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6. 검주, 역졸이 되다(3)2019.06.08.
부하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무언가를 보고 엄청나게 놀란 듯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일이라는 직감에 삼복이 밖으로 나왔다.
“누, 누구냐!!!”
삼복은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감추려고 애를 쓰며 소리쳤다. 그 짧은 사이에 하오문 한양지부가 완벽하게 털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오문도들이 전원 제압당해 땅에 무릎을 꿇었다.
“네놈이 지부장이냐?”
얼굴에 큰 흉터가 나있는 남자가 삼복을 보면서 눈을 부라렸다. 그 남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삼복은 하마터면 다리가 풀릴 뻔했다.
‘십령수보다 강자!’
이류 고수인 십령수 앞에서도 벌벌 떨었던 삼복이다. 그런데 흉터가 나있는 남자는 그 십령수보다 한 단계 더 윗줄의 고수였다. 그 고수 한 명만 있어도 하오문도 전체가 덤벼들어도 이길 수 없다. 이류 무인까지는 어떻게든 수로 눌러죽일 수 있다고는 하지만 일류 무인에게는 그런 방법도 통하지 않았다. 기(氣)를 아주 약간이나마 운용할 수 있는 경지가 바로 일류였기 때문이다.
“누, 누구시길래 저희한테…… 저희는 아무런 원한도 없습니다만.”
삼복은 그런 계산이 서자 곧바로 태도를 바꿨다. 남자는 갑자기 변한 삼복의 태도를 보면서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그때 남자의 뒤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하오문 한양지부장 삼복.”
남자가 옆으로 물러서면서 고개를 까닥 숙였다. 그리고 그 뒤에서 걸어 나온 사람을 본 삼복의 입에 헤하고 벌어졌다.
“서, 선녀님?”
“…….”
알려진 무림칠화에 비견될만한 미모를 가졌다는 무화 임수미. 그녀가 하오문의 정예를 이끌고 한양에 상륙하는 순간이었다.
*** 윤도는 또랑또랑한 눈으로 만우를 빤히 쳐다봤다. 집안을 떠들썩하게 만들던 네 명의 아저씨들이 갑자기 사라져서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던 윤도였다. 그런데 그나마 있던 만우와 방매마저 떠날 준비를 하자 윤도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도련님. 내가 가는 게 슬퍼?”
그런 윤도의 표정을 본 만우가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윤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윤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안 가면 안 돼?”
아이의 울음 섞인 목소리와 순수한 표정은 위력적이었다. 만우가 손을 들어 올려 심장께를 문질렀다. 엄청 귀여웠기 때문이다.
“금방 돌아올 거야. 백 밤만 자고.”
“백 밤?”
윤도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직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수(數)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이었다. 만우는 빙긋 웃었다.
“마님한테 말씀드려서 세면서 기다리고 있어. 알았지?”
“힝…….”
윤도는 그래도 아쉬운 것인지 입술을 삐죽이며 내밀었다. 만우는 그런 윤도를 못 말리겠다는 듯 너털웃음을 짓고는 품에서 화려한 문양으로 장식이 달린 작은 단검을 꺼내들었다.
“내가 제일 아끼는 물건 중 하나야.”
아마 주변에 중원에서 온 무림인이 있었다면 경악을 금치 못 했을 것이다. 만우가 윤도에게 건네주고 있는 단검은 그냥 평범한 단검이 아니었다. 입선건(入仙鍵). 선계에 올라가는데 필요한 열쇠라는 거창한 별명이 달린 단검인데 황실에서 가지고 나온 보물 중 하나였다. 손바닥만 한 단검이었지만 천잠사나 만년한철도 너끈히 베어낼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한데다가 단검 자체가 피독주(避毒珠)의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품에 품고만 있어도 잔병 따위는 범접도 하지 못 했다.
“은공. 이렇게 귀한 걸 윤도에게…….”
“부인. 윤도가 제 동생 같아서 주는 것이니 괘념치 말아주십시오. 윤도가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좋을 것입니다.”
만우는 그 입선건을 윤도에게 거리낌 없이 건네주었다. 만우에게 필요하기 보다는 이제 본격적으로 무럭무럭 자라나야 할 윤도에게 더 필요한 물건이었다.
“감사합니다, 은공.”
그런 만우의 진심이 전해진 것인지 조씨 부인이 고개를 숙여보였다. 기품이 넘치는 조씨 부인의 목례에 만우도 목례를 했다.
“알았어. 이거 잘 가지고 있을게. 그러니까 꼭 다시 와. 알았지?”
