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5. 중원에서 온 손님(4)2019.07.09.
“하지만 자네는 기(氣)라는 걸 사용하는 것 같던데, 나 같은 일반인에게는…….”
“아닙니다.”
만우는 고개를 저었다. 동군영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기를 사용하지 못하고, 순수하게 육체로만 싸운다면 근육이 크고 덩치가 큰 사람이 유리할 것이라고.
“이게 중요합니다.”
만우는 자신의 머리를 두드렸다. 동군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나리는 문과급제를 하셨다고 했죠?”
만우의 말에 동군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급제를 했다고 해서 뿌듯한 표정은 아니었다. 그냥 해야 할 것을 당연히 했다는 얼굴이었다.
“그럼 여쭙겠습니다.”
만우는 동군영에게 말했다. 동군영은 곁눈질로 팔근육이 우락부락한 무인을 힐끗 쳐다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무조건 많이 외울 줄 알면, 공부를 잘하는 것입니까?”
“……아.”
만우의 말에 동군영은 단번에 이해했다. 동군영의 이해력이 흡족했는지 만우기 씩 웃었다.
“그러니까, 덩치가 크다고 해서 잘 싸우는 것은 아니다?”
“이해가 중요한 법입니다.”
만우는 눈을 가리켰다.
“상대방이 어떻게 움직일지, 어디가 먼저 움직이는지 정확하게 볼 수 있는 눈.”
그러고는 다시 머리를 가리켰다.
“상대방의 심리를 읽어낼 수 있는 머리.”
만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압도적으로 강하면 그런 것도 소용 없겠지만 나리께서 말씀하신 그 수준에서는 대부분 이 두 가지로 갈립니다.”
물론 육체적인 차이가 결과에 영향이 아예 없다고 하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전투는 체격이 상대보다 크다고 해서 유리한 것이 아니었다. 경험, 심리싸움 등 다양한 변수에 의해서 달리지기 때문이었다.
“그…… 기라는 거. 나도 좀 배워볼 수 없나?”
동군영이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만우가 피식 웃었다. 처음부터 동군영이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이 그것이 목표란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풍문으로 들어서 알고는 있네. 함부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제가 지금부터 천자문부터 시작해 공부를 하면 과거급제를 할 수 있습니까?”
만우는 동군영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허리를 잘랐다. 하지만 만우의 말에 동군영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단박에 이해가 가는 설명이었다. 할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동군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정도로 힘든가?”
“몸으로 하는 공부와 머리로 하는 공부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둘 다 몸을 사용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동군영은 쩝하고 입맛을 다셨다. 그때, 만우가 재밌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재밌는 걸 보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리.”
“그래?”
지나가던 주모가 이상하다는 듯 동군영과 만우를 쳐다봤다. 분명 동군영은 양반이고 만우는 평민인데, 마주보고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우가 말만 높이고 있었을 뿐, 사실 서로 마주 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만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만우의 말에 동군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재밌는 거? 여긴 객주이지 않은가.”
동군영은 그렇게 말하면서 배를 문질렀다. 말하다보니 시장기가 돈 것이다. 하지만 만우는 그저 웃어보일 뿐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도란도란 하고 계세요?”
그때 방매가 쏙하고 자리에 앉았다. 청포물로 머리를 감은 것인지 은은한 청포 냄새가 올라왔다. 만우는 뜨거운 물로 목욕해 얼굴이 발개진 방매를 보면서 픽 웃었다.
“왜 웃어?”
“애 같아서.”
“애라니!”
방매가 버럭했다. 동군영이 앞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그렇구나. 돈 밝히는걸 보면 세속이 쩔어 있는 것 같았는데. 씻겨놓고 보니 영락없는 여아였어.”
“나리까지 왜 그러세요!”
방매가 볼을 살짝 붉혔다. 부끄럽다는 뜻이었다. 그때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밥과 백숙, 그리고 사기병에 담긴 탁주가 나왔다.
“여깄습니다. 맛있게들 드세요!”
“목욕에 탁주라. 신선 노름이구만.”
동군영이 히죽 웃었다. 술을 먹게 될 줄 몰랐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때 만우의 시선이 방매에게로 향했다. 방매가 똥 마려운 개처럼 끙끙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넌 또 왜 그래?”
“이거…… 비싸. 너무 과소비야.
“국밥과 백숙, 탁주밖에 없잖아.”
방매의 말에 만우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방매는 고개를 저었다.
