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8. 함흥차사?(2)2019.08.24.
“거기에 왕후마마를 후궁으로 격하시키고 이장까지 하였으니, 나와는 같은 하늘을 지고 살 수 없는 놈이다.”
조사의는 눈을 번뜩였다. 그는 안변부사에 부임한 이후 지방호족들을 모아 은밀히 세력을 키웠다.
“상왕께서 호응해 주신다면 지금의 왕은 반역자가 될 것이다. 나는 그릇된 것을 잘못 잡을 영웅이 되는 것이고.”
조사의의 주먹에 들어간 힘이 커졌다. 그런 조사의를 향해 호족 중 하나가 걱정스레 물었다.
“헌데 괜찮겠습니까? 박순과 송류, 두 자를 죽여서 없앴으니…….”
“방원의 개는 죽여 없애는 것이 좋소.”
박순과 송류. 왕은 상왕이 분노해 죽였다고 생각한 그 둘이 사실은 조사의에 의해 죽은 것이다. 그 둘은 조사의가 병력을 키우고 있다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죽인 것이기도 했다.
“상왕전하의 방원에 대한 분노가 크시니, 우리를 탓하지는 않으실 것이오. 상왕전하께서는 방원이 왕의 재목이 아니라면서 늘 분노하셨소. 하지만 당신의 손으로 건국하신 조선 때문에 참고 계시는 것이오.”
조사의는 지방 호족들에게 말했다. 상왕이라는 소리에 호족들의 얼굴에 서려 있던 옅은 걱정이 사라졌다.
“곧 격문(檄文)을 돌릴 것이오. 그 격문이 조선팔도에 나붙으면, 그때부터 우리의 혁명은 시작되는 것이오. 그러니 빈틈없이 준비해 주시오.”
“예.”
“나는 격문이 돌 때쯤 함흥으로 향해 상왕전하를 모시겠소. 상왕전하를 모시는 순간, 방원에게 정통성은 사라지는 것이오. 옥새도 방원의 손에 없으니.”
조사의를 비롯한 안변의 호족들에게 방원은 왕이 아니었다. 그는 무도한 찬탈자일 뿐이었다.
“방원이란 무도한 찬탈자에게 정해진 운명은…… 죽음뿐이오.”
조사의의 눈이 형형하게 빛을 발했다. 하지만 호족들 중 걱정이 깊은 몇몇이 우려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허나 방원의 군대는 매우 강맹하다 들었소. 그 휘하에도 맹장들이 있고, 군졸들의 수도 우리보다 많을 터. 어떻게 이 간극을 메꾸려 하시오?”
명분이 있다고 해도 힘은 왕에게 있었다. 그런 호족들의 우려에 조사의가 씩 웃었다.
“들어오시오.”
조사의가 바깥에 대고 말하자 문이 열렸다. 그와 함께 호족들을 호위하기 위해 서 있던 무사들이 움찔했다. 바깥에 사람이 있다는 기척을 느끼지 못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문이 열리는 순간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그것을 깨달은 무사들의 모골이 송연해졌다. 자신들보다 훨씬 윗줄의 고수였기 때문이었다.
“안변부사를 뵙습니다.”
“동영(東瀛)?”
문을 열고 들어온 이를 본 호족들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이마를 훤히 드러내고 작은 상투를 튼 체구가 작은 남자가 걸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왜구를 끌어들이는 것이오?”
동영은 왜구에 대한 그나마 존중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이들 중 동영, 그러니까 왜에 대해 좋은 감정을 품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고려 때부터 줄기차게 동해의 해안은 왜구들에 의해 노략질을 당했다. 그 때문에 죽어나간 사람들과 입은 피해만 생각하면 이부터 가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왜구가 아니오.”
작은 체구의 남자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그 순간 호족들을 지키던 호위무사들이 자신들도 모르게 검병에 손을 가져다 댔다. 눈빛 하나만으로 호위무사들을 겁먹은 개새끼들처럼 만든 것이다.
“우리는 위대하신 대명(大名: 다이묘)의 검들. 노략질을 위해 온 천 것들과 비교하지 마시기를.”
남자의 눈이 가늘어지자 호위무사들의 입에서 헉하는 한숨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들을 옥죄고 있던 살기가 풀렸기 때문이다.
“이들이라면 어떻겠소?”
호족들의 표정이 변했다. 동시에 조사의의 얼굴이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변했다.
“이 정도의 무사들이라면…… 하지만 이들을 고용하려면 비용이 많이 드는 것이 아니오?”
조사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복수를 하는데 그깟 돈에 연연하다니. 역시 이방원이 왕에 오르자마자 호족들을 내쳐 버린 데에는 이유가 다 있었다. 하지만 조사의의 거병에 자금을 대주는 것이 호족이었기 때문에 조사의는 가까스로 얼굴을 폈다.
“아닙니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하나.”
조사의가 눈을 빛냈다.
“제부투혼이란 것을 찾을 수 있게만 해주면 된다 하였습니다.”