설미수의 늦둥이 아들인 윤도는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만한 모든 조건을 다 갖추고 있었다. 만우는 웃으면서 윤도의 팔목을 잡고 내공을 불어넣었다.
“시원해!”
“나중에 오면 또 해줄게.”
벌모세수나 추궁과혈 같은 거창한 수법은 아니었지만 이것만으로도 윤도의 몸에 혹시라도 깃들었을 사기는 전부 빠져나갔을 것이다. 만우는 한쪽에 서 있는 간장을 쳐다봤다. 간장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만우가 다가가자 간장이 천으로 감싸놓았던 길쭉한 물건을 내밀었다.
“이게 뭐냐?”
“제가 저번에 드린 검은 형님의 공력을 오래 버틸 수 있는 검이 아니었습니다.”
“알고 있어.”
만우의 공력을 온전히 받아낼 수 있는 검이라면 중원에서도 몇 자루 찾기 힘들었다. 그걸 화산파에 두고 왔기 때문에 가끔 생각이 났지만 힘을 억누르면서 싸우는 것도 나름 내공을 세밀하게 다루는데 도움이 되고 있었기 때문에 검이 생각나진 않았다.
“혹여나 그럴까 싶어 검을 급히 더 만들어 왔습니다.”
“잠도 못 잤겠구나.”
만우는 간장이 내민 천을 풀면서 말했다. 간장은 순박하게 웃으면서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뭐, 그런 셈이지요.”
“괘검(枴劍)이구나.”
“패검(佩劍)을 하면 서투르게 분란에 휘말릴까 걱정이 되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냥 괘검이 아닙니다.”
“그래. 박달나무로 만들었구나. 다듬기 힘들다고 들었는데.”
만우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조선에서 양반이 아닌 평민, 상놈이 검을 차고 다녔다가는 초상을 치르기 십상이다. 실적에 눈이 먼 무료부장 같은 놈들이 그냥 붙잡아다가 관아에서 죽도록 주리를 틀기 때문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그런 놈들과 얽히면 괜히 번거로웠기 때문에 만우는 씩 웃었다. 괘검은 겉으로 보기에는 지팡이처럼 생긴 검이다. 검집이나 손잡이가 가죽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노인들이 짚고 다니는 지팡이처럼 나무로 검집을 만들고 손잡이도 나무로 만들어진 검이다. 약간 휘어 있는 도검(刀劍)의 형태가 아니라 직검(直劍)이었고 검신의 폭도 다른 양산형 검과는 다르게 좁았지만 간장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가 본 만우는 검의 형태나 모양새에 영향을 받는 그저 그런 무인이 아니었다. 그냥 길 가다가 떨어진 나뭇가지를 주워도, 집안에 굴러다니는 식칼을 들어도 세상에 더할 나위 없는 보검처럼 바꿀 수 있는 것이 바로 만우라고 간장은 생각했다. 검이 사람을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검의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것. 검의 달인이나 명인이라는 이들도 못 해내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헤헤. 별로 안 힘들었습니다.”
“마음에 든다.”
만우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실 패검을 하고 다녀도 상관은 없었다. 만우가 자신의 실력을 숨겨야 할 필요성이 하등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만우가 아무 때나 시비가 걸려서 싸우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다. 그러니 피할 수 있는 것은 피할 생각이었다.
“나갈 때 같이 가자꾸나. 나도 가서 한번 내 눈으로 확인을 해야겠으니.”
“네, 형님.”
“그럼 부인.”
만우는 조씨 부인의 품에 푹 안겨 있는 윤도와 조씨 부인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설 대인께는 잘 전해주십시오. 그러면 차후에 다시 뵙겠습니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예.”
만우는 방매, 간장과 함께 북촌 저택에서 떠났다. 만우는 묘한 표정으로 멀어지고 있는 북촌 주택을 쳐다봤다.
“묘하네. 기분이.”
“왜?”
방매는 고개를 갸웃했다. 3개월이나 걸리는 긴 여정이었기 때문에 방매의 봇짐이 제법 컸다. 하지만 방매는 아무렇지도 않아보였다. 분명 여인이 혼자 들기 힘든 무게와 크기의 짐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아니. 원래 집 같은 거 없었거든. 그런데 저기가 집처럼 느껴져서.”
