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5. 나와 함께 가겠소, 아니면 죽겠소?(1)2019.09.17.
함흥본궁이라 불리는 곳은 궁서리에 있었는데 그 규모가 근방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큰 거대한 장원이었다. 본래에는 가운데 경흥전에서 4대 조상들의 신주를 놓고 제를 지내던 곳인데, 그곳을 이성계가 상왕으로 물러난 뒤 이곳에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외삼문부터 내삼문까지 약 9장, 내삼문부터 경흥전까지 20장의 뜰에 고목을 울창하게 만들어놔 본궁의 건물들을 깊숙하게 감싼 것이 특징이었다.
“후우. 따라오겠다는 거 겨우 말렸네.”
만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동군영과 방매가 같이 가겠다면서 들러붙는 것을 떼어놓느라 고생을 꽤나 했기 때문이다.
“제사를 지내러 간다고 했지.”
만우는 공력을 끌어올려 은신을 펼쳤다. 그리고는 본궁 안에서 이성계와 그 가별초들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대충 가서…… 음…….”
그때 만우가 눈가를 찌푸렸다. 강순일을 비롯한 가별초 몇이 먼저 본궁에서 나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저놈이 저기서 왜?”
동군영에게 한 번 크게 당했기 때문에 그냥 물러서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이곳에서 강순일이 나올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다.
“나온다.”
하지만 만우는 강순일에게 더 이상 신경을 쏟을 수가 없었다. 이성계가 가별초들과 함께 본궁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우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문제가 하나 더 생겼다.
“말이잖아?”
만우는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이성계와 그 가별초들이 말에 올라타 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만우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가별초들이 눈치채게 모습을 드러내서는 안 되니까.’
어디까지나 만우에게는 이성계를 한양으로 데려가는 것이 우선이었다. 하지만 이성계는 이방원의 사신이라는 것만 듣고도 화살을 쏴 사신을 두 명이나 죽였다. 그러니 그냥 무방비 상태로 모습을 드러냈다가는 오히려 상황만 악화시킬 것이다. 때문에 만우는 이성계와 단둘만 있을 수 있는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후우.”
그러기 위해서는 기다려야 한다. 문제는 이성계가 만우가 놀랄 정도의 강자라는 점이다. 특히 이성계의 신기에 가까운 궁술은 솔직히 말해 만우로 하여금 승산이 잘 점쳐지지 않을 정도였다.
‘누구라도 한 명이 방심하면 바로 지는 싸움.’
이성계는 노구였지만 그의 궁술은 진짜배기였다. 그리고 그 정도의 궁사의 특성상 육체의 노화에 덜 영향을 받을 것이다. 활을 당길 팔의 힘만 있다면 언제든지 화살을 쏠 수 있으니 말이다. 그 때문에 만우는 방심하지 않았다. 상대방의 패를 모르는 상태로 싸우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더 위험했다. 특히나 온갖 구명절초가 득시글거리는 무림이라면 더했다. 그래서 무림에서는 어린아이와 노인, 여자를 조심하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었다.
‘일단 발바닥에 땀이 날 정도로 달려야겠네.’
멀어지는 말의 뒤꽁무니를 보면서 만우가 단전에서 끌어올린 한 줄기 공력을 발바닥의 용천혈로 흘려보냈다. 휙! 만우의 주변으로 사물이 죽 늘어지며 얼굴에 세찬 바람이 날아와 부딪쳤다. *** 띵~ 띠딩~ 띵! 동군영과 방매, 호선은 벽 너머에서 울려퍼지는 음률에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적응이 되지 않는다는 듯, 연신 주변을 불러봤지만 그런다고 해서 어색한 것이 금세 풀릴리 없었다.
“화아. 내가 별의별 경험을 다해보네요, 아주.”
방매가 화려하게 치장된 방 내부의 풍경을 둘러보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동군영은 간만에 봇짐에서 꺼내입은 때깔 좋은 두루마기와 상태 좋은 갓을 쓴 채로 어색하게 앉아 있었다.
“나리는 이런 곳 자주 와보시지 않으셨어요?”
“이런 곳이라니. 내가 왜?”
