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9. 범골의 호선(號仙)(2)2019.06.18.
만우에게 이 수법이 통한다는 것을 깨달은 방매는 적극적으로 이것을 활용했다. 조금 면역이 되어 있다면 모를까 방매의 그런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소름이 끼친 만우는 손과 발이 움직이는 속도를 한층 더 높였다.
“다시는 그 목소리 내지 마! 어?”
퍼억! 쿠에에엑! 스무 명이나 되던 산적들이 다섯 호흡만에 모두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방매는 손가락을 딱하고 튕겼다.
“그렇지!”
“후우. 후우.”
얼마나 그 목소리가 듣기 싫었던 것인지 만우의 숨이 순간적으로 거칠어질 정도로 만우는 속도를 다해 움직였다.
‘속도로만 따지면 무영투 그 늙은이를 쫓아갈 때보다 더 빨리 움직였다.’
만우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방매가 기생들이나 낼 법한 그런 목소리를 내는 것은 듣는 것만으로도 진저리를 치게 만들었다.
“룰루!!”
반면 방매는 만우가 보고 감탄했던 경신법으로 산적들의 몸에 걸친 것 중 값이 나가는 것을 모조리 챙겼다. 매분구를 하기 위해 나루와 장터를 수도 없이 돌아다닌 덕분에 그녀의 안목은 웬만한 상인의 뺨은 연달아 후려칠 정도로 뛰어났다.
“됐다!”
방매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만우에게서 돈 냄새가 나 따라가기로 결정한 것이 잘한 것이라고 벌써부터 생각이 들었다.
“꺄악!”
방매는 담비 가죽을 한 번 손으로 쓸어보고는 감탄을 했다. 최상급의 담비가죽이었다. 정말 명나라에 가는 조공 행렬이라도 습격한 모양이었다. 찰싹, 찰싹. 방매는 그러고서는 맨 처음 나가떨어진 산적 두목의 벌거벗은 배를 손바닥으로 찰싹찰싹 때렸다. 몸 하나만큼은 기똥차게 튼튼한 듯 날아가 나무 한 그루를 부쉈음에도 시퍼런 멍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안 일어나네?”
방매는 정신을 잃은 두목이 일어나지 않자 자리에서 일어나 발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이어진 일격에 산적두목은 눈을 부릅 뜰 수밖에 없었다.
‘이년도 괴물…….’
그 남자 놈만큼은 아니었지만 여자 년도 작은 괴물이었다. 사실 산적두목은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정확히는 만우가 다섯 호흡 안에 열 아홉 명이나 되는 부하들을 쓰러뜨리는 것을 보고 난 뒤였다. 그런데 작은 괴물의 손에 붙잡히다니, 여자라고 때려도 참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맞은 것이 그의 실책이었다. 두목의 눈에 눈물이 핑하고 돌았다.
“일어났다!!!”
방매가 손뼉을 짝하고 쳤다. 그러자 산적 두목이 기다렸다는 듯 벌떡 일어나 곧바로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조아렸다.
“나리.”
“히익! 살려주십쇼! 목숨만은…….”
“후우.”
만우는 그 모습을 보면서 동군영을 쳐다봤다. 한심스럽기 그지 없는 모습이었다. 유약하기 그지 없는 데다가 체력까지 약한 약골이었다. 심신이 모두 약골인 놈이었다. 그리고 이런 놈들을 어떻게 다루는지 만우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일어나!”
퍼억! 어차피 주변에 보는 눈도 없었기 때문에 만우는 안 어울리던 저자세를 벗어던졌다. 그러고는 발을 들어 동군영의 엉덩이를 걷어차자 동군영이 앞으로 데굴데굴 굴렀다.
“용서해 주십쇼. 전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산군님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군영은 눈을 뜨지 않았다. 만우는 헛웃음을 지었다.
“산군이라니. 범도 아니고 옥면산군 같은 놈들도 아닌데. 산묘네 산묘(山猫).”
삵도 못 되는 놈들이었다. 만우는 여전히 눈도 못 뜨고 있는 동군영의 뒷덜미를 잡아 일으켜세웠다.
“끝났어. 눈 떠.”
“…….”
“눈 뜨라니까!”
만우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동군영이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러고는 눈앞에 익숙한 만우의 얼굴이 보이자 동군영이 눈을 부릅 떴다.
“어, 어떻게 된건가. 나도 모르게 나도 죽은 겐가? 어? 자네랑 같이?”
만우는 헛웃음을 지었다. 정신을 못 차려도 너무 못 차리는 양반이었다. 만우는 그런 동군영을 뒤로 휙하고 던졌다.
“으헉!!!”
물컹. 동군영이 팔다리를 파닥거렸다. 살고자 하는 몸부림이었다. 그런데 물컹하는 느낌과 함께 몸이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으히이이이익!!”
