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4. 중원에서 온 손님(3)2019.07.06.
“곰탱이. 시끄럽다.”
“곰탱이? 내 이름은 웅풍이다!”
정파에서 신력을 타고나는 가문으로 하북팽가(河北彭家)가 유명하다면, 마교에는 곤명웅가(昆明雄家)가 있다. 곰의 힘을 타고 났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곳으로 웅풍은 곤명웅가의 소가주였다. 이곳에 있는 일곱, 혈세천마의 아들인 마얼(魔孼) 주창까지 포함한 여덟 명은 전부 마교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장로나 가문의 직계였다. 일패(一覇) 혈세천마의 아들 마얼 주창. 마교의 지낭(智囊)으로 마군자(魔君子) 마원의 아들인 파천서생 마일. 혈성(血星)을 타고나 천마조사와 자웅을 겨루었던 고대무학(古代武學) 중 하나인 혈마공(血魔功)을 익힌 나찰사화 옥령. 산을 뽑아 던질 수 있을 정도의 신력을 가지고 있다는 일산(一山) 웅풍. 실전무학의 대종사인 낭황(浪皇)의 진전을 이어받은, 웅풍에게 핀잔을 준 광호검(狂虎劍) 기무. 몽골 황족 출신으로 살풍대와 함께 마교에 투신한 악궁(惡弓) 테무르. 태상호법의 제자로 차세대 호법으로 점쳐지고 있는 폭혈도(暴血刀) 위문. 마존과 곡왕의 공동전인이자 대쪽 같은 성품으로 유명한 마정(魔正) 백영. 중원에서 돌아다녔다가는 정파 무림인들이 눈에 불을 켜고 죽이기 위해 달려들 여덟 명이 죽립을 벗고 모습을 드러냈다.
“후아.”
“이제 좀 살 것 같군.”
웅풍과 테무르가 죽립을 벗고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이렇게 정체를 숨기지 않고서는 조선까지 오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대주님.”
파천서생은 창백한 피부에 병약한 인상의 미남자였다. 그는 곧게 뻗은 검미에 남자다움이 물신 풍겨지는 주창에게 말했다.
“일단…… 정보가 필요하겠구나.”
“예.”
파천서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주창은 눈을 빛냈다. 그들이 교주인 혈세천만의 명을 받아 십만대산으로부터 멀고 먼 이곳, 조선까지 온 이유는 단 하나였다. 검주 만우의 목.
“허나 이 조선에서 정보를 구하는 것이 쉽겠느냐?”
“풍문으로 들은 바에 의하면 이곳, 조선에는 무림이 없다 들었습니다.”
“맞다. 나도 그리 들었다.”
주창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파천서생은 슬며시 웃었다. 막막한 상황임에도 파천서생은 다 방법이 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방법이 있는 것이냐?”
주창이 궁금해하며 물었다. 그러자 파천서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힘이 있는 자에게는 그만한 책임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절대로 조용히 살 수 없다는 것, 아시지 않습니까?”
힘이 있는 곳에 소란이 벌어진다. 그것은 당연한 이치였고 세상의 진리였다. 힘이 있으면 당연히 사건과 사고가 뒤따른다.
“검주 만우라면, 그에 대한 소문의 절반만 진실이라 한다면.”
검주 만우가 홀로 마교에 걸어들어와 혈세천마에게 비무를 신청하였지만, 마교주인 혈세천마가 만우를 회피했다! 이 말도 안 되는 소문이 진실일 것이라고 투귀대는 믿지 않았다. 혈세천마가 누구던가. 사적으로는 그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투귀대주 주창의 아버지인데다가 공적으로는 천마신교의 하늘이고 신이었다. 하지만 그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런 소문이 날 정도로 검주 만우가 대단하다는 뜻일 것이다.
“어떻게든 그자와 관련된 소문이 나 있을 것입니다. 굳이 하오문이나 개방, 혹은 본교의 만안대(萬眼代)가 없다고 하더라도 정보를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렇겠지.”
주창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우의 소문이 어디까지 진실인지는 모르나, 무림십좌의 일 좌를 차지한 고수임에는 틀림 없었다. 무림십좌는 전부 화경지경에 다다른 초극강의 고수들. 하지만 그런 만우를 상대하러 감에도 투귀대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떠올라 있지 않았다. 투귀대주 마얼 주창 덕분이다!
“근처에 가까운 곳으로 가자.”
