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4. 어리와 향이(4)2019.09.14.
“눈이 좋은 아이로구나.”
슌스케 행수를 일으켜세워 그것을 찾아낸 이성계가 방매를 보면서 재밌다는 듯 말했다. 방매는 가별초 무사가 내민 것을 두 손을 내밀어 조심스럽게 받았다.
“또 원하는 것이 있느냐?”
“청이 하나 있습니다.”
가별초 무사들의 눈썹이 또다시 꿈틀했다. 이성계가 베푼 것만으로도 이미 많은 것을 베풀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족을 모르고 다시 평민 따위가 상왕에게 청을 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다.
“또 있느냐?”
하지만 이성계는 허허하며 웃었다. 방매의 당돌함과 영특함에 홀딱 빠진 것이다. 방매가 순식간에 이성계의 마음에 들었음을 본 만우가 혀를 내둘렀다. 이게 의도적인 것이라면 방매는 매우 무서운 여자였고, 그게 아니라면 타고난 것이다. 사람을 끌어들이는 능력. 그때 방매가 몸을 일으켜 슌스케 행수의 앞으로 걸어갔다.
“행수님이라 하셨습니까?”
“……그렇다.”
슌스케 행수가 입술을 잘근 꺠무는 것이 보였다. 억울해하는 표정을 보니 그가 빼앗긴 단검이 꽤나 중요한 단검인 모양이었다. 방매는 그것을 보고 씩 웃었다.
“매우 중요한 물건으로 보이는데, 이 단검. 얼마에 사시겠습니까?”
“…….”
“으, 으하하하하하!!!!”
슌스케에게서 가장 중요한 것을 빼앗고 그것을 다시 되판다? 이성계는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그게 정말로 중요한 것이라면 슌스케는 비싼값을 지불하고 살 수밖에 없다. 거기에 이성계가 증인이 된 셈이다. 그러니 값을 후려칠 수도 없다. 슌스케가 이를 뿌드득 갈았다.
“정녕 상인의 자질을 타고난 여아로다. 상단의 대행수가 될수도 있음이야. 흐하하하.”
이성계는 눈가에 고인 눈물까지 손가락으로 찍어내면서 웃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암. 거래는 모름지기 그렇게 해야하는 법이지. 상대방이 간절하게 원하는 것을 내밀어 상대가 얼마를 불러야 하나 고민하게 만드는 것.”
이성계가 슌스케를 쳐다봤다.
“그대가 외통수에 걸렸음이야. 왜무사의 목숨을 살려주는 값이라 생각하고 비싸게 사야 할 것이네.”
“……은병 오십 개.”
슌스케가 이를 뿌드득 갈면서 방매를 노려봤다. 방매의 눈이 반짝였다. 왜상이라고 했으니 이제는 상인과 상인의 흥정 싸움이 벌어질 때다.
“칠십 개.”
이성계가 흥미진진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슌스케는 완전히 방매에게 말려 버렸다. 은병 66개. 방매는 은병 66개에 슌스케에 단검을 되팔아 그 자리에서 받았다. 슌스케는 사무라이와 함께 이성계에게 인사를 한 후, 방매를 한 번 노려보고는 사라졌다.
“간만에 재밌었다. 흐흐흐.”
이성계는 다시 오체투지를 한 방매를 보고는 흘흘거리며 웃었다. 손녀가 있다면 딱 이런 기분일까 싶었다. 손녀 생각을 하자 이방원이 떠오른 이성계의 얼굴이 설핏 굳었지만 고개를 저어 털어냈다. 굳이 지금 그런 우울한 생각을 할 필요는 없다.
“그래. 이제 다 되었느냐?”
“마지막으로 한 가지가 더 남았습니다.”
이성계가 생각보다 저잣거리에 오래 서있었기 때문에 엎드린 사람들 중 다리가 저리고 허리가 아파 끙끙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하지만 방매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하.’
원래 성격대로라면 상왕의 할애비가 와도 땅바닥에 엎드리는 짓을 하지는 않았을 만우다. 하지만 아직은 역졸이었기 때문에 만우는 흙바닥을 이토록 오래 쳐다보는 신기한 경험을 하면서도 방매의 집요함에 혀를 내둘렀다. 순간적인 기지로 은병 하나를 빼앗길 뻔한것을 예순 여섯 개를 번 방매다. 그런데도 아직 만족하지 못한 눈치였다.
“그래? 말해보거라. 네 덕분에 즐거웠으니.”
“이 은병.”
방매는 상자 하나에 가득 쌓은 은병을 욕심 어린 눈으로 한 번 쳐다보더니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는 손으로 상자를 밀었다.