“미쳤어? 아껴야 잘 살지. 식은밥 한 덩이에 뜨뜻한 물 한 그릇이면 되는데…….”
“괜찮아. 너보고 돈 내라고 하는 것 아니니까.”
동군영이 방매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자 방매가 동군영을 쳐다봤다.
“진짭니까?”
“그래. 내가 사는 것이다. 이렇게 먹어줘야 몸을 추슬러서 다시 출발하지 않겠느냐.”
“와아아!!!”
방매가 박수를 짝짝 쳤다. 그리고서는 야무지게 두 팔을 걷어부친 방매가 백숙의 다리를 쭉 찢어 입에 넣었다. 만우는 그런 방매를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지만 동군영은 크게 웃었다. 쩝쩝쩝. 둘 다 이런 뜨거운 음식이 오랜만이었기 때문에 기꺼운 표정이었다. 만우도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씩 웃었다.
“호선은?”
만우가 국밥을 크게 떠서 입에 한 술 넣어 씹어 삼키고는 방매에게 말했다. 그 순간, 객주가 술렁이는 것이 느껴졌다.
“우와! 미녀!”
“저런 미녀가 의주에 있었나?”
“가서 말이나 한번 걸어보게나!”
만우가 고개를 들어 사람들이 힐끔거리고 있는 곳을 쳐다봤다. 그러고는 만우의 눈이 커졌다.
“왜 고양이로 안 변하고…….”
옆에서 방매의 풀 죽은 목소리가 들렸다. 만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호선이 나타났는데,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객주의 2층에서 사뿐거리는 발걸음으로 내려오는 호선은 진짜 신선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기품이 있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냥 인간이 아니라 빼어난 미녀의 외양이었기 때문이다.
“풉!!!”
앞에서 국밥을 먹던 동군영이 입에 있던 분비물을 앞으로 내뱉었다. 호선이 아름다워서가 아니었다. 거대한 백호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놀란 것이었기 때문에 지금 저 모습에 심하게 거부감이 드러난 것이다.
“켁, 켁켁.”
“에이 드럽게!!”
만우가 순간적으로 욱 했다. 동군영의 입에서 나온 분비물들이 하마터면 묻을 뻔했다. 반사적으로 펼친 호신강기가 아니었다면 만우의 옷이 더러워졌을 것이다.
“에이…….”
만우는 눈앞에서 주르륵 흘러내리는 밥풀떼기를 보면서 인상을 썼다. 고작 국밥의 분비물을 막는 데 호신강기가 쓰였지만 만우는 깨끗하게 닦은 몸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먼저 드시고들 계셨네요?”
그때 호선이 사뿐거리는 발걸음으로 만우가 앉은 자리로 걸어와서는 옆에 앉았다. 동군영의 어깨가 바짝 얼어붙는 것이 느껴졌다.
“어머. 너무 긴장하지 마시라니까요. 제가 뭘 잡아먹기라도 합니까, 나리?”
호선이 나른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자 주변의 상인들과 남자들이 술렁이는 것이 느껴졌다. 교태 그 자체였기 때문이었다. 호선은 사람들과 부딪치면서 수백 년을 살아왔다. 영성을 가진 후부터는 인간과 계속해서 함께했기 때문에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겉모습을. 더불어 그녀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얻는 것을 상당히 좋아하는 편인 듯했다. 따악!!! 하지만 곧바로 호선의 머리통에 만우의 숟가락이 작렬했다.
“꺄악!”
호선의 두 눈은 약간 처져 있었다. 그런데 눈이 워낙 커서 그 눈에 물기가 올라오자 그렇게 안쓰러워 보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만우의 표정에는 일말의 자비도 없었다. 이게 사람이 아니라 500년 묵은 호랑이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 저놈!”
“피도 눈물도 없는 놈! 어떻게 저런 미녀를!!”
“에잉!!!”
주변에서 만우의 만행을 보고 성토하는 목소리가 튀어나왔지만 만우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누가 함부로 인간으로 둔갑(遁甲)하라고 했지?”
“어쩔 수 없었어요. 방매 저 계집애가 절 놔두고 갔단 말이에요.”
호선이 억울하다는 듯 만우의 숟가락을 슬금슬금 피했다. 하지만 만우의 숟가락이 다시 한번 작렬했다. 따악!
“꺄악!!!”
