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7. 나와 함께 가겠소, 아니면 죽겠소?(3)2019.09.24.
강순일은 코웃음을 치며 기녀들을 향해 소리쳤다.
“기녀들은 꺼져라.”
“예, 나리.”
강순일의 얼굴을 모르는 기녀는 없었다. 강순일이 함주에 있는 유명하다는 기루는 모두 출근도장을 찍고 다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어나지 않는 이가 딱 하나있었다.
“…….”
어리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재밌다는 듯 웃음을 지어보이며 거문고의 현을 뜯던 손가락을 멈췄다.
“이 함주에서 내게 그런 수모를 주고 무사할 성 싶었더냐?”
동군영은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상황은 최악이었다. 그때는 저자의 사람들이라도 있었지만 이곳은 기루였다. 거기에 도와줄 만우도, 호선도 없었다. 방매의 발기술이 고절하다고는 하지만 방매는 어린 여아에 불과했다.
“하. 이게 누구야. 이 나리한테 죽사발이 났다는 그 나리인가?”
하지만 동군영이 나서기도 전에 방매가 앞에 나섰다. 동군영은 방매를 보고 뜨악했다. 목숨이 하나 더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방매 때문이었다.
“이 겁대가리를 상실한 놈이, 감히 어디서?”
강순일이 씨근덕거리면서 눈에 살기를 담았다. 하지만 방매는 그런 강순일을 보면서 피식하고 웃었다.
“어이구. 그렇게 깨지셨으면 창피한 줄 알아야지, 이곳에 부하들 우르르 끌고 와서 한다는 말이 뭐?”
남장을 한 방매였다. 그 때문에 강순일은 방매가 여자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듯 했다.
“이놈이…….”
강순일의 두 눈이 살기로 번들거리자 동군영이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그보다 방매의 움직임이 훨씬 더 빨랐다. 퍽, 척! 강순일의 손이 허리춤으로 가는 것을 본 방매의 발이 검병을 쥐려 했던 강순일의 손을 내리찍어 검을 못 뽑게 한 다음 발의 날을 강순일의 목에 가져다 댔기 때문이다.
“이제는 나한테도 졌으니, 더 많이 데려와야 되려나?”
방매가 우습다는 듯 강순일을 쳐다봤다. 가진 바 재능은 없으면서 뒷배만 믿고 나대는 놈들을 방매는 혐오했다. 그녀가 여자의 몸으로 그렇게 억척스럽게 살아서 더욱 그랬다. 그녀가 살면서 봐온 남자들을 생각하면 방매가 남자혐오증이 걸리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이, 이놈이…….”
강순일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게 물들었다. 자신보다 작고 힘도 없어 보이는 놈에게 또다시 당했다는 것 때문이었다.
“이 두 놈이 힘줄을 끊어 내 앞에 꿇어 앉혀라!!!”
강순일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뒤에 서있던 가별초들이 앞으로 한 발자국씩 나왔다. 방매는 가별초들의 기세에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서면서 혀로 입술을 축였다.
“너 미쳤어?”
“그럼 어째요. 이렇게 시간이라도 끌었어야죠.”
동군영이 방매에게 속삭였다. 동군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니. 도망 안 가가고 무엇을 한 것이오? 이쪽으로 오시오.”
그때 동군영이 아직 나가지 않은 어리를 보고는 어리에게 손짓을 했다. 그는 어리가 미처 빠져나가지 못하고 남아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동군영은 그 상황에서도 어리를 불렀다. 자칫하다가 다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때 어리가 거문고를 세워서 그것으로 땅을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나리들. 술과 음악, 웃음을 즐기러 오신 곳이니 부디 검들을 거둬주세요.”
어리는 역용술(易容術)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미모가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어리가 일어서서 움직이자 그녀는 자태만으로도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렇게 일어선 어리는 대치 중인 그 사이로 들어가 강순일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이들이 많은 곳입니다. 그들이 굶을 수도 있습니다.”
“뭐? 무슨 개소리를 하는 것이냐?”
강순일은 그렇게 말하고는 가별초에게 눈짓을 했다. 그냥 치워 버리라는 뜻이었다. 그러자 가별초 중 하나가 나와 어리의 손목을 붙잡고 잡아끌었다.
“나와라. 죽고 싶지 않으면.”
가별초의 싸늘한 목소리에도 어리의 두 눈에는 두려움이 보이지 않았다. 어리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조용히 있으려고 했는데.”
