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4. 검주, 역졸이 되다(1)2019.06.01.
만우는 어둠이 찾아오자 한 줄기 달빛으로 변해 경복궁으로 스며들었다. 여전히 사방에 깔린 용호군들과 내금위는 만우의 기척을 눈치채지 못했다. 조선제일검이라는 권희달도 무참히 패배하고 강녕전이 무너진 상황에서 용호군과 내금위들 사이에는 철통같은 군기가 흘렀지만 만우의 발걸음을 막을 정도는 아니었다.
‘더 무서워졌네.’
그래도 만우 정도의 실력이 아니라면 경복궁에 잠입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만우는 하루만에 한층 강화된 궁궐의 경비를 확인하고는 근정전(勤政殿)의 지붕 위에 한 마리의 두루미처럼 우아하게 내려앉았다.
“기다리고 있었나?”
“……그래.”
근정전의 지붕 위에는 권희달이 앉아 있었다. 만우를 기다리는 것 같았지만 만우가 말을 걸기 전까지 만우의 기척을 느끼지 못한 듯했다. 만우는 얼굴빛이 좋지 않은 권희달을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내가 말한 대로 내 부하들을 찾아가 봤나?”
“……아니.”
권희달은 고개를 저었다. 만우는 권희달에게 그의 실력을 더욱 키우고 싶다면 자신의 부하들에게 찾아가라고 조언을 했었다. 어차피 자신이 가 있는 세 달 동안 구금되어 있어야 할 네 명의 부하들이었기 때문에 권희달이 필요한 실전감각을 키우는데는 충분할 것이라 생각했다. 더불어 네 명에게도 나쁘지 않은 것이 화경지경의 고수와 비무를 해볼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다.
“음…….”
만우는 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원래 무인이란 자들은 자신의 무기 하나에 모든 명예와 자긍심을 건다. 하지만 권희달은 더 강해질 수 있음에도 만우의 호의를 무시했다.
“왕이 막은 건가?”
“내 앞에서 주상 전하를 욕되게 하지 마라.”
권희달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금세라도 검을 뽑을 기세였기 때문에 만우는 두 손을 들어올려 싸울 의사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내가 말해주려고 했는데, 싫다면 뭐 어쩔 수 없지.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말라니까?”
만우는 능글맞게 말했다. 권희달은 그런 만우를 보면서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표정이 좋을 리 없었다.
“전하께서 기다리신다. 어서 내려와라.”
만우는 재미없는 놈이라고 투덜거리면서 근정전의 지붕 위에서 떨어져 내렸다. 왕의 어명으로 근정전 주변에는 근정전을 경비하는 내금위와 용호군도 없었다. 왕이 전부 물린 것이다.
“내시 하나 빼면…… 저자가 어사겠네. 왕이 임명한.”
“…….”
권희달은 만우를 무시하는 쪽을 택했다. 계속해서 주상 전하를 왕이라고 부르는 것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호되게 혼을 내줬겠지만, 만우에게는 그마저도 할 수 없었다. 때문에 권희달은 조선제일검이 된 후 처음으로 인내심을 길렀다. 활짝! 만우는 일부러 손으로 문을 열 수 있음에도 공력으로 문을 열어젖혔다. 문을 열기 위해 손을 들어올렸던 권희달이 인상을 팍 썼다. 하지만 만우는 그런 권희달을 무시하고는 손을 번쩍 들었다.
“여.”
“왔는가.”
왕 앞에 부복하고 있던 희여멀건한 서생의 모습을 한 동군영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철혈의 왕이라 불릴 정도로 냉철한 작금의 왕에게 저런 식으로 말을 하는 사람이 있을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어사 동군영은 고개를 들라.”
권희달은 대전 안에서 모습을 감췄다. 왕이 바깥 행차를 하지 않는 이상 왕의 그림자 속에서 왕을 지키는 것이 바로 운검의 임무였다. 왕이 태양이라면, 운검은 구름이다. 왕이 오롯이 빛날 수 있도록 왕을 위해 기꺼이 구름이 되어 살아가는 것이 바로 운검이란 자들이다.
“예, 전하.”
동군영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옥좌에 앉아 있는 강인한 인상의 왕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굵은 눈썹은 세상의 단호한 의지를 담은 것 같았고 눈은 총기로 빛났다. 더불어 꽉 한 일자로 다물어진 입은 사내다움과 진중함이 보였다. 그런데, 그런 왕의 옆에 웬 날건달 같은 놈이 서 있었다. 무명천으로 만든 옷은 평민들이나 입을 옷이었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욱 충격적인 것은 바로 머리였다. 백정이 아닌 다음에야 머리를 풀어헤치고 다니는 놈들은 없었다. 그런데 만우는 긴 머리를 그대로 늘어뜨린 채 히죽거리고 있었다. 왕과 상것. 반상의 도리로 도저히 설명이 안 되는 광경이었다.