쓰러진 산적 중 하나의 위로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깔고 앉은 것이 사람의 머리라는 것을 깨달은 동군영이 기겁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기우뚱. 쿵! 그러다 다른 산적의 몸에 걸려 나뒹구는 것을 보니 헛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아마 관리보다는 광대쪽에 더 재능이 있는 양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잠시 뒤 상황을 눈치 챈 동군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감격이 서린 눈으로 만우를 쳐다봤다.
“역시! 전하께서 수행원들을 직접 정해주시겠다고 했을 때 알아봤어! 나를 지키기 위해 온 무사, 그런건가? 어디 소속인가. 용호군? 내금위? 계방?”
만우는 그런 동군영을 보면서 혀를 쯧쯧하고 찼다.
“어사 나리. 아니, 야! 동 어사!!!”
“어헉! 그런 소리를 어떻게 그렇게 함부로…….”
동군영이 기겁하면서 만우를 말리려고 했다. 만우는 피식 웃으면서 그 뒤에 쓰러진 산적들을 가리켰다.
“뭐. 너네 어디가서 이거 말하고 다닐 거야?”
기절한 산적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저 멀리 무릎을 꿇은 두목만 고개를 도리도리 저을 뿐이었다. 하지만 만우의 눈을 산적 따위가 속일 수 있을리 없었다.
“안 일어나면 한 명씩 찌르고 다닐 거야.”
스릉! 만우의 괘검이 박달나무 안에서 스르륵하고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러자 마치 기절했던 산적들이 기적을 일으키는 것처럼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주르륵 일자로 무릎을 꿇고 앉았다.
“호오. 재빠른데? 한두 번 당해본 솜씨가 아니야?”
만우는 그들의 일사불란함에 감탄했다. 한두 번 해보는 솜씨가 아니었다. 여러 번 경험을 한 경력자에게서만 나오는 일사불란함이었다.
“이, 일 년에 네다섯 번 정도는 겪습니다.”
산적들은 속으로 욕을 바가지로 했다. 대체 저 정도로 실력이 있는 놈들이 왜 일개 하인처럼 하고 다니거나 허름하게 하고 다니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것 때문에 제대로 된 손님을 구별해 내는 것이 극도로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
“됐고, 말하고 다닐 거야?”
동군영이 벙찐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만우가 묻자 산적들이 입을 모아 목청이 터지도록 소리를 질렀다.
“아닙니다아아아아!!!”
“됐지 동 어사?”
“……근데 자네 말투가…….”
만우의 말투가 바뀐 것을 알아챈 동군영이 만우에게 말하려 했지만 만우가 말허리를 잘랐다.
“아 됐고!”
“…….”
“설 대인한테도 가서 물어봤다면서. 본주가 누군지. 그러니까 그냥 복잡하게 하지 말고 서로 편하게. 어? 앞으로 3개월은 함께해야 하는데.”
“세, 세 달? 여기서 목적지까지는 최소한 여섯 달포는…….”
만우가 동 어사를 보면서 손가락을 딱하고 튕겼다.
“그래. 맞아. 안 그래도 내가 그것 때문에 한마디 하려고 했지.”
만우가 팔짱을 꼈다. 동군영은 자신도 모르게 그런 만우 앞에서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만우에게서 말로 표현하지 못할 박력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 가지고 사내구실하겠어?”
“사내구실이라니…….”
동군영이 자신의 중요부위를 손으로 슬쩍 가리면서 만우를 쳐다봤다. 만우는 고개를 저었다.
“고작 여섯 시진 걷고 퍼져서 언제 가? 난 무조건 세 달 이내로 다녀와야 하니까…….”
만우가 씩 웃었다. 동군영은 자신의 미래를 예감한 것인지 불안한 얼굴로 부르르 떨었다.
“체력 단련도 좀 하고, 검도 배워보고 하자. 알았지? 앞으로 험난한 관직 생활을 하려면 이런 위기 정도는 알아서 벗어나야지.”
“관직 생활과 검이…….”
동군영이 뭐라고 반박하려 했지만 만우 앞에서 무참히 묵살당했다. 만우가 동군영의 등짝을 팡팡 두드렸기 때문이었다.
“세 달 안에 사람 만들어 줄게. 든든한 신랑감으로 만들어 주지. 고마운 줄 알아야 돼. 내 가르침 한번 받겠다고 황금 일만 관을 싸들고 온 갑부도 있었어.”
“에이…….”
동군영은 됐다면서 고개를 저었다. 황금 일만 관이라니, 터무니없는 양이었다. 그 정도면 한양을 통째로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만우 오…….”
“하지 마!”
그때 방매가 만우에게 나는 것처럼 달려오면서 오라버니라고 부르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기 전에 만우가 말을 잘라 버리며 으르렁거렸다.
“그럼 만우?”
“그냥 이쪽저쪽그쪽 해! 예전처럼!”
“에이. 사해가 동도라면서.”
“……하아.”
방매의 능청에 만우는 고개를 저었다. 결국 호칭을 만우라 부르기로 결정한 방매가 만우의 소맷자락을 잡고 흔들었다.
