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5. 인면수심의 인매골(2)2019.08.13.
“낙선이라면 일이 쉽겠어. 크흘흘.”
김충이 으르렁거리는 백호 앞에 다가가 손을 뻗었다. 그러자 김충의 손에서 아지랑이 같은 것이 피어오르더니 호선의 머릿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커허어엉!!! 호선이 입을 떡 벌리고 거세게 포효했다. 그런데 그건 거의 비명에 울부짖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주술이 걸린 천잠사는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호선의 몸을 파고들었기 때문에 호선은 손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쉭! 쉭!! 동군영이나 방매는 만우가 오기를 기다렸지만 만우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나타날 수가 없었다.
“축지(縮地)라니.”
대체 무슨 술수를 부린 것인지 김충이 한 걸음씩을 내딛을 때마다 주변의 풍광이 휙휙 뒤바뀌었다. 땅을 접어 달린다는 신선의 축지법에 비교하면 손색이 있었지만 말을 타고 가는 것보다 월등한 속도였다.
“복종하라. 오염된 낙선이여.”
김충은 동군영과 방매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어차피 독안에 든 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애초에 그 둘은 덤이었다. 호선을 잡으려다가 우연찮게 얻어 걸렸을 뿐이다. 그래도 돈이 충분히 될 수 있었기 때문에 김충은 둘을 죽이지 않았다.
“고양이 손이라도 필요할 조 대감일 테니까.”
그 이유는 전부 조 대감 때문이었다. 김충은 클클거리며 웃었다. 크와아아아앙!!! 호선의 포효 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마치 누군가를 찾는 것 같은 그 포효 소리에 김충이 샐쭉하게 웃었다.
“설마 그놈을 찾는 것이냐? 뒤에 남겨진 그놈 말이다.”
방매의 눈이 커졌다. 동군영은 내장까지 다치지는 않았지만 피를 너무 흘린 나머지 기운을 차리지 못했다.
“축지를 쫓아올 것이라 생각하다니. 말을 타도 그건 불가능하다.”
김충은 도술을 익힌 주술사였다. 하지만 그 도술을 올바른 데 쓰는 것이 아니라 노예상인으로써 돈을 벌고 권력을 손아귀에 쥐는 데 사용했다. 그런데 그의 도술에 대한 이해가 결코 얕은 것이 아니어서, 지금처럼 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축지시킬 정도였다. 거의 공간 전체를 이동시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흐어어어어.”
“으아아악!!”
하지만 당연히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선기가 필요했다. 도술은 선기를 근간으로 펼쳐지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김충은 방법을 찾아냈다. 노예들. 살아 있는 사람을 에너지원으로 사용해 선기를 쥐어짜냈다. 선기란 것이 신선의 기운이라고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살아 있는 생물의 기운이었다. 그중에서도 인간이 가진 선기가 가장 강했는데, 그 선기는 인간의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기운이었다. 선천지기(先天之氣). 당연히 김충이 도술을 쓸 때마다 선천지기를 빼앗기는 노예들이 바싹 말라가면서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복종하라. 낙선이여!!!”
김충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호선은 머리가 깨질 것 같은 고통에 몸부림쳤지만 천잠사 때문에 다리 하나 움직이는 것이 힘들었다. 호선은 이를 바드득 갈며 핏줄이 터진 두 눈으로 김충을 노려봤다. 크와아앙!
[굴복하지 않는다!]
“대가 센 놈이로고! 역시 산군이다!”
김충은 감탄했다. 오랫동안 도력을 쌓아 신선이 되면 종(種)을 초월하게 된다고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잘못된 사실이었다. 개구리가 아무리 오랫동안 도력을 쌓아 신선이 되어 도술을 부린다 하더라도, 본래 자신의 원형이 가지는 그 한계를 뛰어넘을 뿐이지 다른 종보다 우월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애초에 원형 자체가 먹이사슬의 최상위권인 호랑이, 그중에서도 백호인 호선은 김충이 지금껏 본 낙선들 중에 가장 강력했다.
“하지만…….”
김충이 비릿하게 웃었다. 동시에 그가 품에서 작은 단검을 꺼내들었다. 하지만 보통 단검이 아니었다. 김충이 단검을 뽑아드는 순간 어마어마한 요기(妖氣)가 사방으로 폭사됐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혈령비(血靈匕)라는 것이다.”
