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3. 어리와 향이(3)2019.09.10.
방매가 그것을 보고 멈칫했지만 그런 것에 굴할 방매가 아니다.
“무슨 개소리야! 그게 얼마짜린데! 그리고 부딪친 것은 그쪽도 마찬가지잖아?”
저잣거리에서 이런 일로 싸움이 일어나는 것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싸움 구경이 불 구경보다 더 재밌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함흥에는 그런 즐길거리가 많지 않다보니 이렇게 한 번 싸움이 나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곤 했다.
“조선인들은 고분고분한 맛이 없단 말이지. 꼭 피를 봐야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어요.”
“조선인? 너희, 조선 사람 아니구나?”
이렇게 사람들이 몰렸을 때는 군중을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 이런 저잣거리의 생리에 빠삭한 방매다웠다.
“흥. 헛소리로 말 돌리려고 하지 말고.”
함흥은 그나마 국경에서 가까웠다. 하지만 방매는 그렇게 잡은 기세를 쉽사리 내줄 생각이 없었다.
“조선인이라고 하는 것 보니까 명나라? 아니면 여진?”
“헛소리.”
남자의 눈빛이 사나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방매가 신경이 굵은 걸로 따지자면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방매가 남자를 말로 몰아붙였다.
“조선 사람이 스스로 조선인이라고 해? 그리고 칼도 차고 다니네! 동네 사람들! 이 인간 수상하지 않아요? 누가 관아에 신고 좀 해주세요! 포졸들도 데려오시고!”
만우는 그런 방매를 보면서 피식 웃었다. 그러면서 당황해하는 남자를 쳐다봤다.
‘왜인인가?’
만우는 한눈에 남자의 정체를 알아봤다. 바로 남자가 허리춤에 찬 검 때문이었다. 중원이나 조선의 검과는 달리 거의 검신이 매우 길고 곡선을 그리고 있는데다가 얇은 검신이라면 왜검(倭劍)밖에는 없었다.
‘왜검이라면 그냥 왜인은 아니라는 뜻인데.’
그리고 왜인들 중에서 저 왜검을 패용할 수 있는 사람은 그들이 다이묘라 부르는 군주 밑에 있는 무사밖에 없었다.
“사무라이?”
“이 계집이!!!”
방매 때문에 주변이 술렁이기 시작하자 당황한 사무라이가 손을 들어올렸다. 방매가 입을 앙 다무는게 보였다. 주변의 분위기를 보니 한 대 맞아주면 저 놈이 몰매를 맞을 것 같은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쉬익! 그런데 그 때 만우의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화살이 날아오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게 방매나 자신을 향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하마터면 올라갈 뻔한 손을 꽉 잡을 수 있었다. 퍼억!!
“끄, 끄아아악!”
방매에게 손을 들어올렸던 사무라이의 손에 화살이 퍽하고 박혀들었다. 난데없이 날아온 화살에 손등이 꿰뚫린 사무라이의 손에서 은병이 떨어졌다. 탁.
“아싸. 쌤통이다.”
방매도 놀라긴 했지만 방매에게는 당장 눈 앞의 은병이 더 중요한 모양이었다. 돈에 대한 그녀의 집착에 만우가 혀를 내둘렀다.
“대단하다 너도.”
“칙쇼!!!”
챙! 그때 사무라이가 허리춤의 왜검을 뽑아들었다. 대개 사무라이라 불리는 왜무사들은 긴 왜검과 길이가 사람의 팔 정도까지 밖에 안 오는 작은 왜도를 허리춤에 패검(佩劍)했다. 정확히 말하면 왜검이 아니라 왜도검이었다. 찌르기보다는 베는 데 특화된 왜검의 길이가 길어 길고 짧은 두 개의 검을 썼기 때문이다. 그중 왜인이 빼든 것은 긴 왜검이었다.
“뒤로.”
만우가 방매의 뒷덜미를 붙잡고 끌어당겼다. 사무라이의 두 눈에서 살기가 뚝뚝 떨어졌지만 만우는 웬 개가 짖느냐는 표정으로 놈을 쳐다봤다.
“어떤 새끼가!!”
웅성웅성
“상왕전하시다!”
“전하!!!”
그런데 그때 저잣거리에 몰려든 사람들이 웅성거리더니 사람들이 넙죽 엎드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사이로 검은 두루마기를 걸치고 검은 갓을 쓴 노인이 활을 한 손에 든 채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런 노인의 뒤로는 엄정한 기세에 단단한 눈빛을 한 건장한 무사들이 열 명이나 따르고 있었다.