방매의 말에 동군영이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방매가 그게 뭐가 이상하냐는 표정을 지었다.
“에이. 이런 곳에 양반 나리들 아니면 누가 와요. 그리고 나리는 양반이시고. 당연한 것 아니겠어요?”
“난 이런 곳에 와본 적이 없네.”
“한 번도요?”
“……선배들이 억지로 끌고 간 적은 있지만…….”
“에이! 그럼 와본 적 있는거네요!”
“어허!”
방매가 동군영을 놀리는 모양새였다. 둘 사이에는 양반과 평민이라는 높은 신분의 벽이 있었지만 달포가 넘게 함께 구르면서 그 벽이 많이 허물어진 상태였다. 냐아아옹!
[분 냄새가 너무 많이 나잖아. 술 냄새도 나고. 나 갈래.]
작은 고양이로 변한 호선이 버둥거렸지만 방매는 그런 호선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자꾸 그러면 만우한테 이른다?”
[……계집애가 어려서부터 호랑이를 협박하는 버릇을 들이다면 못 써요.]
“그래? 이것도 만우에게 전해줄게.”
[…….]
만우란 이름 두 글자에 호선은 입을 다물었다. 동군영은 남장을 한 방매를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갓이라니. 내가 보기엔 도령처럼 머리를 땋아야 하는데 말이야.”
“도령인 모습으로 이 기루에 올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동군영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그들은 기루에 있었다. 기루가 처음인 방매가 신기해하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거기에 여자인 방매가 기루에 들어올 수는 없었기 때문에 남장까지 한 상태였다.
“아무리 만우라고 해도 상왕전하를 모셔올 수 있을까요?”
방매의 말에 동군영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만우가 나서서 실패한 일은 없었다.
“모르겠다. 일단 그 전까지 기루에 와서 노는 척이라도 해야지. 괜히 책 잡히지 않으려면.”
기루에 와서 아무 것도 안 시키고 기생도 부르지 않는다는 것은 수상하다고 광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은밀한 대화가 오가는 곳으로 사용하는 것은 맞지만 동군영과 방매는 이 함흥에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이방인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보이지 않던 그런 얼굴은 다른 이들의 쓸데없는 호기심을 자아내는 법이다. 그러니 괜한 문제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기루에 와서 노는 양반 행세를 할 필요가 있다. 딸랑딸랑. 동군영이 손을 뻗어 노끈을 당기자 종이 딸랑거리는 소리를 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창호지를 바른 문이 열리더니 무릎을 꿇은 기생이 머리를 숙였다.
“찾으셨습니까, 나리.”
“가서 술상을 봐오거라. 노래와 악기를 잘 다루는 아이들과 시중드는 아이들도 두엇 넣어주고.”
동군영은 그렇게 말하면서 은병을 던졌다. 일부러 과장되게 행동하는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과장이 아니라 이게 대부분의 양반들의 행동거지였다.
“예, 나리.”
은병 하나가 데굴거리며 굴러나가는 것에 방매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조금만 시간이 흐르면 입에서 침을 줄줄 흘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동군영은 방매의 돈에 대한 집착을 보고는 고개를 한 번 내저었다. 잠시 후, 술상이 들어왔다. 특별한 음식을 시키지 않는 이상 기본으로 나오는 술상이었다. 동군영은 능숙하게 방매의 잔에 술을 따랐다.
“오!”
주막에서 흰색의 탁주나 봤던 방매였다. 하지만 붉은색이 도는 투명한 술이 잔에 따라지자 방매가 눈을 반짝였다.
“여아홍이라 하는 것이네. 딸이 태어났을 때 술을 담갔다가, 딸이 시집갈 때 열어서 먹는 술이라고 하지.”
동군영은 기루를 좋아하진 않았지만 주도(酒道)는 좋아했다. 마음 맞는 벗들과 술 한 잔을 벗 삼아 밤하늘을 노래하는 것을 좋아했다.
“이러니까 조금 양반 같으시네요, 나리.”
방매가 웃었다. 아직 기생들이 들어오기 전이었기 때문에 동군영이 말했다.