호선의 얼굴이 굳었다. 그녀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혈령비는 약 400년 전에 나타난 마검(魔劍)이다. 보기에는 그냥 새빨간 검신을 가진 단검처럼 보이지만 저 단검의 무서움은 단지 쥐는 사람을 피에 미친 혈귀로 만드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영혼을 먹는 검.’
저 단검은 영혼을 먹었다. 그 영혼이 신선의 것이든, 인간의 것이든 가리지 않았다. 문제는 저 단검에 베이기만 해도 영혼에 상처를 입는다는 점이었다. 영혼이 베이는 고통은 끔찍하다. 그 때문에 제 아무리 심지가 굳건한 사람이라고 해도 혈령비의 고통에는 버티지 못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범의 원형을 한 낙선을 길들이는 데 이 정도면 아깝지 않지.”
김충의 두 눈이 위험하게 번들거렸다. 호선이 이를 악물었다. 김충은 음침하게 웃으며 호선을 향해 혈령비를 들이댔다. 쉬익!!!
“흣!!”
그런데 그때 김충의 눈앞을 아슬아슬하게 흰 다리가 휙하고 스쳐지나갔다. 호선의 두 눈이 커졌다.
방매였다.
“건드리지 마!”
방매는 혈령비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대단히 위험한 물건이란 것은 눈치를 챘다. 애초에 노예상인인 김충이 도술을 이토록 잘 다룰 때부터 그녀의 위험신호가 맹렬하게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더불어 호선에게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것도. 때문에 호선에게 저 보기만 해도 불길해 보이는 새빨간 단검을 꽂아 넣기 전에 방매가 나선 것이다. 톡, 톡, 톡. 방매가 배운 수박희 중 일절은 각법이었다. 방매가 여자라는 것과 두 손을 묶었다는 것 때문에 방심했던 김충이 피가 주르륵 흐르는 볼을 손등으로 훔치고는 분노한 표정을 지었다.
“이년이!!!”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추노꾼들이 성큼 걸어 나왔다. 그 추노꾼들의 몸에서는 짙은 혈향이 풍겨져 나왔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피를 뒤집어썼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저 계집의 힘줄을 끊어라!!!”
방매의 다리가 매섭게 스친 김충의 볼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만큼 방매의 각법이 날카로웠다. 김충의 두 눈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그러자 추노꾼들이 편을 들고 걸어 나왔다. 방매의 발이 품(品)자를 밟으면서 움직였다. 하지만 두 팔이 묶여 있어서 움직임이 자유롭지 않았다. 촤악!! 방매의 옆을 채찍이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갔다. 방매가 이를 악물고 땅을 박차고 튀어나갔다.
‘거리를 주면 내가 불리해.’
방매도 채찍을 든 상대와 싸워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기껏해야 허접한 산적들이나 파락호들만 상대해 봤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승부를 내야 했다.
‘시간을 벌어야 돼.’
방매는 만우가 올 때까지만 최대한 시간을 끌 생각이었다. 만우라면, 아무리 축지를 쓰고 있다고 해도 따라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제법. 모두 한꺼번에 덮친다!”
하지만 추노꾼들은 한 명을 상대로 온갖 경험을 해본 이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추노꾼들이 능숙하게 자리를 잡고 방매를 향해 다가오자 방매가 뒤로 물러섰다. 압박감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치잇.”
방매가 이를 악물고 틈을 살폈지만 쉽사리 틈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 방매를 향해 추노꾼들의 공격이 쏟아졌다.
“이 비겁한 새끼들! 가운데 다리나 떼라! 나 혼자가 그렇게 무섭냐?”
방매가 이리저리 몸을 흔들면서 움직였다. 추노꾼들은 철저히 거리를 유지한 채 방매를 공격했다. 방매의 치명적인 약점을 순식간에 알아챈 것이다. 촤악!
“아악!”
아무리 방매가 수박희를 익혔다고 해도 방매는 맨손이고, 체력도 한계가 있었다. 그러던 방매의 등짝에 채찍이 작렬하자 방매의 몸이 비틀거렸다.
“잡아!!!”
방매가 비틀거리자 추노꾼 한 명이 방매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들의 수가 많으니 일단 쓰러뜨리면 끝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방매의 눈이 빛났다.
“챠합!!”
방매가 몸을 낮추면서 다리를 낫처럼 만들어 추노꾼의 다리를 걸었다. 방매의 키가 추노꾼보다 작았기 때문에 무게중심적인 측면에서 방매가 훨씬 유리했다.
“억!”
방매가 다리를 걸자 추노꾼이 둥실 떠올랐다. 동시에 방매가 몸을 회전시키며 다른 다리로 추노꾼의 목을 감쌌다.
