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5. 검주, 역졸이 되다(2)2019.06.04.
만우는 권희달의 패배를 단정지으며 말했다. 권희달이 그런 만우의 말에 얼굴을 찌푸렸지만 그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화경까지 올라간 것이 투전놀음으로 올라간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비무를 앞두고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한 것이다. 감령은 거대한 부를 어깨에 척 걸치고 나오면서 입꼬리를 씩 끌어 올렸다.
“조선제일검? 그 이름 참 광오하구려.”
쿵! 감령의 도끼가 땅에 닿자 쿵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감령은 곱상한 외모와는 다르게 거력을 타고 났기 때문에 험한 사내들이 모인다는 녹림의 총채주가 될 수 있었다.
“어디까지나 비무이니 살초는 적절히 쓸 것이라 믿고. 그러면…….”
만우가 손을 들어 올렸다. 감령과 권희달이 침을 꿀꺽 삼켰다. 감령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면서 투지를 분출하자 권희달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
‘초절정이라 들었거늘.’
같은 초절정이라 해도 다 같은 초절정이 아니었다. 같은 화경인 만우와 권희달 사이에 큰 격차가 있듯이 말이다. 하지만 감령의 투지는 지금까지 권희달이 겪은 투지와는 달랐다. 밑바닥에서 구르고 구른 자만이 뿜어낼 수 있는 오기와 독기. 그것이 권희달의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들었다.
“비무 개시!!”
촤악! 만우의 맨 손에서 뿜어져 나간 풍압이 연무장 바닥에 날카로운 검흔을 만들었다. 그와 동시에 공력을 한껏 끌어올린 권희달과 감령이 상대를 향해 뛰어들었다. 꽈릉!!!! 지축이 울리는 듯한 굉음이 무각의 앞마당에서 울려퍼졌다.
***
“설 숙부님.”
“아. 오셨나? 어서 들어오시게.”
설미수는 반가운 얼굴로 동군영을 맞이했다. 동군영은 황송하다는 듯 어깨를 움츠렸다.
“만익이, 그 친구는 잘 있나? 매번 서찰로 연락을 주고받긴 하네만.”
설미수와 동군영의 아비인 동만익은 같은 성균관 출신이었다. 하지만 동만익은 현재 전라도 본가에 내려가 있었다.
“예. 아버님께서도 늘 설 숙부님의 소식을 궁금해하십니다.”
“그러니까 고집을 부리지 말고 한양으로 올라오면 좋을 것을. 아, 일단 안으로 들어가세.”
설미수는 혀를 끌끌 찼다. 동군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사랑방으로 안내 된 동군영은 저택의 유려함에 감탄했다.
“거기 앉으시게. 녹차, 괜찮나?”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숙부님.”
설미수는 사랑방에 동군영과 마주보고 앉아 기꺼운 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어릴 때 봤던 동군영이 장성해서 장원급제를 했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같은 한양에 있는데도 얼굴 보기가 참 힘들구나. 힘들어.”
“제가 더 자주 찾아뵈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아니지. 춘추관에 기사관으로 있다고 했던가?”
동군영은 고개를 숙였다. 장원급제를 한 사람이 춘추관에 있다는 것은 창피한 일이었다. 하지만 설미수는 부드럽게 웃었다.
“대제학까지 경연에서 입 뻥긋 못하게 만들었다고 들었다. 역시 만익이를 쏙 빼닮았어. 응?”
설미수는 웃으면서 차를 음미했다. 명나라에서 들어올 때 가지고 온 차였기에 향이 좋았다.
“그래, 만익이는 아직도 강고한가?”
“예. 아마 제가 장원급제했다는 소식을 들으셔도 기뻐하시지 않으셨을 겁니다.”
“쯧쯧…….”
설미수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설미수는 동만익을 째째하다고 비난하지 않았다. 설미수도 충분히 동만익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두문동에서 일어난 비극에서 살아난 몇 안 되는 사람이 바로 동만익이었다. 그는 고려왕조에 맞서 반역을 일으킨 조선을 인정하지 않고 절대로 출사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낙향했다. 거기에 두문동에서 그 많은 동지들이 불에 타죽었으니 동만익이 조선 왕조에 이를 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머릿속에 그 많은 것들을 썩히고 있다니. 백성들을 위해 쓰면 좋으련만.”
설미수는 쓰게 웃었다. 하지만 동만익을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설미수도 그 비사에서 동문수학한 많은 학우들을 잃었다. 하지만 설미수는 고려 왕조에 망조의 기운이 들었다고 느꼈었다. 왕은 무능하고 관리들은 피폐하였으며 외적들은 계속해서 변방을 괴롭혔다. 그렇게 썩어문드러져 가는 고려 왕조는 어떤 특단의 조치를 취했더라도 회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 내가 너무 내 말만 했군. 그래, 무슨 일인가?”
