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1. 어리와 향이(1)2019.09.03.
“하아……..”
광문자의 입에서 꺼질 것 같은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는 한양이 좋았다. 그런데 누구 때문에 한양이 아니라 한양에서 한참 멀리 떨어진 이곳에 있어야 했다.
“하아아아아아……..”
“그만해요 아저씨!”
기생 차림을 한 어리가 광문자를 보면서 빽 하고 소릴 질렀다. 광문자의 어깨가 움찔했다.
“정신 없어 죽겠는데 아저씨까지 그럴 거예요?”
“아가씨. 아무리 그래도 굳이 함흥까지 와서 기생 행세를 할 필요가…….”
“왜요. 우리가 제일 잘하는게 이런 건데.”
변장과 위장. 은월루의 특기였다. 문제는 어리가 기생으로 변장을 한 이유가 한 남자라는 것 때문이었다.
“왜 그렇게 그 검주라는 자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시는 겁니까?”
“음…….”
어리는 턱 끝에 손가락을 얹었다.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색기와 교태가 흘러 넘쳤지만 광문자는 그런 어리의 모습에 단련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굳건히 버틸 수 있었다.
“그 남자, 태풍의 눈이에요.”
“태풍의 눈?”
“이 조선반도가 재밌게 되어가고 있잖아요? 그게 검주라는 그 남자가 나타난 이후에 일어난 변화거든요.”
“…….”
미처 그 부분까지는 생각해 보지 못했다. 그래서 생각해 보니 어리의 말이 맞았다.
“게다가 우리 은월루에서 나서도 상왕전하를 설득하는 걸 실패했어요. 아니, 설득이 뭐예요, 근처에 가기만 해도 활 맞아 죽었는데.”
“끄응…….”
은월루의 정예들은 전부 뛰어난 수준의 은신술과 살법을 배운 암살자들이다. 은월루가 언제부터 존재해 왔는지는 루주인 어리도 알지 못했다. 그저 은월루는 조선에 있어왔고, 늘 권력과 깊숙하게 연이 닿아 있었다. 그들은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거대한 명분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가진 재주를 이용해 조선의 방관자로 살아왔다. 그런 은월루를 끌어들인 것이 바로 정도전이었다. 삼봉 정도전은 은월루의 존재를 알아채고 상왕 이성계와 전 은월루주를 이어주었다. 그렇게 같은 배를 타고 가는듯 싶던 이성계와 은월루의 관계가 깨진 것은 한 인물의 죽음 때문이었다. 정몽주. 정몽주를 혈죽교에서 철퇴로 때려죽인 이는 조영규인데, 이 조영규가 바로 은월루 소속의 요원이었다. 정확히는 이성계의 혈족들의 보호를 위해 붙인 이였는데 이 일로 인해 현재의 국왕인 이방원이 은월루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길이 다르나 정몽주를 흠모하던 이성계는 그 일로 은월루를 버렸고, 이방원이 은월루를 품었다. 개국공신(開國功臣). 개국공신인 그들을 거두어 이방원은 품었고 그 대가로 이방원은 국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은월루가 아니었다면 이방원은 정도전을 죽일 수 없었을 것이고 이방번의 난을 막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검주가 들어온 이후로 중원의 시선이 우리 쪽으로 쏠리고 있어요. 한양의 하오문부터 시작해서 의주까지…….”
어리의 두 눈에 기이한 열기가 서렸다. 광문자는 그 열기를 보고는 흠칫했다.
“무료한 인생에 내려온 한 줄기 구명줄 같지 않나요?”
“아가씨…….”
“조선의 왕은 고려의 관습을 타파하고 개혁을 이루고 싶어하죠. 삼봉을 미워하면서도 삼봉을 흠모하니까요. 하지만 개혁의 바람을 불러일으키기에는 국왕 혼자로는 무리예요.”
철혈왕으로 불리며 절대왕권을 성립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한양이나 국왕의 고향인 동북면이나 전주에 한해서였다. 고려 때부터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지방의 호족들은 여전히 그 세력이 강맹했고 조선을 등지고 낙향한 고려의 문사들인 사림파(士林派)의 영향력 또한 여전했다. 그들은 국왕이 일으킨 개혁의 바람을 막아낼 것이다.
“그 남자. 분명히 이 함흥에 원하는 것이 있어요. 그러니까 순순히 여기까지 가겠다고 한 거죠.”
“왕이 명령을 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까?”
광문자가 눈을 크게 떴다. 어리와 함께 궁에 입궐해 왕을 알현한 적이 있었다. 그때 광문자는 왕의 기도에 크게 경악했다. 제왕의 기도였다. 태어나면서부터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는 것이 당연하고, 제왕의 위를 잇는 것을 타고난 사람의 기도였기 때문이다.
