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1. 범골의 호선(號仙)(4)2019.06.25.
만우는 백호(白狐)를 보면서 비릿하게 웃었다. 반면 동군영과 방매는 뒤에서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자신보다 훨씬 거대해진 백호를 쳐다보고는 웃었다.
“네년도 오래 살았을 터이니 죽이지는 않으마. 대신…….”
푸화아아악!!! 만우의 괘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강이 점점 더 거대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검강의 크기가 백호의 몸이 절반이 넘을 정도로 커졌다.
“내 앞에서 이빨과 발톱을 드러낸 걸 후회하게 만들어 주마. 진심이다.”
“…….”
“…….”
사람이 호랑이로 변한 것도 믿을 수 없었지만 만우의 검강이 그렇게 커진 것도 믿을 수 없었다. 그 덕분에 사람들은 모두 목격했다. 모든 것을 씹고 찢어버릴 것처럼 포효를 내지르던 백호가 입을 꾹 다문 것을. 파앗! 백호의 몸에서 다시 휘황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흥!”
만우가 콧방귀를 뀌는 소리가 침묵만이 내려앉은 산채에 크게 울려퍼졌다. ***
“옛다. 이거나 먹어라 호랑아.”
“…….”
철푸덕. 만우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사슴의 뒷다리를 크게 썰어 호선에게 던졌다. 호선은 황당한 눈으로 자신의 눈앞에 털썩하고 떨어진 사슴 뒷다리를 쳐다봤다. 문제는 호선이 아까 전 백호의 모습이 아니라 아리따운 여자의 모습이란 것에 있었다. 하지만 만우는 그런 호선의 겉모습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만우에게는 그저 호선이라고 해도 그냥 커다란 호랑이일 뿐이었다. 그것도 감히 자신을 향해 이빨과 손톱을 드러낸 호랑이.
“안 가면 다 잡아 족친다?”
만우가 아무도 없는 곳을 쳐다보면서 말하자 화들짝 놀란 인기척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만우는 입맛을 쩝하고 다신 후에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며 노릇노릇하게 구워지고 있는 사슴고기를 쳐다봤다.
“야 맛있겠다.”
“우와아아아.”
방매는 사슴고기나 호선 따위는 쳐다보고 있지도 않았다. 그녀는 산채에서 가지고 나온 은병(銀甁)을 양손에 들고는 황홀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호선은 이 중에서 딱 한 명만 그래도 정상적인 반응을 보인다는 것에 한숨을 내쉬었다.
“히익!”
하지만 그 한 명이란 것도 거의 비정상적인 반응에 가까웠다. 호선이 한 번 한숨을 쉬었다고 게거품을 물 것처럼 놀랐기 때문이었다.
“어사 나리. 체통 좀 지켜. 양반이잖아. 호랑이 한 마리에 너무 호들갑을 떠는 거 아니야?”
“호, 호랑이 한 마리?”
동군영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는 1촌이라도 호선에게서 멀어지려 애를 쓰고 있었다.
“저 여자…… 아니 신선님은 왜 데려온 것이야! 응?”
만우는 별말을 다 한다는 표정으로 사슴고기를 쭉 찢어서 입에 한 움큼 넣고는 손가락에 묻은 기름기를 쭉쭉 빨아먹으며 말했다.
“쭙…… 피곤하면…… 쭙…… 타고 다닐 수도 있고…… 쭙…… 냄새도 잘 맡고…… 쭙…… 도술도 부릴 줄 아니까?”
“아이고…….”
엄밀히 말하면 호선은 신선은 아니었다. 그냥 오래 묵은 호랑이일 뿐이었다. 그것마저도 등선을 하다가 등선문을 통과하지 못했으니 악령이나 원귀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저…… 나리…….”
그때 호선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만우를 잡아먹을 것처럼 달려들면서 고와 보이는 저 손에서 손톱과 발톱을 뽑아냈었다. 동군영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아예 만우의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아, 저리 가!”
“잠깐만, 잠깐만 있자.”
양반으로서의 체면이나 체통 같은 것은 이미 저 멀리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일단 살고 봐야 될 것이 아닌가. 채 하루도 같이 있지 않았지만 살기 위해서는 만우에게 붙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동군영은 깨달았다.
“전 이런 날 것은…….”
만우와 호선 사이에 기대한 격돌은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만우가 기대한 격돌만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만우는 더욱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못 먹습니다.”
호선은 만우의 그런 시선을 받으면서 목소리의 끝이 파르르 떨렸다. 확실히 누가 보더라도 아름다운 미녀가 그렇게 목소리를 떠는 모습은 퍽 애처로워 보였지만 그걸 신경 쓰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호랑아. 약한 척하지 말고 할 말이나 해.”
