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1. 한양 환도의 조건(2)2019.10.08.
[일단 만우 자네는 그 왜상단을 감시하게. 그들이 안변부사의 직인이 찍힌 통행증을 가지고 있으니 확실한 증좌가 없이는 구류하거나 폭력을 행사할 수 없네.]
동군영은 몇 번이나 만우에게 이를 주지시켰다. 종래에는 그 잔소리에 만우가 도망을 나왔을 정도였다.
“아함.”
그 때문에 만우는 난데없이 낮부터 왜상단이 묵고 있는 객주가 내려다보이는 지붕 위에 올라야만 했다. 그게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 몸이 베베 꼬이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지루했기 때문이다.
“어딜 가…… 에이. 칼 차고 가는 게 아니네.”
그들이 묵고 있는 객주 안에서 저번에 저자에서 만났던 슌스케라는 놈을 비롯한 몇 명이 날듯이 뛰어나와 말에 올랐다. 그것을 본 만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지만 이내 그들이 비무장 상태라는 것에 만우는 입을 불퉁하게 내밀었다.
“그놈들한테 물어보고 싶은데. 어디로 가야 만날 수 있는지를 모르니.”
만우는 기루에서 만났던 어리를 찾고 싶었지만 찾을 수 없었다. 그건 아무리 만우가 화경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죽자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나.”
만우는 입을 쩍 벌리고 다시 한번 하품을 했다. 그러다 턱에서 빠각하는 소리가 나자 만우가 손바닥으로 턱을 열심히 비볐다.
“아갸갸갹.”
너무 하품을 크게 한 나머지 턱이 빠질 뻔한 것이다. 혼자서 별의별 꼴을 연출하고 있던 만우가 순간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어? 저놈?”
만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시간에 나와서 돌아다녀서는 안 될 놈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강순일인가 그놈 아닌가? 근신했다더니.”
이성계에 추상같은 명령에 의해 근신을 명 받았던 강순일이었다. 그런데 그놈이 왜놈들이 있던 객주에서 기어 나오고 있었다.
“뭐야. 아는 사이라고?”
만우의 눈이 가늘게 좁혀 떠졌다. 이성계는 왜상의 정체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성계의 총애를 받는 강순일은 왜상단이 묶고 있는 객주에서 기어 나왔다.
“호오.”
만우의 눈이 반짝였다.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가별초도 없이. 혼자서 나왔다.”
가별초도 없이 혼자서 나왔다는 것은 이성계 몰래 나왔다는 뜻이다. 만우는 강순일이 말 위에 올라 본궁 방향이 아닌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을 보고는 눈을 반짝였다.
“가보자.”
파샥. 만우가 몸을 날리자 기왓장 하나가 버석하는 소리와 함께 반으로 쪼개졌다. 하지만 이미 만우의 몸은 옆 지붕을 밟고 박차 오르고 있었다. ***
“함주까지 얼마 정도 남았지?”
“반나절입니다 각주.”
곡산 척가의 소사각주인 척준영은 김충이 포박된 상태 그대로 땅바닥에 질질 끌며 함주 근방까지 도착했다.
“함주에서 정비를 마친 후 가문으로 돌아간다.”
“죽겠습니다. 좀 씻고 싶어요.”
“으허.”
아무리 강철처럼 훈련을 받는 척씨 세가의 무인들이라고 하지만 인매골 사건으로 인해 외부에 나온 시간이 길어져 다들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도 괜히 척가가 아니라는 듯, 흐트러지지 않고 주변을 경계하며 휴식을 취하는 곡산 척가의 무인들이었다.
“그놈은?”
“여전히 인사불성 상태입니다. 이상한 말을 지껄이고 있습니다.”
“무슨 검이 자신을 쫓아온다는 말 말이냐?”
“예. 대체 뭘 본 건지, 완전히 미쳤습니다.”
척준영은 나무에 거꾸로 매달려 있던 김충을 잡은 이후 놈의 팔다리의 힘줄을 끊은 뒤 문초했다. 하지만 이미 김충은 척준영의 말에 제대로 대답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대체 뭘 봤길래.”
척준영은 혀를 내둘렀다. 그런데 그때 저 멀리에서 아주 작은 소리가 들렸다. 핏, 피비비빗!!!!
“흡!!!”
놀란 척준영이 반사적으로 검을 빼 휘둘렀다. 의식적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몸이 움직인 것이다. 하지만 그건 척준영만 그랬다. 퍼버버벅!!!!!
“크악!!!”
“끄아악!!!”
척준영이 들은 아주 작은 소리는 화살이 날아오면서 내는 소리였다. 그리고 척준영이 검을 뽑아 반사적으로 화살을 쳐낸 순간, 화살비가 쉬고 있던 소사각의 단원들의 몸을 사정없이 유린했다. 퍼버벅!
“크윽!!!! 이놈들!!”
세차게 내리는 화살비 아래서는 척준영이라고 해도 검 하나로 모든 화살을 쳐내는 것은 중과부적이었다. 다리와 팔에 화살을 한 대씩 맞은 척준영이 이를 악물고 화살이 날아온 쪽을 쳐다봤다.