산적들의 시체 속에서 혈세천마가 하사한 마교의 보물인 마련검(魔鍊劍)이 보이지 않는 발이라도 달린 것처럼 날아왔다. 허공섭물(虛空攝物)! 그것도 무려 일장이나 떨어져 있는 거리에서 시전된 허공섭물이었다. 그런 주창을 보는 투귀대의 눈에 존경이 깃들었다. 마얼 주창. 그는 이미 화경에 도달한 고수였다. 천마신교가 보유한 네 번째의 화경의 고수. 투귀대는 확신했다. 아무리 검주 만우라고 하더라도, 그가 화경에 오른 고수라고 할지라도 주창과 투귀대라면 그의 수급을 취하는데는 무리가 없을 것이란 것을.
“가장 가까운 마을이 어디냐?”
“의주. 의주입니다.”
“가자.”
주창을 필두로 한 투귀대들이 혈향이 짙게 풍기는 학살이 현장에서 연기처럼 절정의 경공술로 꺼지듯이 사라졌다.
***
[으허허…… 으허어어어어…….]
“…….”
만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만우를 비롯한 동군영과 방매는 의주의 중심지에 위치한 가장 큰 객주에 짐을 풀었다. 돈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오문에서 뜯어온 여비가 만우에게 넉넉했고 동군영도 돈이 부족하지 않았다. 거기에 범골에서 만난 산적에게서 턴 것들 중 현금화할 수 있는 것들이 상당했다. 물론 방매는 징징댔지만 범골의 산적들을 턴 것은 만우가 없었다면 상상할 수도 없는 것들이었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객주에서 명과 조선을 오가는 상인들에게 몇 가지 물건들을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 돈으로 목욕물까지 사는 사치를 부린 만우는 벽 너머에서 동군영이 내는 소리에 인상을 찌푸렸다.
“나리, 시끄럽습니다?”
[이런 뜨신 물에 몸을 담그고도 이런 소리를 안 내면…… 커허어어!!! 그건 사람이 아니야!]
만우가 동군영에게 말을 먼저 놨기 때문에 동군영도 만우 앞에서 말로 차리던 격식을 벗어던졌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가서는 정말 만우가 때려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기 때문에 악을 쓰다 보니 양반이나 할 법한 말투를 유지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즉, 양반으로 태어나 평생을 양반답게 살던 그 껍데기를 만우를 만난 지 달포 만에 벗어던진 것이다. 그렇게 한참 동안 몸에 쌓인 여독을 푼 뒤 만우와 동군영은 객주의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객주의 1층에서는 여러 가지 요깃거리를 할 음식들을 팔기도 하고, 상인들이 정보를 교환하거나 물건 흥정을 하는 용도로도 사용했기 때문에 저녁이 다 되어가는 시간임에도 사람들로 북적였다. 이러다가 밤이 되면 노름판과 술을 같이 파는 주객으로 변할 것이다.
“방매는…….”
만우가 주변을 휘휘 둘러보면서 방매를 찾았지만 방매는 보이지 않았다. 동군영이 그런 만우를 툭 밀쳤다.
“원래 여인네들은 남자들보다 더 시간이 필요한 법이지. 앉자고. 배에 걸인이 든 것 같아.”
동군영이 씩 웃으면서 자리에 앉았다. 만우가 그런 동군영을 보고 픽하고 웃었다.
“차림새가 제법 어울립니다?”
만우가 존대를 쓰자 동군영이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내가 상놈 차림을 하고 다니는게 낫겠군. 자네의 존대를 들으니 닭살이 다 돋네 그려.”
동군영은 확실히 눈치가 빨랐다. 만우는 피식 웃었다. 동군영의 자질은 평범했지만 괜히 장원급제가 아니라는 듯 무언가를 배우는 속도가 빨랐다. 거기에 눈치도 빨라서 만우가 말을 높이자 바로 만우의 뜻을 알아챘다.
“그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나리. 어색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동군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생각해 보니 지금이 아니면 자네에게 이런 대접을 받을 일도 없을 것 같은데.”
“쩝…….”
만우는 입맛을 다셨다. 보는 눈이 있고 듣는 귀가 있으니 말을 조심하자는 뜻이었다. 만우가 입맛을 다시면서 손을 들었다.
“점소이!”
“여긴 점소이가 아니라 주모라네. 주모!!!”
동군영이 웃으면서 손을 들자 무명천 옷을 입은 여인이 쪼르르 달려왔다. 만우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걸 보면 확실히 이곳은 중원이 아니라 조선이 맞았다.
“국밥 두 개 주시고, 백숙도 하나 주시게. 탁주도 하나 주시고.”
“아이고, 알겠습니다. 나리.”