“제부투혼?”
“사무라이 슌스케.”
슌스케라 불린 남자는 자신의 키에 약간 못 미치는 검을 허리에 세 자루나 차고 있었다. 검신이 얇고 완곡하게 휜 것이 전형적인 왜구의 검이었다.
“백제 무왕의 아들인 의자왕은 백제가 멸망하는 최후의 순간 백제의 뜻을 잇기 위한 보물지도를 하나 남겼고, 그것을 바로 제부투혼이라 합니다.”
“장보도……?”
호족들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그와 동시에 그들의 얼굴에 탐욕이 서렸다. 슌스케는 호족들의 표정을 봤으면서도 여전히 평온한 표정으로 말했다.
“싸울아비의 검을 이은 이들이라면 눈독을 들일 최고의 심득이 녹아들어 있는 비급에 눈독을 들이지 않을 수가 없지요. 특히 저 같은 무사에게는.”
슌스케의 가늘어진 눈이 호선을 그렸다. 하지만 슌스케의 말에 호족들의 얼굴에 서렸던 탐욕이 사라졌다.
“그러니까, 그 장보도란 것이 비급을 말하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그래…… 그 비급이면 우릴 도와준다?”
“조선의 왕이 거느린 자들이 어떤 실력일지는 모르겠으나…….”
슌스케의 작은 눈이 호족들의 뒤에 선 호위무사들에게로 향했다. 그 순간 슌스케의 손에서 하얀 빛이 뻗어나갔다. 서걱!!!
“끄아아악!!!”
눈앞에서 번개가 치는 듯 했다. 하지만 눈부신 빛이 사라지고 난 뒤 남은 것은 손목이 끊어져 비명을 내지르는 호위무사뿐이었다. 슌스케를 향해 가장 먼저 검병을 잡았던 바로 그 호위무사였다. 그때 슌스케의 허리춤으로 검 하나가 소리 소문 없이 미끄러져 들어가 철컥하는 소리를 냈다.
“이…… 이게 무슨…….”
호족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만약 저 빛이 자신의 목을 향했다면 과연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인지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들 정도라면 천, 만이 와도 두렵지 않습니다. 우리 일월조(日月組)에게는.”
슌스케가 혼자가 아니라는 말에 호족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무력은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저 정도의 무사가 더 있다면 왕의 군대와도 충분히 자웅을 겨뤄볼 수 있을 것이다.
“하하핫! 잘 부탁하네. 잘 부탁해. 우리가 성공한다면 반드시 그대들이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도록 아끼지 않고 지원을 하도록 하지.”
“성공은 이미 기정사실화 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줄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시길.”
슌스케가 등을 돌렸다. 슌스케의 발검술에 손목이 달아난 호위무사가 끅끅거리면서 손목을 지혈하고 있었다.
“일월조는 먼저 함흥에 도착해 있으니, 결정이 되거든 연락 주시길.”
히죽하고 입꼬리를 끌어올린 슌스케가 그 자리에서 허깨비처럼 픽하고 꺼졌다. 그러자 그의 기세에 압도되어 있던 호족들이 훅하고 긴 헛숨을 내뱉었다.
“어떻소. 이방원의 개들과 상충시키기에 저놈들만큼 좋은 개들이 또 있겠소이까?”
그 슌스케의 기세로부터 유일하게 자유로운 조사의만이 히죽 웃으면서 호족들에게 물었다.
***
“어이, 아줌씨.”
“아이고 무사 나리들. 오셨습니까.”
와그작. 딱 봐도 파락호로 보이는 남자들이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하며 주막을 둘러쌓았다. 주모는 버선발로 뛰어나와 넙죽거리며 파락호들의 비위를 맞춰주었지만 파락호들은 피식 웃을 뿐이었다.
“주기로 한 돈은?”
“무사나리들. 아시죠? 저기 본궁에 노역하는 사람들 왔다갔다 하는 거.”
주모는 아들뻘 되어 보이는 파락호들에게 연신 허리를 굽신거리면서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저희 집에서 숙식을 해결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조금만 말미를 주시면…….”
콰직! 와장창!
“아이고, 아이고 무사 나리들!”
파락호가 사기로 만든 그릇들이 소복하게 쌓여 있는 곳을 발로 걷어차자 사기그릇들이 산산조각이 나며 바닥에 뒹굴었다. 그 소란 때문에 저잣거리를 지나다니던 사람들이 이쪽을 쳐다보기 시작했지만 나서서 주모를 도와주는 사람들은 한 명도 없었다.
“그놈들이지? 강가(康家) 망나니.”
“그놈들 빼고 누가 여기서 저런 짓을 벌이겠어?”
“상왕전하께서도 그리 어여삐 여긴다 했으니, 저렇게 패악을 부려도 아무 말도 못하지.”
