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2. 한양 환도의 조건(3)2019.10.12.
“한 명이 엄청 몰아붙여요. 다른 사람은 힘이 조금 달리는 것 같고……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네요. 몰아치는 쪽은 웃고 있고.”
호선은 바로 옆에서 보는 것처럼 만우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만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웃고 있다고?”
“네. 저기 모인 사람들이랑 비슷한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인데요?”
“그 외에는?”
“없어요. 아, 지금 힘에 부친 사람과 비슷한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땅바닥에 누워 있는데…… 죽은 것 같아요. 화살이 많이 박혀 있는데?”
만우는 호선의 말을 듣자 어떻게 상황이 전개된 것인지 머릿속에 그려졌다.
“포위한 뒤 화살을 날려 기습하고, 다 죽고 살아난 한 명을 능욕하고 있다? 원한관계인가?”
“아! 팔에 칼 맞았어요. 와. 그런데 안 쓰러져요. 포기를 안 하네요.”
“다른 특징은 없어?”
만우가 호선에게 물었다. 그때 호선이 눈을 살짝 찡그렸다. 더 정확하게 잘 보기 위해서였다.
“검에 뭐라고 쓰여 있는데…… 곡산……?”
“곡산?”
만우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김충을 잡을 때 함께 했던 소사각주 척준영이 떠오른 탓이다. 김충을 잡고 난 뒤에는 그를 위해 김충을 죽이지 않고 남겨놓고 갔던 만우였다. 그는 전형적인 무인이었다. 강직하고 협을 추구하고, 가문과 정의를 위해 희생하는 그런 무인.
“왜 곡산 척가를 군대가 공격하는 거지?”
만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그때 만우의 눈이 커졌다. 그런 만우의 눈에 군대 위를 크게 선회하는 붉은 매가 눈에 띄었다.
“적설청(赤雪靑)?”
적설청은 마교에서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는 매였다. 다른 매보다 거의 1.5배는 큰데다가 영특해 전서구용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사술 중 심령술을 익힌 무인과 짝을 지어 정찰용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그리고 조선에 들어와 있는 마교라면 만우가 의주 인근에서 부딪친 놈들이 유일했다.
“이 근처에 있다고.”
적설청이 보인다는 것은 근방에 마교놈들이 있다는 뜻이었다. 만우가 눈을 반짝하고 빛냈다.
“척가를 구해줘서 나쁠 것은 없지.”
척가를 구해주는 것은 무림에서 소림을 구해주는 것과 비슷했다. 중원무림에서 소림을 모르는 이가 없는 것처럼 조선에서는 곡산 척가를 모르는 이가 없기 때문이다.
“호선. 둔갑술 풀어.”
“에엑? 왜요?”
호선이 둔갑술을 풀라는 말에 기겁했다. 만우는 당연하다는 듯 턱짓으로 싸우는 소리가 터져나오고 있는 곳을 가리켰다.
“갈라고.”
“그런데 소녀는 왜…….”
“왜. 걸어갈까?”
“…….”
자신을 타고 간다는 말을 당당하게 하는 만우를 보면서 호선은 할 말을 잃었다. 산 세월로만 따지면 만우는 자신보다 한참 어렸다. 하지만 만우의 주먹이 꾸욱 쥐어지는 것을 본 호선은 해사하게 웃었다.
“그래야죠. 잠시만요.”
호선이 겉으로는 웃지만 속으로는 울면서 옷을 벗었다. 벗고 입기가 편한 옷이었기 때문에 옷고름 하나만 풀면 인간의 미적 기준에 완벽한 나신이 드러난다.
“빨리!”
하지만 만우는 그런 호선의 나신을 보고서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생각을 했던 호선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펑!!! 크르르. 호선의 나신이 눈 깜작할 사이에 연기와 함께 호랑이로 변했다. 거의 초가집만 한 크기의 호랑이였다. 만우는 씩 웃으면서 호선의 등 뒤에 올라탔다.
“가서 구하자. 저기서 몰리고 있는 사람.”
[아는 사람이세요?]
호선이 날카로운 발톱으로 조심스럽게 자신이 벗어놓은 옷을 걸고는 들어올렸다. 저 옷이 찢어지면 인간으로 다시 돌아갔을 때 난감하기 때문이다.
“누가 몰리고 있는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곡산 척가는 알지.”
[곡산 척가? 그럼 곡산이 그 곡산인가요?]
“그래. 너도 알 텐데?”
[알다마다요. 선바위산 신령이 그 집안에 축복을……]
“됐고! 빨리 달려! 저러다 죽겠다!”
[아, 알겠어요.]
크와아아앙!!! 호선이 목을 쭉 빼고는 노성을 터뜨렸다. 그러자 주변의 대기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만우는 혀를 끌끌 찼다.