“놀라운가?”
왕의 묵직한 목소리가 동군영의 고막을 두드렸다. 동군영은 고개를 얼른 숙였다.
“그, 그렇사옵니다.”
동군영은 소심했고 울렁증이 심했지만 거짓이 없었다. 때문에 그는 성균관 경연에서 대제학도 꺾었지만 눈치 없이 윗사람을 꺾었다고 따돌림을 당했다.
“놀랄 필요 없다. 검주? 그대가 직접 말하시겠나?”
“그래야지.”
만우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한 발자국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러고는 동군영을 향해 허리를 넙죽 굽혔다. 왕의 눈이 커졌다.
“아이고 나리. 오늘부터 나리를 모시고 함흥까지 함께 하게 될 역졸입니다요.”
왕을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주상 전하에게 파락호처럼 말하던 놈이 지금은 또 상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동군영의 눈이 팽팽거리며 돌았다.
“…….”
하지만 동군영은 허리를 필 수 없었다. 왕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때 왕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퍼졌다.
“검주. 그대는 과인의 앞에서도 그리 한 적이 없다. 그런데 어찌하여 동 어사에게는 그리 깍듯한 것인가.”
만우가 고개를 돌려 왕을 쳐다봤다. 왕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만우는 그런 왕을 보면서 씩 웃었다.
“여기선 왕이나 본주밖에 없지. 다른 이들은 눈이 있어도 못 보고 귀가 있어도 못 들으니까.”
“그러면…….”
“하지만 여기 어사 나리랑은 밖에서 같이 움직여야 하지 않나? 그러니 습관화를 시키려고 한다고 생각해 두지.”
“……그런 것 치고는 어색하지 않던데.”
“원래 머슴이었으니까.”
만우는 태연하게 말했다. 그러자 왕의 눈이 커졌다. 왕은 만우를 쳐다봤고, 만우는 앗차하면서 머리를 두드렸다.
“아, 내가 말을 안 했나?”
만우의 눈빛이 변했다. 왕은 흠칫했다.
“광산군 김약항.”
“…….”
왕의 표정이 변했다. 하지만 만우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이렇게 대놓고 선전포고를 한 다음에 보란 듯이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는 것이 원래 만우의 방식이었다. 속으로 숨기고, 또 숨기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모든 것을 터뜨리는 것 따위? 천하제일검이라 자부하는 만우에게 맞지 않는 소심한 방법이었다. 막을 테면 막아봐라. 그것이 만우가 싸우고 쟁취하는 길을 걸어오며 증명한 자신만의 가치였다. 그런 만우의 신념과 가치가 조선의 국왕 앞이라고 해서 바뀔 리 없다.
“내가 그 어르신의 머슴이었거든. 명나라로 같이 끌려갔던.”
“……김약항이라.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군.”
“뭐, 내가 조선으로 온 이유도 그 때문이야.”
왕이 만우를 쳐다봤다.
“본주는 알고 싶거든. 어르신께서 왜 그 먼 명나라에서 살수들의 손에 돌아가셔야만 했는지. 근데 어르신이 그걸 원치 않으셔서 고민 중이야.”
“……그런가?”
그 당사자였던 국왕의 얼굴은 편치 않았다. 하지만 만우는 여기서 그걸 걸고넘어질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지금 당장은 함흥으로 가 어르신의 손녀를 구출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어르신께서 돌아가시면서 내가 원하는 것을 하고 살라고 하셨거든. 그래서 원하는 것을 하고 살아볼려고 조선으로 돌아왔지.”
왕은 만우의 눈을 쳐다봤다. 만우는 왕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러자 먼저 눈을 피한 것은 왕이었다.
“자, 어쨌건.”
만우는 손바닥을 짝하고 쳐서 주위를 환기했다. 만우는 저벅거리면서 아래로 내려가 동군영의 어깨를 딱 붙잡아서는 강제로 일으켰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나리.”
“알았…… 아니, 알겠습…… 아니…….”
만우의 손에 붙잡힌 동군영이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울상을 지었다. 만우는 준수한 동군영의 얼굴을 보면서 씩 웃었다. ***
“만우 형님!!”
“대장님!”
“검주 대협!”
만우의 갑작스런 등장에 앉아 있던 다섯 명이 동시에 일어났다. 만우는 한 명이 더 늘어났다는 것에 고개를 갸웃했다.
“넌 왜 여기 있냐?”
“검주 대협 때문에 그렇습니다.”
설운은 만우와 함께 온 사람을 힐끗 쳐다봤다. 그리고 권희달과 눈이 마주치자 얼른 눈을 옆으로 돌렸다.