중원을 유랑하는 동안에는 아무리 길게 머물러도 그곳을 떠나는 것이 별로 아쉽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의 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만우는 돌아갈 집이란 것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고작 열 살의 나이에 명나라에 어르신과 함께 넘어와 이곳저곳을 십 년 동안 떠돌았다. 그러고는 오 년 동안 중원 곳곳을 유람하였으니 집이란 곳이 낯설 수밖에 없었다.
“안 어울리게 웬 감성?”
방매는 풋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만우는 그런 방매를 신기하다는 듯 쳐다봤다. 지금까지 그 어떤 사람도 자신을 방매처럼 대한 사람이 없었다. 만우가 자신의 입으로 직접 검주라고 밝히지 않아도, 만우의 몸에서 풍기는 대종사의 기세는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 보는 사람이어도 그런 기세에 눌리기 마련인데, 방매는 정말 뻔질나게도 까불었다. 담력으로만 다지면 화경지경 수준에는 이른 듯했다.
“됐다. 내가 무슨 말을 너랑 하겠냐.”
만우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간장에게 고갯짓을 했다. 간장이 단박에 알아듣고는 끄덕였다.
“예. 대장간으로 가시죠, 형님.”
지팡이를 턱하고 짚은 만우가 간장의 뒤를 따라 운종가(雲從街) 사이를 거닐었다. ***
“제법 잘 관리했군.”
임수미는 삼복이 정리해놓은 장부들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깔끔하다거나 한눈에 들어오는 정도는 아니지만 딱히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이 정도면 천부적이다.
“가, 감사합니다.”
임수미를 보고 선녀라고 허튼 소리를 했던 삼복은 고개도 들지 못하고 쩔쩔 맸다. 누추하기 그지없는 자신의 집에 임수미 같은 아름다운 여인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뿐더러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 중 그보다 직급이 낮은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려 하오문의 정예들 중의 정예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건 뭐지?”
삼복의 일처리 능력을 검사하기 위해 장부를 가져오라 일렀던 임수미가 장부의 한 부분을 짚었다. 삼복이 그 부분을 보고는 움찔했다.
“저번에 십령수 대…… 아니 십령수를 통해 제게 전달해 주셨던 그 단신의 주인공께서 직접 시키신 일이었습니다.”
“……검주?”
무화 임수미의 말에 정예들의 기세가 크게 출렁였다. 검주란 이름은 삼복이 감히 눈도 못 마주칠 정도로 강렬한 기세를 내뿜고 있는 하오문의 정예들을 기겁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대체 어느 정도기에.’
대충이나마 듣기는 했지만 두 눈으로 본 적은 없었다. 기껏 본 것이라고 해봤자 설미수의 집 여기저기에 시체처럼 걸려있던 사람들뿐이었다.
“만 대협이 무슨 부탁을 한 거지?”
“대장간, 대장간을 알아봐달라고 하셨습니다. 아는 동생이 쓸 것이라고…….”
“아는 동생?”
삼복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 동생이 하필이면 검계에서 일을 하던 야장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자신이 한양에서 그런 공작을 펼치고 있었다는 것이 임수미에 귀에 들어가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삼복은 입을 꾹 다물었다.
“예. 토지 비용부터 모든 부대시설 비용까지 저희보고 책임을 지라고…….”
무작정 찾아온 만우의 말을 전부 다 들어준 것은 하오문으로부터 온 단신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보낸 것이 임수미였다.
“무조건 책임을 져야지. 그것 가지고 왈가왈부 한 것은 아니겠지?”
설마 삼복이 사고를 쳤을까 싶어 와락 걱정이 된 임수미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삼복은 얼른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그런 적 없습니다.”
“다행이야. 다행.”
삼복의 대답에 임수미를 비롯한 하오문 정예문도들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천만다행이라는 표정들이었다.
“하라는 대로 다 해드려.”
그렇게 말한 순간, 임수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런 그녀의 안색은 창백해져 있었다.
“아가씨?”
정예문도들이 고개를 갸웃하며 임수미를 쳐다봤다. 임수미가 딱딱해진 얼굴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만 대협.”
“어이. 이게 누구야.”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면서 이남 일녀가 등장했다. 이남 일녀 중 가장 앞에 선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정예문도들의 안색이 일제히 과다출혈이라도 일어난 듯 창백하게 변했다.
“간만…… 이 아니라 벌써 다시 보네? 응?”
임수미가 푸들거리는 입술을 간신히 움직였다. 그러고는 필사적으로 내공을 움직여 얼굴에 수축된 근육을 풀었다. 활짝. 동시에 임수미는 자신이 지어 보일 수 있는 가장 예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자 만우의 뒤에 서있던 간장이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서, 선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