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4. 인면수심의 인매골(1)2019.08.10.
만약 이곳까지 왕의 손길이 닿을 수 있었다면. 아니면 이곳에서 일어난 일들이 한양까지 들릴 수 있었다면.
‘과연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동군영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런 동군영의 단단한 얼굴을 본 호선이 한숨을 살짝 내쉬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요. 대신 위험하다면 가지 않겠어요.”
호선에게는 그냥 인세의 일일 뿐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동안 동행을 했다고 정이 든 듯, 무 자르듯 딱 잘라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좋아. 그렇게 하지.”
“방매는?”
호선이 방매를 쳐다봤다. 동군영의 굳은 표정을 본 방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뒤에서 창창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가요.”
대체 왜 사건 사고들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자신들이 가는 길에 일어나는 것일까. 방매는 무슨 악운이 들러붙었나 잠시 생각했지만 객주를 통해 바꾼 든든한 금병이 생각나자 실실 웃었다.
‘이번에는 또 뭘 얻을라나?’
만우는 그렇게 세 명의 기척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면서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진이다.’
분명 만우의 기감에는 아무런 인기척이 잡히지 않았다. 만우의 기감은 평상시에도 근방 50장에 들어온 살수를 감지해 낼 수 있을 정도다. 그건 만우가 의식해서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이 인매골에서는 만우의 기감이 어딘가 고장 나 있었다.
‘당장 이것만해도…….’
팅팅팅!!! 만우가 괘검을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팅팅하는 소리와 함께 화살이 위로 튀어 올랐다. 만우는 그것이 철시(鐵矢)임을 확인하고는 손에 남은 경력을 털어냈다. 원래라면 이런 철시가 날아오기 전에 만우가 알아채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런데 만우는 철시가 지근거리까지 날아오고 나서야 철시가 날아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기감이 아니라 청력으로 알아낸 것이다.
“웬 놈이냐.”
철시는 무려 100장 밖에서 날아왔다. 그냥 보통 활이 50장에서 60장 정도만 날아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무시무시한 거리였다. 쐐액!! 만우가 소리를 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철시뿐이었다. 그 순간 만우의 괘검이 또다시 거대한 검막(劍幕)을 형성했다.
“허튼 짓.”
그 궤도가 만우가 아니라 뒤에서 멀어지고 있는 동군영을 비롯한 나머지 일행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만우는 비릿하게 웃었다.
“무인이 아니라 군부인가?”
철시는 주로 조선의 군병들이 즐겨 다루는 활이었다. 조선의 활은 중원의 것보다 질기고 탄성이 좋은 것으로 소문나 있었다. 그리고 활을 다루는 기예에 있어서는 중원의 그것보다 압도적으로 뛰어났기 때문에 활을 다루는 이들이 많았다.
‘범도 화살 한 대로 잡는 사냥꾼들이 있는 곳이니까.’
그 때문에 조선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실력을 가진 활잡이들이 있었다. 그들이 내공을 익히고 초식을 익혔다면 활을 다루는 화경이 나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활을 다루는 데 있어서는 몽고인만큼이나 뛰어난 것이 바로 조선인이었다. 타다다당!! 만우의 괘검 끝에서 불꽃이 일었다. 그러자 철시들이 튕겨져 올랐다. 하지만 이번에는 철시가 끝이 아니었다.
“오라!!!”
만우가 두 눈을 부릅뜨면서 재밌다는 듯 소리쳤다. 그러자 마치 그림자에서 솟아난 것처럼 장검들이 만우를 향해 날아들었다. 차자자장!!!
“크읏!”
만우와 검이 부딪친 자들이 신음소리를 내면서 뒤로 비척거리며 물러섰다. 그런데 만우를 공격한 것은 한 명이 아니었다.
휘리릭! 휙! 만우의 사혈을 노리고 사방에서 검이 짓쳐들었다. 그 때문에 만우는 입맛을 다시며 후속타를 먹이지 못하고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마치 각자의 공격이 서로를 지키는 것처럼 대단히 유기적이었다. 쩌엉!!! 그렇게 뒤로 연신 물러나던 만우의 눈이 커졌다. 개중 가장 강맹한 공격이 날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절묘한 것인지 만우가 검을 들어 올리지 않고서는 피할 수 없었다.
“크윽!!”
만우의 검이 짜르르 울렸지만 오히려 뒤로 물러서는 것은 검은 피풍의를 뒤집어 쓴 소사각주인 척준영이었다. 척준영의 눈가에 난처함이 서렸다.
‘고수다.’