“상왕전하께 진상하는 진상품입니다.”
“진상품이라?”
이성계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이내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가난해 보이더냐? 남루해 보이거나?”
이성계가 장난스레 자신의 의복을 살폈다. 가별초 무사들의 검미가 다시 꿈틀거렸다. 그때 방매가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역시도 소녀가 상인이기 때문에 드리는 것이옵니다.”
“어찌하여?”
“세 가지 이유가 있사옵니다.”
“세 가지나? 말해보거라.”
방매는 잠시 목을 가다듬었다. 이성계는 그런 방매를 흥미롭다는 눈으로 내려다봤다. 방매가 입을 열었다.
“첫 번째. 소녀는 상왕전하 덕에 이 함주에서 든든한 배경을 두었사옵니다. 그 어떤 상인이 소녀를 상대로 바가지를 씌우겠습니까?”
함주는 함흥의 또다른 명칭이다. 이성계가 고개를 끄덕였다. 방매의 말에 틀림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곳 함주는 상왕이 기거하는 곳이다. 그곳에서 방매는 저잣거리에서 상왕의 어여쁨을 받는 모습을 보였다. 강순일이 이성계의 총애를 받아 이곳에서 무도한 짓을 해도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렇지. 그리고 두 번째는?”
“두 번째. 말 한마디로 66개의 은병을 벌어들였으니 소녀에 대한 이곳의 믿음이 깊어졌습니다. 상인이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득으로 자신을 증명하는 존재이옵니다.”
“그렇구나. 그럼 세 번째는?”
방매가 빙긋 웃었다. 이성계는 마치 손녀를 보는 할아버지의 눈으로 방매를 쳐다봤다.
“이로 인해 소녀가 얻을 이익이 은병 66개보다 더 많아질 것이기 때문이옵니다. 게다가 그 큰 재물을 소녀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다른 이들이 안다면 지킬 수 있겠사옵니까?”
“하하하하. 맞다. 맞아. 그 말이 이치에 틀리지 않다.”
이성계는 흡족하다는 얼굴로 웃음을 터뜨렸다. 방매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오체투지를 하기 위해 무릎을 꿇었다. 그때 이성계가 부드럽게 말했다.
“보부상이면 멀리서 왔겠구나. 어디서 왔느냐.”
“한양에서 왔사옵니다.”
“한양에서 어디에 기거하는고? 이 재물은 이 늙은이가 한양으로 보내주마. 이건 네 것이다.”
“…….”
방매의 입이 함지박하게 벌어졌다. 그게 속물적으로 보였지만 그게 또 귀엽기도 했다. 이성계는 흐뭇하게 웃었다.
“덕분에 내 아우를 보러는 나중에 가야 하겠으나, 오늘 너를 만난 것이 그 대가를 충분히 치렀다. 사실 그곳에 가면 내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는데 말이야.”
이성계가 그렇게 말하면서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러자 가별초 무사들이 몸을 바로했다. 그중 하나는 방매가 내려놓은 은병 궤짝을 들었다.
“그 왜상이 이 일로 인해 겁박을 하거든 본궁으로 오라.”
“감사합니다, 상왕전하.”
이성계는 그런 방매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저잣거리를 빠져나갔다. 그렇게 이성계와 가별초 무사들이 전부 사라지자 여기저기서 곡소리가 터져나오면서 사람들이 몸을 일으켰다.
“후아아아…….”
그중 가장 진이 빠진 사람은 방매였다. 이성계를 하나도 두려워하지 않는 듯 보였으나 그게 위험한 줄타기란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방매가 다리가 풀려 주저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은병이 못내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걸 정말 방매가 낼름 삼켰다면 그 왜상이 난리를 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본궁에 진상하였으니, 왜상은 방매를 어찌하지 못할 것이다.
“너도 대단하다.”
만우가 그런 방매에게 말했다. 방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내 활짝 웃었다.
“그래도 덕분에 여기 있는 동안은 목에 힘 좀 주고 다녀도 되겠는데?”
방매가 고개를 돌리자 여기저기서 허리를 피던 이들이 흠칫했다. 상왕과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방매에게는 권력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그 권력은 한낱 평민이 그냥 무시할 수 있을만한 성질이 아니었다.
“그래. 목에 힘주고 다녀라.”
“나 시전에 가서 다시 흥정 좀 해야겠어. 텃세가 워낙 심했는데 다 죽었어.”
방매는 그 난리를 피우고도 지치지 않았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만우는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만우에게도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다.
‘이성계.’