만우의 심드렁한 목소리에 호선은 자세를 고쳐앉았다. 처연한 미녀 행세를 했던 호선이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것이다. 주르륵
‘인간 중에 어떻게 저런 괴물이…….’
호선은 이것이 지독한 악몽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게 아니고서는 그녀가 겪은 일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대체 인간 중에, 신선도 아닌 인간이 자신을 제압한단 말인가. 호선이 진정으로 신선계에 들었다면 그렇게 쉽게 굴복하지 않았을 테지만 그녀의 진신(眞身)은 어디까지나 호랑이였다. 그리고 호랑이는 짐승이다. 짐승은 항거하지 못할 상대를 만났을 때는 무리하게 대적해서 죽는 것을 택하기 보다는 본능적으로 배를 까뒤집고 목숨을 구걸한다. 만우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오백 년을 묵은 호랑이에게 본능을 이끌어낸 것이다.
“화식을 한 지 오백 년이 넘어…….”
“하. 인간 행세를 했다 이거네?”
만우는 코웃음을 쳤다. 호선은 대단히 굴욕적이었지만 꾹 참고 고개를 끄덕였다. 만우에게는 반항하는 것이 무의미했다.
“그래? 그럼 가지고 와서 구워.”
“네, 네!”
만우의 한 마디에 호선이 재빨리 모닥불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손을 까닥해 나뭇가지를 뚝 부러뜨려 날아오게 만들고는 푹하고 사슴고기를 찔렀다. 화르륵! 동시에 호선이 도술을 부리자 사슴고기가 순식간에 익었다. 그걸 보던 만우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그런 재주가 있는데 왜 진즉에 안 구웠어?”
“…….”
호선은 만우의 눈치를 살폈다. 만우는 그런 호선을 보고서는 고개를 저었다. 동군영은 겁에 질린 눈으로 호선을 쳐다봤지만 동군영을 신경 쓰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앞으로는 네가 숙수(熟手)다.”
“예, 예???”
호선이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녀는 호선이다. 비록 신선계에 들어서지는 못 했어도 그녀가 닦은 수행은 보통 수준이 아니었다. 그런데 숙수라니. 자신을 기껏 숙수로 써먹겠다는 소리에 호선이 고개를 번쩍 치켜들고 만우를 쳐다봤다.
“그럼. 널 잡아서 구워먹어 줄까?”
하지만 이내 호선은 눈을 깔 수밖에 없었다. 만우가 호선을 보면서 입맛을 다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년화리(百年火鯉)는 정말 맛있던데…….”
만우는 영기를 품은 녀석들이 세상에 둘도 없는 진미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황궁에 갔을 때 백년화리를 한 번 먹어본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미식(美食)에 큰 의미를 두고 있지는 않았지만 영물로 한 음식만큼은 만우도 욕심을 냈다. 그런 점에서 만우에게 호선은 그냥 먹을 고기가 많은 영기를 품은 먹거리일 뿐이었다.
“하겠습니다. 사냥부터 요리까지 전부 하겠습니다.”
그런 만우의 눈길 앞에 호선은 납죽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만우는 진심으로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괜찮아. 싫으면 싫다고 말해도 돼.”
그렇게 말했다가는 당장 몇 백 근의 고깃덩어리가 될 판인데 어떻게 그렇겠는가. 호선은 또 다시 그녀가 이지도 없는 짐승 시절의 본능이 돌아오는 것에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반드시 최고의 음식을 대접해 드릴게요. 믿어주세요.”
“흠…… 어쩔 수 없지.”
만우는 아깝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호선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동군영은 그런 호선을 여전히 무서운 눈으로 쳐다보면서 만우의 옷자락을 당겼다.
“저, 정말 함께 동행할 셈이야?”
“어사 나리. 그만 좀 겁내라니까. 안 되겠다.”
만우는 동군영의 말을 그냥 싸그리 무시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동군영이 엉덩이로 뒷걸음질을 쳤다.
“하기로 한 거, 지금 시작하자.”
“무…… 무엇을 말이냐.”
동군영은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무언가 대단히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만우는 그런 동군영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손짓을 슥 했다. 서컹!!! 쿵!! 근처에 있던 나무 하나가 예리한 검기에 잘려져 나갔다. 손가락 하나로 검기를 쏘아 보낸 것이다. 초절의 기예에 호선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저 정도 수준인데 검선이 아니라고?’
하지만 생나무를 저렇게 쉽게 베어버리는 것을 보면 검선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가 착각을 할 정도로 만우의 무위는 대단했다.