“웬 놈들이냐!!!”
척준영은 소사각의 단원들이 일거에 몰살당한 것을 보고는 피눈물을 흘렸다. 그만이 유일한 생존자가 된 것이다.
“으으, 으으으으.”
아니, 한 명이 더 있었다. 김충은 그 화살비 아래에서 어떻게 살아남은 것인지 힘줄이 끊어진 팔다리로 버둥거리며 살기 위해서 기어가고 있었다.
“큭…….”
서거걱! 척준영은 검으로 몸에 맞은 화살을 잘랐다. 움직이는 데 거치적거리기 때문이었다. 스스스슥! 잠시 후 수풀이 들썩이더니 화살을 치켜든 군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그 수가 족히 수백은 넘었다. 척준영은 이를 악물고 사방을 포위한 군졸들을 보면서 검병을 꽉 움켜쥐었다.
“나는 곡산 척가의 소사각주 척준영이다! 신원을 밝혀라!!”
근방 100리 안에서 곡산 척가의 이름을 무시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척준영은 팔과 다리에서 몰려오는 고통을 무시하고 소리쳤지만 돌아오는 것은 싸늘한 살기뿐이었다.
“이런 짓을 하고도 몸 성히 살아남을 것 같더냐!!”
척준영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산 속에 울려 퍼졌다. 그런데 잠시 후 포위하고 있는 군졸들 사이로 길이 하나 났다.
“이런 곳에서 척 형을 볼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그리고 그 사이로 검을 꼬나쥔 남자가 걸어 나왔다. 척준영은 그 남자의 얼굴을 보고는 신음하듯 이름을 씹어 내뱉었다.
“……강현.”
“오랜만이오 척 형.”
“네놈이 어찌 여기에…….”
“이런. 다들 죽어버렸구료. 설마 척가의 무인들이 이 정도에 죽을 줄은 몰랐지.”
“네 이놈!!!!”
척준영이 핏발 선 눈으로 소리쳤다. 강현은 비릿하게 웃었다. 강현은 곡산 척가에서 무예 수련을 한 적이 있었다. 강현이 바로 상왕 이성계의 비(妃)인 현비 강씨의 조카였기 때문이다. 일종의 속가제자 같은 개념이었는데, 강현은 행실이 방자하고 주색잡기를 좋아하여 척가 인근의 마을에서 아낙네 하나를 강제로 범한 것이 들통나 파문당했다. 원래라면 죽였을 테지만 그가 현비의 조카라는 것 때문에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다. 그런데 그런 강현이 척준영의 앞에 군졸들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뭐, 별로 쓸데없는 무예였나 보구려. 겨우 이정도 화살에 죽는 것을 보면.”
척준영은 죽은 자신들의 단원을 모욕하는 강현의 말에 검병을 세게 움켜쥐었다. 하지만 경거망동을 하진 않았다. 자신의 처지가 절체절명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곳에 데려온 저 군병들은 무엇이냐.”
“이 군병들?”
강현이 비릿하게 웃었다.
“안변부사 조사의 대감의 군병들이오.”
“내 말은 왜 이들이 이곳에…… 설마.”
척준영의 눈이 크게 뜨였다. 강현이 검을 옆으로 늘어뜨린 채 앞으로 걸어 나왔다.
“아무리 저승에 갈 이라고는 하나 모든 궁금증을 풀어줄 수는 없는 노릇. 내 척 형과 한번 꼭 붙어보고 싶었소. 이 손으로 그 목을 잘라드리리다.”
강현의 얼굴에서 살기가 물씬 베어 나왔다. 척준영은 그런 강현을 보면서 이를 악물었다.
“역당의 무리구나!!!”
“크하핫. 역당이라니. 여덟째 태자를 죽인 정안군이 왕위에 오른 것이야 말로 역천이 아니던가! 이곳 함주에 계신 상왕 전하께서 그 증좌요 옥새도 없는 이방원이야 말로 역당의 무리다!”
강현이 검을 늘어뜨린 채 척준영을 향해 뛰쳐나왔다. 척준영은 자주 쓰는 오른손 대신 왼손으로 검을 쥐었다. 그리고는 이를 악물었다.
“살려두지 않겠다.”
“척 형의 목숨이나 걱정하시구려!!”
카앙!!!!! 강현의 검을 막아낸 척준영의 어깨가 크게 흔들렸다. 척준영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
“뭐야. 웬 군대가 산중에 있어?”
강순일이 탄 말은 함주를 벗어났다. 강순일이 그대로 본궁에서 도망쳐 나오는 것이 아닌가 순간적으로 생각했지만 강순일은 도망치는 것이 아니었다. 함주 인근의 산중에 위치한 군대에 강순일이 탄 말이 그대로 들어간 것이다.
“거기에 싸우고 있네.”
만우는 피식 웃었다. 대략 천 명 규모의 군대였다. 큰 규모는 아니었지만 군대가 함주 인근의 산중에 있을 이유가 없다.