“간다고 광고를 해라 광고를.”
[인간의 몸으로만 있다가 오랜만에 돌아온 거라…….]
“가!”
퍽! 만우가 말에 박차를 가하듯 호선의 갈비뼈를 툭하고 쳤다.
[꺄악! 숙녀의 어디를…….]
뻐억! 하지만 호선이 이상한 곳에서 자지러지면서 비명을 지르자 만우는 결국 주먹을 들어올렸다. 결국 한 대 얻어맞은 호선이 으르렁하고 한 번 더 포효를 내지르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호…… 호랭이!!!”
“범이다! 범이야!”
호선은 워낙 그 크기가 거대한데다가 하얀 털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멀리서도 보였다. 그 때문에 호선을 발견한 군졸들이 동요를 일으켰다.
“백호다!!!”
“잡아라!!!”
“갑사! 갑사는 앞으로 나오라!!”
하지만 그들은 훈련을 받은 군졸들이었다. 호선을 보고 놀라기는 했지만,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하얀 털에 부장들이 군침을 흘리며 갑사들을 부르고 그물을 꺼내들었다.
“얼씨구. 너 잡아서 가죽 벗길 모양인데?”
[어디서 감히 아녀자의 가죽을!]
크와아앙!!! 호선이 달리기 시작하자 만우의 몸이 압력이 실리며 엄청난 바람이 몰아쳤다. 하지만 정작 그 바람을 맞고 있는 만우의 옷자락이나 머리카락은 펄럭이지도 않았다. 우우웅!! 공력으로 몰아치는 바람의 저항력을 옆으로 흘려보냈기 때문이었다. 만우는 그런 호선의 위에서 감탄했다.
“우와. 나도 이런 경신법 하나 있으면 좋겠다.”
호선은 한 줄기 바람이었다. 동시에 만우가 지금껏 본 그 어떤 경신법 중에서도 가장 빨랐다. 무영이니 뭐니 하는 별호를 단 경공의 대가들보다도 호선이 월등하게 빨랐다.
[빠르죠? 축지를 적당히 섞었더니 이런 속도가 나왔지 뭐에요.]
만우의 칭찬에 기고만장한 호선이 부탁하지도 않은 설명을 했다. 만우는 대번에 가까워지는 군대를 쳐다봤다.
“사람이다.”
“호랑이 위에 사람이?”
“시, 신선인가?”
호선이 가까워지자 만우의 모습이 보인 모양이었다. 만우는 그런 군졸들을 보면서 히죽 웃었다.
“진짜 신선 노릇이나 해볼까?”
만우가 공력을 끌어올리며 두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만우의 소맷자락이 찢어질 것처럼 펄럭이기 시작했다.
“에비!”
“우, 우아아악!”
“우악!”
만우가 공력을 끌어올린 손을 양 옆으로 벌리자 달려드는 호선을 향해 진형을 구축하고 있던 군졸들이 누가 민 것처럼 양옆으로 쭉 밀려났다. 그리고 그 틈으로 호선이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뛸게요!]
“좋아!”
크허어어엉!!!! 호선의 포효소리가 선기를 품고 사방을 떨쳐 울렸다. 호선은 그냥 호랑이가 아니라 신선이 될 뻔한 영물이었다. 선기가 실린 호선의 포효에 심력이 약한 군졸들이 놀라 손에 쥐인 무기를 떨어뜨렸다. 개중에는 하얗게 질려 뒷걸음질을 치는 이들도 있었다. 휘익! 동시에 호선이 한줄기 하얀 선이 되어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그런 호선을 향해 군졸들을 이끄는 부장들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갑사들! 활을 쏴라!”
“잡아!! 잡아라!!!”
“그물을 던져!!!”
호피(虎皮)는 예로부터 가장 진귀한 조공품 중에 하나였다. 제대로 무두질이 된 호피는 금 수백 냥에 팔리고는 한다. 한양의 양반들이 쌈짓돈을 털어가면서까지 사려고 하는 것이 호피였다. 있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액운을 내쫓고 부정한 것들을 내쫓는다는 호피는 없어서 못 파는 인기 상품 중 하나였다. 거기에 보기 드물다는 백호의 호피라면 나랏님도 내탕금을 털어 사려고 할지도 모른다. 한 마디로 저 백호를 잡으면 인생역전을 하는 셈이었다.
“어허.”
하지만 호선의 위에는 만우가 타고 있었다. 만우가 허공을 향해 두 손을 휘젓자 사방에서 날아들던 화살과 그물들이 거센 바람이 휘말린 것처럼 허공에서 떨어져 내렸다. 호풍환우(呼風喚雨)를 불러일으킨다는 신선들이나 부릴 법한 묘기였다. 하지만 사실은 간단했다. 그냥 공력을 전사경(纏絲經)의 묘리를 담아 사방으로 뿌린 것뿐이다. 전사경이 극에 달하면 이화접목의 묘가 된다. 하지만 화살과 그물을 튕겨내는 데에는 전사경 정도면 충분했다.
