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8. 범골의 호선(號仙)(1)2019.06.15.
흥인지문을 나온 뒤 동군영은 품에서 서찰을 꺼내들었다. [도동대문외개탁(到東大門外開坼): 동대문을 나간 뒤에 열어봄)] 국왕이 직접 하사한 봉서(封書)를 뜯자 그 안에는 국왕의 직인이 찍힌 교지가 나왔다. 동군영은 그 자리에서 철퍼덕 엎어지면서 왕이 있는 경복궁을 향해 절을 했다.
“신(臣) 춘추관 기사관 동군영! 전하의 어명을 받들어 백성의 어려움을 살피고 수령의 득실을 면밀하게 살피어 전하의 덕이 만방에 만개할 수 있도록 견마지로를 다하겠나이다…….”
그렇게 우렁차게 외친 뒤 동군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말 두 마리가 음각된 발마패를 손에 꼬옥 쥐었다. 그 외에도 두 개의 유척을 허리춤에 매달았다.
“아주 잘 어울리십니다.”
만우는 동군영을 보면서 박수를 쳤다. 동군영은 남루한 옷과 찢어진 삿갓을 입고 있었는데 멀리서 보면 딱 남루한 것이 장돌뱅이처럼 보였다.
“폐의파립(弊衣破笠: 남루한 옷과 찢어진 삿갓)이 기본이니 어쩔 수 없…….”
“그냥 편하게 말씀하십쇼 나리.”
만우는 허리를 넙죽 숙였다. 하지만 만우가 설미수가 말을 높일 정도의 사람이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노상에서 만나도 사해(四海)가 동도(同道)라 하였습니다. 그러니 한양의 것들은 한양에 넣어두시지요.”
“……알겠네.”
동군영은 힘들게 말을 놨다. 그러고는 괘검 끝에 작은 봇집을 걸친 만우와 커다란 봇짐을 짊어 맨 방매를 쳐다봤다.
“옆에 있는 처자는 누군가?”
“아. 이 아이는 방매란 아이로 함흥까지 우리를 안내할 길잡이입니다.”
만우는 그렇게 말하고는 방매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인사드려. 우리랑 같이 가실 양반 나리셔.”
“어디를 막 찔러!”
방매가 얼굴을 사르르 붉히고는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나리. 매분구 방매라고 합니다.”
“매분구?”
동군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님과 여동생이 매분구에게 무언가를 사는 모습을 몇 번 봤었던 동군영이었다.
“어서 가시지요 나리. 3개월밖에 시간이 없지 않습니까.”
방매가 신기한 듯 쳐다보는 동군영에게 만우가 말했다. 동군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어서 감세.”
만우와 방매, 동군영은 부지런히 걸었다. 역참이 있으니 마패를 제시하고 말을 빌려서 갈 수도 있는 노릇이지만 동군영은 그러지 않았다.
“세상에 이 꼴을 하고 말을 타고 다니는 사람이 있던가?”
동군영의 말에 만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탁월한 선택이었다. 말은 지극히 귀하고 값진 짐승이어서, 군영에 속한 기마병이거나 양반이 아니라면 엄두도 못 낼 동물이었다. 그러니 저렇게 남루한 차림을 하고 말을 타고 다닌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아이고…… 발이야.”
“체력을 좀 신경 쓰시지요. 이게 뭡니까.”
하지만 동군영은 평생을 앉아서 글만 읽던 선비였다. 운동이라고 해봤자 활 몇 번 쏘는 것이 전부였다. 그렇기 때문에 체력이 형편없었다.
“자네도 매일같이 앉아서 책만 읽어보시게. 오래 앉아 있는 걸로 따지면 내가 자네들을 가볍게 이길 걸?”
봇짐을 짊어 맨 방매보다도 체력이 형편없었다. 만우는 하루만이 퍼져버린 동군영을 보고는 혀를 쯧쯧 찼다.
“안 되겠습니다, 나리. 내일부터는 제게 체력 훈련 좀 받으시지요.”
“어찌 양반이 경박하게 뛴단 말인가. 되었네.”
동군영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만우는 피식 웃었다.
“양반의 체면이 주상 전하의 어명보다 더 중요한 모양입니다?”
만우의 반문에 동군영이 입이 조개처럼 다물어졌다. 할 말이 없었다. 성리학을 중시하는 양반의 도리도 중요했지만 양반은 결국 왕에게 충성하기 위해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갈 길이 600리나 됩니다, 나리.”
“하루만. 하루만 쉬어가세.”
동군영은 만우에게 매달렸다. 그런 동군영의 등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만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니, 대체 얼마나 더 느리게 걸어야 하는 겁니까?”
