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7. 검주, 역졸이 되다(4)2019.06.11.
넋이 나간 간장의 벙찐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뭐? 푸하하하하.”
그런 간장이 웃겼는지 만우가 대소를 터뜨렸다. 그러자 실내를 가득 채우던 긴장감이 단박에 깨져나갔다. 만우에게서 다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반박귀진(返樸歸眞)!’
임수미의 눈이 커졌다. 공력의 화후가 절정에 달하면 터질 것처럼 솟아오른 태양혈이 만우의 얼굴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의 만우는 그냥 무공을 모르는 일반인처럼 느껴졌다. 그 말은, 만우의 공력의 화후가 반박귀진이라는 고절한 경지에 다다랐다는 뜻이었다.
‘뛰어남을 넘어서 평범함이 되었다는 경지.’
임수미의 입술이 바짝거리며 말라갔다. 조선에서 만난 만우는 여전히 긴장감이 넘쳤고 박력이 넘쳤다. 임수미를 마치 동네 똥개 이름을 부르듯 부르면서 들어오는 것을 보면 그는 여전했다. 단지 다른 점이라면, 항상 혼자 다니던 그에게 다른 사람이 생겼다는 것 정도?
‘평범한데.’
간장은 멍청해 보였고 방매는 평범해 보였다. 얼굴은 이쁘장해 보였지만 무공을 따로 익힌 것 같지는 않았다.
“어이. 무화 선녀.”
만우가 임수미를 놀리듯 말했다. 임수미의 양 볼이 붉어졌다. 선녀, 선녀해서 사실 제일 곤란한 것은 임수미 바로 그녀였기 때문이었다.
“농이 짓궂으십니다.”
“왜? 선녀라고 한 걸 선녀라고 하는 건데.”
간장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하지만 이곳에 찾아온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만우는 임수미에게 말했다.
“내 동생이 쓸 대장간을 보러왔다.”
“……만 대협의 동생분이십니까?”
임수미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간장을 쳐다봤다. 누가 봐도 간장이 만우의 삼촌뻘이었다.
“약관이라니까 그렇게 알고.”
“…….”
임수미보다도 무려 세 살이나 어렸다. 임수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간장을 쳐다봤지만 간장은 익숙한 듯 피식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제가 원래 좀 그렇게 보이죠, 선녀님?”
“……선녀 아닙니다.”
간장은 임수미를 선녀라고 부르기로 결심을 한 것이지 태연하게 임수미에게 선녀라 불렀다. 그런 간장의 엉덩이를 방매가 걷어찼다.
“그만해.”
“아야!!”
간장이 엉덩이를 문질렀다. 방매는 임수미를 한 번 흘겨봤다. 방매도 여자라고 임수미만 예쁘다고 하는 것을 보니 질투가 난 모양이었다. 만우는 그런 방매를 보고 피식 웃었다. 임수미의 눈이 살짝 커졌다.
“왜?”
“아, 아닙니다.”
임수미는 방매를 눈에 담아뒀다. 만우와 함께 다닌다고 한 것치고는 지나치게 평범하다 생각했다. 그냥 조금 예쁘장한 것을 빼면 무림에 즐비한 미녀들에 비교해 여러모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우가 방매에게 지극히 호의적이었다. 만우가 저 정도로 관심을 보이는 여자는 무림에서도 몇 명 없었다.
‘화산파의 소령이라는 여아 정도?’
하지만 소령이라는 그 여아는 나이가 훨씬 어렸으니 여자라기보다는 동생 같은 느낌이 더 강했다.
“눈 굴리는 걸 보니 또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 것이냐?”
만우가 임수미에게 말했다. 갑자기 만우가 찌르고 들어오자 임수미는 비명을 지를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이 남자는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박자에 말로 푹푹 찔러들어왔다.
“아, 아닙니다.”
“아니긴 뭘.”
만우는 피식 웃었다. 임수미는 만우의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시선을 슬그머니 틀었다.
“너희. 아직 조선에 정보망 구축 안 됐지?”
만우가 임수미에게 말했다. 또 무엇을 부탁하는가 싶어 임수미의 표정이 슬핏 굳었다.
“네. 아직 부족합니다.”
“쩝. 그런 것 같더라. 그럼 그놈들은 뭐지?”
만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만우가 검계를 족치러 뒷방길에 들어갈 때 자신을 감시하던 눈길을 분명히 느꼈다. 거기에 궁에도 숨어 있는 쥐새끼들이 있었다.
“아니, 쥐새끼라 불릴 정도는 아니고…….”
쥐새끼라고 하기엔 궁에서 느꼈던 숨어 있는 그 기척은 너무 과소평가한 단어였다.
“고양이. 그래 고양이 정도로 하면 되겠다.”