동군영과 방매, 이 둘은 만우와 가까운 이들이다. 그러니 이들에게 봉변이 일어나게 그냥 두고만 볼 수는 없었다.
[아씨.]
그때 어리의 귓가로 광문자의 전음이 들렸다. 어리가 멈칫하자 어리를 끌고 나가던 가별초가 멈칫했다. 마치 땅에 뿌리를 내린 것처럼 순간적으로 어리가 끌려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인들입니다. 동영의 인자들이 그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흐응.”
어리는 재밌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런데 그 미소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순간적으로 아찔함을 느끼게 만들었다.
“인자라.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은월루의 정보력을 넘어서는 일들이 최근 들어 일어나고 있었다. 갑작스레 늘어난 이방인들로 인해 정보원들이 분산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물러설 수 없게 됐네요.”
바깥은 조용했지만 어리는 예리한 살기 수십 개를 느꼈다. 틀림없이 광문자와 싸우고 있는 인자들의 살기일 것이다. 살수들의 싸움은 원래 섬짓할 정도로 조용했다. 그들은 소리를 내는 순간 더 이상 살수가 아니었다.
“나와!!!”
가별초가 다시 한번 거칠게 어리의 손목을 붙잡고 끌어냈다. 동군영과 방매는 긴장한 얼굴로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동군영이 나서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괜히 나섰다가 지키지도 못할 기녀를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뚱~!
그런데 그 때, 어리가 거문고의 현을 튕겼다. 그러자 어리의 손목을 그러쥐고 끌고 나가던 가별초의 몸이 갑자기 굳어버리더니 모로 쓰러졌다.
“제법 쓸 만한 거문고였네.”
놀란 강순일과 가별초가 어리를 쳐다봤지만 어리는 한 손으로 거문고의 현을 쓸어내렸다. 강순일은 그런 어리를 보면서 소리쳤다.
“네년은 또 무엇이냐?”
강순일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어리는 강순일을 보면서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섬섬옥수(纖纖玉手). 강순일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하고 삼켰다. 어리는 그런 강순일을 보면서 웃어 보이고는 거문고의 현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띠리리링~!
“저년은 왜 갑자…….”
뚱, 뚱기둥, 뚱, 뚱. 어리가 선 채로 거문고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괜찮았는데 어리가 거문고의 현을 튕기는 횟수가 늘어나자 강순일을 비롯한 가별초들의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
“끄…… 끄윽…….”
“끄억…….”
동군영과 방매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동군영과 방매의 귀에는 그냥 거문고의 현을 튕길 때 나는 소리로만 들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강순일과 가별초들은 얼굴이 퍼렇게 변하더니 마치 약을 먹은 쥐새끼처럼 몸을 베베 꼬기 시작했다.
“죽이진 않을게요.”
어리는 웃어 보였다. 동군영과 방매를 구해냈으니 검주에게 빚을 하나 지운 셈이다. 어리가 생긋 웃으면서 마지막으로 거문고의 현을 튕겼다. 띠루루웅! 푸웃!!!!
“크헉!”
그와 함께 비틀거리던 강순일과 가별초의 입에서 피분수가 솟구쳤다. 방매가 그것을 보면서 신음하듯 말했다.
“음공(音功)…….”
“음공?”
“네. 이야기꾼한테 들은 적이 있는데…… 중원의 무림강호란 곳에는 소리로 사람을 상하게 하는 수법이 있다고 들었어요.”
“아…….”
동군영은 피를 한 바가지나 입에서 분수처럼 쏟아내고서는 실 끊어진 인형처럼 쓰러진 이들을 보면서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죽이진 않았어요. 그러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는 마시길.”
어리가 생긋 웃어 보였다. 동군영은 그 자리에서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데 그 순간 어리가 창문 바깥을 쳐다봤다.
“어머. 여러분들. 주안상 좀 들어 올려 주시겠어요? 그렇게 앞으로요.”
와장창!!! 어리가 손을 까닥하자 주안상 위에 차려져 있던 술병과 접시들이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방매와 동군영은 얼떨결에 주안상을 손으로 잡았다.
“세우세요.”
“…….”
“…….”
동군영과 방매는 자신들도 모르게 어리의 말에 움직였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어리가 동군영과 방매에게 말했다.
“머리 숙여요. 주안상 뒤로.”
“그게 무슨…….”
“…….”