“자네가 어려 보이기는 하나 그건 태생이 그렇다고 하면 되는 일이네. 그러니 입조심하시게. 동 형이라 부르던가, 아니면 동 선배라 부르던가.”
“동 형? 동 형 좋네. 형이라고 부를게요, 나리.”
“온다. 조심해.”
동군영이 주의를 주자 방매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군영은 만우가 상왕과 함께 돌아올 때까지 노는 시늉만 할 생각이었다. 상왕의 존안을 뵐지도 모르는데 술에 취해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들어온 기생을 본 동군영의 눈이 커졌다.
‘……아름답다.’
동군영은 여인의 얼굴을 보고 서시나 초선이라느니, 수월폐화(羞月閉花)나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는 미사여구를 붙이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표현이 서책에 나오기는 하지만 정말 그에 걸맞는 여자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한양 최고 기루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때문에 모든 이야기가 그렇듯, 옛날 서책들이 과장해서 기록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경국지색…….”
동군영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어리는 치마를 살짝 붙잡은 채 방 안에 들어서서는 동군영과 방매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저자는…….’
동군영과 방매를 빠르게 훑어본 어리의 눈이 반짝였다. 의외의 장소에서 의외의 얼굴을 만났다. 어리는 방매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검주 만우, 그자와 함께 다닌다고 했던 매분구가 아니던가?’
만우가 초절정이나 되는 네 명의 수하들과 한 명의 매분구와 함께 설 판윤(判尹: 판한양부사)의 집에 머물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 얼굴도 외워뒀었는데, 전혀 의외의 장소에서 마주친 것이다.
‘저자도 내가 아는 얼굴이고.’
그녀는 조선에서 가장 최고급의 정보를 다루는 은월루의 주인이다. 그 은월루는 한양에서도, 특히 관직에 오른 모든 이들의 정보를 기록하고 매번 갱신하곤 했다. 그런 은월루가 장원급제로 들어와서는 고작 춘추관 기사관이 된 동군영을 모를 리 없다.
‘어사가 저자라면…… 주상전하께서 내 말대로 사람 잘 꽂아 넣으셨네.’
어리는 속으로 웃었다. 만우를 주체로 한 암행어사를 파견하라고 주청했던 것이 바로 그녀였다. 그러면서 만우의 성격을 받아줄 수 있는 소심한 이를 어사로 삼으라고 했었다.
‘검주가 없는 것을 보니 따로 모종의 임무를 하고 있는 듯하고.’
어리가 입술을 살짝 혀로 핥았다. 만우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침이 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안녕하세요, 나리들. 소녀, 어리라고 해요.”
“……어리…… 어리…… 어리…….”
동군영은 멍한 표정으로 어리를 쳐다보며 어버버 거렸다. 방매는 그런 동군영을 보고 혀를 쯧하고 찼다.
“사내란 것들은…….”
예쁜 여자만 보면 사족을 못 쓰지. 하지만 그때 방매의 머릿속에 만우가 생각난 것은 왜인지 방매 스스로도 이해를 하지 못했다.
“아잉 나리들. 소녀들이 술 한 잔 따를게요.”
“어머. 이 나리는 피부가 왜 이렇게 곱대요?”
“나리! 어리만 보지 말고 저도 보셔요!”
그때 기생들이 우르르 들어와 동군영과 방매 옆에 앉았다. 그리고는 그 둘이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이야기를 하면서 술을 권했다. 어리는 여악(女樂)이었다. 아무리 정체를 숨겼어도 은월루주인 그녀가 남자를 위해 술을 따라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못 할 것도 없긴 하지. 검주 같은 사내라면.’
어리가 요사스럽게 웃었다. 검주처럼 무료한 그녀의 삶을 이토록 생동감 있게 만들어줄 수 있는 남자라면 얼마든지 술을 따라줄 수 있었다. 그 뒤에 그녀에게 잡아먹히지 않는 것은 그이들의 능력이고. 뚱, 뚜둥~! 어리가 거문고의 현을 뜯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술이 몇 순배 돌고 기생의 웃음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스르륵. 그렇게 방 안에서 음률이 고조되고 있을 때 기루의 주변으로 검은 그림자들이 솟아올랐다. 그들은 복면을 뒤집어 쓰고 검은 야행복을 입고 있었는데, 야행복의 소매에 모두 같은 모양이 수놓아져 있었다. 해와 달. 일월조(日月組)였다. *** 함흥본궁으로부터 말을 한참 달린 이성계는 낮은 산이 눈앞에 나오자 말의 속도를 줄였다.