고양이 정도는 됐다. 적어도 화경지경이 아니면 느낄 수 없을 정도의 고도의 은신술을 익힌 자가 임금 주변에 숨어 있었다.
“누가 있는 겁니까?”
만우의 중얼거림에서 임수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보란 거창한 곳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이 평범하게 대화를 하다가도 진귀한 정보가 나오기도 한다.
“그래. 네가 와 있길래 하오문인 줄 알았는데…… 뭐, 그래서 박살 내려다가 한번 참았는데 참길 잘했네.”
만우의 눈이 임수미와 그 정예들을 훑었다. 하오문에는 그 정도의 실력자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부르르. 하마터면 영문도 모르게 만우에게 깨질 뻔했다는 것에 정예들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래봬도 다들 하오문에서 한자리씩 하는 사람들이지만 만우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 신세였다. 발버둥을 치다가 고양이를 한 번 콱 깨물 수는 있어도 결국 죽음을 피하지 못할 그런 쥐들. 하지만 임수미는 달랐다.
‘우리로 착각할 정도의 정보를 휘두르는 놈들이 있다고?’
하오문은 엄밀히 말해 그렇게 아주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만우는 그 정체모를 이들을 언급하면서 하오문의 간부들을 쳐다봤다. 전체적인 정보의 질로 따지면 개방보다 못 하지만 하오문의 간부들은 달랐다. 그들은 모두 무공을 익힌 이들로 그들이 구해오는 정보는 양질의 정보들이었다. 그렇다는 뜻은, 만우의 기감에 걸린 이들이 하오문의 간부 정도의 실력을 가진 이들이라는 뜻이다.
‘조선이 작은 땅이라고 해서 너무 얕본 것인가?’
무림이라 불릴 만한 세계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임수미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자신들은 이번 일에 사활을 걸었다. 그렇기 때문에 돌다리라도 몇 십 번이나 두드려 보고 건너야 한다.
“대협. 그러면…….”
“그 일은 하오문이 알아서 하고. 얼마 전에 왔나 봐? 북경은 어쩌고?”
하지만 만우는 임수미의 궁금증을 풀어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임수미는 영특하니 자신이 흘린 이 정도만 가지고도 의구심을 품고 파고 들어갈 것이다.
‘그러면 돌아올 때쯤 되면 나도 알 수 있겠지.’
만우는 씩 웃었다. 임수미는 만우의 질문에 침을 꿀꺽 삼켰다.
“얻고자 하는 것이 있어 조선까지 오게 됐습니다.”
싸울아비의 장보도인 제투부혼(濟鬪夫魂)임은 말하지 않았다. 검에 미친 만우가 혹시나 관심을 품을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조선이 시끄러워지겠네.”
만우는 혀를 쯧하고 찼다.
“아무도 알지 못하게 은밀하게 왔으니, 소란을 피우지 않겠습니다.”
임수미는 얼른 만우에게 말했다. 만우는 그런 임수미를 보면서 피식 웃었다.
“너, 은근히 순진한 구석이 있구나?”
“예?”
임수미의 눈이 커졌다. 그녀를 순진하다고 하는 사람은 만우가 처음이었다. 하오문의 꽃인 임수미는 하오문도들에게는 빈틈이 없이만 보였기 때문이다.
“정말 하오문 따위가 중원의 눈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만우의 말에 임수미의 얼굴이 굳었다. 하오문을 따위라고 한 것이 걸렸지만 만우는 강자였다. 약육강식, 강자존. 만우가 무슨 말을 하든 임수미는 만우의 말에 딴지를 걸 자격이 없었다.
“그냥 너희를 주시할 생각이 없었던 것뿐이야. 위협이 되지 않으니까. 그런데 딱 보아하니 중원을 버리고 조선까지 온 걸 보면 보물 하나 발견한 것 같은데…….”
만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만우의 추론에 놀란 임수미의 표정이 굳었다.
“그 냄새를 다른 놈들이 못 맡았을까?”
만우는 그렇게 말하면서 괘검을 쓰다듬었다. 박달나무로 만들어진 지팡이가 마음에 들었다. 검으로 휘두르지 않더라도 봉이나 몽둥이용으로 딱일 것 같았다.
“무림맹, 사림곡, 마교. 그리고 수천 개에 달하는 중소문파와 세가들.”
만우는 손가락으로 하나씩 꼽았다. 그러자 임수미의 눈가가 미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전에 하나 묻자.”
만우는 임수미를 쳐다봤다.
“무림맹과 사림곡, 그리고 마교가 정보를 감추려고 하면 너희들, 찾아낼 능력이나 있어?”
“…….”
