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8. 조우(3)2019.07.20.
‘떨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만우는 피식 웃었다.
“이곳은 저희 정의대가 맡겠습니다.”
정의대란 소리에 만우는 더욱 웃음을 참지 못했다. 무림맹의 정의대였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척씨세가(拓氏世家)의 무사가 망설이는 목소리로 답했다.
“부탁드립니다. 대협.”
정의대와 척씨세가 사이에는 이미 모종의 관계가 있었던 듯 싶었다. 만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의 정의를 수호한다는 정파(正派)는 이래서 좋았다. 정의와 법을 수호하기 때문에 다른 이들의 호감을 사기가 쉬운 것이다.
“교 선배.”
“호오. 무림맹의 개들이구나.”
검진의 압력이 옅어지고 정의대가 그 자리를 대신하자 교수의 얼굴이 밝아졌다. 척씨세가는 상대하기가 불편하지만 정의대는 아니었다. 어차피 정의대는 정파의 개들. 그런 놈들을 쳐죽이는 것에 교수가 눈 하나 깜박할 리 없었다.
“한번 해보시렵니까?”
“척씨세가 놈들이 무시한다고 해서 네놈들도 날 무시할 셈이냐?”
교수의 두 눈에서 살기가 폭사했다. 척씨세가의 무인들은 이미 자리를 뜬 듯 그들의 기세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까다로운 놈들이로고.’
교수는 척씨세가의 검진이 주는 그 끈적함을 떠올리며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지지 않기 위해 공력을 내뿜었지만 척씨세가의 검진은 그 안에서 버티는 것만으로도 공력을 소모하게 만들었다. 대체 이 무슨 해괴망측한 검진이란 말인가. 남궁세가의 천왕검진도, 무당검수나 매화검수의 검진도 이런 효과를 발휘할 수는 없었다. 고려무신(高麗武神)의 후예가 아니라면 설명이 되지 않는 검진이었다.
“그전에…….”
교수의 두 눈에 만우의 뒷통수가 그대로 들어왔다. 하지만 교수는 섣불리 달려들지 않았다. 아까 전에야 분노에 눈이 팔려 달려들었다고는 하지만 무언가 께름칙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곳은 엉망진창이 되어 있는데 저기만 멀쩡하다는 것도 그랬고, 이 난리에도 뒤를 한 번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이 더욱 그랬다. 저건 운이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아무리 기감을 확장시켜 훑어봐도 그저 그런 놈팽이일 뿐이었다. 그런 놈이 자신의 눈이 훼까닥 돌아가게 만든 미녀(방매)를 옆에 끼고 있었다.
“죽이지는 않겠지만, 하늘이 높은 줄은 알게 해줘야 겠구나.”
만약 상대가 반박귀진(返樸歸眞)에 다다른 초고수라면 모르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 정도의 고수는 무림십좌에만 있었다.
‘설마…….’
문득 검주(劍主)가 조선으로 향했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지만 교수는 아주 치명적으로 낮은 그 확률은 머릿 속에서 지워버렸다. 꽈릉!! 그에 교수의 두 손이 묵빛으로 물들며 거센 굉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만우의 뒷통수를 향해 교수가 주먹을 내질렀다. 꽈앙!!!
“꺄아아악!”
“으, 으아아악!!!”
교수의 철권이 그대로 만우의 뒷통수에 작렬했다. 그 무시무시한 기세에 동군영과 방매가 눈을 가리면서 비명을 내질렀다. 만우의 머리가 수박처럼 깨져나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허, 허억…… 이 반탄력은……. 아니…… 호신강기(護身剛氣)라니…… 그러면…….”
우드득!! 그와 함께 교수의 오른손에서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만우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고개를 옆으로 돌려 뒤를 쳐다봤다.
“허, 허어어어억!!!!!”
만우에게 기세 좋게 철권을 내질렀지만 교수의 철권은 만우의 호신강기 앞에 허무하게 막혔다. 거대한 폭음이 바로 그 증거였다. 그리고, 고개를 돌린 만우의 얼굴을 확인한 교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와 함께 교수가 비틀거리면서 뒤로 물러났다.
‘주, 죽을 수도 있다.’