한 번 걷기 시작한 만우는 무지막지했다. 만우는 답답하다는 듯 말했지만 체력이 바닥인 동군영에게는 그 걷는 것조차도 힘들었다.
“여섯 시진이나 걸어오지 않았나. 그러니까 쉬어야지.”
만우는 방매를 쳐다봤다. 하지만 방매도 아직까지 멀쩡했다. 매분구를 하기 위해서는 말빨만이 아니라 체력도 발군이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열여덟 먹은 애도 멀쩡한데…….”
“난 못 가네!”
동군영은 벌러덩 드러누웠다. 만우는 그렇게 강짜를 부리는 동군영을 보면서 심각하게 생각했다.
‘쥐어 패? 그래서 말 잘 듣게?’
만우는 자신 있었다. 딱 한 시진만 자신에게 주면 동군영이 자신의 한 마디에 번개처럼 움직이게 만들 수 있었다. 인간이란 모름지기 극한의 상황에 몰리면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기 마련이다. 그 경험을 여러 번 했기 때문에 만우는 그런 점에 있어서 아주 최적의 교관이었다. 그런데 그때, 근처의 수풀이 들썩이더니 험상궂은 인상을 한 장정 스무 명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이놈들!!!!!”
그중 맨 앞에 선 남자는 철사처럼 삐죽삐죽 솟은 수염이 장비를 연상케 하는 거한이었다. 가죽옷에 가죽신을 입은 남자가 자신의 머리만큼이나 큰 커다란 도리깨를 손에 든 채 소리를 지르자 산천초목이 버렁버렁하고 떨었다.
“가진 것을 다 내놓고 간다면 내 목숨만은 살려주마!”
“흐익!!!”
동군영이 기겁하며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섰다. 하지만 그는 이내 자신이 양반이란 것에 용기를 얻고는 소리쳤다.
“네 이놈! 감히 양반 앞에서 산적 놈 따위가 목소리를…… 흐익!”
쉭!!! 동군영이 뒷짐을 지고 말을 하고 있는데 쉭하는 소리와 함께 동군영의 관자놀이를 화살이 스치고 지나갔다. 쿵. 낄낄낄.
“저거 뭐야?”
“에비! 가운데 다리 떼버려라!”
크하하하! 그 여파에 동군영이 뒷걸음질을 치다가 쿵하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런 동군영을 보고 산적들이 왁자지껄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 이놈들!!!”
동군영이 애써 추상같은 호통을 내지르려 했지만 그는 그러기에는 너무 심약했다. 만우는 그런 동군영을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나리.”
“…….”
이쪽은 여자까지 포함해 세 명이었다. 반면 저들은 딱 봐도 힘깨나 쓰게 생긴 스무 명이나 되는 산적들이었다.
“뭐하시는 겁니까. 전하의 명을 받고 나오신 분이.”
“어, 어사란 건 내 목이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밝히면 안 되는 일이다!”
암행어사란게 원래 그런 법이었다. 왕이 자신의 분신처럼 권한을 주어 지방을 감시토록 만든 것이었지만 고작 산적들에게 어사란 신분을 밝힐 수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암행어사를 모두가 기피하는 직책이 되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조정에는 정의감에 넘치는 선비들이 한둘씩은 있었기 때문에 하기 싫은 사람이 억지로 제수 받은 적은 없었다. 물론, 그들 중 둘에 하나는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이 함정이긴 했지만.
“아니. 그러면 대체 무슨 생각으로 가려고 하신 겁니까? 산적이랑 싸울 무예나 그런 것도 안 익히셨습니까?”
“난 문과급제다!”
“어이쿠.”
만우는 이마를 탁하고 쳤다. 설마 했는데 이렇게 꼴통일 줄은 몰랐다. 그가 장원급제를 한 수재이건 아니건 간에, 지금 군영은 만우에게는 그저 구멍이었다, 구멍.
‘똥구녕!’
꼭 사람 미래가 이름 따라간다고 하더니, 동군영이 딱 그런 꼴이었다.
“어떻게 좀 해봐라. 넌 방법도 없느냐? 너도 네 목숨은 귀할 것 아니냐!”
군영은 마침내 콧물을 흘리면서 만우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만우는 마치 이 모습을 강창사의 이야기 놀이를 보는 것처럼 쳐다보면서 낄낄거리는 산적들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 그거! 담비 가죽이다!”
그런데 그때 방매가 손가락을 번쩍 치켜들었다.
“반반하게 생긴 계집애가 보는 눈은 있구나!”
산적이 가슴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우리가 그 유명한 범골 산군님이니라!! 크하하하!”