“달려!”
[가요!]
파앙!!! 호선이 허공을 밟았다. 동시에 만우는 주변의 풍경이 죽 밀려나는 것에 순간적으로 놀랐다.
“바람을 타는 거로구나!”
호선의 거체는 놀랍게도 바람과 바람의 결을 타고 움직였다. 500년 묵은 영물은 자연의 이치를 어느 정도 통달한 존재다. 그 중 호선은 바람에 특히 이해가 깊었다.
[구하는 건 알아서 하세요!]
“좋았어.”
그 덕분에 단박에 수백의 군졸들의 머리 위를 뛰어넘은 호선이 만우에게 말했다. 순간적으로 만우가 용천혈을 통해 호선의 몸을 박차고 튀어 올랐다. 크허어엉!
[꺄악!]
내공을 잔뜩 머금은 만우의 발에 짓밟힌 지지대가 된 호선이 비명을 내질렀지만 만우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그 정도로 호선은 터럭 하나 상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웬 놈이냐!!!”
갑자기 나타난 백호와 그 위에서 튀어나온 만우에 놀란 강현이 만우를 쳐다보면서 검을 휘둘러왔다. 만우는 갑작스런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검을 휘둘러 온 강현의 팔목을 덥썩 붙잡고는 말했다.
“기본기가 충실하구나!”
“무슨 개소리를!”
순식간에 팔목이 붙잡힌 강현이 팔목을 비틀어 빼면서 검병으로 만우의 관자놀이를 노렸다. 만우는 감탄했다.
“개싸움에 능한고로. 초근거리 싸움에도 능하다니.”
검을 휘두르다가 만우가 초근거리로 붙었음에도 강현의 대처는 빨랐다. 그것을 보면 강현이란 자의 기초가 탄탄할 뿐만 아니라 실전 경험이 풍부함을 알 수 있었다.
“다, 당신은?”
“오. 소사각주셨구려.”
그런 만우를 알아본 척준영이 크게 놀랐다. 김충을 함께 추격하다가 갑자기 사라졌던 사람이란 것을 알아본 것이다.
“꼴이 말이 아니구려.”
파박, 팍, 팍!
“왜, 왜 당신이…….”
“그게…….”
만우는 강현의 박투를 쳐다보지도 않고 팔과 다리를 들어 올려 막아냈다. 그러면서도 척준영을 쳐다보고 있었으니 강현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이노오오옴!!”
부아아앙!!! 분노한 강현의 검이 벌떼가 우는 소리처럼 검명을 터뜨렸다. 만우는 검명을 터뜨리는 강현의 검에 고개를 돌려 강현을 쳐다봤다.
“습. 본주가 말하고 있는데.”
챙!!! 강현이 휘두른 검이 만우의 손가락에 붙잡혔다. 그리고는 쩌적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강현의 검이 만우의 검지와 중지 사이에서 사기그릇처럼 깨졌다.
“허, 허억!!”
대경한 강현이 땅을 박차고 뒤로 날아올랐다. 강현은 반토막이 된 검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본주는 그대가 마음에 들었거든. 곡산 척가에 빚을 씌워둘 수도 있고, 왜 이런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서.”
“그게 무슨…….”
척준영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만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일단 이곳을 빠져나갑시다.”
척준영의 몰골은 꽤나 심각했다. 팔과 다리에 화살을 맞은 상태에서 강현과 싸운 덕분에 여기저기 검상을 입고 있었다. 검흔을 보니 강현이 척준영을 농락한 것이 궁금해보였다. 이 정도의 검상이라면 이미 진작에 검하고혼(劍下孤魂)이 되었어도 이상할 것이 하나 없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강현이 척준영을 농락했다는 뜻이다.
“어딜!!!”
다른 검으로 바꿔든 강현이 만우를 향해 달려들었다. 만우는 강현을 향해 혀를 쯧하고 찼다.
“일군을 이끄는 장군으로써 그 용기는 가상하나.”
쉭!! 만우의 검지와 중지 사이에 잡혀 있던 검신의 반쪽이 만우의 손에서 사라졌다. 서걱!!!
“끄, 끄아아악!!!”
동시에 검을 들고 달려들던 강현의 오른 발목이 서걱하고 잘려져 나갔다. 만우가 날린 검신이 강현의 오른 발목을 잘라버린 것이다.
“상처 입은 이를 상대하여 이토록 농락하였다는 것은 무인으로서의 마음가짐이 부족하다는 뜻이니, 네놈은 검을 쥘 자격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