“흐음…….이 정도면.”
만우는 그런 나무를 검기로 잘 다듬은 뒤 허공섭물로 공중에 띄웠다. 그러고는 동군영의 몸을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괘검을 뽑았다. 스릉! 간장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괘검이 예기를 뿜어냈다. 만우는 그 괘검으로 나무를 통째로 잘랐다. 검이 몇 번 움직이자 손바닥만 한 크기의 나뭇조각들이 우수수 쏟아졌다.
“어사 나리. 내일부터 말이야.”
만우는 손가락으로 나무토막들을 가리켰다. 동군영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무토막과 만우를 번갈아 쳐다봤다.
“한 팔과 다리 하나에 각기 두 근씩. 그리고 허리에는 네 근 정도를 달아. 그러고는…… 뛰어.”
만우가 새하얀 이빨을 드러냈다. 동군영의 눈이 커졌다.
“지, 지금?”
“응. 지금.”
동군영은 고개를 돌려 어둑어둑해진 숲속을 쳐다봤다. 그러고는 재차 만우에게 물었다.
“정말 지금 뛰라는 말이냐?”
“그래. 안 위험해. 절대로.”
호선의 존재감 때문에 어차피 짐승들은 이 근처로 다가오지도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동군영은 겁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음. 이렇게 하면 뛰려나?”
만우는 그렇게 말하고는 호랑이, 호선을 쳐다봤다. 호선은 살기 위해 눈치가 최상으로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만우가 원하는 것을 단박에 눈치챘다.
“…….”
하지만 그걸 알았다고 해도 만우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게 된다면 오백 년 동안 수행한 신선으로서의 존엄을 포기하게 된다.
“호랑아?”
호선이 대답이 없자 만우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호선을 불렀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호선의 몸은 알아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 소녀는 잠시…….”
호선이 스르륵 일어나 나무 뒤로 돌아들어갔다. 스르륵 스륵. 그러더니 그 나무 뒤편에서 옷고름이 풀리는 소리가 들더니 그녀가 입고 있던 비단 재질의 옷가지들이 하나씩 땅바닥에 놓였다. 기겁한 동군영이 얼른 고개를 돌렸다. 양반이 돼서 아녀자가 옷을 벗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 호랑이인 걸 봤는데도 내외하는 거야?”
만우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름다운 미녀의 모습을 하고 있다곤 하지만 그녀의 원래 모습은 덩치가 산만 한 백호다.
“그, 그래도 지킬 건 지켜야…….”
“그래? 그럼…… 어사 나리 목숨부터 지키길 바랄게.”
“그게 무슨 소리…….”
만우가 한 말에 동군영이 의문을 표시하려는 순간, 나무 뒤편에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살벌하게 울려퍼졌다. 저벅, 저벅 크흥. 그리고 나무 뒤편에서 아까 전 낮에 산채에서 봤던 거대한 덩치의 백호가 콧김을 뿜으면서 걸어 나왔다. 동군영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뛰어.”
크와아아앙!!! 만우가 한 마디를 하자 백호가 동군영을 향해 포효했다. 안 그래도 만우 때문에 호선으로서의 자존심에 금이 간 호선이었다. 그렇기에 그 감정까지 더해지자 동군영이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하더니 숲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으, 으아아아아!!”
“쫓아라 호랑아!”
크와아앙!!!! 호선이 동군영의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호선이 있는 이상 동군영은 무서워서라도 계속해서 뛸 것이다.
“그렇게 하다보면 늘겠지.”
만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충격 요법이었지만 효과는 확실할 것이라는 것을 장담했다. 만우는 이런 상황에서도 유일하게 태평한 1인, 방매를 쳐다보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돈 귀신에 씐 것도 아니고…….”
방매는 황홀하다는 눈빛으로 은병이 가득 담긴 상자를 내려다보면서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그 크기가 방매의 몸통만 했지만 그녀는 굳이 그것을 챙겼다. 은이나 금으로 주조하는 것이 궁궐을 제외하고는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이건 국왕이 내린 명령이었다. 하지만 명나라로 가는 조공품에는 늘 이 은병들이 껴있었는데, 그걸 산적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어디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으니 비쌀 것은 분명했다. 그렇기 때문에 방매는 싱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으아아악!!! 크와아아앙!!!! 동군영이 내지르는 비명소리와 호선의 포효소리가 어둠이 잠식하고 있는 숲속을 시끄럽게 만들었다. 만우는 그 소음들을 음률 삼아 사슴고기를 크게 한 입 베어 물고는 산채에서 가지고 나온 술을 들이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