동군영과 방매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둘의 표정을 보면서 어리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평범한 얼굴인데도 불구하고 그게 경국지색의 한숨처럼 들렸다.
“아니면…… 죽어요?”
파앗!!! 피비비비빗!!!
“뜨헉!”
“헉!”
그 순간 방의 벽면이 마치 종잇장처럼 쭉하고 찢어지더니 그 사이로 수리검과 표창을 비롯한 암기들이 우르르 날아들었다. 놀란 동군영과 방매가 아슬아슬하게 머리를 숙여 그것들을 피해냈다. 동시에 그들의 들어 올린 주안상 위로 술과 음식 대신 암기들이 빼곡하게 박혀들었다.
“끄아악!”
“끄악!!”
갑자기 쏟아진 암기 세례에 땅에 쓰러져 있던 가별초들이 피를 쏟아내며 죽어나갔다. 하지만 강순일은 그 와중에도 명이 길어 그 암기들이 날아들지 않는 사각에 자리를 잡고 살아남았다. 퍼걱!
“으헉!”
주안상 뒤에 숨어 있었던 동군영이 게거품을 물 기세로 놀라 고성을 내질렀다. 수리검 중 하나가 주안상을 반쯤 뚫고 그 날이 동군영의 눈앞으로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파바바박!!! 그리고 그렇게 양옆으로 찢어진 벽면 사이로 검은 인형들이 어지러이 움직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소리가 거의 없이 공수를 주고받으며 나오는 작은 소음이 전부였지만, 동군영과 방매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 속도가 거의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그 안으로 뛰어든 인자들 중 하나가 방매를 발견하고는 방매를 향해 날아들었다. 다른 인자들과 맞붙어 싸우던 광문자는 그 인자를 미처 막지 못했다.
“피해!”
방매가 놀란 눈으로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인자를 보며 눈을 크게 치켜떴다. 그리고는 몸을 뒤틀어 인자의 손을 피해내려고 했지만 방매는 목이 졸린다는 느낌과 함께 몸이 둥실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커헉!”
방매의 뒷목으로 파고든 인자가 방매의 목덜미를 붙잡아 올린 것이다. 방매는 숨이 막히는 와중에도 이를 악물고 적을 발로 차려고 했지만 그 순간 인자의 몸이 꺼지듯이 사라졌다. 텅! 그리고 인자가 있던 자리에는 통나무가 덩그라니 놓여 있었다. 동시에 방매의 두 눈이 커졌다. 뒤에서 억센 팔이 그녀의 목을 휘감았기 때문이다.
“이놈!”
놀란 동군영이 인자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지만 엉성하기 그지없는 주먹질이었다. 인자는 가볍게 동군영의 주먹을 피한 다음 방매의 목을 뒤에서 팔로 조인 채 발을 놀려 훅하고 멀어졌다.
“어머.”
어리가 놀란 표정으로 방매를 쳐다봤다. 방매는 버둥거렸지만 인자의 억센 두 팔은 방매를 놓아주지 않았다. 누가 봐도 방매가 위험한 상황이었는데, 어리는 태연한 표정으로 인자들에게 말했다.
“아마 놔주는 게 좋을 걸요? 괴물이 오고 있거든요. 저기서.”
하지만 인자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어리는 심통이 났다는 표정으로 볼을 부풀리고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정말인데. 후회할 텐데.”
“빠져!”
일월조의 목적은 방매였다. 그 방매를 확보한 순간, 그들은 임무를 완료한 것이다. 인자들이 물러서기 시작하자 광문자가 어리 옆에 내려섰다.
“방매야! 방매야!!”
동군영만이 멀어지는 인자를 보면서 방매의 이름을 소리쳤지만 어리는 조금도 걱정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스팟!!! 허공을 격하고 날아오던 하늘의 점 한 개가 급격하게 방향을 바꾸는 것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쿵!!!! 그리고 그 점에 사라지는가 싶은 순간 땅이 미약하게 쿵하고 울리는 진동이 느껴졌다. 그와 함께 멀리서 비명소리가 아스라이 들리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빠르시기도 하셔라.”
어리가 광문자를 향해 눈짓을 했다. 그와 함께 어리와 광문자가 그 자리에서 꺼지듯이 사라졌다. 동군영은 혼자 방에 남아 사라진 방매 때문에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런데 다음 순간, 문이 드르륵 열리더니 동군영의 눈이 커졌다.
“뭐야? 여긴 전쟁이라도 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