설미수가 동군영에게 물었다. 동군영이 설미수를 찾아온 이유는 간단했다. 검주 만우. 주상조차도 공대를 썼던 그 미지의 존재가 설미수의 저택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몇 달을 함께해야 할 텐데 자신은 만우에 대해서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주상전하도 공대하는 것을 보면 극진히 모셔야 할 것 같은데, 자기 스스로를 노비라고 했으니 대체 어찌해야 할지 기준이 서지 않았다.
“만우라는 노비가 이곳에 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
동군영은 그렇게 말하면서 설미수의 얼굴을 관찰했다. 찰나의 순간 설미수의 얼굴이 크게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뭐가 있구나.’
주상전하의 공대에 이어 설미수의 표정에도 변화가 있었다. 그건 분명히 ‘놀라움’이었다.
“주상전하께서 이번 세자 저하의 사건과 관련하여 그 주동자인 만우라는 자에 대하여 조사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주상전하께서?”
설미수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잡혀간 네 명을 비롯하여 만우가 이 저택에 살았다는 것은 내금위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주상의 귀까지 들어간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설미수는 끄응하는 소리를 냈다.
“혹시 아시는 게 있으면 여쭤보려고 왔습니다.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동군영은 최대한 예의를 지키면서 그렇게 말했다. 설미수는 동군영을 빤히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뭐, 어렵지도 않은 일이지.”
설미수는 동군영에게 말했다.
“그분은, 이 설 가의 은인일세. 둘도 없는 은인.”
끔찍히도 조씨 부인을 아끼는 설미수에게 만우는 둘도 없는 은인이었다. 만우가 없었더라면 사기꾼에 속았을 것이고 조씨 부인은 여전히 천형(天刑)에 시달리고 있었을 것이다.
“은…… 인?”
동군영의 표정이 더욱 알쏭달쏭하게 변했다. *** 만우는 간장과 방매를 불러다 앉혔다. 간장은 갈 곳이 없기 때문에 임시로 설미수 저택의 접객전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형님?”
대장간이 마땅히 없었기 때문에 간장은 쉬고 있었다. 매일 같이 검계에서 거의 혹사당하듯 검을 만들어왔기 때문에 간장은 생기가 넘쳐흘렀다.
“나 바빠. 팔러 가야 돼.”
방매는 자신의 보따리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만우와 함께 검계 소굴까지 들어갔다 온 대가로 큼지막한 옥가락지를 받았지만 여전히 방매는 돈을 버는 데 여념이 없었다.
“나, 조만간 함흥에 일이 있어 간다.”
“함흥? 그 먼 곳에?”
“무슨 일로 가시는 겁니까?”
간장과 방매가 놀란 표정으로 만우에게 말했다. 만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말해줄 수 없고. 한 3개월 정도 걸릴 거야. 그러는 동안 특히 간장 너, 어떻게 할지 네 거취를 정해야지.”
“흠…….”
간장은 만우를 쳐다봤다. 만우는 그런 간장에게 고갯짓을 했다.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뭐든지 말해. 대장간을 지어달라고 하면 대장간을 지어줄 수도 있어.”
“……정말이십니까?”
간장의 눈이 번쩍했다. 편하게 쉬니까 좋기는 했지만 그렇게 쉬고 나니 몸에 녹이 슨 것 같았다. 이럴 때는 검이나 하나 화끈하게 만들어주면 쫙 풀리는데 검을 만들 곳이 없었다.
“응. 어차피 내 검도 만들어 준다고 했잖아.”
만우는 씩 웃었다. 명검은 언제나 만우를 들뜨게 만든다. 비록 조선으로 오면서 검들을 모두 화산파에 남겨두고 왔지만 그들은 알아서 잘 돌볼 것이다.
‘내가 언제 돌아갈지 모르니.’
만우의 밝은 웃음을 본 간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형님, 대장간 하나만 지어주십쇼.”
“자, 잠깐만.”
대장간을 마치 옆집 개집을 짓듯이 말하는 둘을 보면서 방매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쉽게 못 만들어. 특히나 무기 만드는 곳은 엄격하게 정해져 있다고. 대부분은 농기구나 만드는 게 고작이란 말이야.”
검이나 무기류를 만들기 위해서는 관청에 의해 허가를 받은 대장간에서만 만들 수 있었다. 사병혁파를 통해 양반들의 사병 양성을 금지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걱정 마. 내 말 잘 듣는 애들 있어. 그 애들이면 대장간 하나 만드는 건 쉬울 거고.”
“으음…….”
만우가 괜찮다고 하니 방매는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만우가 생각 없이 움직이는 것 같아도 생각해보면 만우가 다 원하는 대로 일이 다 풀렸다.