호선이 머리를 움켜쥐었다. 대체 알 수가 없었다. 웬만한 철검으로 내리쳐도 생채기조차 나지 않는 것이 호선이다. 둔갑술을 썼다고 해서 그 내구도가 어디로 갈리 없었다. 그런데 만우의 숟가락은, 나무로 만든 것이 분명한 그 숟가락은 호선의 골을 울리게 만들었다.
“만년한철로 만들어지거나 만련정강이 아닌 다음에야…….”
호선이 중얼거리면서 이마를 문질렀다. 눈이 홱 돌아갈 정도의 미녀가 그러고 있는 모습은 그것만으로도 볼만했다.
“변명하지마. 그러면 고양이 모습으로 나오면 되지.”
“맞아!!!”
방매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호선이 그런 방매를 흘겨봤다.
“내가 네 인형이니?”
방매의 눈치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니었다. 호선은 500년이나 살았지만 신선이 되지 못해 악령이 될 처지에 처한 호랑이였다. 하지만 만우 앞에서 꼼짝도 못 한다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그 때문에 방매는 호선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맨 처음 호선에게서 받은 충격이 너무 컸던 동군영은 여전히 호선을 보고도 심약했다.
“끄윽.”
호선 때문에 국밥을 잘못 삼키기라도 한 것인지 동군영이 불편한 트림을 내뱉었다. 만우는 그런 동군영이 트림을 하다가 밥풀을 뱉는 것을 보고는 인상을 찡그렸다.
“더럽잖습니까!”
“이건 내 잘못이…….”
동군영이 억울함에 뭐라고 하려다가 어깨를 움츠렸다. 만우는 호선을 쳐다봤다.
“다시 고양이로 돌아가.”
“싫어요! 저도 인간 모습이 더 좋단 말이에요.”
호선은 그래도 지난 달포 동안 같이 동행했다고 만우에 대한 공포심을 많이 희석시켰다. 억지로 호선을 끌고 오기는 했지만 만우가 별다른 위해를 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
하지만 만우가 의미심장하게 웃자 호선의 얼굴이 불안함으로 물들었다. 이 조선에서는 적수가 없다 생각했는데 만우는 그런 호선을 웃으면서 때려잡을 수 있는 존재란 생각이 문득 든 것이다.
‘아냐. 도망가면 아무리 만우 님이라도…….’
그러고 보니 만우의 경공은 본 적이 없었다. 그냥 달려들었다가 일방적으로 힘의 차이를 느끼고 굴복했을 뿐이다.
“난 책임 못 진다?”
실제로 만우는 호선을 휴대용 영약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어차피 인간을 죽인 업보가 너무 커서 악령이 될 놈이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묵은 영물이 악령이 되면 그 자체만으로도 자연재해에 준하는 재앙이다. 뭐, 만우 정도의 실력자이거나, 궁에서 봤던 조선제일검 정도라면 제거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이 작은 조선에 그 정도로 많은 실력자가 있을 리 없다. 초절정도 몇 없는 곳인데, 호선 정도 되는 놈은 중원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영물이다. 그것도 오래 묵은 잉어나 거북이 따위가 아니라 무려 호랑이가 아니던가.
“무슨 책임을…….”
호선이 뒤늦게 만우에게 물었지만 그보다 먼저 객주의 문이 펑하고 터져나갔다. 호선으로 쏠려 있던 사람들의 시선으로 펑하고 터져나간 객주의 문으로 향했다. 만우가 젓가락을 들어올려 날아오는 문의 나무 파편들을 젓가락으로 잡아챘다.
하지만 다른 상인들이나 사람들은 나무 파편에 얻어맞고 비명을 내질렀다. 객주 안이 삽시간에 난장판으로 변해버렸다. 촹!!! 그런 난장판 너머로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퍼졌다. 만우가 젓가락으로 잡은 나무 파편들을 땅바닥에 내던지면서 눈을 동그랗게 뜬 동군영을 보고 말했다.
“재밌는 걸 볼 수 있다하지 않았습니까?”
“그 재밌다는 게…….”
“싸움 구경이지요.”
만우가 이를 하얗게 드러내고 웃었다. 동군영은 무슨 미친놈을 다 보겠다는 눈으로 만우를 쳐다봤다. 평생을 책만 읽었던 동군영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만우의 머리 구조였다.
“대체 우리가 무얼 했다고…….”
“보물은 힘이 있는 자의 손에 들어가야만 하는 법! 보물에 눈이 먼 네놈에게 이 어르신의 가르침을 내리는 것뿐이니라!!! 크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