‘상왕.’
만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함흥에 들어선 순간부터 만우의 감을 계속해서 자극하던 그 기운의 주인공이었다. 동북면의 무신. 동북면을 무던히도 괴롭히던 악명 높은 왜구 아지발도를 화살 두 대로 쏘아죽인 이성계의 무위는 수십 년이 지나도 동북면에서 전설처럼 떠돌았다. 전설의 주인공이 나타난 것이다. 이성계는 다른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만우는 나이를 먹었음에도 형형한 이성계의 눈빛에 감탄했다.
‘타고난 무골이다.’
이성계는 노구임에도 불구하고 허리가 굽지도 않았고 근육이 쪼그라들지도 않았다. 하얀 머리와 주름이 아닌 몸만 보면 웬만한 장정보다 더 건강해 보였다.
“어디서 감히 왜놈 따위가 백주 대낮에 조선의 백성에게 손을 대려 하는 것이냐.”
이성계의 호통이 터져나오자 사무라이의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만우는 이성계의 기운이 사무라이를 옥죄는 것을 보고는 이채를 띄었다.
‘기운의 수발이 능숙하다.’
만우도 궁을 다루는 고수와 겨뤄본 경험이 거의 없었다. 무림에서의 궁은 실력이 안 되는 삼류나 이류 무인들이 구명절초로 사용하고는 하는 그런 무기에 불과했다. 부르르. 만우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호승심이었다. 중원무림에서도 만우에게 이 정도의 호승심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들은 무림십좌를 제외하면 몇몇 문파의 은거기인들 뿐이었다.
‘참자.’
어차피 한번은 만나야 하고, 같이 한양으로 돌아가야 하니 그 안에 서로의 기예를 겨룰 수 있는 시간이 있을 것이다. 나이에 상관 없이 이성계도 만우와 비슷한 욕구에 시달릴지도 모른다. 호승심. 무(武)로써 자신의 뜻을 세운 사람에게 이 호승심이란 건 자신이 쌓아온 모든 것을 걸고 겨루는 신성한 행위다.
“가별초!”
“예!”
만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성계의 말에 우렁차게 대답하는 가별초 무사들의 기세가 일전에 동군영이 저잣거리에서 조우했던 이들과는 차원이 달랐기 때문이다.
‘분명 가별초라고 했는데.’
저잣거리의 사람들이 가별초라고 하면서 분명히 수근댔다. 하지만 저들과는 실력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전원 일류.’
무재(武才)가 있는 이가 구대문파나 오대세가 정도 되는 곳에 들어가 십 년 이상을 끊임없이 수련을 하면 오를 수 있는 경지가 일류다. 그리고 특출난 재능이 없는 대부분의 무림인들이 평생 동안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일류다. 그 이상은 뛰어난 심법과 오성이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성계를 호위하는 이들이 모두 일류라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칙쇼!!”
손등에서 피를 흘리는 사무라이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사무라이는 잘 봐줘야 삼류다. 만우는 가별초들이 사무라이 주변을 포위하는 것을 보면서 방매의 뒷덜미를 붙잡고 한 발자국 더 물러섰다.
“흐음.”
이성계는 그런 만우와 방매를 잠시 쳐다봤다. 다들 오체투지를 한 상태에서 유일하게 움직인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마터면 방금 큰 일을 치룰 뻔한 여아가 껴 있었기 때문에 이성계는 고개를 돌렸다. 아니, 돌리려고 했다. 찌릿.
“…….”
이성계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수도 없이 활을 당긴 손이다. 그 때문에 화살이 시위에서 떠날 때 자신의 화살이 표적에 맞을지 안 맞을지를 곧바로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손에 찌릿한 전류가 흘렀다.
“……강자.”
그리고 이성계는 그것이 강자라 불릴 만한 이를 마주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임을 잘 알았다. 이성계는 매와 같은 눈으로 주변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그 정도의 실력자는 보이지 않았다.
“최근에 저자가 시끄럽다 했더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구나.”
이성계는 감각을 최대한 돋웠다. 실력자를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마치 그 느낌이 거짓이었다는 것처럼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카무라.”
“슈, 슌스케 행수님!”
그때 시전 골목에서 다른 왜인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왜인을 발견한 사무라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거기서 무엇을…….”
사무라이를 둘러싼 무사들과 그 뒤에 선 이성계를 본 슌스케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이성계를 알아본 것이다.
“상왕전하를 뵙습니다.”
“호오.”