“그리고 방매 너.”
“……왜?”
“너, 한양 말고 다른 곳도 돌아다녀봤어?”
방매의 수박희, 그중에서도 각법은 웬만한 성인 남자 대여섯 명은 찜쪄먹을 정도로 강했다. 그리고 경신법이나 보법을 보면 절대로 설렁설렁 배운 수준이 아니었다. 일정 수준 이상 배우고, 실전 경험까지 착실하게 쌓은 숙련도가 방매의 수박희에서 보였다.
“응. 당연하지.”
만우의 얼굴이 밝아졌다. 방매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그건 왜?”
“그럼 이번에 함흥 갈 때, 길잡이 좀 해줘.”
“에엑?”
방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다음 순간 방매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돈은?”
“당연히 주지. 아니, 돈보다 더 귀중한 걸 줄 수도 있어.”
만우의 호언장담에 방매의 눈이 더 반짝반짝하게 빛났다.
“그런데 함흥까지 가는 길은 알아?”
만우가 방매에게 물었다. 방매는 코웃음을 쳤다.
“흥. 내가 이래봬도 의주까지도 여러 번 갔다 와봤어. 왜 이러셔.”
“의주까지?”
의주면 패수(압록강) 바로 아래 위치한 상업 도시다. 명나라나 북쪽과 가까워 그곳에서는 활발하게 물류가 유통됐다. 배로 들어오는 것과는 또 다른 성질의 물건들이 많기 때문에 방매는 화장품을 사러 여러 번 그곳에 간 경험이 있었다.
“함흥도 가봤어. 함흥이면 동북면에서도 그나마 가장 살 만한 곳이라서 호족들이 많거든. 개경이나 한양이 화장법과는 다른 식으로 그쪽에서는 많이들 화장하더라고.”
방매는 중얼거렸다. 함흥은 여진족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동북면에서 가장 큰 고을 중 하나였다.
“됐네.”
“얼마 줄 건데. 얼마?”
방매는 눈을 반짝였다. 검계 소굴에 다녀오는 길이 두렵긴 했지만 옥가락지 하나를 얻은 순간 모든 두려움이 잊혀졌다. 고작 몇 시진 만에 옥가락지 하나를 줬으니 3개월이나 가야 하는 길이면 보수가 더 어마어마할 것이다.
‘호구!’
방매는 눈을 반짝였다. 만우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돈을 아끼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러니 방매에게는 그런 만우가 호구였다.
“더 좋은 걸 준다니까. 돈보다 더 좋은 거.”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방매는 보수에 대해서 듣기 전까지는 한다고 이야기를 안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만우가 한 말에 방매는 냅다 손을 번쩍 들 수밖에 없었다.
“왕의 재가를 받아서, 네가 궁의 공식 매분구가 될 수 있게 해줄게.”
“할게!!!!”
***
“궁에서 큰 소란이?”
삼복이 눈을 가늘게 좁혀 떴다. 하오문의 한양지부장인 삼복은 며칠 전에야 자유를 되찾았다. 목에 갈린 가시처럼 떡하니 버티고 있던 십령수가 떠났기 때문이었다.
“아. 미치겠네.”
삼복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안 그래도 요즘 머리가 아픈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검계는 또 어떤 미친놈이 싹 털어버렸고…….”
검계는 삼복이 야심차게 추진하던 하오문 한양지부의 일이었다. 본국에서 내려온 명령이 아니라 삼복이 한양지부장으로써 처음으로 추진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검계가 누군가에 의해 싹 털려 버렸다. 검계주. 만우가 그렇게 이를 갈던 검계주가 바로 삼복이었다.
“궁에서는 그게 다야? 무수리나 이런 애들한테 안 물어봤어?”
삼복은 부하에게 말했다. 부하는 머리를 조아렸다. 십령수가 없는 하오문 한양지부의 왕은 삼복이었다.
“죄송합니다. 접촉하기가 쉽지 않아서…….”
“후우.”
하오문의 한계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하오문 자체가 하류 인생들을 모아서 만든 집단이기 때문에 고급 정보를 손에 넣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특히나 궁에서 일어나는 일의 경우에는 접근하는 것이 아예 불가능했다. 양반들이야 기루에 와서 기생들을 옆에 끼고 놀지만, 궁에는 그게 아예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알았어. 나가봐.”
“예, 지부장님.”
지부장님이란 소리에 삼복은 어깨가 한 뼘은 더 올라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런데 그 때, 지부가 소란스러워지더니 삼복에게 인사를 하고 나갔던 부하가 뛰어 들어왔다.
“뭐야. 무슨 소란이야?”
“지부장님. 지부장님. 지금 밖에……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