“더 갈 수는 없고…….”
군대는 주둔지를 만들면서 주변의 나무를 다 베어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만우가 접근할 수 있는 길은 없었다. 하지만 만우의 귀에는 병장기가 챙챙거리면서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그 때문에 만우는 잠시 고민했다.
“그냥 가? 귀찮은 일에 휘말리지 말고?”
만우는 볼을 긁적였다. 싸움 구경이라면 환장하는 만우지만 딱 봐도 이곳에 숨어 있는 군대 앞에 모습을 드러내서 좋을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아무리 만우라고 해도 저런 정식 군대와 맞서 싸우는 것은 부담이 됐다. 화경이 초인지경이라고는 하지만 만우도 쓸데없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혈향.”
하지만 바람 중에 퍼지는 혈향이 자꾸만 만우의 궁금증을 건드렸다. 이 정도의 혈향이라면 방금 전에 사람이 죽은 것이다. 대체 누가 군대의 추격을 받아 이 산중에서 죽어야만 한 것일까.
“왜구? 여진족?”
군대는 웬만해서는 잘 움직이지 않는다. 외적의 침입이 있을 때나 움직이는 것이 군대였다. 군대가 한 번 움직일 때 소모되는 물자가 상당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기에 왜구나 여진족이 나타났을 리는 없고.”
함주는 동북면이기는 하지만 왜구가 침입하는 동해안이나 여진족이 노략질을 하는 북쪽과는 거리가 떨어져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군대가 왜구와 여진족을 잡자고 함주 근방까지 올 이유는 없었다.
“그렇다면 내란.”
그렇다면 남은 것은 내란뿐이다. 만우의 두 눈에 흥미가 깃들었다.
“국왕에게 반기를 든 반란군?”
국왕의 성정으로 보건데 반란군이 일어날 정도로 허술하게 통치를 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여기는 국왕의 아버지인 상왕이 거주하는 함주 근처였다.
“상왕을 인질로 잡으려고?”
만우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의 한계였다. 그 외의 복잡한 사정은 알고 싶지도 않았고 알 필요도 없었다. 만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흐음. 한번 조사해 볼 필요는 있겠어.”
궁금증이 도진 만우는 동군영 핑계를 댔다. 하지만 그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이럴 때는 발이 빠른 게 최고니까…….”
잠시 목을 가다듬은 만우가 목을 길게 빼고 입술을 모아 휘파람을 불었다. 그런데 그냥 휘파람이 아니라 내공이 실린 휘파람이었다. 삐이익-! 일반 사람의 청력으로는 들을 수 없는 휘파람 소리가 만우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일반 사람이 들을 수 없는 휘파람을 분 이유는 간단했다. 스아아아악!!!! 어디선가 한 줄기 바람이 불더니 무언가 만우의 앞을 휙하고 스쳐지나갔다. 만우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팔을 쭉 뻗었다. 콰악
“켁!!!!”
그 휘파람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존재를 부르기 위해서였다. 만우는 자신을 지나쳐가 그대로 나자빠져 자신들의 존재를 알릴 뻔한 호선을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아직도 이 정도라고?”
“잘 안 돼요오오오…….”
만우의 손에 뒷덜미가 붙잡힌 호선이 애교 섞인 눈웃음을 흘리면서 손을 꼼지락 댔다. 만우의 부름에 축지를 이용해 순식간에 만우가 있는 곳까지 온 것이다. 만우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런 돌대가리가 반선이라니. 다행이다. 넌 악선이 되어도 똑똑하지 못해서 사냥 당했을지도 몰라.”
“돌대가리라뇨. 그냥…… 어렵다고요. 해본 적이 없어서.”
“사냥은 누구한테 배워서 했니?”
만우의 말에 호선의 입이 합죽이처럼 변했다.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그녀가 영성을 갖지 못했을 때 사냥도 누가 가르쳐준 적은 없었다.
“그런데 왜 부르셨어요?”
축지를 완벽하게 익히지 전까지는 나돌아다니지 말라고 했던 만우였다. 만우 덕분에 몸에 깃드는 악기를 밀어낼 수 있었기 때문에 호선은 만우의 말을 잘 들었다. 가끔 반항하기는 했지만 실력으로 만우의 상대가 되지 않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기도 했다.
“저기. 싸우는 소리 들려?”
“네. 들려요. 챙챙거리면서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인 것 같은데요.”
호선을 끌어올려 자신의 옆에 앉힌 만우가 손가락으로 군대가 있는 쪽을 가리켰다.
“누가 싸우고 있는 거니?”
만우는 초인이지만 어디까지나 그 육신은 인간의 것이었다. 공력의 힘으로 500년 묵은 영물보다도 강한 힘을 내긴 하지만 신체적인 한계를 완벽하게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 그 예로, 만우는 저 멀리서 누가 싸우고 있는 것은 소리를 통해 들을 수 있지만 눈에 보이지는 않았다. 너무 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호선은 호랑이였기 때문에 만우보다 훨씬 더 멀리까지 내다볼 수 있었다. 종족적인 한계의 차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