“명령? 검주에게요?”
어리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는…… 왕이에요. 자신이 원하는 것이 없다면 움직이지 않는 왕. 같은 왕에게는 아무리 철혈왕이라고 해도 명령을 내릴 수 없죠.”
어리가 검지 손가락으로 자신의 턱을 살짝 긁었다. 광문자는 멍한 표정으로 어리를 쳐다봤다.
“궁금하네요. 그자가 대체 함흥에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어리의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그것도 잠시, 문이 벌컥 열리더니 창모(娼母)가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그리고는 어리를 한 번 쳐다보고는 광문자에게 말했다.
“기둥서방이란 놈이 아직까지 여기서 죽치고 있으면 뭐해! 어리 찾는 나리 오셨어. 어서 나가!”
“알았소. 그리고 얼굴 좀 불쑥불쑥 들이밀지 마시오. 우리 어리가 놀라지 않소?”
광문자는 능글맞은 웃음을 흘리며 창모에게 말했다. 연기가 수준급이었다. 갑작스레 들이닥친 창모에게도 광문자는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그럼 마저 준비 다하고 나오려무나. 내가 또 이거 하나 죽이거든. 흐흐.”
광문자가 입에 손나팔을 만들어 불어대면서 어리에게 말했다. 그리고는 창모의 등을 떠밀었다.
“어서 갑시다. 어서. 맞다. 향아! 향아!!!”
광문자가 문 밖에서 누군가를 불렀다. 그러자 잠시 후, 어리가 있던 방의 문이 살짝 열리더니 열 살 남짓해 보이는 수수한 얼굴의 몸종이 문을 열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씨. 시키실 일 있으면 부르셔요.”
어리가 웃으며 향이라 불린 몸종에게 손짓을 했다. 그리고는 옆에 놓인 접시에서 당과를 손으로 집어 향이의 손에 쥐여 주었다.
“여기서 이거 먹으면서 쉬려무나.”
“아, 아씨. 안 되어요. 창모께서 경을 치실 거여요.”
향이가 기겁하면서 애써 당과를 거부했다. 하지만 어리는 웃으면서 향이의 손을 잡아 옆에 앉혔다.
“걱정 마. 대신 나한테 몇 가지 이야기를 해주지 않겠니?”
“이야기요?”
하지만 어린 몸종에게 달콤한 당과의 유혹은 강렬했다. 거기에 공짜도 아니라 어리가 해달라는 것을 해주고 받는 것이기 때문에 향이는 슬그머니 어리의 옆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 촤악!!! 달빛 아래 비친 선녀탕은 과연 왜 이곳이 선녀탕이라고 불리는 지 이해가 가는 곳이었다.
“멋있다.”
파문 하나 일지 않은 물 위로는 하늘 높이 뜬 보름달과 구름들이 그대로 반사됐다. 하늘과 물 위를 가르는 수평선이 아니라면 밤하늘이 물속에 담겼다고 해도 믿었을 것이다. 단지 그곳에 하나의 오점이 있었다면 바로 동군영이었다.
“으…… 으하아아! 시원하다!!!”
동군영이 물을 보자마자 뛰어들어 예쁜 한 폭의 그림이나 다름 없던 수면을 사정없이 망쳐놓았기 때문이다.
“저 화상…….”
“어서 들어와! 만우 자네도 씻어야지!”
만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주섬주섬 옷을 벗었다.
“선녀가 있으면 좋았을 텐데.”
“하핫! 그냥 이야기일 뿐인데 그걸 믿는 겐가?”
“그럼, 호랑이가 500년 동안 산 건 믿고?”
만우가 피식 웃으면서 옷을 벗자 조각 같은 상체가 드러났다. 동군영은 할 말이 없어져서는 뽀글거리며 잠수를 했다.
“시원하네.”
만약 주막에 부탁을 했다면 장작을 때워 따뜻한 물을 제공해 줬을 것이다. 언제까지 그 효과가 지속될지는 모르나 동군영은 주모의 은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군영이 그러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다른 양반들은 거침없이 뽑아먹고 이용해먹고 그러더만.”
주모에게 그런 부담을 부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양반을 거의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만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별로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래. 하고 있는 걱정은 뭔데?”
물 위를 둥둥 떠다니던 동군영이 만우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만우기 흠칫했다.
“무슨 고민?”
“에이. 얼굴에 다 써있어. 돌리려고 하지 말고.”
“허.”