“잘 있었느냐.”
가별초들이 말에 지고 온 짐을 풀자 그 안에서 음식들이 나왔다. 이성계는 손수 바닥에 그 음식들을 차려놓고 시큼한 냄새가 나는 마유주가 든 병을 꺼내들었다.
“크으. 이게 무엇이라고 그리 좋아하는지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이성계는 마유주의 시큼한 냄새에 인상을 쓰다가 나지막한 산 중턱에 자리한 작은 봉분 위에 마유주를 쫄쫄거리며 부었다. 그리고는 그게 한 모금 정도 남자 이성계는 따르던 것을 멈추고 봉분 옆에 주저앉았다.
“지란아.”
이성계는 쓸쓸한 눈으로 봉분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검버섯이 피고 여기저기 주름이 진 손이었다. 이성계는 자신의 동생인 이지란(李之蘭)을 눈으로 그렸다.
“참 좋았지 않았더냐. 비록 피와 죽음이 난무했어도 말이다.”
동북면의 너른 들판을 말을 타고 이지란과 어릴 때부터 뛰어놀았다. 이지란은 여진족 사람이었지만, 이성계와 결의형제를 맺은 후 이성계가 상왕이 되어 한양에서 물러나자 함께 함주로 내려왔다. 그런 그가 타계한 것이 바로 작년이다.
“흐흐. 내가 재밌는 이야기 해주랴?”
이지란은 말년에 불교에 귀의했다. 젊은 시절 남정을 하고 북벌을 하면서 많은 살상을 한 것에 회의를 느꼈기 때문이다. 이성계는 쓸쓸해 보이는 이지란의 봉분 옆에 주저앉아 말했다.
“내가 얼마 전에 말이다. 저잣거리에서 맹랑한 계집아이를 만났다.”
그렇게 나지막한 산 중턱에는 이성계의 목소리가 도란도란 울려 퍼졌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말하던 이성계가 고개를 들었다. 피윳!! 캉! 그러던 이성계가 옆에 내려놓았던 활을 번개처럼 들어 화살 한 대를 시위에 걸고 허공에 쏘아냈다. 어렴풋이 지던 해가 만들어낸 황혼 너머에 걸린 달을 향해 화살이 쏘아져 나갔다. 그렇게 쏘아져 나가던 화살이 허공에서 부딪쳐 꺾였다. 이성계의 눈이 하늘에 걸린 달처럼 호선을 그렸다.
“전하!”
변고를 눈치 챈 가별초들이 이성계 주변을 에워쌓았다. 번개와도 같은 움직임이었다. 이들은 이성계와 함께 조선을 세웠던 가별초들로 강순일과 함께 다니는 가별초와는 차원이 다른 실력을 가진 무사들이었다. 스윽.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낸 만우가 무명천으로 된 옷을 나풀거리며 떨어져 내렸다. 만우는 아무말 없이 괘검을 들어 보였다.
“그래. 인사는 잘 받았느냐?”
이성계의 태연한 목소리에 만우의 눈이 호선을 그렸다. 만우는 말을 아꼈지만, 눈으로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재밌는 노인네.’
만우는 괘검의 검신을 힐끗 쳐다봤다. 부지불식간에 날아온 화살을 막아낸 괘검의 이가 나가있었다. 만우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보다 훨씬 강한 노인네.’
시위에 살을 걸어 쏘아 보내는 그 일련의 동작 자체가 번개처럼 빨랐다. 거기에 화살은 완벽하게 만우의 미간 한가운데를 노렸다.
“이 노인네를 보러 온 것 같은데.”
만우가 땅바닥에 고양이처럼 내려서자 가별초들의 기세가 만우를 향해 쏟아졌다. 만우는 허리를 피고 선 뒤 괘검을 어깨에 척하고 올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