인매골에 들어간 동군영과 만우 일행을 보고 사람시장에서 노비를 사기 위한 이들로 착각해 덮친 소사각이었다. 그런데 일개 몸종인 줄 알았던 만우의 실력이 예상외였다. 소사각의 합공을 받고서도 오히려 피해를 본 것이 이쪽이었기 때문이다.
“제법이다.”
만우가 감탄하면서 뒤로 쑤욱 물러섰다. 만우는 그렇게 뒤로 물러서는 것 하나만으로 소사각의 검진을 파훼했다. 그러자 닭 쫓던 개처럼 소사각의 무인들이 멍하니 만우를 쳐다봤다.
“헌데 상대를 잘못 고른 것 같은데?”
맨 처음에 만우는 상대가 인매골을 지키는 쓰레기 무인들이라고 생각했다. 노예상인을 호송하고 다니는 무인들이 있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만우가 부딪쳐 본 결과 이들의 수준은 결코 그 쓰레기 무인들 수준이 아니었다.
“무슨 소리! 사람시장에 들어가려고 온 놈을 수행…….”
“아니. 그게 틀렸다.”
만우는 소사각주인 척준영을 보면서 빙긋 웃었다. 대쪽 같은 성품이 느껴지는 무인이었다. 그리고 만우는 이런 이들을 썩 싫어하지 않았다.
“이곳에 볼 일이 있어서 온 것은 맞지만…… 아마 그쪽과 똑같은 목표인 것 같은데.”
“……인매골 토벌?”
“비슷하지. 우린 조사차 온 것이고, 소탕할 수 있다면 소탕하는 것이고.”
척준영은 만우를 아래위로 훑어봤다. 척씨세가는 유서 깊은 유학자 가문은 아니다. 오히려 뿌리 깊은 무가라고 보는 것이 맞았다. 그래도 무반 출신의 선조들이 있기 때문에 양반 가문이다. 반면 만우는 평범한 무명천으로 된 옷을 입은 하인 복장이다.
‘실력은 제대로였으니…….’
척준영이 생각하기에도 만우의 실력은 일개 양반의 몸종이나 할 정도의 실력은 결코 아니었다. 소사각의 검진, 그러니까 척씨세가의 검진을 홀로 받아낸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미안하게 됐소.”
척준영은 만우에게 말을 높였다. 이놈 저놈 하기에는 만우가 보여준 실력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무인은 검으로 말하는 법이고, 그런 점에서 만우의 검은 이렇게 대접 받을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
“그럴 수도 있지. 다친 사람도 없으니 여기까지 하고.”
만우는 깔끔하게 괘검을 박달나무 지팡이 안으로 납검했다. 척준경은 군더더기 없는 만우의 납검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곡산 척가의 소사각주 척준영이라고 하오.”
“오. 척씨세가?”
만우가 두 눈을 빛냈다. 곡산 척가라면 요동 지방에까지 소문이 난 유명한 조선의 무가다. 요즘에는 중원에서도 거의 사라진 무사행을 꼬박꼬박 나오기 때문에 요동지방의 모용세가와 친분이 두텁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중원 안까지 진출한 적이 없기 때문에 중원 내부에서는 척씨세가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었다.
“만우라고 한다.”
만우가 포권을 취하며 예의를 취하자 척준영의 눈이 가늘어졌다.
“대국에서 오신 분이구려.”
“조선 사람이다. 단지 명에서 오래 살았을 뿐.”
만우의 말에 척준영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럼 이곳의 인신매매단이 어디로 갔는지 혹시 아시오?”
인매골의 노예상인을 잡기 위해 곡산에서부터 이곳까지 파견된 소사각의 무인들이다. 하지만 만우도 척준영과 입장이 똑같았다.
“아마 나와 함께 온 일행들이 무언가를 발견한 것 같은데…….”
호선이라면 이런 진법에서 능통할 것이 분명했다. 500년 동안 산 호랑이는 생각보다 더 많은 잔기술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만우는 아니었다.
“아마도 진이 깔려 있는 것 같은데? 진법에 대해 아는 사람 있나?”
만우는 척준영에게 평어로 일관했다. 하지만 소사각의 무인들 중 눈쌀 하나 찌푸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만큼 훈련이 완벽하게 되어 있다는 소리였다.
“우리 쪽에는 없소.”
척준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만우는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남은 방법은 한 가진데.”
“그게 무…… 윽!”
놀란 척준영이 뒤로 다섯 발자국이나 움직였다. 만우에게서 폭발적인 기세가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척준영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베어버리는 수밖에.”