그가 이야기처럼 강한 무인이란 것을 알게됐다. 그리고 강자의 존재는 만우의 삶에 활력소가 된다.
“난 돌아간다. 숯돌 사러 나왔다 이게 뭐야 대체.”
“그래! 주모가 밥 공짜로 준다고 했으니까 그거 먹어. 괜히 나가서 사먹지 말고.”
방매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리며 만우가 이성계가 사라진 곳을 쳐다봤다. 본궁. 그곳에 갈 날이 기다려졌다. ***
“위대하신 다이묘, 만세, 만세, 만세!!”
푸욱!!! 서걱!! 자신의 배를 단검으로 찌른 사무라이의 눈에 핏발이 섰다. 그와 동시에 날카로운 왜검이 사무라이의 목을 쳐내 고통을 줄여주었다. 털썩.
“칙쇼…….”
슌스케는 얼굴에 끼얹어진 피를 손바닥으로 쓸어 닦아내면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버러지만도 못한 놈이 일을 망쳤구나.”
슌스케의 눈이 살기를 담고 번들거렸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고저가 없이 차분하기만 했다. 스윽. 슌스케가 고개를 돌리자 뒤에 도열해 있던 일월조의 사무라이들이 몸이 힘을 줬다. 슌스케의 고저 없는 목소리가 사무라이들의 귓가에 울려퍼졌다.
“이성계의 활. 그의 궁기가 아직 녹슬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 외에는 일을 망치기만 했어.”
슌스케는 허리를 숙여 죽은 사무라이가 할복을 할 때 쓴 단검을 주워 들었다. 방매에게서 산, 대명이란 한자가 손잡이에 음각되어 있는 단검이었다. 그 단검은 매우 날카롭고 예리했다. 그 용도는 적을 죽이기 위함이 아니었다. 스스로의 배를 가르기 위함이었기 때문에 그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여주고자 매우 날카로웠다. 스윽, 슥. 그 단검의 검신에 묻은 사무라이의 칼날을 천으로 닦아낸 슌스케의 이마에서는 여전히 피가 흐르고 있었다.
“저 버러지 같은 것들을 죽여도 된다. 허나.”
슌스케의 손이 흐릿해졌다. 푸화아아아악!!!! 그와 함께 슌스케의 허리춤의 왜검이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일진광풍(一陣狂風)이 죽은 사무라이의 시체를 난도질했다. 죽은 사무라이의 시체가 육편이 돼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일을 그르치지는 마라. 알았나?”
“하이!!!”
일월조의 사무라이 서른 명이 바짝 언 채로 복명복창했다. 스르릉, 턱! 사람을 수백 조각을 내고도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검이 슌스케의 허리춤으로 돌아왔다. 극쾌(極快)의 검술이었다.
“그 계집.”
슌스케가 날이 선 눈으로 사무라이들에게 말했다.
“오늘 밤까지 내 침실에 대령하라.”
“하이!!!”
*** 냐옹~! 호선이 기분 좋게 갸르릉거리면서 침상 위에서 뒹굴었다. 동군영은 그런 호선이 재롱을 피우는 것을 심각한 얼굴로 쳐다봤다.
“무슨 한번 나가면 들어오는게 이렇게 오래 걸려?”
“내 잘못 아니잖아!”
잠시 뒤 바깥이 소란스러워지는가 싶더니 만우와 방매가 티격대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동군영은 그 둘을 보고서도 별반 반응을 하지 않은 채 여전히 심각한 표정이었다.
“나리는 왜 저러셔?”
“몰라. 달거리 하나보지.”
“뭐어?”
방매가 주먹으로 만우의 등짝을 퍽하고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주먹을 부여잡고 아프다면서 펄쩍 뛴 것은 맞은 만우가 아니라 때린 방매였다.
“아호호오오.”
“모기가 물었나.”
“이 괴물!”
“고마워.”
방매가 분한 듯 발을 굴렀지만 만우에게는 이길 수가 없었다. 그 바람에 방매가 다음 목표로 선택한 것은 호선이었다. 냐오오옹!!
[놔, 놔 이 기집애야!]
“나랑 놀러가자!”
[싫어. 싫어. 쉬고 싶다고오오!!!]
인매골에서 도사와 만나 고초를 당했던 것의 후유증이 컸던 것인지 호선은 격렬하게 반항했다. 하지만 작은 고양이인 호선이 방매의 힘을 이겨낼 수 있을 리 없었다. 만우는 그 모습을 보고서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이성계를 저잣거리에서 우연하게 만났을 때 사놓은 숫돌을 꺼내놓고서는 괘검을 뽑아들었다. 스르릉! 괘검이 시린 예기를 뿜어내면서 박달나무로 만들어진 검집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중원에서 만우가 보유하고 있었던 수집품에 비하면 하품이었으나 그래도 제법 썼다고 정이 들었다.