한양에서 고작 여섯 시진 떨어진 곳이지만 북쪽이었기 때문에 길이 험준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산적들이 생길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이런 산적들이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고려 때 죽은 가신들의 사병들이나 그들이 부리던 파락호들이 모여 집단이 된 것이다. 현재의 국왕이 왕위를 계승하면서 국내 치안을 다잡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지만 원래 이런 놈들이 한번 숨으면 박멸하기가 어려운 법이었다.
“산군?”
“그래! 크하하하.”
그중에서도 범골 산군은 이곳을 지나다니는 보부상이나 행상들에게 악명이 높았다. 낼 돈이 없으면 마치 이삭을 줍든 사람 목을 따는 것은 물론이고 걸리면 가진 것을 몽땅 다 빼앗는 것은 기본이었다. 심지어는 명과 조선을 오가는 행렬을 습격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 증거가 바로 저 담비가죽이었다.
“어쩐지. 너무 화려하다 했다.”
만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저 산적놈들의 화려한 복장이 이해가 갔다. 그 순간 방매가 만우에게로 다가와 만우의 손을 꼭 붙잡았다.
“만우 오라버니.”
“…….”
쫘악! 방매의 간드러진 콧소리에 만우가 본능적으로 자신의 팔뚝을 쳐다봤다. 마치 닭의 껍질처럼 오돌토돌한 소름이 쫙 돋았다.
“뭐, 뭐야!”
난데없는 방매의 교태에 만우가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방매가 몸을 이리저리 베베 꼬면서 손가락으로 범골 산적을 가리켰다.
“오라버니. 쟤네 가지고 있는 거 나 가지고 싶어. 응? 응? 아이잉.”
“…….”
“저놈이 네 서방님이라도 되는 모양이구나! 크하하하. 그런데 어쩌냐. 저놈은 우리를 보고 바짝 얼었는데. 차라리 이 산군님이 극락을 보여주마!”
만우가 방매의 어이없는 짓거리를 보고 충격에 굳은 것이 무서워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인지 산적 두목이 광소를 터뜨렸다. 아니, 정확히는 광소가 아니라 일부러 있어보이려고 크게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목청 하나는 타고난 것인지 그게 제법 그럴듯해 보였다.
“오라버니. 응? 만우 오라버니이이이이…….”
“하지 마!!!!”
방매가 만우의 팔에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리듯 문지르며 몸을 베베 꼬자 만우가 참지 못하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하지만 방매는 아랑곳 하지 않고 눈을 찡긋했다.
“그러면…… 저거 나 줄 꼬야?”
“으으으…….”
팡!
“쿠엑!”
만우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자 만우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질질 짜던 동군영이 개구리처럼 바짓가랑이를 놓치고 나자빠졌다. 파라락!! 만우의 전신에서 공력이 흘러나오면서 옷자락이 펄럭인 것이다. 만우는 무서운 것을 본 얼굴로 산적두목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네놈도 반반하게 생겼구나! 남색을 좋아하는 양반네들에게 팔…… 꾸엑!!!”
콰앙!!! 쩌억! 우르르! 스무 명, 아니 이제는 열아홉 명이 된 산적들의 얼굴에서 혈색이란 것이 썰물 빠지듯 사라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들의 두목이라 불렸던 남자가 서 있던 자리에서 사라지고, 뒷편으로 날아가더니 나무 한 그루가 쩌억하면서 반으로 부러졌기 때문이었다. 우수수수! 나무가 꺾이면서 다른 나뭇가지들을 때린 것인지 나뭇잎들이 우수수거리며 산적들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으악! 으악! 잘못했어요. 살려주세요!”
그런데 오히려 비명은 만우 쪽에서 흘러나왔다. 자신의 몸 위에 떨어지는 나뭇잎의 촉감에 기겁을 한 동군영이 비명을 질렀기 때문이었다. 방매는 머리를 땅에 묻고 엉덩이만 치켜든 동군영의 추한 자세를 보면서 혀를 쯧하고 찼다.
“오라버늬이이이~!”
어쨌든 방매는 고개를 돌려 만우에게 교태 섞인 콧소리를 내뱉었다. 그러자 만우의 신형이 주욱 늘어나는 것처럼 보이더니 만우의 지팡이가 번개처럼 뻗어져 나갔다. 퍼버버버버벅!!!! 이런 산적들에게 검까지 빼들 필요는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이곳으로 자신들이 지나갔다는 흔적을 남길 필요는 없었다. 이 세상에는 혹시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오라버니! 죽이지는 마. 아라찌? 방매는 걔네가 가진 거 다 가지고 시푸니까. 웅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