“끄으으윽!!”
방매의 다리가 추노꾼의 목을 졸랐다. 채찍이 훑고 지나간 방매의 등에서 피가 붉게 배어나왔지만 방매는 이를 악물었다. 원래 이런 종류의 싸움은 기세 싸움이다.
“내가 개경에서는 미친년이라 불린 몸이야!”
방매가 으르렁거리면서 힘을 주자 추노꾼이 축하고 늘어졌다. 그러자 추노꾼들이 움찔했다. 방매는 재빨리 무릎으로 일어섰다.
“덤벼. 가운데 다리 떼버린 놈들아.”
방매의 기세가 순간적으로 추노꾼들을 찍어 눌렀다. 하지만 그 정도로 추노꾼들이 물러서기에는, 김충이라는 커다란 벽이 있었다.
“계집년이 입이 제법 매섭구나. 내가 상대해 주마!”
“닥쳐. 내시 같은 놈.”
방매의 날카로운 일갈에 김충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수염이 없는 그의 약점을 방매가 제대로 건드렸다.
“죽고 싶어서 용을 쓰는구나.”
김충의 눈에 살기가 깃들었다. 하지만 방매는 오히려 히죽 웃었다.
“왜. 쫄리면 나오던가.”
“하.”
김충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코딱지만 한 여자애가 보통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이 결국 만용임을 증명할 자신이 김충에게는 있었다. 둥실. 김충이 손가락을 흔들자 혈령비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미친…….”
방매가 입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도술을 부리는 놈인 건 알았지만 저런 사술까지 쓸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소개하지. 맹수(盲手)라고 하지. 보이지 않는 손이야.”
크허어어엉!!! 방매의 위험을 느낀 호선이 포효를 내질렀다. 그러자 눈썹을 꿈틀거린 김충이 손을 까닥거리자 혈령비가 호선의 하얀 가죽을 헤집었다. 크와아아악!!!
[피해. 어서!]
“피할 곳이 없어.”
호선은 고통에 비명을 내지르면서도 방매에게 전음으로 말했다. 하지만 방매는 쓰게 웃었다. 김충이 한 발씩을 내딛을 때마다 공간 자체가 축지를 하고 있었다. 그 말인즉슨 이 공간 자체가 김충의 지배하에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빨리 와 만우. 내 돈 써보기도 전에 죽고 싶진 않으니까.”
방매가 곁눈질로 거의 목내이(木乃伊)가 된 노예들을 보면 이를 악물었다. 저렇게 악독하게 살면서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축적하는 사람들이 방매는 제일 싫었다. 노동의 정당한 대가가 아니라 꼼수를 이용해 다른 사람을 착취하는 것이 이제는 지긋지긋했기 때문이다.
“버티기만 하자. 버티기만.”
호선을 헤집고 난 뒤 더욱 붉어진 혈령비가 김충 곁으로 다가와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김충의 살기가 폭사하는 순간, 방매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
“먼저 가도록 하지.”
만우가 척준영에게 말하자 척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만우가 땅을 박차자 막대한 공력으로 인한 풍압이 척준영을 비롯한 소사각 무인들의 얼굴을 때렸다. 콰가가가가!!! 만우의 경신법은 투박했다. 무지막지하게 공력을 쏟아부어 속도를 높인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우는 공력을 아끼지 않고 용천혈을 통해 분사했다.
‘느껴지지 않아.’
그 말인즉슨 놀랍게도 동군영과 방매, 그리고 호선이 사라지고 나서 300장 이상을 벗어났다는 소리였다. 만우의 입가가 하늘로 치솟았다.
“도망갈 수 있을 줄 알고?”
만우가 발끝에 힘을 줬다. 그러자 만우의 몸이 화살처럼 더욱 빨라졌다. 잡초들의 뿌리가 패이며 흙을 비롯한 잡초들이 하늘로 비산했다.
“보이지 않으면…… 달려서 잡으면 되는 거지.”
정확한 방향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호선의 선기만은 뚜렷하게 느껴졌다. 맨날 호선을 두들겨 패면서 선기를 느꼈기 때문에 호선의 거대한 선기가 느껴졌다. 그런데 그 선기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호선을 꺾을 정도의 강자가 있다는 소리지?”
호선은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500년 동안 살아오면서 쌓은 선기와 그 선기를 품은 호랑이로서의 능력을 생각하면 초절정 여럿은 가볍게 찜쪄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호선을 제압한 사람이 고작 노예상인이란 소리였다.
“재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