것이 검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