교수는 자신의 두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이 자리에 있으면 안 될 사람이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제야 교수는 모든 것이 이해가 갔다. 이런 난리통에도 저 탁자만 멀쩡할 수 있었던 이유. 그리고 태연하게 자신을 무시하면서 밥을 먹고 닭다리를 뜯을 수 있었던 그 여유의 원천. 검주 만우! 슈가악!!!! 안에서 일어난 폭음과 비명소리에 바깥에서 한 줄기 강맹한 장력이 교수를 향해 폭사됐다. 만우는 그 모습을 보고는 피식 웃으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직 식사가 다 끝나지 않았다.”
동군영과 방매가 멀쩡한 만우의 목소리에 눈을 살며시 떴다. 그리고 만우가 멀쩡하자 그들은 허탈한 한숨을 내쉬면서 만우를 쳐다봤다.
“그러니 소란을 피우려거든 나가서 해라.”
“…….”
만우는 제법 많은 공력을 쏟아부어 만든 호신강기가 찌르르 울렸던 것을 떠올리면서 철권 교수를 제법이라 생각했다. 아무리 만우라고 해도 완숙한 초절정에 화경지경을 목전에 둔 교수의 공격을 파리를 쫓아내듯이 막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원래라면 그대로 맞아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교수의 실력을 보고 싶었던 것이 우선이었다.
‘손속을 겨뤄본 적이 없으니까.’
그 결과 교수라면 확실히 탐이 나는 상대였다. 적절히 호승심도 불러일으킬 정도의 강자였고 죽지 않고 살아남는다면 확실히 화경에 들어설 강자로 보였다.
‘조선제일검이란 녀석보다 나으니까.’
적어도 지금의 교수는 지금의 권희달보다 나았다. 권희달의 경지가 높을지는 모르지만 권희달은 감령이나 필두, 괴검과 동수를 이루는 정도였다. 교수는 그들보다 반 수에서 한 수 정도 더 뛰어났다.
“찌릿하네.”
만우는 교수의 철권을 정면에서 막아낸 댓가로 단전이 찌르르하게 울리는 것을 느끼면서 피식 웃었다. 펑!! 교수는 만우의 호신강기를 제대로 후려친 결과로 오른 팔에 금이 갔다. 그랬기 때문에 교수는 굳은 얼굴로 뒤로 물러서면서 장력을 후려쳤다. 처저적!!! 그와 동시에 창을 통해 만우에게 익숙한 이들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교수란 강적을 눈 앞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만우를 알아보지 못 했다.
“무량수불.”
매화극검 검인이 도호를 읊으며 교수를 쳐다봤다. 그런 검인의 눈가에 이채가 스쳐지나갔다. 교수의 오른팔이 정상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철권 선배님.”
검인이 교수를 향해 목례를 했다. 하지만 검인의 손은 검병 위에 올려져 있었다. 언제라도 출수를 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곡산 척가를 조심하라고 했던 건 바로 선배님이십니다. 그런데…… 정녕 피를 보시려 했던 것입니까?”
교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교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은 정의대나 척씨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저 괴물이 왜…… 아니, 정말 소문대로 괴물이란 말인가? 아무리 화경지경이라도…….’
철권을 정면으로 막는 것은 화경이라도 불가능하다 생각했다. 하지만 만우는 그것을 해냈다.
‘기린대 전원과 합격술을 펼치지 않는 이상…….’
교수는 만우를 상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생각했다. 하지만 다행인 점은 만우가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는 점이었다.
‘다행? 크큭.’
교수는 쓰게 웃었다. 하지만 그것이 사파의 본 성격이기도 했다. 승리할 수 있는 싸움만 한다. 승리할 수 없다면 비굴해 보이는 한이 있더라도 그 자리를 피한다. 그리고 실력을 쌓아 나중에 복수한다. 하지만 교수는 자신 정도 되는 사람이 그래야 될 것이라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 이 세상은 넓고 기인이사는 많았다.
‘하필이면 검주라니.’
교수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고는 몸을 돌렸다. 더 이상 싸우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철권이라는 사람이 꼬리를 말고 도망가다니. 김이 새는구려.”
팽대수가 그런 교수를 보면서 들으라는 듯 말했다. 교수의 어깨가 부르르 떨렸지만 교수는 분노를 참았다. 지금은 살아남는 것이 우선이었다.
‘검주의 심기를 거스를 필요는 없다.’
어차피 조선에 온 이유는 따로 있었다. 무림맹의 개들 앞에서 등을 돌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다.’
교수는 그러기 위해 지금의 굴욕은 참아낼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금이 간 오른팔이 너무나도 아팠다.
“대주. 철권이 이상한 것 같습니다.”
제갈명이 검인에게 말했다. 검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오른손이 이상한 것 같았소.”