“나 때문에? 뭐…… 그건 그렇고. 다들 인사해.”
만우는 씩 웃으며 권희달을 감령과 필두, 문형일과 마익후에게 소개했다.
“이쪽은 조선제일검 권희달.”
안 그래도 권희달이 등장한 순간부터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던 네 명이 아하고 입을 벌렸다. 조선에서 가장 강한 무인이 조선제일검이란 소리는 그들도 귀가 있어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막상 그를 눈앞에서 마주하자 상상이상이었다. 화경지경! 모든 무림인들이 꿈꿔 바라마지 않는 화경의 고수였던 것이다.
“반쪽이야.”
“…….”
하지만 만우는 거침없이 권희달을 깎아내렸다. 권희달은 눈썹을 꿈틀거렸지만 그에 뭐라 반발하지 않았다. 이미 한 번 만우에게 패했기 때문에 그의 신랄한 평가를 부정할 수 없었다.
“왕을 호위하다 보니 실전경험이 부족해. 그래서 말인데.”
국왕은 단호하게 권희달을 만우와 함께 이쪽으로 보냈다. 권희달이 처음으로 왕 앞에서 안 된다면서 반항을 했지만 지엄한 어명 앞에서는 그도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어명이다! 운검 권희달은 무각(武閣)으로 가라!]
이들 네 명이 임시로 구금된 이 작은 전각을 무각이라고 부르기로 한 모양이었다. 원래 이름도 없는 그냥 빈 전각이었는데 비로소 이름을 되찾은 것이다.
“제가 하겠습니다!”
“대협! 제가 하겠습니다.”
“저요! 저요!”
“내가, 한다!”
만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네 명이 손을 번쩍 들었다. 권희달은 그런 그들을 보면서 흠칫하고 놀랐다. 그들의 눈에서는 호승심과 투지가 들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어찌 보면 무인들이 가진 무(武)에 대한 순수한 열망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권희달에게도 불을 지폈다.
“일단 한 명씩 돌아가면서 해. 실전경험이 없으니까 고려해 가면서 하고.”
“……저들과 한 명씩? 일대 다수도 할 수 있다!”
권희달은 만우의 말에 처음으로 토를 달았다. 만우는 그런 권희달을 힐끔 쳐다봤다.
“그래? 만약 한 명과 비무를 해서 제일검 네가 이긴다면 너와 비무를 한 번 더 해주지.”
“정말인가?”
권희달은 만우와 비무를 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만우는 단칼에 거절했었다. 비무로 권희달이 만우에게 배워가기에는 권희달에게 실전경험이 너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비효율적인 만우와의 비무보다는 네 명과의 비무가 훨씬 도움이 될 것이라 데려온 것이다.
“그래.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는다.”
“좋다, 그러면!”
권희달은 앞으로 성큼 한 발 내딛었다. 그러고는 검집에 손을 올려놓고는 만우를 쳐다봤다. 얼른 한 명을 뽑으라는 뜻이었다. 만우는 그런 권희달을 보면서 헛웃음을 흘리고는 네 명을 차례대로 훑어봤다. 그러고는 씩 웃었다.
“감령!”
“아싸!!!!”
“어째서 저희는!”
네 명은 공교롭게도 사용하는 무기가 모두 달랐다. 감령은 곱상하게 생긴 외모와는 다르게 거대한 도끼(斧)를 기가 막히게 잘 다뤘다. 녹림 총채주인 감령의 풍월부법은 강호 일절로 유명했다. 필두는 자신의 허벅지만큼이나 커다란 박도를 다뤘는데 박도의 달인인 양산박의 적발귀 유당의 비기를 이었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다. 도를 즐겨 쓰는 하북팽가에서도 필두의 박도만큼은 인정해 줬다는 소문이 있었다. 거기에 문형일은 괴검이라는 칭호에 맞게 괴기하게 생긴 검을 다뤘다. 천축국 출신인 그는 천축국에서 주로 사용하는 삼일월도(三日月刀:샴쉬르)를 사용했는데 삼일월도를 휘두르는 것이 마치 미녀의 속눈썹이 깜박이는 것 같다 하여 첩여월도(睫如月刀)라 불렀다. 마익후는 거대한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력(神力)과 대진국의 비기인 권투(拳鬪)를 익히고 거기에 중원에 흘러들어와 소림 속가에서 호권(號卷)을 익혔다. 패도적이고 과격한 권법으로 상대방을 압살하는 것이 마익후의 특징이었다. 부, 도, 검, 권. 그렇기 때문에 만우는 이 네 명이라면 권희달의 부족한 실전경험을 채워주는데 딱이라고 생각했다.
“돌아가면서 한 명씩 하게 될 거야.”