저잣거리의 사람들이 수근거렸다. 강가(康家)는 현비(顯妃) 강씨(康氏)의 집안을 뜻했다. 강씨의 사후 그 집안 전체가 국왕의 분노를 피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살기 위해 상왕의 그늘 안으로 들기를 청했다. 상왕인 이성계는 그런 강씨 집안을 무시할 수 없었고, 아들에 대한 분노가 컸기 때문에 기꺼이 그들을 자신의 그늘로 받아들였다. 그 때문에 그들은 이 함흥에서 마치 왕처럼 군림했다. 상왕 이성계가 거처하는 함흥본궁, 소위 본궁이라 불리는 곳만 아니라면 이곳에서는 관아에서조차도 그들을 건드릴 수 없었다.
“가별초가 어찌 저리 됐누…….”
“그 옛날 가별초가 아니라지 않나.”
그중 강씨 집안에서도 늘 함흥 저잣거리에서 분란을 일으키는 놈은 정해져 있었다. 강순일. 현비 강씨의 조카로 상왕은 강순일을 어여삐 여겼다. 강순일에게서 상왕이 태자로 책봉했던 여덟 째 방석을 생각이 난다는 이유에서였다. 상왕은 강순일에게 직접 궁술을 사사할 정도로 애정이 깊었다. 강순일은 무(武)에 대한 재능이 나쁘지 않아 상왕을 기쁘게 만들었고, 그것이 강순일을 지금처럼 안하무인으로 만드는데 일조를 했다. 때문에 상왕은 강순일에게 그의 가병인 가별초까지 붙여주었고 예전 고려의 가별초들의 후대인 지금의 가별초들은 강순일과 함께 함흥을 돌아다니며 패악을 부리는데 일조하고 있었다.
“아이고 나리, 왜 이러십니까. 말미를 며칠만이라도 주시면 제가 반드시…….”
“그런 소리 하려고 내가 돈놀이를 하는 줄 알아?”
강순일이 비릿하게 웃었다. 그는 헌앙하게 생겨 뭇 여인들의 방심을 뒤흔들었지만 그의 눈에는 사이함이 흘러 뱀처럼 위험해 보였다.
“빌려갔으면 제 때 갚고, 그래야 하는 것 아니겠어?”
강순일이 비릿하게 웃으며 발로 주모의 가슴팍을 걷어찼다. 그러자 주모가 고통스런 신음을 흘리며 뒤로 나뒹굴었다.
“전부 다 부셔라!”
강순일이 벌떡 일어나 직접 육각방망이를 집어 들고는 주막을 때려 부수기 시작했다. 솥이 깨져나가고 닭이 닭장에서 도망갔다. 말려놓은 야채들은 남정네들의 발아래 짓밟혔고 평상은 다리가 부러져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아이고, 아이고오.”
주모는 그것을 보면서 발을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돌리자 근처를 지나가는 포졸들이 보였지만 포졸들은 이쪽으로 눈 한 번 돌리지 않았다. 관아의 포졸들조차도 누르고, 원님들까지 눈치를 봐야하는 존재가 바로 강순일이었기 때문이다.
“난 뭐 먹고 살라고, 뭐 먹고 살라고!”
“이 아줌마가 진짜. 난 뭐 손가락 빨아먹고 살라고 쩐 빌려주나?”
주모가 강순일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악을 쓰자 강순일이 주먹으로 주모의 머리통을 쳐서는 떼냈다. 그런데 그때, 바깥에서 수근거리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줄어들었다. 그것을 알아챈 강순일이 고개를 돌렸다.
“뭐야 저건 또?”
강순일의 말소리가 주막을 때려 부수던 가별초들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주체하지 못 하면서 목검을 들고 있는 웬 거지가 서있었다.
“뭐야 저 거지는?”
강순일의 입가에 비웃음이 머금어졌다. 상투를 틀고 있고 찌그러진 갓을 쓰고 있는 것을 보니 양반인 것 같았는데, 그 차림새가 웬만한 상놈보다 더 추레했다.
“이 백주대낮에 저잣거리 한복판에서 행패를 부리다니. 국법이 지엄하거늘!”
“호오.”
후들거리는 다리와는 달리 거지 양반의 목소리는 깨끗하고 우렁찼다. 강순일이 재밌다는 듯 웃자 가별초들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저렇게 웃을 때의 강순일은 반드시 자신을 그렇게 웃게 만든 사람을 반죽음으로 만든다. 사람 몇 명 죽인다고 해도 가별초들이 알아서 처리를 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강순일은 사람을 죽여본 적도 있었다. 물론 그는 장난치다 상대가 허약해서 죽었다고 생각했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강순일은 사람을 죽이고도 멀쩡하게 살아온 것이다.
“이 함흥에선.”
강순일이 돌아서는 순간 빛이 번쩍했다. 가별초들은 강순일의 거의 완벽한 궁체(弓體)를 보면서 누군가가 그 위에 겹쳐 보이는 듯한 환영이 보였다. 신궁(神弓)! 고려와 조선의 난다긴다하는 무인들 중에서 신궁이란 별호를 받은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쉬익!!
“국법보다 내 활이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