임수미는 정예들을 돌아봤다. 대부분이 하오문의 장로들과 호법들이었다. 임수미는 이마를 짚었다. 만우의 말에 깨닫는 것이 있었다.
“덕분에 개안하였습니다. 대협.”
정보를 흐리기 위해 가짜 정보를 시중에 수도 없이 풀었다. 그랬기에 방심한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하류인생들이 모여 만든 하오문이다. 무언가를 대단히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그들은 개방 같은 대단한 곳이 아니다. 그저 사람의 머릿수가 가장 많을 뿐이다. 그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임수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그 장보도를 얻은 것처럼 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만우의 한 마디에 자신의 잘못을 바로 깨달은 것을 보면 그녀의 자질도 역시 범상치 않은 수준이다.
“뭐, 본주는 본주의 일만 방해 안 받으면 되니까 알아서들 해. 조선으로 들어올 놈들에게도 한 마디씩 전해주면 고맙고. 귀찮은 일 안 벌어지게.”
“반드시, 반드시 그러겠습니다. 만 대협.”
임수미는 고개를 주억거렸지만 만우는 못 미덥다는 표정으로 임수미를 쳐다봤다. 그 눈빛에 임수미는 뜨끔했다.
“뭐, 그럼 간다.”
하지만 다행히 만우는 더 이상 꼬투리를 잡지 않았다. 대신 제일 가장자리에 있던 삼복의 뒷덜미를 잡아 일으켜 세웠다.
“야. 안내해.”
삼복의 눈이 사정없이 떨렸다. 대단한 사람일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본토에서 온 고수들까지도 눈치를 보기에 급급할 줄은 몰랐다.
‘그리고 저놈은.’
삼복은 간장을 보고서는 검계를 풍비박산을 낸 것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삼복이 할 수 있는 것이 있을 리 없었다.
‘내 팔자야…….’
삼복은 울상을 짓고서는 터덜터덜 안내했다. 그곳에 고이 숨겨놨던 천년한철도 저놈들이 털어갔을 것이 분명했지만 삼복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거대한 태풍이 할퀴고 지나간 듯한 뒷방길의 흔적을. 그와 함께 흩뿌려져 있는 수십 명의 머리 잃은 시체들을. 꿀꺽.
“야. 너.”
“예? 예 대협.”
삼복이 허리를 넙죽 숙였다. 만우는 평범한 무명천 옷을 입고 있었지만 삼복은 감히 만우를 경시할 수 없었다.
“내 동생 잘 봐줘. 모자란 것 없이 재료 다 대주고. 만약 간장의 입에서 뭐라도 한 마디 나온다?”
만우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꽈드득 소리와 함께 박달나무에서 나는 소리가 섬짓하게 울려퍼졌다.
“넌 안 건드려. 하오문 그 자체를 지워 버릴 테니까.”
원래 이렇게 협박을 남발하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만우는 이들의 특성에 대해서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오문 같은 하류인생들에게 좋은 말을 해주고 잘해주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이들이 자신의 말에 복종하게 만드는 방법은 딱 하나, 힘(力)밖에는 없다.
“알았지?”
그리고 그런 만우의 협박은 탁월한 효과를 발휘했다. 검신이 아니라 검집 통채로 바닥에 두 치 정도 부드럽게 파고든 괘검을 보고는 고개를 미친 듯이 끄덕이는 삼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만 사람 좀 괴롭혀!”
그때 방매가 만우의 옆구리를 쿡하고 찔렀다. 만우는 그런 방매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
“알았다, 알았어. 잔소리가 왜 이렇게 심해. 마누라도 아니고.”
“마, 마누라라니!”
방매가 기겁하는 표정을 지었다. 만우는 빙글거리며 웃었다.
“내가 너보다 7살은 많아. 그러니까 오라버니라고 불러.”
“싫어! 으악. 오라버니는 무슨!”
방매가 닭살이 돋는다는 듯 팔을 벅벅 긁었다. 만우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고는 삼복의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명심해.”
“예. 대협.”
삼복이 허리를 직각으로 숙였다. 만우는 간장을 보면서 여자의 허리 굵기만 한 팔을 툭툭 건드렸다.
“그럼 부탁한다. 내 검. 기똥찬 놈으로 하나 만들어줘.”
“믿고 가십쇼, 형님. 방매도 몸 조심히 다녀와!”
“내가 왜 네 여동생이야!”
“으하하하.”
간장에게 한 방 먹이겠다며 발버둥치는 방매의 뒷덜미를 잡은 만우가 멀어졌다. 삼복은 아연실색한 얼굴로 간장을 쳐다봤다. 검 뽑아먹으려고 잡아놓은 놈이 자신의 숨겨진 상관이 되게 생겼다. 삼복의 입에서 새어 나오는 한숨이 한층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