“아. 그리고 조금 있다가 여아가 내려오면 그 여아가 먹을 국밥도 하나 주시게.”
동군영은 능숙하게 주문을 하면서 은병을 건넸다. 저화(楮貨)를 당금의 조선 왕이 야심차게 밀어붙이고 있었지만 이런 곳에서는 은병이나 승포(升布)가 주로 쓰였다. 저잣거리라면 3승포나 4승포를 사용했겠지만, 이곳은 객주다. 그렇기 때문에 은병도 무리 없이 사용할 수 있었다.
“예, 나리.”
동군영의 거지 같았던 모습은 말끔하게 씻고 나오자 말끔하게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한양에서 출발할 때 만해도 병약해 보이던 동군영의 얼굴이 구릿빛으로 건강하게 빛나고 있었다.
“육포는 지겨워. 그렇지 않나?”
동군영이 만우에게 말했다. 만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식(美食)은 만우도 제법 즐겼다. 하지만 어릴 적 머슴 생활을 해서인지 웬만한 음식이 다 입에 맞았다. 동군영은 입맛을 다셨다.
“드디어 따뜻한 밥이라니. 내 살아생전에 국밥을 이렇게 기다려 보기는 처음이야.”
동군영이 희희낙락하면서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주변을 둘러봤다. 객주는 굉장히 다양한 기능을 한꺼번에 수행했다. 물건을 위탁받아서 판매하는 기능도 있었고 상인과 상인 사이에 무역 거래가 이뤄지기도 했다. 그 외에도 돈을 맡기고 되찾는 전장(錢場)의 역할도 했으며 잠자리도 제공했다. 거기에 물건을 위탁받아서 판매하면, 사는 사람으로부터 판매금액을 반드시 받아오는 역할도 했다. 그 대가로 객주는 수수료를 챙기거나, 마음에 드는 물건이 들어오면 그것을 선매(先買)할 수 있는 권리도 있었다. 거기에 관아에서도 이런 객주를 통해 세금을 징수할 수 있었으니 의주처럼 명이나 동래(東萊)처럼 왜(倭)와 교류가 활발한 곳에는 객주가 성황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보는 재미가 있었다.
“오. 저자들의 수준은 어느 정도인가?”
무예를 수련하는 것 같은 비슷한 걸 하다보니 무인들에 대한 궁금증이 생긴 모양이었다. 동군영이 한 쪽에 서 있는 이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들은 황금(黃金)이라 자수가 놓인 옷을 입고 있었는데 이 객주의 이름이 바로 황금객주였다. 그러니 황금객주 소속이란 뜻이었다. 즉, 저들은 황금객주 소속의 무인들로 위탁받은 물건의 판매 금액을 받아오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무인?”
만우는 동군영이 그들을 무인이라 부른 것을 듣고는 피식 웃었다.
“삼류. 아니면 그 이하. 파락호보다 조금 더 나은 정도?”
만우의 평가는 신랄했다. 동군영은 그들이 범상치 않아 보였기 때문에 눈을 크게 떴다.
“나리. 이걸 아셔야 합니다.”
만우는 무림인이라면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는 조언을 동군영에게 했다.
“이런 무림, 혹은 저자에서는 어린아이와 노인, 그리고 여자를 가장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동군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성균관 출신으로 유교를 배운 그는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었다. 무엇보다 공자의 가르침은 측은지심을 가장 강조하여 모름지기 위정자라면 측은지심의 마음으로 백성들을 아껴야 한다고 배웠다. 그런데 가장 약한 어린아이와 노인, 그리고 여자를 조심해야 한다니.
“아아. 무슨 생각하시는지 알 것 같습니다.”
만우는 쓰게 웃었다. 동군영은 무인이 아니었다. 그러니 무인의 눈높이에서 말을 해주는 것이 통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만우가 말하고 싶은 것은 딱 하나였다.
“겉모습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음?”
“겉모습에 상대방을 오판하는 순간, 검과 검이 오가는 전장에서는 그 찰나의 순간이 생사를 가릅니다. 그러니 상대방의 겉모습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황금객잔의 무인들은 전부 우락부락한 덩치를 가지고 있었다. 딱 봐도 근력을 기르는 수련을 많이 해 팔과 목이 돋보일 정도로 두꺼웠다.
“저런 겉모습에 말인가?”
누가 보더라도 힘깨나 쓸 것 같은 무인들이었다. 만우는 피식 웃으면서 스스로를 가리켰다.
“겉모습만 보기에, 누가 더 강할 것 같습니까?”
“…….”
만우의 적절한 비교에 동군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가 간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동군영은 만우에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