이런 진법 따위로 만우를 속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면 그들은 큰 오산이다. 만우의 검이 이런 진법을 유지하는 기운을 베어버리지 못할 리 없었다. 서거거걱!!! 만우의 허리춤에서 한 줄기 빛살이 허공을 관통했다. 만우가 검을 허공에 휘두른 탓이다. 척준영은 순간적으로 만우에게서 느껴진 소름 끼칠 정도의 강함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정도일 줄은…….’
만우가 강하다는 것은 짐작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 했다. 척준영은 부르르 떨리는 손을 붙잡았다.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붙어보고 싶다.’
곡산 척가의 무인들이 그토록 높은 실력을 쌓을 수 있었던 데에는 이 끝 모를 호승심과 투쟁심이 있었다. 그들은 결코 강자를 보고서도 투지가 꺾이지 않았다. 그 때문에 많은 제자들이 무사행에서 목숨을 잃기도 하지만, 그만큼 많은 고수들이 탄생하기도 한다. 파아앗!!! 만우의 검이 허공을 가르자 무언가 서컥하고 잘려나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오감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던 자연의 기운들이 싹 날아갔다. 만우는 가리고 있었던 눈을 푼 것 같자 후련하다는 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강하시군요.”
척준영은 만우를 보면서 말했다. 만우가 척준영을 보고서는 씩 웃어 보였다. 그런데 그때, 만우의 얼굴이 삽시간에 썩어 들어갔다.
“혈향. 피 냄새가 난다.”
주변에서 피 냄새가 났다. 그것도 희미한 피 냄새가 아니었다. 강한 피냄새였다. 누가 방금 다쳐서 흘린 피에서 난 냄새거나,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죽었을 때, 전장 같은 곳에서 나는 냄새였다.
“이건…….”
주변을 살피던 만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만우는 허리를 굽혀 땅에 떨어진 것을 주워 들었다. 피가 묻은 유척이다. 그리고 유척은 동군영이 한양을 떠나면서 왕에게 받은 하사품이다.
“호선이 있는데도 당했다고?”
만우의 시선이 핏자국이 난 길을 따라 움직였다. ***
“이거면 아주 좋은 진상품이 되겠어.”
캬아아악!!! 카흐흐응!!! 인매골의 촌장이자 인신매매단의 대행수인 김충이 흐흐거리며 웃었다. 그는 주술이 들어간 굵은 줄에 묶여 발버둥치는 산채만한 백호를 보고서는 씩 웃었다.
“사람으로 둔갑한다고 해도 내 눈을 피해갈 성 싶으냐?”
[이노오오옴!!!]
크허어어엉!!! 집채만 한 크기의 백호가 노성을 터뜨렸지만 김충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그것을 보면서 동군영은 헐떡거리는 숨을 참고는 눈가를 찡그렸다.
‘함정이었다니.’
설마 인신매매단의 대행수라는 김충이 호선을 포획할 수 있을 정도의 주술사일 줄은 몰랐던 것이 큰 패착이었다. 이놈들은 방매와 호선을 노린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호선을 노렸다.
“조 대감이 아주 좋아하겠어. 억만금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 분명해.”
김충은 호선을 보면서 입맛을 다셨다.
“500년이나 묵은 놈이 등선하지 못 했다면, 네놈도 그런 놈들이구나. 낙선(落仙)!”
김충이 재밌다는 듯 낄낄댔다. 한참을 발버둥치던 호선이 축 늘어졌다. 그런 호선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동군영의 귓가에 호선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미안합니다. 이 줄이 보통 줄이 아니라…… 도저히 빠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처음부터 호선을 노리고 있던 놈들이었기 때문에 준비가 완벽했다. 주술이 걸린 천잠사로 호선을 묶어놨기 떄문에 호선은 움직일수록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나리. 괜찮으세요?”
동군영이 옆을 쳐다봤다. 동군영은 배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놈들이 단검으로 동군영의 배를 찌른 것이다.
“괜찮…… 쿨럭.”
동군영의 입에서 핏줄기가 솟아올랐다. 방매가 놀라 무릎을 꿇은 채 동군영의 옆으로 다가왔다.
“나리. 기대세요.”
호선이 붙잡힌 뒤 방매를 지키려다가 칼을 한 대 맞은 동군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군영은 죽지 않았다. 이놈들은 사람을 괴롭히고 고문하는 데는 모두 전문가였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단검은 동군영의 장기를 하나도 건드리지 않고 살가죽만 찔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