왜인은 예의를 모르고 무도하다. 남의 것을 약탈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기생충 같은 이들이라 생각했던 이성계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슌스케 행수라 불린 이가 자신의 앞에 오체투지를 하면서 넙죽 엎드렸기 때문이었다.
“나를 아는가?”
“어찌 소인이 동북면의 무신을 못 알아보겠습니까.”
“아직도 나를 그리 기억하는 자가 있나보군.”
슌스케가 오체투지를 하자 사무라이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성계는 이내 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 무도한 왜놈이 우리 조선의 백성을 겁박하였다. 그대는 누군가. 왜구인가 왜인인가.”
왜구(倭寇)와 왜인(倭人)은 다르다. 왜구는 조선을 침략하고 약탈을 저지르는 도적이고 왜인은 국적이 다른 사람이다.
“소인, 왜상(倭商) 슌스케라 하옵니다. 저자는 저희 상단의 호위입니다.”
“호위?”
이성계의 입에 조소가 떠올랐다. 난동을 피운 사무라이는 무사라고 하기에도 아까울 정도였다. 그냥 파락호에게 검을 쥐어준 것이나 다름없다.
“다른 호위를 구하는 것이 좋겠군. 아니 그런가?”
이성계의 목소리에 살기가 돋았다. 그 목소리에 슌스케의 어깨가 파르르 떨었다. 이내 그는 눈을 질끈 감고 이마를 땅에 박았다.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다카무라!!!”
“하이!”
“절지(切指)하여 자비를 구하라.”
“하이!”
다카무라가 이를 악물고 배쪽에 찬 소검을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약지를 잘라냈다. 촤악!
“끄윽…….”
이성계는 무표정한 얼굴로 사무라이가 손가락을 끊는 모습을 지켜봤다. 슌스케는 다시 땅에 머리를 박았다. 쿵, 쿵. 슌스케의 이마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자비를!”
그때 이성계가 고개를 돌려 방매를 쳐다봤다. 만우 뒤에서 움츠리고 있었던 방매를 향해 이성계가 말했다.
“여아야.”
오체투지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있던 방매가 고개를 조심스럽게 들었다. 이성계의 목소리가 마치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울려 퍼졌기 때문이다. 만우의 주먹이 다시 한차례 파르르 떨었다. 공력이 움직이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확실히 상승기예였다.
“이 정도면 되었느냐?”
방매는 손에서 피를 뚝뚝 흘리며 얼굴이 하얗게 질린채 서 있는 사무라이를 쳐다봤다. 그때 방매가 당돌하게 고개를 돌렸다.
“소녀는 보부상입니다.”
“보부상?”
이성계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방매의 돌발행동에 움찔했던 가별초 무사의 눈에 노기가 깃들었다. 평민 주제에 상왕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성계가 흥미로워하자 무사들은 입을 닫았다. 만우는 또 얘가 무슨 사고를 치려고 하는 것인가 하는 눈으로 방매를 쳐다봤다.
“상인은 절대로 손해보는 장사를 하지 않습니다. 헌데, 이자가 저잣거리에서 소녀가 가진 은병을 모든 사람에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슌스케는 여전히 땅바닥에 이마를 처박고 있었고 사무라이의 얼굴에는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아직 소녀는 이곳에서 살 것들을 모두 사지 않았습니다. 허나 모든 거래에는 흥정이 필요합니다. 헌데 소녀가 가진 돈을 다른 이들이 모두 보게 되었으니, 그로 인해 소녀가 볼 손해분도 저자가 배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배상이라?”
이성계의 눈이 커졌다. 자신 앞에서 저렇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모두 얻고자 또랑또랑하게 말하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재밌었기 때문이다.
“크하하하하. 고것 참 맹랑한 여아구나. 그래, 얼마를 원하느냐?”
“소녀가 원하는 것은…….”
방매의 눈이 반짝였다. 만우는 그런 방매를 보면서 헛웃음을 터뜨렸다. 방매가 그 와중에 최대의 효율을 뽑기 위해 슌스케 행수와 사무라이의 전신을 살폈기 때문이다.
“손잡이에 대명(大名: 다이묘)이라 쓰인 검을 원하옵니다.”
“대명이라?”
그 순간 손가락이 잘린 손에 지혈을 하던 사무라이의 눈이 크게 떠졌다. 동시에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은 슌스케 행수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슌스케 행수의 품 안에 손바닥만 한 작은 단검이 있었는데, 거기에 대명이라는 한자가 각인되어 있었다. 그것을 방매가 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