“생채기가 낫네.”
만우의 실력이 아니었다면 만우가 지금까지 부딪친 적들로 미루어 짐작컨데 괘검은 진작에 부러졌을 것이다. 하지만 괘검의 검신에는 몇 줄기의 상흔만이 남아 있었다. 털썩. 만우는 괘검과 숫돌을 들고는 창호지로 된 문을 열고 나가 툇마루에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우물로 가서는 물을 한 바가지 퍼오더니 숫돌에 올려놓았다.
“후읍.”
서억, 서억, 서억. 그리고 난 뒤 만우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시고는 괘검의 날을 정성스럽게 갈기 시작했다. 노숙을 하지 않으면 매일마다 만우는 최소한 한 시진은 검의 날을 갈았다.
“그 고민. 내가 해결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내가 고민이 있는 건 어떻게 알았는가?”
“본주가 모르는 건 없거든.”
만우는 숨도 거의 쉬지 않은 채 괘검의 날을 갈았다. 만우의 말에 반응한 것은 어울리지 않게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동군영이었다.
“뻔질나게 돌아다니더니 며칠 째 똥도 못 싼 얼굴로 앉아 있는데 모르면 등신이지.”
“또, 똥이라니.”
“맞잖아. 지금 어사 나리 얼굴.”
동군영이 자신의 얼굴을 더듬었다. 하지만 이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아무리 자네라도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닐세.”
“왜. 상왕을 한양으로 환궁시키면 간단하게 해결되는 일인데.”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될 리가 없지 않은가.”
동군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만우가 단박에 동군영이 고민하고 있는 부분을 꿰뚫었기 때문이다. 이곳, 함흥에서 상왕이란 존재가 문제가 되고 있었다.
“사실상 이곳을 다스리는 이는 상왕이고, 이곳의 백성을 지키는 이는 가별초가 되버렸지. 질서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들이 전부 상왕전하의 말 한마디에 해결이 된단 말이야.”
“그래. 당연한거겠지. 왕의 아비가 있다는데 어떤 간 큰 관리가 거길 건드려?”
“하아. 과연 그런가?”
함흥을 실질적으로 관리하는 것은 관아가 아니라 본궁이었다. 함흥에 부임한 관리는 상왕이란 존재 때문에 그냥 눈에 거슬리지 않기 위해 매일을 궁리하는 것이 전부였다. 백성들을 위한 정책 따위는 없었다. 백성들의 치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본궁의 가별초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법으로 금지된 상왕의 개인 사병들이 함흥의 치안을 책임지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공권력의 상징인 포졸들의 육각모 방망이는 썩고 포승줄은 끊어졌다.
“딱히 부패를 저지르는 것도 아니야. 단지…… 아무것도 하지 않을뿐.”
수령이나 관아의 향리들이 딱히 부패를 저지르지도 않았다. 본궁의 존재 때문이었다. 하지만 만우는 그런 동군영에게 말했다.
“그러니 본궁이 사라지면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가야 하겠지. 이 상태라면…….”
답이 없었다. 제법 오랜 시간을 상왕의 비위만 맞추던 수령이 갑자기 상왕이 사라진다고 해서 함흥을 잘 다스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 한번 혼쭐을 내줘야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수령칠사에 어긋나는 법이지. 아무것도 하는 게 없음에도 녹봉을 받아갔다면 그것 역시도 경을 칠 일이고.”
“만우 그대 말이 맞다. 암. 그렇지. 일을 하지 않아도 죄를 지은 법이지.”
수령칠사는 수령이 고을을 다스릴 때 명심해야 하는 일곱 가지 의무를 말한다. 농사와 양잠을 장려하고, 인구를 늘리며, 선비들의 면학을 위한 환경 조성에 힘을 써야 하며, 사익을 위해 움직이지 말아야 하고 적절하게 세금을 거둬야 한다. 또한 송사를 간편하게 해야 하고 도둑을 막아야 하는 이 일곱 가지를 수령칠사라 하였다. 이 일곱 가지 중 함흥의 수령이 하는 일은 단 한 가지도 없었다. 세금까지 가별초가 관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이야.”
만우가 시퍼런 예기를 발산하는 괘검을 들어올리면서 히죽 웃어 보였다.
“오늘 본궁에 갈 생각인데, 같이 갈래?”
“뭐, 뭣이라?”
놀란 동군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