“하지만…… 이상합니다. 분명 폭음이 터졌길래 일이 터졌다 생각하였건만…….”
그런데 그때 소령이 어디론가 달려가더니 웬 남정네의 뒤에서 목을 끌어안으면서 매달렸다. 그것을 본 제갈명이 당황해 소리쳤다.
“소, 소 소저. 지금 무슨 짓을…….”
“……검주??”
소령의 이상행동을 본 검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딘가 익숙한 뒷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 소령이 볼을 부비적거리면서 말했다.
“오라버니! 조선에 오면 오라버니를 볼 줄 알았어요. 얼마나…….”
그러던 소령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만우의 옆에 붙어 있는 방매를 쳐다봤다. 방매는 자신을 쳐다보는 소령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이 만두 같이 생긴 건 뭐야?”
방매를 본 소령의 입에서 충격적인 말이 튀어나왔다. 난데없이 한 대 말로 얻어맞은 방매의 두 눈에 쌍심지가 돋았다. 스윽. 그런데 그때 만우가 일어섰다. 소령을 그대로 매단 채였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리자 정의대에서 헉하고 헛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만우는 쓰게 웃으며 자신을 환한 얼굴로 쳐다보는 검인에게 말했다.
“이렇게 일찍 만날 줄은 몰랐네. 검인.”
“조선에 오면 자네를 만날 줄 알았어. 역시 자네와 우리 사문은 무언가 연결된 끈이라도 있는 모양일세!!”
만우는 자신을 불편한 경악을 담아 쳐다보는 정의대 대부분의 얼굴을 보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이 친구들한테는 별로 좋은 기억들이 없을걸?”
“이 찧다 만 인절미 같이 생긴 게!!!!”
만우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방매와 소령이 말싸움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만우는 적의 어린 정의대의 시선과 검인의 반갑다는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나…… 나는??”
갑작스런 상황에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홀로 남겨진 동군영만이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
“그래서. 역졸?”
“그래.”
만우는 검인과 술잔을 기울이며 웃었다. 오랜 기간 중원을 떠돌았지만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검인 한 사람밖에 없었다. 만우가 검인과 친해진 이유? 간단했다.
[네가 내 목숨을 구해줬으니, 나도 나중에 언젠가 한 번은 널 위해 목숨을 걸겠다.]
당시 무림을 공포로 물들였던 무림공적 환혼색마(換魂色魔)의 화산파 토벌대의 일원으로 정주 부근에서 죽을 위기에 처했던 검인을 구해주고 난 뒤 검인이 만우에게 한 말이었다. 당시 만우는 정사지간이란 소리를 들으며 유람행을 다닐때 였는데 그 말이 만우에게 대단히 신선했다.
[목숨?]
[그래.]
그 한 마디로 만우는 검인과 친우가 되었다. 지금까지 만우를 보고 사람들이 보인 반응은 두 가지였다. 그의 무력을 두려워하거나 아니면 탐내거나. 그랬기 때문에 만우의 무력이 아니라 만우를 위해 목숨을 걸겠다는 말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실제로 검인만이 만우를 만우의 지위나 별호와는 별개의 사람으로만 봐줬다.
‘더 있긴 하지.’
만우는 피식 웃었다. 생각해 보니 검인뿐 아니라 두 명이나 더 있었다. 소령과 방매. 만우는 아직도 둘이 싸우는 소리가 귀에 들려오는 것 같아 몸을 부르르 떨고는 값싼 탁주를 털어넣었다.
“그래. 하오문 때문에 온 건가?”
“역시 알고 있었군. 하오문이 한양에 벌써 도착한 모양이야.”
검인이 술잔을 들면서 만우에게 말했다. 만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우와는 별로 상관이 없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언제나 무림에 출현한 장보도는 시산혈해(屍山血海)를 만들어냈지. 무림맹은 무림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그 장보도의 귀물이 무림으로 들어오지 않기를 바라네.”
“무림맹의 노인네들이야 변화를 두려워하니까.”
“…….”
검인은 아니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이 바로 앞에 앉아 있었다. 검주 만우. 중원인, 즉 한족(漢族)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얼마나 무시를 당했던가. 게다가 만우는 그냥 중원을 유람하고 있을 뿐이었는데 우르르 몰려가 명예를 회복하겠다며 덤벼든 것도 바로 정파였다.
“그래서. 없앨 셈인가?”
“물론이네.”
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우는 피식하고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