만우는 동군영을 흘겨보았다. 검을 보는 눈은 없으면서 사람의 표정을 살피는 눈치는 어쩜 저렇게 좋은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히, 동군영의 말대로 만우에게는 고민이 있었다.
‘향이 아씨, 아니 향이.’
김향. 만우의 주인인 김약항의 핏줄 중 마지막 생존자인 김향이 여기 함흥에 있었다. 그런데 하오문도, 개방도 없는 이곳에서는 어떻게 하면 김향을 찾을 수 있는지 막막하기만 했다.
‘기루가 한두 곳도 아니고.’
김향이 기생의 몸종이 되어 함흥까지 왔다는 것은 하오문을 통해 알아냈다. 하지만 그 이상은 하오문도 모르고 있었다.
‘어떻게 찾아낸다.’
다행인 점이라면 아직 나이가 어려 기생으로 머리를 틀어올릴 나이는 아니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워낙 중원에서 미친놈들을 많이 봤기 때문에 만우는 그것도 안심할 수가 없었다.
‘어린 여아들만 좋아하는 색마들도 많았으니까.’
물론 그런 색마들은 무림공적이 되어 비명횡사하기는 했지만 사람의 성적 취향이 어느 정도까지 뻗쳐 있는지는 알수 없었기 때문에 늘 주의해야만 했다. 그것도 가장 취약한 계층인 기생, 그 기생의 몸종이라면 결코 안심할 수가 없었다.
“찾을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어디있는지 알 수가 없어.”
“이곳, 함흥에 있나 보군?”
“맞아.”
“간단하네.”
동군영은 양손을 모아 물을 가득 담아 입에 넣고 우물거리면서 말했다. 만우의 눈이 커졌다.
“무슨 수로? 어떻게?”
“용모파기를 그릴 수 있어?”
“……아니. 아는 건 이름과 나이 뿐이야.”
“여자? 남자?”
동군영의 말에 만우는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도움을 얻으려면 어느 정도까지는 솔직하게 말해야 했다.
“여자.”
“만우 자네가 머슴이라고 했지?”
동군영은 거침 없었다. 만우는 그런 동군영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동군영이 피식 웃었다.
“왜. 양반 같지 않나? 내가 원래부터 그런 소리는 자주 들었네만.”
이럴 때보면 고지식한 유학자가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만우가 그런 눈으로 동군영을 쳐다보자 동군영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불리할 때 자주 써먹는 말이네. 반상의 도리다 뭐다 하면 편하니까.”
“단순히 편해서?”
“그렇네. 내가 말하지 않았나.”
동군영이 피식 웃었다. 자신이 한심하다는 듯한 웃음이었다.
“난 학자가 아니라 관리라네. 내가 학자가 되고 싶었다면 과거를 보지 않았을 테니까.”
“출세하기 위한 수단이다?”
“뭐, 그렇다는 말이지. 여튼.”
동군영은 더 이상 말하기 싫다는 듯 말머리를 돌렸다. 만우도 지금은 김향을 찾아내는 것이 더 우선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뭐, 자네는 그럴 만한 능력이 있으니까.”
동군영은 그렇게 말하면서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왕 앞에서도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던 만우의 모습이 떠올랐다.
‘속물이구나’
앞에 말한 것은 전부 거짓이었다. 사실은 만우가 출신 성분을 뛰어넘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동군영은 자기 자신을 비웃었다.
“쓸데없는 생각 말고.”
저음의 목소리가 동군영을 상념으로부터 건져냈다.
“그렇지. 만우 자네가 찾는 사람이면 비슷한 처지의 사람이겠지?”
노비. 원래 김향은 노비가 아니었지만 관기의 여종으로 있다면 노비다. 만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여자에 노비. 그리고 함흥. 대충 짐작이 되는데. 혹시 기녀인가?”
“기녀가 아니라 몸종이라 하더군.”
딱. 동군영이 손가락을 튕겼다. 답이 나왔다는 얼굴이었다.
“관아를 털면 되네.”
“……뭐?”
만우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동군영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기녀의 여종이고, 만약 그 기녀가 관기라면 여종도 관기가 될 운명이네.”
“…….”
“그리고 모든 관아 소속의 기녀들을 정리한 장부가 있겠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갔고.”
“노비문기를 말하는 건가?”
“그렇지.”
동군영이 씩 웃었다. 만우가 설마하는 눈으로 동군영을 쳐다봤다. 장원급제까지 한 인재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만우의 머릿속에 동군영은 그냥 반푼이였다.
“아니, 신기해서.”
“그런 눈으로 보면 상처 받네.”
만우의 말에 동군영이 토라진 표정을 지었다가 피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