“산채 가자. 범골 산적 산채. 어차피 노숙해야 되잖아. 거기로 가자. 응? 안 멀대.”
“……가서 뭘 또 가지고 나오려고.”
“왜. 쟤네들이 가져간 거, 그거 조공품이야. 나랏 물건.”
만우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나랏 물건이건 말건 만우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내가 왜. 언제부터 조선이 내 조국이었…….”
“가야지! 가세!!”
그런데 그때 동군영이 끼어들었다. 그러자 방매가 박수를 짝하고 쳤다.
“저 나리가 가자고 하니까 너도 가야 되지?”
이미 동군영에게 말을 시원하게 놓은 만우였지만 방매는 듣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만우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내일 각오해. 둘 다.”
“알았어 알았어. 가자. 가자!!! 산적 두목! 너 일어나!!”
만우의 승낙에 방매가 콧노래를 부르며 산적 두목을 일으켜 뒤에서 닦달했다. 산적 두목은 눈물을 펑펑 흘리기 직전이었다. 가끔씩 날아와 박히는 방매의 조막만한 발이 너무나도 아팠기 때문이었다.
“가자! 돈 냄새가 나는 곳으로!”
신이 난 방매가 소리를 질렀다. 만우는 그 모습을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인간들을 데리고 어쩐다…….”
만우는 지금 이 한숨이 어째 점점 늘어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을 받았다. *** 범골이란 이름은 말 그대로 범, 호랑이(號)가 많이 서식하는 곳이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었다.
“범이라. 참 귀한 놈들인데 말이지.”
만우는 신이 나서 걸어가는 방매의 뒤를 따라 휘적거리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파르르! 커허어엉!!! 만우의 존재감이 갑자기 확하고 커지자 아주 먼 수풀 속에서 인간의 냄새를 맡고 천천히 다가오던 호랑이가 퍼뜩 놀라 도망가는 것이 느껴졌다.
“조선은 너무 흔하고.”
오죽하면 호환(虎患)이란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고 어린아이에게 호랑이가 와서 잡아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 정도로 명나라에 비해 조선에는 호랑이가 많았다. 산채까지 걸어오면서 만우가 쫓아낸 호랑이만 다섯 마리가 넘었다. 호랑이가 한낱 짐승이라고 하지만 일반인에게 호랑이는 거의 재앙에 가까웠다. 호랑이 한 마리가 무림인의 수준으로 따졌을 때 일류 무인 세 명 이상이 모여야 잡을 정도로 강력했다. 그런 호랑이가 조선 전역에서 시도 때도 없이 출몰했으니 조선이 한 해 호환(虎患)으로 입는 피해가 막대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심지어는 경복궁의 근정전에도 호랑이가 나타나 궁궐이 발칵 뒤집힌 적도 있었다.
“저깁니다.”
산채 두목이 하도 긴장한 것인지 고작 한 시진을 걸었다고 구슬땀을 흘리면서 허리를 넙죽거렸다. 방매가 신이 나서는 목책 아래 서서 고함을 질렀다.
“이리 오너라! 이리 오너라!!!”
난데없는 여자애의 목소리에 목책 위에 횃불이 타올랐다. 그러고는 목책 위로 머리 하나가 불쑥 나오더니 눈을 비비면서 말했다.
“뉘쇼?”
“네놈들의 두목을 잡아 왔으니 썩 문을 열어라!!”
“뭐, 뭣!!!”
자다가 일어난 듯한 산적이 방매의 말에 두 눈을 비비더니 두 눈을 부릅떴다. 방매의 뒤에 양손이 꽁꽁 묶인 두목이 오들오들 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땡땡땡땡!!
“비상! 비사아아아앙!!!!”
만우는 경종을 울리는 산적을 보면서 눈을 가늘게 좁혀 떴다. 그냥 일개 산적이라고 보기에는 그 무리가 질서가 있고 체계가 잡혀 있었다.
‘아무리 사병들이라고 해도…….’
고려 귀족과 호족들이 보유한 사병들이 아무리 훈련을 잘 받아 전쟁 때는 정규군으로 동원이 됐다고 해도 산채의 방비 상태가 보통이 아니었다.
“흠?”
그런데 그 때 만우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목책의 문이 열림과 동시였다. 방매가 산적 두목을 앞세우고 목책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만우가 손을 뻗어 동군영의 뒷덜미를 움켜쥐었다.
“뭐, 뭐하는…… 으헉!”
파바밧! 동군영이 헛숨을 들이켰다. 순간적으로 주변의 사물들이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만우가 방매를 향해 그대로 짓쳐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만우는 방매를 공격하기 위해 달려든 것이 아니었다.
“똥구녕! 거기 구석탱이에서 얘랑 같이 얌전히 있어!”
“쿠엑!”
“꺄악!”
만우가 동군영과 방매를 반죽을 뭉치듯 뭉쳐서는 목책 바깥으로 밀어젖혔다. 그와 동시에 만우가 좌장(左掌)을 내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